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카데미의 노예가 살아남는 법-126화 (126/200)

◈ 126화

올란도의 발언에 나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부릅떴다.

“하하… 농담이라면 꽤 질이 나쁜 농담이군요.”

“갈프 신관께서는 제가 이런 사안으로 농담이나 할 사람으로 보이십니까?”

“물론 그건 아닙니다만… 워낙 믿기 어려운 사안이라서 말입니다.”

나의 굳은 표정을 본 올란도 또한 짙은 한숨을 토해 낸다.

“저도 신탁을 부정하고 싶어 하는 사람 중 한 명인데, 갈프 신관님의 심정을 제가 왜 모르겠습니까. 하지만… 성녀의 행방이 묘연해졌다고 하시니 이로써 확실해졌습니다. 후우…….”

“성녀님은 대신관과 함께 사라진 것뿐입니다. 아직 성녀님께서 배교를 했다고 속단하기엔…….”

“갈프 신관님, 레바논 님께서 직접 성녀의 배교를 언급하셨습니다.”

올란도가 이 이상의 증거는 없다는 듯 딱 잘라 말하자.

나는 평소보다 배에 힘을 주어 한숨을 내쉬곤 그에게 물었다.

“이것 참…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잠시 말을 아끼다가 슬며시 운을 뗐다.

“그럼 본국에서는 새로운 성녀를 선출하려고 하겠군요.”

“아마 그럴 겁니다. 다만 그 전에 한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조건이라니요?”

나의 물음에 중년의 성기사가 결의에 찬 눈빛으로 나를 바라본다.

“갈프 신관님, 제가 단순히 두 사람의 행방이나 물어보기 위해 흑탑에 왔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럼 그것 말고도 이유가 있다는 말씀이신지요?”

“흑탑에 오기에 앞서 저는 교황님께 한 가지 명령을 받았습니다.”

올란도는 슬며시 문 쪽을 살피곤 나지막이 속삭인다.

“배교한 성녀를 죽여라… 그게 제가 교황님께 받은 명령입니다.”

“…….”

성기사의 차가운 선언에 나는 놀란 척 눈을 부릅떴다.

“당황스럽군요. 하지만 성녀가 정말 배교를 했다고 해도… 굳이 죽일 필요까진 없지 않습니까?”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배교한 성녀를 살려 두는 건 타락의 승리를 알리는 꼴밖에 되지 않습니다! 안타깝지만 반드시 필요한 일입니다.”

‘타락의 승리라……. 그보단 그냥 레바논에 치부가 될 것 같으니까 없애려는 것 아냐?’

“허어…….”

하나 속내와 달리 내가 깊이 탄식하자.

올란도는 굳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래서 전 당신의 조력을 필요로 합니다.”

“제 조력이라……. 구체적으로 어떤 걸 원하시는 겁니까?”

“갈프 신관님도 아시다시피 저는 레바논의 사신으로서 이곳에 왔습니다. 즉, 활동에 큰 제한을 받고 있죠.”

내가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이자.

올란도가 무겁게 말을 이어 간다.

“따라서 갈프 신관께서 저 대신 흑마법사들을 동원하여 성녀의 행방을 알아내 주셨으면 합니다. 성녀의 위치만 파악된다면 죽이는 건 제 쪽에서 알아서 하겠습니다.”

‘흠… 제이나의 괴력을 알고서도 저러는 건지, 아니면 몰라서 저렇게 자신만만하게 나오는 건지 모르겠네.’

물론 지금의 제이나에게 더 이상 괴물 같은 완력은 없다고 해도.

올란도가 그 사실을 알고 있을 리는 없을 터.

“성녀를 찾는 거야 최대한 도와드려야지요. 하지만 정말 혼자서 괜찮으시겠습니까?”

“믿을 만한 동료들과 함께 왔으니 너무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동료라…….’

나는 게슴츠레한 눈으로 올란도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하, 그렇군요. 일단 잘 알겠습니다. 저도 어떻게든 성녀의 행방을 찾아내 보도록 하죠.”

“도움에 감사드립니다.”

올란도가 꾸벅 고개를 숙이자.

나는 입가에 희미한 반달을 그리며 고개를 저었다.

“감사라니요? 레바논을 위해서라면 이보다 더한 부탁이라도 들어드려야지요.”

* * *

1시간 뒤.

“제이나! 제이나!”

나는 흑립 유치원으로 돌아와 곧장 제이나를 찾았다.

‘이 여자가 또 어디로 간 거야?’

흑카데미, 매점을 비롯하여 온갖 곳을 뒤진 끝에야.

나는 그녀를 흑립 유치원의 작은 도서관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사각-

그녀는 조용한 도서관에 홀로 앉아 바삐 양피지에 뭔가를 적고 있었는데.

그 옆에 있는 다 읽긴 한 건가 싶을 정도로 방대한 양의 책이 괜스레 더 눈길을 끌었다.

“여기 있었어? 한참 찾았네.”

“어머, 언제 왔었나요? 온 줄도 몰랐네요.”

나를 스윽 쳐다본 제이나가 깃펜을 내려놓곤 힘껏 기지개를 켠다.

‘뭘 쓰고 있는 거지?’

나는 방대한 양의 책에 호기심이 들어.

그녀를 찾은 목적을 잠시 미루고 슬며시 질문을 던졌다.

“뭐 하는 중이었어?”

“아아, 이거요?”

제이나가 배시시 웃으며 양피지 뭉치를 들어 보인다.

“경전을 집필 중이었어요. 한번 보실래요?”

“경전이라…….”

나는 그녀가 내민 양피지 뭉치를 받아 들곤.

천천히 글귀를 살펴 나갔다.

[태초에 혼돈이 있었다. 혼돈은 이윽고 하나의 초월체를 만들어 냈고, 초월체는 혼돈을 보며 말했다. 빛이 있으라. 그러자…….]

‘…음?’

“아니, 잠깐만.”

나는 가슴이 턱 막히는 기분이 들어.

양피지를 내려놓곤 제이나를 응시했다.

“이거… 뭔가 이상한 것 같지 않아? 경전이라며? 경전은 날 섬길 신도들에게 교리를 알려 주는 책 아니었어?”

“맞아요.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근데 초입부의 이건 뭐야? 태초에 혼돈이 있었다? 빛이 있으라?”

나의 물음에 제이나가 활짝 미소를 짓는다.

“아아, 그 글귀 때문에 그런 건가요? 그건 별것 아니에요.”

“별게 아니라니? 이건 좀… 뭔가 사기 같잖아! 난 혼돈 사이에서 태어나지도 않았고 빛도 만들어 내지도 않았는데?”

“물론 그렇죠. 하지만 이걸 보세요.”

제이나가 옆에 쌓아 뒀던 책들 중 몇 권을 집어서 내게 내밀자.

나는 재빨리 책들을 훑었다.

‘이건…….’

그녀가 내민 책들은 적혀 있는 신들의 이름만 달랐을 뿐 전부 경전이었는데.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었다.

‘어째 경전들의 도입부가 죄다 비슷한 것 같은데?’

바다를 가르고 출몰했다는 바다의 신 미나를 시작으로.

하늘이 황금알을 품었는데 알에서 나온 게 하늘의 신 아델이라는 둥.

내용만 조금씩 다를 뿐 도입부는 죄다 말도 안 되는 것들뿐이었다.

“보셨으니 아시겠지만 경전 대부분이, 특히 처음 부분이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지 않으시나요?”

“솔직히 믿기 어렵긴 하지.”

내가 동의하자 제이나는 그것 보라는 듯 어깨를 쭉 폈다.

“그게 경전의 기본이에요.”

“이게… 기본이라고?”

“물론이죠!”

자신의 전문 분야라 그런 걸까.

평소보다 신이 난 제이나가 열심히 설명을 시작한다.

“다른 누구보다 신은 특별해야 하고, 사람과 확실한 차별점이 있어야 하죠. 그러니 신의 탄생도 사람과는 달라야 하지 않겠어요?”

‘아니… 그렇긴 한데 이건 좀……. 아무리 신도들을 포섭해야 한다고 해도 그렇지. 나는 내 인생을 기록한 게 그대로 경전이 되는 건 줄 알았는데.’

나는 멋쩍게 입맛을 다시다가 슬며시 입을 열었다.

“확실히 탄생이 특별한 게 신으로서의 위엄이 살긴 하지.”

“그렇죠?”

“하지만 뭐랄까… 내 경전은 좀 달랐으면 좋겠어.”

내 말이 의외였던 걸까.

제이나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어떤 식으로 달랐으면 좋겠다는 건가요? 혼돈에서 등장하는 게 마음에 안 드는 거라면, 음… 지옥에서 등장하는 걸로 바꿔 볼까요?”

“아니, 아니. 내 말은 그런 게 아니고, 경전을 단순히 날 신성하게 여기는 거짓으로 가득한 책으로 만들기보단, 나의 삶이 녹아들었으면 좋겠어. 그래, 일대기 같은 것 있잖아!”

내가 탁 손뼉을 치자.

어째 제이나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음… 솔직히 말하면 썩 좋은 생각은 아닌 것 같아요. 만약에 레바논이나 베논이 당신의 경전을 읽기라도 한다면 귀찮아질 수도 있잖아요?”

“그럴 수도 있긴 하겠지만 놈들이라면 대수롭지 않게 넘어갈 것 같은데?”

실제로 검은 대지에선 베논이 아니라 나가란 탑주나 레논 부탑주 등과 같은.

사람을 신처럼 취급하며 섬기는 이들도 있었기에 제이나의 우려는 큰 문제가 될 것 같지 않았다.

다만…….

‘씁… 표정이 아주 울겠다, 울겠어.’

자신이 원하는 대로 경전을 쓰지 못하게 된 탓인지.

울상이 된 제이나를 보며 나는 손을 휘적거렸다.

“끙… 뭐, 그래. 그럼 일단 네가 원하는 대로 한번 써 봐. 완성본을 보고 영 아니다 싶으면 그때 바꿔도 되니까.”

“정말이죠?! 말 바꾸기 없기예요?”

어느새 활짝 미소를 짓는 제이나를 보며 나는 혀를 내둘렀다.

“아 참, 그리고 종교의 이름이랑 경전에 들어갈 이름은 정했나요?”

“그건 아직… 못 정했지. 은근히 정하기가 어렵더라.”

“정 결정하기 어려우면 그냥 랄프로 하는 건 어때요?”

그녀의 의견에 나는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건 아니야.”

“…그래요? 랄프도 괜찮아 보이는데……. 아무튼 빨리 정해 주면 그만큼 경전이 나오는 속도도 빨라질 거예요.”

“그러지.”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다가.

‘아… 맞다.’

불현듯 이곳에 온 이유가 떠올라 얼른 화제를 돌렸다.

“그건 그렇고, 레바논에서 사신이 왔다.”

“그래요?”

제이나가 별 관심이 없는지 시큰둥해하자.

나는 슬며시 입꼬리를 올렸다.

“너야 이제 레바논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아직 저쪽은 아닌 것 같던데?”

“그게 무슨 말인가요?”

제이나는 그제야 깃펜을 내려놓고 내 말에 관심을 보였다.

“아무래도 레바논에서 널 죽이려고 암살자를 보낸 모양이야.”

“그렇군요.”

“별로 안 놀라는 눈치네.”

내 말에 제이나가 어깨를 으쓱여 보인다.

“어차피 전 이곳에 계속 박혀 있을 건데 놈들이 절 어떻게 찾아내겠어요? 그리고…….”

제이나가 내 눈을 마주 보며 싱긋 웃는다.

“거기다가 아직 경전에 넣을 이름을 못 정하긴 했어도, 바알도 소멸한 신이 내 옆에 있는데 무서울 게 뭐가 있을까요?”

“허…….”

‘사회생활 잘하네…….’

나는 머쓱한 미소를 보이곤 다시금 대화를 이어 나갔다.

“그래. 어쨌건 그럼 전부 처리해도 상관없다는 거지?”

“좋을 대로 하셔요. 그런데 이번에 놈들을 처리한다고 한들, 다음에도 비슷한 상황이 또 벌어질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괜찮나요?”

“흐음…….”

확실히 듣고 보니 일리가 있다.

‘이번에 제이나를 노리는 놈들을 제거한다고 쳐도 확실히 레바논에서 계속 암살자를 보내올 확률이 높긴 해.’

배교한 성녀는 그들에게 있어 큰 치부였으니 말이다.

‘대책을 마련하긴 해야겠는데.’

예전에는 성녀였다고 한들.

지금은 나의 첫 번째 신도이면서 내 경전을 작업하는 우수한 인재를 죽게 놔둘 수는 없었다.

‘죽이는 것도 죽이는 거지만 뭔가 좀 더 근본적인 대책이 있으면 좋을 텐데…….’

* * *

1주일 뒤.

흑탑의 회장 안.

“흑남님, 무슨 일로 회의를 요청하신 겁니까?”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 아니지요?”

내가 나가란 탑주의 동의를 빌려 흑탑의 간부들을 전원 소집한 탓인지.

자꾸 내게 질문이 쏟아져 들어왔다.

‘거참, 기다리면 금방 알게 될 걸, 인내심들이 없네.’

어느덧 회장에 사람이 전부 모여들자.

“탑주님, 시작하겠습니다.”

나는 나가란에게 양해를 구하곤 좌중을 보며 입을 열었다.

“최근 1주일간, 저는 곰곰이 고민을 해 봤습니다. 뭔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이상하다니요? 뭐가 이상하다는 말씀입니까?”

좌중이 의문을 표하자.

나는 이마를 찌푸린 채 말을 이어 갔다.

“지금 우리는 베논 님께서 내린 거룩한 사명 아래에서 3년이라는 준비 기간을 갖고 있는 중입니다.”

“그렇지요.”

좌중이 고개를 끄덕이자.

나는 슬슬 본론을 그들에게 투척했다.

“한데 아직도 검은 대지에서는 레바논의 노예들이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께선 이게 말이 된다고 보십니까?”

“그것도 그렇긴 하네만… 갑자기 관계를 단절해 버리면 도리어 놈들이 더 우리를 의심하지 않겠나?”

연로한 흑마법사의 물음에 나는 속으로 실소를 흘렸다.

‘그럴 리가 있나? 절대 그럴 일은 없어.’

레바논이랑 베논이 세상의 멸망을 원하는 이상 절대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었다.

하나 저들이 그 사실을 알 리 없었기에.

나는 차분히 설득을 이어 나갔다.

“아니요. 놈들은 우리가 관계를 단절해도 그러려니 할 겁니다. 애당초 우리와 레바논의 관계는 그 정도 관계였으니까요.”

“으음…….”

“오히려 우리가 진행 중인 3년의 큰 계획이 놈들에게 알려지게 된다면, 그게 더 큰 피해로 돌아올 거라 생각하진 않으십니까?”

나의 물음이 회장을 울리고, 좌중이 저들끼리 작게 속삭이던 중.

“확실히 흑남의 말도 일리가 있다. 이제껏 애매한 관계를 유지해 왔던 탓에 확실히 그 부분을 간과하고 있었군. 으허허허허!”

나가란 탑주의 선명한 웃음소리가 귓가를 울려왔다.

“기왕 말이 나온 김에 먼저 흑남의 의중을 묻고 싶군. 랄프, 자네는 어떻게 하길 원하나?”

“앞으로 레바논과 관련된 놈들은 검은 대지에 발조차 못 붙이게 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나는 차갑게 웃으며 좌중을 향해 소리쳤다.

“검은 대지에 있는 모든 레바논의 주구들을 죽여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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