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8화
레바논에서 흑탑을 향해 칼을 빼 들려던 그 시각.
[이건 예상 밖인데…….]
천계에서 신도들의 움직임을 지켜보고 있던 레바논이 입술을 질근 깨문다.
그녀가 원했던 건 3년 뒤 강성해진 흑마법사들이 대륙을 멸망시키는 것이었건만.
저건 그녀가 원하던 그림이 아니었다.
[레바논 님, 저대로 놔두면 레바논 님의 계획이 다 어그러지는 것 아닌가요?]
옆에서 시중을 들던 천사가 조심스럽게 질문을 해 오자.
레바논은 무거운 한숨을 내쉰다.
[그렇겠지. 하지만 말릴 명분이 없는 것도 사실이야.]
만약 그녀가 저 상황에 개입하여 전쟁을 하지 말라고 한다면.
당연히 신도들은 그녀의 저의에 의구심을 가질 것이었다.
[그럼 저들이 그냥 전쟁을 하도록 놔두실 생각이신가요?]
[그렇게 놔둘 수 없으니까 고민을 하고 있는 거잖아. 자꾸 신경 건들래?]
[죄, 죄송합니다.]
괜히 천사에게 짜증을 쏟아 낸 레바논은 다시금 지상을 내려다보며 나지막이 중얼거린다.
[저 미친 것들이 단체로 약을 먹기라도 한 건가… 왜 갑자기 안 하던 짓거리를 해 갖고 일을 귀찮게 만드는 거야?]
그녀의 중얼거림을 들은 천사가 잃었던 점수를 따기 위해.
슬며시 의견을 던져 본다.
[그보단 베논이 가장 큰 문제가 아닐까요? 애당초 베논이 흑마법사들의 통제를 제대로 못했으니 저 사달이 난 거라고 생각합니다!]
[베논의 문제라…….]
솔직히 말하면 신이 인간에게 신탁을 내릴 수는 있어도 인간의 행동에 직접적으로 간섭하는 건 쉽지 않다.
‘직접적으로 간섭하려면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만 하니까.’
그렇기에 면밀히 따지면 이걸 베논의 잘못이라 하긴 어려웠다.
‘하지만 흑마법사들이 저런 행동을 할 때까지 방치한 베논의 잘못이 있는 것도 맞잖아?’
어쨌건 그녀와 베논 중, 누군가는 저 상황에 대해 책임을 져야만 했고.
당연히 그 책임을 져야 할 존재는 베논이었다.
[그래. 이건 신도들을 관리하지 못한 베논에게 책임을 물어야지.]
레바논이 게슴츠레한 눈으로 레바논 왕국이 있는 방면을 응시하던 그때.
쩌저저저적-
갑자기 그녀의 거처 인근에 균열이 생겨나더니.
그 사이로 베논이 걸어 나온다.
[베논! 이 몰상식한 놈이, 이곳이 어디라고 감히!]
그 모습을 본 천사들이 눈이 뒤집혀 베논에게 무기를 겨누려 했으나.
[잔챙이들은 꺼져라. 너희에게 줄 관심은 없다.]
서걱-
베논의 대검이 달싹거리기 무섭게 천사들의 몸이 먼지처럼 스러졌다.
[누구에게 문제가 있다고?]
[어머, 그러잖아도 찾아가려고 했는데, 마침 잘 왔네요. 그런데 굳이 내 종들을 소멸할 필요가 있었나요?]
[어차피 하급 천사들 따위 몇이 죽든 별 관심도 없을 텐데?]
[그건 당신 생각이고요. 그보다…….]
비꼬듯 말을 이어 가는 레바논.
[당신의 신도들 때문에 계획이 산으로 가게 생겼는데, 이제 어쩔 건가요?]
[그걸 왜 나에게 묻는 거지?]
[그럼 내 탓이라고 할까요?]
단단히 화가 난 것 같은 그녀의 목소리에도 베논의 표정은 무심했다.
[누구의 탓도 아니다. 굳이 이유를 찾자면, 우리가 변수를 너무 고려하지 않았던 게 문제지.]
[하… 우리요? 말은 똑바로 하세요. 우리가 아니라 당신 혼자겠죠.]
애당초 베논의 신도들이 레바논을 도발하는 행위를 하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은 없었을 터이니.
결국 이번 일만큼은 베논이 책임을 져야 한다고 레바논은 생각했다.
[함께 계획을 구상했으면 책임도 함께 져야지.]
그러나 베논은 그런 레바논의 생각 따윈 일절 무시한 채 덤덤히 대답한다.
[후우… 그래요. 잘잘못을 따지기 전에 이유나 좀 들어야겠네요. 흑마법사들이 왜 갑자기 저 난동을 부린 거죠? 놈들이 저러는 데는 이유가 있을 것 아니에요!]
[…….]
레바논의 추궁에 잠시 말이 없던 베논이 천천히 입을 뗀다.
[흑남의 입김이 작용했다.]
[…뭐라고요? 아니, 그놈은 그냥 가만히 전쟁이나 준비할 것이지, 왜 나서서 벌집을 건드린 거죠?]
당장 누구를 죽일 것만 같은 레바논의 눈빛에 흔들릴 법도 하건만.
[하지만 생각해 보면 흑남의 행동에도 일리는 있어.]
베논은 자신이 생각하던 바를 조용히 꺼내 놓았다.
[…일리가 있다고요? 진짜 돌았나요?]
레바논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그를 바라봤지만.
베논은 아랑곳 않고 말을 이어 간다.
[3년 후엔 적으로 상대해야 할 놈들이 자신의 앞마당을 돌아다니고 있으면 당연히 꺼림칙할 수밖에 없겠지. 흑남의 행동을 두둔하는 건 아니다만 어쨌건 판단 자체는 옳다는 거다.]
[그렇긴 하지만… 마음에 안 드네요.]
베논의 말에도 불구하고 레바논은 불쾌함을 드러내며 계속 그를 쏘아붙였다.
[혹시 흑남이 자꾸 당신의 시야에서 사라지는 것과 이번 일이랑 무슨 연관이 있는 건 아니겠죠? 추궁은 해 봤나요?]
[웃기는 소리를 하는군. 내가 항상 흑남만 보고 있을 정도로 한가해 보이나?]
그에 레바논이 비웃음을 던진다.
[잘 확인하는 게 좋을걸요? 혹시 알까요. 당신이 안 보는 곳에서 흑남이 음모를 꾸미고 있을지 누가 알겠어요?]
[네가 내게 충고를 할 처지던가? 성녀 한 명조차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는 년이 누구에게 훈수질이지?]
[…….]
베논의 일침에 입을 꾹 다문 레바논.
흑남을 더 거론해 봐야 손해만 본다고 생각한 것일까.
[그보다… 이번 일은 어쩔 거죠? 만약 저대로 방관하면 당신의 신도들이 쓸려 나갈 게 당연하잖아요?]
그녀는 화제를 돌리려 슬쩍 질문을 던진다.
[당연히 막아야지. 네가 신탁을 내려서 전쟁을 일으키지 말라고 하면 깔끔하게 해결될 텐데?]
[사고는 당신의 신도들이 쳤는데 수습은 나보고 하라고요? 말이 되는 소리를 해요.]
성기사들과 신관들이 흑마법사들에게 무참히 학살당한 지금.
그녀가 전쟁을 하지 말라는 신탁을 내린다면 신도들이 그녀를 무어라 생각하겠는가?
[그럼 이대로 계획이 무너지도록 방치를 하겠다는 건가? 아가멤논의 계승자의 칼끝이 너만은 피해 갈 거라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아니, 하… 짜증 나게 하지 마요. 아니면 그냥 지금 흑남을 이용해서 재앙의 문이라도 열든가요.]
레바논이 신경질을 부리자 베논은 그녀에게 툭 한마디를 던진다.
[뭘 그리 어렵게 생각하지? 그저 네가 신탁으로 간단히 한마디만 던지면 해결될 문제인데.]
[무슨 한마디를 해요?]
이를 악다문 레바논을 보며 베논이 어깨를 으쓱인다.
[예를 들어 검은 대지에서 벌어진 살육극의 이면에는 흑마법사들이 아닌 어떠한 왕국의 노림수가 자리하고 있었다든가.]
베논의 말에 레바논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흑마법사들이 한 짓거리를 다른 왕국에 뒤집어씌워라 이건가요?]
[그래. 그러면 계획에도 차질이 없을 것이고, 만약에 누명을 뒤집어씌운 왕국에 아가멤논의 계승자가 있다면 그건 그것대로 좋은 일이겠지.]
[흐음…….]
생각보단 나쁘지 않은 계획에 곰곰이 고민에 잠기는 레바논.
‘만약 해당 왕국에 아가멤논의 계승자가 없어도, 어쨌건 대륙의 전투력을 소모시킬 수도 있고. 괜찮은 계획이긴 하네.’
비록 베논의 말대로 한다는 게 고깝긴 했어도.
어쨌건 실행에 옮길 만한 계획인 것도 사실이었다.
[…좋아요. 대신 이번 한 번만이에요. 만약 당신의 신도들이 또 헛짓거리를 하면 그땐 당신이 책임지고 해결하세요. 알았나요?]
[그러지.]
* * *
한편, 흑립 유치원의 집무실 안.
‘으음…….’
나는 화창한 창밖을 보며 가만히 생각했다.
‘슬슬 레바논에 보낸 서신이 도착했을 때가 됐는데. 이제 놈들이 어떻게 나오려나…….’
만약 레바논에서 뭔가 수상쩍은 분위기가 감지되거든 비밀 지부에서 연락이 올 터.
‘연락이 오기 전까지는 기다려 봐야겠지.’
물론 레바논 쪽에서 어떻게 나올지는 대충 짐작이 가긴 했다.
‘설마 이쪽에서 이렇게까지 도발을 했는데도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는다면 그건 그것대로 웃기긴 하겠다만… 역시 그럴 리는 없겠지?’
그래도 정말 놈들이 엉덩이를 의자에서 떼지 않을 가능성도 있으니.
놈들의 움직임을 확인하고 움직이는 것이 여러모로 나을 것이다.
‘레바논이야 대충 움직임이 예상이 간다지만, 신들은 어떻게 나올지 모르겠네.’
내가 점점 생각과 생각 속에 잠기어 가던 중.
똑똑-
누군가가 나의 집무실을 노크해 온다.
“누구야.”
“저예요.”
문밖에서 제이나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난 문에 대고 넌지시 소리쳤다.
“들어와.”
그러자 옆구리에 책을 몇 권 끼고 있는 제이나가 슬며시 안으로 들어온다.
“무슨 일이야?”
“경전이 얼추 완성돼서 한번 보여 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호오, 벌써 완성이 됐다고?”
내가 감탄하며 그녀에게서 책을 건네받자.
제이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너무 기대는 하지 마세요.”
“글쎄… 일단 보고 다시 이야기를 할게.”
나는 자리에 앉아 느긋하게 경전을 훑어보기 시작했다.
‘흐음… 확실히 전에 비해서 내용이 좀 더 담백해진 것 같네.’
제이나가 나의 의견을 적절히 반영을 한 것인지.
내가 혼돈에서 태어났다느니, 빛을 만들어 냈다느니 하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들 중 일부가 경전에서 빠져 있었다.
“전보다 훨씬 깔끔해진 것 같다.”
“그래요? 다행이네요.”
“여전히 말이 안 되는 게 없진 않은 것 같던데, 뭐, 그 정도는 괜찮겠지.”
내 말에 제이나가 배시시 웃어 보이며 다른 책 한 권을 들어 보인다.
“그럼 이건 안 써도 되겠네요?”
“그건 뭔데?”
“당신이 원했던 거짓말이랑 환상을 완전히 뺀 경전이요.”
그녀의 말에 나는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래도 기왕 쓴 거니 그것도 써 줘. 뭐든 적은 것보단 많은 게 낫잖아?”
“알겠어요.”
나는 그녀에게 책을 돌려주며 나지막이 물었다.
“그럼 이제 신도를 모을 준비는 다 된 건가?”
“일단은요? 경전만 있으면 포교 활동을 하는 건 어렵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말이야…….”
나는 잠시 말꼬리를 흐렸다가 슬며시 그녀를 응시했다.
“그런데 이걸로 신도를 모으는 게 과연 잘될지 의문이 들긴 해.”
차라리 사람들이 아무도 믿지 않는다면 모를까.
검은 대지에 살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베논을 신봉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다른 신을 믿으라고 했다간 돌을 맞을 수도 있을 테니까.’
제이나가 포교 활동을 하기엔 결코 녹록지 않은 환경이었으나.
“너무 걱정 말아요. 충분히 가능해요.”
어째 제이나는 꽤나 자신만만해하는 것 같았다.
“…그래? 좋은 방법이 있는 모양이네.”
“가장 좋은 방법은 흑마법사들을 포교하는 거죠. 하지만 당신도 알다시피 그건 쉬운 일이 아니잖아요?”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당찬 태도로 말을 이어 갔다.
“그래서 좀 고민을 해 봤어요. 어떻게 하면 베논의 세력권에서 별 탈 없이 포교 활동을 할 수 있을지 말이죠. 그래서 전 한 가지 가능성을 떠올릴 수 있었죠.”
“가능성?”
나의 물음에 제이나가 씨익 미소를 짓는다.
“결국 신도라는 건 신을 믿는 자녀들을 뜻하는 말이잖아요?”
“뭐, 그렇게 볼 수 있겠지.”
“그럼 자녀가 반드시 사람일 필요가 있을까요?”
‘그것도 그렇긴 하다만… 가만, 자녀가 사람일 필요가 없다는 건…….’
나는 제이나가 말하려고 하는 바를 눈치채고 입을 열려고 했으나.
제이나의 입이 반 박자 더 빨랐다.
“저는 아니라고 봐요. 사람이건 아니건 누군가가 신을 믿는다면, 그 존재는 신의 신도라고 생각해요.”
“그렇기야 하지. 결국 중요한 건 외형이나 재산 같은 게 아니라, 신을 믿고 존경하는 게 더 본질적인 부분이니까.”
“맞아요. 그래서…….”
활짝 웃으며 말을 이어 가는 제이나.
“그래서 전 먼저 마물들과 이종족들을 상대로 포교 활동을 해 보려고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