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카데미의 노예가 살아남는 법-127화 (127/200)

◈ 127화

나의 외침이 회장을 꽉 울리자.

“흑남께선 참으로 슬기로우신 것 같습니다. 확실히 흑남님의 말씀대로 이제 우리가 놈들과의 관계를 지속해야 할 이유는 그 어디에도 없잖습니까?”

“거기다가 흑남의 말대로 우리의 원대한 계획이 들통나는 것보단 레바논과의 관계를 완전히 단절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참으로 현명한 생각입니다!”

대부분의 흑마법사가 탄성을 터뜨리며 나의 의견에 힘을 실어 주었다.

“자네들의 뜻이 그러하다면… 좋네!”

의자 손잡이를 탁 내려친 나가란 탑주가 기다렸다는 듯 소리친다.

“오늘부로 레바논과의 관계는 완전히 단절하도록 하지.”

“참으로 과감한 결단력입니다!”

“분명 먼 훗날 역사는 오늘의 결정을 높이 평가하겠지요!”

좌중이 바삐 나가란의 결정을 칭송하던 중.

잠자코 있던 레논이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질문을 던진다.

“그럼 지금 흑탑에 머물고 있는 레바논 사신의 처우는 어떡하실 겁니까?”

“어떡하긴요? 사신들뿐만 아니라 레바논 왕국 출신은 싸그리 찾아내어 다 죽여야지요!”

흑마법사의 대답에 레논이 눈살을 찌푸린다.

“음… 하지만 만약 그리할 경우, 3년간 준비를 하기도 전에 레바논에서 먼저 공격을 해 올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만.”

레논의 우려에 나는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애당초 그걸 노리고 한 발언이었는데 당연히 그렇게 돼야지.’

만약 이쪽에서 사신을 비롯하여 레바논과 관련된 모든 것을 죽인다면.

레바논 왕국은 과연 가만히 있을까?

‘절대 그럴 리 없지.’

사신은 곧 교황을 대신하여 온 자.

하물며 이쪽에서 그런 사신을 죽인다면 모르긴 해도 교황의 눈이 뒤집힐 건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이쪽에서 침공의 명분을 줬으니 레바논도 분명 우리를 토벌하려고 군세를 모으겠지. 그 군세가 검은 대지로 쳐들어온다면…….’

두 신이 원하던, 흑마법사들을 이용하여 대륙을 멸망한다는 계획에 시원하게 똥물을 뿌리는 셈이 될 터.

‘분명 많은 피가 흐르겠지만… 적어도 놈들이 원하는 대로 멸망을 하는 것보단 낫잖아?’

물론 내가 두 신을 소멸하는 게 최상의 시나리오인 건 사실이었으나.

‘그 연놈들도 문제지만 놈들 뒤에 있는 그 수많은 부하까지 상대할 걸 생각하면… 솔직히 아직은 무리야.’

적어도 지금은 실현 가능성이 너무도 떨어졌다.

‘일단은 최대한 놈들의 계획에 물을 뿌리면서 내 힘을 키워야 돼.’

내가 속으로 결의를 다지던 중.

레논의 맞은편에 서 있던 흑마법사가 레논의 말에 반박하고자 입을 열었다.

“확실히 부탑주님의 말씀대로 놈들이 쳐들어올 가능성도 있겠지요. 아니요, 전 오히려 높다고 봅니다. 하지만 뭐 어떻습니까? 놈들이 쳐들어온다면 다 쳐부수고 죽이면 될 뿐입니다.”

“…….”

너무도 당당한 상대의 모습 때문일까.

레논은 의견을 내는 대신 침묵했고.

타악-

나가란 탑주가 자리에서 일어나 좌중을 향해 소리친다.

“이 시간부로 우리 흑탑은 레바논과의 어중간한 관계를 깨부수고! 우리 본연의 삶을 되찾는다! 잠시 잊었던 살육의 욕망과 피의 갈망을 일깨워라! 검은 대지에 서식하고 있는 레바논의 노예들을 모조리 잡아 와라!”

“베논께 영광을! 흑탑에 번영을!”

이윽고 회의가 파하고 내가 회장을 나서려던 무렵.

“랄프 님, 잠시 시간을 내주실 수 있으십니까?”

레논이 슬며시 내게 다가왔다.

“물론이지요. 무슨 일이십니까?”

“그게…….”

잠시 머뭇거리는 레논.

“편하게 말씀하시지요.”

“예전이었다면 선뜻 그런 발언을 하지 않으셨을 분이 오늘은 유독 강하게 발언을 하신 것 같아서 말입니다. 아, 별다른 의도가 있는 건 아닙니다. 그저 랄프 님의 의중이 궁금해서 말이지요.”

레논의 말에 나는 덤덤히 그를 바라봤다.

“혹시 전에 제가 했던 말을 기억하십니까? 전 기본적으로 전쟁을 싫어하지만…….”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다고 하셨지요. 기억하고 있습니다.”

레논이 뒤를 이어 말하자 나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맞습니다. 이번에 검은 대지에서 레바논의 주구들을 처리하자는 것도 그 발언의 연장선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연장선이라 하심은…….”

“베논 님의 명령으로 인해 저희는 3년 뒤, 대륙을 상대로 전면전을 벌일 수밖에 없게 됐지요. 좋으나 싫으나 벌어질 일이라면 차라리 미리 준비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내가 말을 끝마치자 레논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번진다.

“그렇습니까…….”

“레논 부탑주께선 아직도 전쟁을 반대하시는 겁니까?”

“하하… 랄프 님의 말씀대로 베논 님의 입김이 강력히 들어온 상황에 저 하나의 의견이 뭐 그리 중요하겠습니까? 그저 따라야겠지요. 다만…….”

레논이 슬쩍 주변을 살피곤 입을 뗀다.

“전 그저 걱정이 될 뿐입니다.”

“걱정이요?”

“흑남께선 우리가 3년간 전력을 증강하면, 대륙을 상대로 승리를 할 수 있을 거라고 보십니까?”

‘글쎄… 레바논 쪽에서 다른 왕국 전력을 얼마나 깎아 먹는지, 두 신이 어떤 식으로 나올지에 따라 갈리긴 하겠다만 솔직히 힘들긴 하겠지.’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3년 뒤 전쟁이 벌어진다는 가정하의 전제일 뿐.

상황이 어떻게 흘러갈지는 나도 감히 단언할 수 없었다.

“솔직히 확답을 드리진 못하겠군요. 하지만 베논께서 저희에게 그리 말씀하신 데는 이유가 있지 않겠습니까?”

“…저도 그러길 바랄 뿐입니다.”

* * *

5일 뒤.

흑탑 앞에 위치한 대광장.

절그럭, 절그럭-

몸 곳곳에 상처가 가득한 사람들이 손발에 달고 있는 사슬을 질질 끌며 힘겹게 걷고 있다.

그런 그들의 모습이 아니꼬웠던 건지.

“걷는 꼬라지 봐라? 똑바로 걷지 못해?!”

검은 로브를 두른 남자가 역정을 내며 힘껏 채찍을 휘두른다.

“크윽…….”

“이런 식으로 사신을 대접하고도 너희가 무사할 것 같아?!”

“언제고 우리를 배신한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될 거다…….”

채찍질에도 죄수들이 애원을 하긴커녕 온갖 저주를 퍼붓자.

채찍을 들고 있던 흑마법사가 껄껄 웃으며 말한다.

“배신? 야, 이 머저리 같은 새끼들아. 애당초 동맹이었던 적이 없는데 배신은 뭔 놈의 얼어 죽을 배신이야? 아직 입을 움직일 힘이 있나 본데, 움직여!”

“이 땅에 멸망이 있을지어다! 거룩한 심판이 이곳에 있을지어다!”

“레바논이시여…….”

철썩-

서슬 퍼런 채찍 소리가 죄수들의 울부짖음을 잠재우자.

웅웅웅-

보기만 해도 위압감이 느껴지는 데스나이트들이 무릎 꿇은 죄수들 뒤에 도열하기 시작했다.

“이야, 이게 얼마 만의 처형식이야?”

“그러니까 말이야. 오랜만에 유흥거리가 생겨서 좋네.”

반면, 어느새 대광장에 몰려든 사람들은 간만의 구경거리에 흥이 오른 모습이었다.

“근데 어디서 전쟁이라도 났대? 갑자기 웬 처형식이래?”

“허 참… 어디 산골에서 살다가 온 사람처럼 말하고 있네. 흑탑에서 내려온 공문 못 봤었어?”

“공문? 무슨 공문?”

남자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옆에 있던 남자는 쥐고 있던 과일을 씹으며 고개를 까딱였다.

“그 왜… 얼마 전에 레바논의 기사들이 보이거든 신고하라고 했었잖아? 포상금 준다고.”

“어… 그랬었나? 우리 집에는 안 왔었는데……. 어쨌건 갑자기 왜 신고를 하라는 거야?”

“낸들 알아? 하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확실하지 않겠어? 퉤!”

그러자 남자는 과일 씨앗을 뱉어 내는 남자의 어깨를 건들며 그를 보챘다.

“답답해 죽겠네. 뭐가 확실하다는 거야?”

“어이고, 이 인간아. 가축만 잡지 말고 세상 돌아가는 것도 좀 살피고 그래. 저걸 보고도 드는 생각이 없어? 흑탑이 레바논을 도발하려고 저러는 거겠지.”

“오오, 그런 거였나?”

“…말을 말자.”

두 남자가 대화를 나누던 그때.

스르릉-

처형의 시작을 알리듯 데스나이트들이 일제히 검을 빼 들어 하늘 높이 쳐들었다.

“죽여라! 죽여!”

“피를 뿌려라! 빨리 목을 치라고!”

삽시간에 대광장이 군중의 아우성으로 소란스러워지자.

“정숙해라!”

한 흑마법사가 고성을 내지르며 기다란 양피지를 펼쳐 들었다.

“이 자리에 앉아 있는 올란도 외 48명의 죄인은 검은 대지에서는 금기시되는 레바논을 포교하는 행위를 했으며, 무고한 백성들을 죽인 살인마들이다! 또한! 놈들은 흑탑을 무너뜨리기 위해 물밑에서 온갖 작전을 펼쳐 왔었다. 따라서! 이 죄인들을 전원 사형에 처하는 바이다!”

와아아아아아아-

“…….”

군중의 함성 소리가 귀를 먹먹하게 하자.

올란도는 멍하니 하늘을 바라봤다.

‘…오늘도 하늘은 맑군.’

죽는 게 두렵진 않았다.

사신으로서 검은 대지에 오게 된 순간부터 항상 마음 한편에 죽음을 준비해 두고 있었으니 말이다.

‘다만… 나의 임무를 다하지 못한 게 그저 아쉽고 또 원통하구나.’

어떻게든 배교한 성녀를 찾아내어 죽였어야 했건만.

갑작스러운 흑마법사들의 태세 전환으로 인해 도리어 이쪽이 죽게 될 줄이야.

‘하지만… 내 죽음은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이다.’

비록 그는 이곳에서 끝을 마주하겠지만.

레바논의 사신과 기사들의 대량 학살을 본국에서 좌시하지 않을 터.

‘스스로 멸망을 재촉하는 어리석은 것들. 지금이야 웃고 있지만 검은 대지에 레바논의 깃발이 꽂히는 그날이 오게 될 것이다.’

“처형을 시작해라!”

‘그래도 한 가지 위안이라 한다면…….’

올란도는 멍하니 전방을 바라봤다.

“…….”

무미건조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는 갈프 신관을 보며.

올란도는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갈프 신관의 정체만은 들키지 않아서 다행이…….’

서걱-

* * *

올란도를 비롯하여 기사들의 목이 힘없이 바닥을 구르자 나는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이로써 당분간은 제이나가 암살자 걱정 할 일은 없겠지. 그리고…….’

이미 내가 보낸 폭탄은 바다를 넘어 레바논에 도착했을 터.

‘레바논이 전쟁을 일으킬 건 거의 확실하고. 이제 남은 건 두 신의 결정인가.’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피식 미소를 흘렸다.

‘레바논이 전쟁을 일으키게 놔둘 건지, 아니면 말릴 건지 한번 잘 고민을 해 보쇼.’

* * *

10일 뒤.

레바논의 대신전.

“…….”

묘한 적막만이 공간에 흐르던 가운데.

양피지를 읽어 내리는 교황의 표정이 점차 일그러져 간다.

“성녀와 대신관은 행방불명이고… 보냈던 사신들은 놈들이 모조리 처형을 했다? 갈프 신관은 정녕 이걸 나보고 믿으라고 보내왔단 말인가?”

“그, 그것도 큰 문제긴 합니다만 더 큰 문제가 남아 있습니다.”

“더 큰 문제? 이보다 더 큰 문제가…….”

양피지를 읽어 내리던 교황이 몸을 흠칫거린다.

“이건… 흑탑이 대륙 침공을 준비 중에 있다고?”

“믿기 어려운 사안이긴 합니다만… 만약 놈들이 정말 사신들을 처형하고 검은 대지에 있던 기사들마저 제거했다면… 대륙 침공에도 설득력이 생기긴 합니다.”

“허… 허허… 으허허허허허허!”

슈바츠가 미친놈처럼 웃어 젖히기 시작하자.

대신관들은 더더욱 침묵을 고수했다.

“이 벌레들이 완전히 돌아 버린 걸 보니, 아무래도 평화가 너무 길었던 것 같네. 그렇지들 않나?”

“…….”

대신관들이 선뜻 답하지 못하자.

콰작-

슈바츠는 양피지를 꽉 움켜잡곤 그들을 보며 스산한 미소를 짓는다.

“도발을 했으면 응당 받아 줘야지. 아무래도 놈들에게 쓰라린 기억을 다시 심어 줄 필요가 있을 것 같군. 아니! 이번에는 정전 정도로 그치지 않겠다. 흑탑이 불타오르는 그날까지 정전은 없다.”

“그, 그 말씀은…….”

“대륙의 모든 왕국들에 공문을 보내게. 5만의 최정예 병력을 집결하여 레바논에 보내라고 말이야.”

슈바츠가 지도를 노려보며 나지막이 중얼거린다.

“검은 대지를 지도에서 완전히 지워 버리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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