◈ 129화
제이나의 당찬 발언에 난 속으로 헛웃음을 흘렸다.
‘이종족까지는 예상을 했는데… 마물을 전도한다고?’
말도 안 통하는 데다가 누구보다 본능에 충실한 놈들이 마물이건만.
제이나는 무슨 수로 그런 마물을 전도한다고 하는 것일까?
“뭐, 좋은 생각인 것 같긴 한데. 가능하긴 한 거야?”
“솔직히 쉽지는 않을 거라 생각해요. 하지만…….”
빙긋 미소를 짓는 제이나.
“진심을 담아서 포교를 한다면 마물도 알아주지 않을까요?”
“아아… 진심을 담아서?”
“네, 진심이요.”
나의 되물음에 그녀는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
‘허 참… 난 또 뭔가 엄청난 방법이 있는 줄 알았더니.’
“진심이 통할 상대였다면 진작 다른 놈들이 마물에게 포교를 하지 않았을까?”
“그렇긴 하지만… 진지하게 마물을 상대로 포교하려는 사람도 없었을걸요?”
“그럼 넌 진심으로 포교를 하겠다?”
내 물음에 제이나가 힘껏 고개를 끄덕인다.
“네. 안 될 것도 없잖아요?”
“…….”
‘그렇기야 하지. 그렇기는 한데…….’
나는 괜히 뒤통수를 긁적이다가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며 손을 까딱였다.
“그래. 네 좋을 대로 해 봐. 되면 좋은 거고, 안 돼도 할 수 없는 거고.”
“알았어요. 진심을 다해 마물을 포교해 볼게요.”
“마물도 마물이지만, 그래도 이종족 위주로 포교를 하는 쪽이 나을 것 같은데.”
내가 넌지시 우려를 표하자.
제이나는 걱정 말라는 듯 밝은 미소를 보인다.
“알았어요. 이종족의 포교를 우선순위로 둘 테니까, 그만 걱정해요. 아 참, 그리고 이름은 정했나요?”
“정했지.”
“오오, 얼른 알려 줘요! 그래야 경전에 이름을 적죠.”
제이나가 눈을 반짝이며 경전을 펼치자.
나는 그런 그녀를 내려다보며 천천히 입을 뗐다.
“주신.”
“…주신이요?”
“그래. 주신, 랄프. 그게 내 경전에 적힐 이름이다.”
* * *
며칠 뒤.
“그럼 다녀올게요.”
“포교 활동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안전이 가장 중요하다는 걸 잊지 말고.”
나의 염려에 제이나가 희미한 미소를 짓는다.
“걱정해 주는 건가요?”
“예전처럼 괴물 같은 힘이 있으면 모르겠지만 지금은 아니잖아?”
“고마워요. 하지만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이렇게 절 보호해 주는 사람들이 많은데 무슨 일이 있겠어요?”
그녀가 길잡이인 다크 엘프들을 비롯하여 골버린을 가리켜 보이자.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저 정도면 어지간한 일들에는 대처가 가능하겠지.’
“그래도 방심하지 말고.”
“알았어요. 최대한 많은 신도들을 만들고 돌아올게요.”
마침내 제이나가 주신을 포교한다는 위대한 사명을 안고.
무리와 함께 검은 숲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
이윽고 저들의 모습이 숲에 가리어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되자.
‘그래도 성녀로 지내 온 짬밥이 있는데, 잘하겠지. 잘할 거야.’
나는 여유로이 발걸음을 돌렸다.
그러던 그때.
[뭘 하고 있는 거지?]
그 어떠한 징조나 예고도 없이 베논의 음성이 나의 머릿속에 뚜렷하게 울려왔다.
‘씁… 하필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던 건가. 망할…….’
순간 나는 베논의 음성을 무시할까 고민도 했으나.
그건 상황을 회피하는 꼴밖에 되지 않았기에 하늘을 보며 천천히 입을 뗐다.
“베논이시여…….”
[요즘 네가 하는 행동들을 보면 나도 의심을 할 수밖에 없구나. 무엇보다 내 시야가 닿지 않는 곳에서 뭘 하는 거지?]
명백히 나를 의심하는 것 같은 베논의 발언에 난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오해입니다. 전 언제나 흑탑과 마신님을 위해 몸이 부서져라 움직였습니다!”
[오해라고? 그럼 네 모습이 자꾸 내 시야에서 사라지는 건 어떻게 설명할 생각이지? 혹시 네 녀석… 바알의 힘을 사용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씁… 추궁하려고 아주 작정을 하고 왔네.’
하나 이대로 아무 말도 못 한다면 베논의 말을 시인하는 꼴밖에 되지 않는다.
어떻게든 놈을 속여 넘겨야만 할 터.
‘뭔가 그럴듯한 변명거리가… 그래, 여기선… 그년을 팔아먹자.’
“아닙니다! 제가 베논 님의 시야에서 자꾸 사라지게 된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이유가 있다고?]
“예! 저는 그저 당신과 레바논이 준 힘을 키우기 위해 몰두하는 나날을 보내왔었습니다! 그러던 와중! 저는 한 가지 능력을 얻게 됐는데 그것이 바로 베논 님께서 말씀하신 그 힘입니다!”
내 입에서 헛소리가 줄줄 흘러나왔으나.
[…그런 능력이 생겼다고?]
‘그래. 아무리 베논이라고 해도 신성력에 대해선 잘 모를 수밖에 없겠지. 기왕 레바논을 팔아먹은 김에 좀 더 그쪽 방향으로 대화를 끌어가 보자.’
어딘가 의아해하는 것 같은 베논의 음성에 난 서둘러 변명을 이어 갔다.
“그렇습니다! 믿기 어려우시겠지만 특히 신성력이 쌓이면 쌓일수록 그러한 힘이 제게 생겨났습니다!”
[신성력을 키우니 그리됐다고?]
“예! 아무래도 레바논의 숨겨진 힘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흐음…….]
베논의 침음 소리가 머릿속을 울리자.
나는 서둘러 말을 이어 갔다.
“그리고 제가 자꾸 모습을 감출 수밖에 없는 건 모두 레바논 때문이기도 합니다!”
[레바논 때문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지?]
“그 망할 여신이 은근슬쩍 제 앞에 나타나 제 일을 훼방 놓는 통에 저로서도 어쩔 수 없이 그런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내가 억울하다는 듯 목소리를 높이자.
어째 베논에게서 아무런 말도 들려오질 않았다.
‘후우… 다행히 개소리가 먹혀든 건가. 그럼 조금 더 개소리를 해 볼까.’
“솔직히 이번에 검은 대지에서 레바논의 세력을 쓸어버린 것도 그렇습니다! 만약 레바논이 제가 그러한 일을 벌일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면, 절 가만히 놔뒀겠습니까? 분명 절 방해하려고 들었겠지요!”
[그건… 네 말도 일리가 있구나. 또한 검은 대지에서 그년의 세력을 몰아낸 일은 분명 칭찬받을 만한 일이었다. 다만 모습을 감추는 건 적당히 하는 게 좋을 거다. 이번에야 넘어가겠다만 자꾸 내 시야에서 모습을 감춘다면, 언제고 나의 신임을 잃게 될 거다. 무슨 말인지 알겠나?]
베논의 말이 끝나자 나는 허공에 대고 넙죽 허리를 숙여 보였다.
“주의하겠습니다!”
[네 행보를 계속 지켜보마.]
그 말을 끝으로 더 이상 머릿속에서 베논의 음성이 들려오지 않자.
‘후우… 일을 다 그르치는 줄 알았네.’
나는 그제야 안도의 숨을 토해 낼 수 있었다.
‘아직 베논을 적으로 돌리는 건 좀 그러니까.’
아무리 내가 아가멤논의 유지를 이었다고 해도.
지금 베논과 맞붙는 건 분명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베논과 정면에서 붙어도 꿀리지 않을 정도로 힘을 더 키우긴 해야 하는데…….’
물론 흑카데미에 설립한 시설들에서 계속 힘을 모으고 있긴 했으나.
아가멤논의 힘을 얻고 난 뒤로는 그 힘들도 어딘가 부족한 감이 있었다.
‘오리하르콘만 한 게 없는데 어째 이놈들은 소식이 없냐.’
나는 전에 임무를 맡겼었던 전쟁 상인들과 도굴꾼들을 떠올리며 혀를 찼다.
‘뭐… 오리하르콘 구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긴 하지.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좀 더 기다려 보는…….’
그러던 그때.
“흑남님! 여기 계셨습니까?!”
웬 흑마법사가 나를 부르며 허겁지겁 내 앞으로 달려온다.
“무슨 일이지?”
“레논 님의 전언입니다! 전에 흑남께서 모아 달라고 하셨던 사람들 중 몇이 복귀를 했는데, 만나시겠냐고 물으셨습니다.”
‘오오, 벌써 돌아왔다고?’
흑마법사의 말에 나는 신이 나 고개를 끄덕였다.
“더 말할 필요가 있나? 당연히 만나 봐야지.”
* * *
나는 곧장 레논의 저택으로 이동했다.
“하하, 부탑주님. 급한 일도 아닌데 이렇게 배려를 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얼른 들어가 보시지요.”
난 저택에 있는 레논과 간단한 인사를 주고받은 뒤.
사람들이 모여 있을 별실로 걸음을 옮겼다.
“흑남님, 그간 무고하셨습니까?”
“다시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내가 별실로 들어서자.
좌중은 누구 할 것 없이 내게 공손한 태도를 보여 왔다.
“다들 자리에 앉지.”
나는 상석에 착석하곤 좌중을 향해 운을 뗐다.
“내 예상보다 더 빨리 오리하르콘을 구해 갖고 왔나 본데, 다들 내 생각 이상으로 능력이 출중했던 모양이야?”
내가 흡족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묻자.
자리 한편에 앉아 있던 노인이 송구스러워하며 입을 연다.
“…죄송합니다. 애석하게도 전 오리하르콘을 구할 수 없었습니다. 하여… 전 이번 일에서 손을 떼려고 합니다.”
“손을 떼다니? 돈이 부족했나?”
“아닙니다! 돈이 부족하다니요?”
화급히 손사래를 치며 말을 이어 가는 노인.
“전 오리하르콘을 보유하고 있다는 귀족가에 용병들을 대거 파견을 했었습니다. 다만 용병들이 전부 전멸을 해 버린 터라… 더 이상의 손해를 감수하긴 어려울 것 같아 부득이하게 그런 결정을 내리게 됐습니다. 죄송합니다.”
노인이 허리를 푹 숙여 보이자.
“허 참…….”
나는 고개를 돌려 다른 사람들을 응시했다.
“그럼 자네들은 오리하르콘을 구해 왔겠지?”
설마 그 누구 하나 오리하르콘을 못 구하진 않았을 터.
“죄, 죄송합니다. 저희도…….”
“송구스럽습니다.”
그러나 믿었던 도굴꾼들마저 고개를 푹 숙이자.
나는 가만히 그들을 바라봤다.
“너희도 귀족가에 용병을 보냈다가 큰 피해를 입기라도 한 건가?”
“그건 아닙니다. 저희는… 정보가 부족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뭔가 오리하르콘이 매장된 무덤에 대한 정보를 입수해야 저희도 그곳에 가서 도굴을 할 텐데, 오리하르콘에 대한 정보가 아예 없었습니다.”
도굴꾼들의 변명에 나는 그들에게 차가운 시선을 보냈다.
“내 눈엔 그저 찾을 의지가 없었던 걸로밖에 보이질 않는데. 내가 분명 시간은 신경 쓰지 말고 찾으라고 하지 않았었나?”
“그게… 아무래도 발견 가능성이 낮은 오리하르콘에만 매달리다간 당장의 생활에 지장이 생길 것 같아서…….”
“착수금을 줬었던 것 같은데. 그것도 부족했던 건가? 변명은 됐다.”
나의 대답에 도굴꾼들이 고개를 푹 수그린다.
‘아오… 생각보다 빨리 돌아와서 일이 잘 풀린 건 줄 알았더니, 오히려 안 풀린 거였다니.’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고는 다시 전쟁 상인인 노인을 바라봤다.
“아까 자네가 말했던 귀족가 말이야. 그곳에 오리하르콘이 있는 건 확실한 건가?”
“적어도 제가 매수했던 귀족에게서 들은 바로는 그렇습니다.”
“어느 왕국의 귀족인데?”
나의 물음에 노인이 조심스럽게 묻는다.
“설마 직접 가시려는 겁니까?”
“일단 이야기를 해 봐.”
“페른 왕국의 브람스 백작 가문입니다.”
‘브람스 백작가? 거긴 또 어디야?’
“브람스 가문?”
“그렇습니다. 검술로 큰 명성을 떨쳤던 가문인데 소드마스터를 여럿 배출한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그래? 그런데 자네는 그런 가문에다가 용병들을 투입한 거였나? 과감한 면이 있군.”
내가 어이가 없다는 듯 묻자.
“전에는 그랬었습니다만 지금은 그렇게까지 성세가 크지 않아 시도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어……. 죄송합니다.”
얼굴이 새빨개진 노인이 연신 사죄를 고해 왔다.
‘후… 그래. 실패할 수도 있지. 그래도 넌 시도라도 해 보고 돌아왔다지만 저 도굴꾼 놈들은 그냥 돌아온 것 아냐?’
나는 슬쩍 도굴꾼들을 째려보고는 계속 말을 이어 갔다.
“그런데 말이야. 그 브람스 가문에 오리하르콘이 많은 건 사실인가?”
“소문이긴 합니다만… 브람스가 가주들에게만 대대로 전해지는 하나의 비사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비사?”
내 물음에 노인이 눈을 번뜩이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렇습니다! 브람스가의 영지 어딘 가에는 오리하르콘 광산이 존재하고, 그 위치는 브람스가의 가주만이 알고 있다는 비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