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5화
쿠르르릉-
이미 붕괴되어 가고 있는 바알의 영역을 보며 레바논은 이마를 찌푸렸다.
[소멸한 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조금만 더 빨리 이곳을 발견했다면 좋았었겠네요.]
[어쩔 수 없다. 애당초 놈이 소멸하지 않았다면 이곳을 발견하는 것도 어려웠을 거다.]
애당초 쥐새끼의 영역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도.
놈의 힘이 증발하여 이곳이 드러나게 된 덕이었으니 말이다.
[그렇기야 하지만, 아쉬워서 그래요.]
현장을 이리저리 살피던 레바논이 무언가를 발견하곤 눈살을 찌푸린다.
[이건… 소멸의 힘이군요. 그렇죠?]
[…….]
베논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레바논은 게슴츠레한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혹시 당신이 바알을 소멸한 건 아니겠죠?]
[…헛소리를 하는군.]
[하지만 소멸의 권능을 다룰 수 있는 건 당신뿐이잖아요?]
레바논의 물음에 베논은 어이가 없었는지 실소를 흘리며 대꾸했다.
[잊었나? 놈은 아가멤논의 계승자다. 소멸의 권능뿐만이 아니라 네년의 창조의 권능까지 사용할 가능성이 높다.]
[혹시나 해서 물어본 거예요. 그보다 당신이 아니라면 바알을 소멸한 게 아가멤논의 계승자인 건 확실해 보이는데……. 아아, 진짜 너무 아쉽네요. 우리가 조금만 더 빨리 왔으면 계승자를 죽일 수 있었을 수도 있었잖아요?]
[계승자가 이곳을 뜬 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추적하는 건 어렵나?]
한숨을 토해 내는 레바논.
[바알의 힘을 흡수했을 텐데 무슨 수로요? 하아… 바알의 힘으로 세계 멸망을 가속화하려 했더니… 오히려 골치가 아프게 됐네요.]
[더 골치 아픈 일은 계승자의 성장세가 우리의 상상 이상이라는 거다. 아무리 바알이 변방으로 밀려났다고 해도 놈은 엄연히 재앙을 담당하던 신이었다. 그런데 놈은 그런 바알을 소멸해 버렸지.]
경각심을 일깨우는 베논의 말에 레바논은 도리어 퉁명스럽게 대답한다.
[아가멤논의 힘을 계승했으면 바알 정도는 당연히 소멸할 수 있었겠죠. 애당초 놈은 당신한테 힘을 갈취당해 온전하지도 않았잖아요?]
[그렇다고 해도 이건 단순히 여길 사안이 아니다. 만약에 놈이 바알의 힘까지 완전히 통제하게 된다면, 꽤나 골치가 아파질 거다.]
[그걸 지금 누가 몰라요? 어쨌건 이미 일은 벌어졌으니 방도를 찾아야 할 것 아니에요?]
세상 끝, 버려진 땅에 왔음에도 불구하고 마땅한 소득이 없어서 그런 탓일까.
레바논이 불쾌함을 드러내자 베논 또한 차가운 말투로 응수한다.
[방도? 간단하다. 놈이 더 성장하기 전에 빨리 찾아내서 죽이면 된다. 3년을 좀 더 단축하는 것도 방법일 수 있겠지.]
[솔직히 3년도 짧은 느낌이 있는데, 거기서 더 줄이자고요?]
레바논이 기가 막히다는 듯 픽 실소를 흘린다.
[3년도 안 되는 시간 동안 준비를 한다고 치죠. 흑마법사들이 대륙으로 쳐들어오면 이길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럼 네년이 좋은 의견을 내놔 봐라.]
베논이 으르렁거리자.
[하아… 계승자에 대한 정보가 없으니 답답할 노릇이네요. 하다못해 성별이라도 알면, 한쪽을 완전히 멸족해 버릴 텐데요.]
레바논은 슬며시 말을 돌리며 푸념을 늘어놓았다.
[3년에서 1년으로 기간을 단축하는 게 나을 것 같은데.]
[괜히 조급해하지 말고 일단 처음 계획대로 3년으로 가요. 솔직히 3년은 별로 길지도 않은 시간이잖아요? 그 시간 동안 놈이 강해진다고 해도 결국 우리 상대가 되진 못할걸요?]
[…태평한 소리를 늘어놓는군.]
베논이 답답하다는 듯 고개를 젓던 중.
쿠르르르르릉-
버려진 땅이 완전히 소멸되어 가자 베논이 고개를 까딱였다.
[일단 자리를 옮기지.]
쩌저저적-
베논이 수하들을 이끌고 균열 사이로 사라지자.
레바논 또한 마찬가지로 균열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쿠르르르르릉-
이윽고 주인을 잃은 땅은 완전히 무너져 내렸고.
깊은 어둠만이 그 자리를 대신할 뿐이었다.
* * *
한편, 같은 시각.
쩌저저적-
‘후우… 돌아왔나.’
균열을 비집고 나오자 보이는 익숙한 집무실의 모습에 난 빙긋 미소를 지었다.
‘이 균열이 참 요물이네.’
아무런 대가나 노력 없이도 내가 원하는 곳으로 이동하는 게 가능하다니.
‘균열이 있는데 전송 마법을 왜 써?’
내가 속으로 고개를 젓던 중.
“어어?! 어떻게 된 건가요?! 바알이 무슨 수작을 부리진 않았나요?”
아직도 내 집무실에 남아 있던 제이나가 나를 보며 질문 폭탄을 던져 왔다.
“진정해. 일단 결론만 말하자면 일은 잘 풀렸지.”
“일이 잘 풀렸다는 건… 바알을 쫓아냈다는 건가요?”
놈을 죽였을 거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한 것인지.
그녀는 그마저도 대단하다는 듯 날 올려다봤다.
‘사실을 말해 줄까? 아니면 그냥 묻어 둘까. 음… 그래, 그냥 사실을 말해 주자.’
언제고 바알의 신도들을 통해 바알의 소멸이 세상에 알려지게 될 터.
어차피 들통날 거짓말을 굳이 할 필요는 없었다.
“쫓아낸 건 아니고, 소멸했지.”
“…소멸했다고요? 누구를요? 바알의 하수인을요?”
“아니, 바알.”
내가 단호히 대답하자.
“…진심으로 하는 말인가요?”
제이나는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듯 나를 바라봤다.
“내가 이런 걸로 거짓말을 할 사람으로 보여? 놈은 소멸했다.”
“…….”
나의 발언에서 확신을 느낀 걸까.
제이나가 침을 꿀꺽 삼키며 묻는다.
“그럼 이제 바알의 힘을 사용할 수 있는 건가요?”
“그것도 알고 있었어?”
“신끼리 다툴 경우, 승리한 쪽이 패자의 모든 걸 가져간다는 말을 레바논에게서 들은 적이 있어요. 그래서 물어본 거예요.”
그녀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은 그렇긴 한데 아무래도 실험을 좀 해 봐야 할 것 같아.”
“실험이요?”
“그래, 적어도 바알의 힘에 뭐가 있는지, 어떤 종류의 힘인지는 알아야 할 것 아냐.”
‘어디 보자…….’
나는 지그시 눈을 감곤.
바알이 남긴 기억을 떠올리며 허공에 손을 뻗었다.
“단절된 세계.”
나의 나지막한 중얼거림이 집무실을 울리기 무섭게.
스스스스슥-
바닥에서 검은 그림자가 생겨나더니 순식간에 내 집무실을 완전히 뒤덮어 버린다.
‘오오… 이게 진짜로 되네?’
솔직히 이제껏 바알의 힘을 삼켰다는 게 나로선 그리 체감이 되지 않았으나.
바알의 고유 능력이 내 손에서 발현되는 것을 보고 나니 이제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정말 바알의 힘은 내 게 됐구나.’
“세상에… 정말이네요. 정말… 바알의 힘이에요.”
제이나 또한 지금의 상황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멍하니 검은 장막을 바라보며 말을 이어 갔다.
“그럼 이제 당신이 바알을 대신하여 재앙의 신이 된 셈이나 다름없겠네요.”
“뭐, 그렇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딱히 신경 쓰지는 않아. 재앙의 신이고 자시고, 중요한 건 그깟 호칭 따위가 아니니까.”
어떻게 두 신의 계획을 파훼하느냐.
가장 중요한 안건은 바로 그것이었으니까.
“그래도요. 이제 바알의 힘까지 얻었으니 이제 두 신의 이목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진 게 아닌가요?”
“그렇지. 나도 그리고 너도 말이야.”
나는 물론이거니와 내 신도가 된 제이나 또한 그 영향을 받게 됐으니.
이는 분명 엄청난 호재였다.
“그렇다면 이제 저도 한결 편히 당신을 도와줄 수 있을 것 같네요.”
“도와주다니?”
“신들의 영향에서 벗어났으니 신도들을 포섭하는 것도 비교적 수월하지 않겠어요?”
제이나는 빙긋 웃으며 내게 양피지를 내민다.
“갑자기 양피지는 왜?”
“슬슬 정해야 하지 않겠어요? 아니면 그대로 랄프라는 이름으로 할 건가요?”
“그게 무슨 말이야?”
내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자.
그녀는 깃펜까지 내게 넘기며 계속 말했다.
“무슨 말이라니요? 당연히 신도들이 섬길 신의 이름을 말하는 거죠. 그리고 기왕 정하는 김에 계명 같은 것도 같이 만들어 주면 좋고요.”
“계명이라고 하면… 설마 경전 같은 걸 말하는 건 아니겠지?”
내 물음에 제이나가 바로 그거라는 듯 활짝 미소 짓는다.
“맞아요! 경전이요! 신도들을 믿게 하려면 경전은 기본이니까요.”
“음… 하지만 보통 경전에는 신의 활약상이 많이 들어가던데… 경전에 쓸 만한 게 있나? 아니, 그보다 경전을 내가 적는 게 맞는 건지 모르겠는데.”
내가 경전에 대해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자.
제이나가 빙긋 미소를 짓는다.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요. 걱정 마요. 당신의 경전은 제가 직접 만들게요. 당사자가 쓰는 것보단 그게 낫겠죠?”
“그렇기야 하다만…….”
‘그래. 뭐, 낯간지러운 것보단 차라리 제이나한테 맡기는 게 낫겠어.’
나는 그녀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해.”
“대신 당신이 해 주셔야 할 게 또 있긴 해요.”
“이번에는 또 어떤 건데?”
“이름도, 경전의 집필도 정해 뒀으니 일단 당장 필요한 거야 하나죠.”
제이나가 이글거리는 눈으로 날 보며 입을 뗀다.
“종교의 이름이요.”
* * *
2주 뒤.
‘으으… 미치겠네.’
나는 텅 빈 양피지를 노려보며 뒤통수를 긁적였다.
‘이게 뭐라고 이렇게 고민이 되는 건지.’
종교명.
솔직히 처음에는 대충 아무 이름이나 갖다 붙이면 된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래도 따지고 보면 간판의 이름을 정하는 건데 대충 정하기도 좀 그래.’
사각-
랄프, 미친 랄프, 인생역전, 극락 등.
나는 여러 가지 후보를 양피지에 썼다가도.
‘아니야! 미친 랄프는 개뿔! 극락은 또 뭔데?!’
금세 손이 오그라들어 냅다 양피지를 찢어 버렸다.
‘하아…….’
내가 종교명을 두고 깊은 고민에 잠겨 있던 그때.
똑똑-
누군가가 나의 집무실 문을 두드렸다.
“누구야?”
“흑남님, 흑탑에서 회의에 참석하시라고 연락이 왔습니다.”
“회의? 알겠다.”
‘그래, 종교명은 잠시 뒤로 미루자. 저건 하루아침에 될 게 아니야.’
나는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흑탑의 회장으로 이동했다.
* * *
“다들 모인 것 같군.”
내가 회장으로 들어서자.
나가란 탑주가 좌중을 보며 입을 열었다.
“오늘 자네들을 부른 건 다름이 아니라 레바논에서 온 사신 때문이네. 놈들이 검은 대지에다가 성녀와 대신관을 보냈는데 그들에게서 소식이 없다고, 우리가 죽인 게 아닐지 의심을 하는 눈치더군.”
“하지만 대신관은 이미 죽지 않았습니까?”
일부가 나를 바라보자.
나는 덤덤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었죠. 하나 애당초 그들이 정식적인 절차를 통해 검은 대지에 온 게 아니었으니, 그저 모른 척 발뺌을 하면 해결될 것 같습니다만.”
“흑남의 말이 맞네. 구태여 우리가 했다고 인정할 필요는 없지. 하지만 저쪽에서도 쉽사리 의심을 거두지 않는 눈치더군.”
나가란의 말에 나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계속 발뺌을 하는 게 좋아 보입니다. 더욱이 어차피 3년 뒤에는 대륙에서 사라질 놈들이잖습니까? 크게 신경 쓸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으하하하하하! 흑남의 말이 맞습니다! 어차피 3년 뒤에 몰락할 놈들인데 굳이 눈치를 볼 필요는 없지요!”
“흑남께서 아주 시원하게 잘 말씀하셨습니다!”
여러 인원이 나의 발언을 옹호하며 시원하게 웃자.
나가란 또한 흐뭇한 미소를 짓는다.
“그럼 다음 안건을 이야기하기에 앞서, 랄프.”
“예, 탑주님.”
“저쪽에서 자네와의 독대를 신청해 왔는데 어쩔 텐가?”
‘독대를 신청해 왔다라…….’
아무래도 레바논 쪽에선 나를 통해 작금의 상황을 확인하고 싶어 하는 모양이다.
‘당연한 거겠지. 저들에게 있어 나는 갈프 신관이니까.’
“자네가 원치 않는다면 거절해도 좋네.”
“아닙니다. 사신을 만나 보겠습니다.”
* * *
몇 시간 후.
회의가 파한 뒤.
나는 레바논의 사신이 기다리고 있는 접객실로 이동했다.
끼이익-
내가 접객실 안으로 들어서자.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흑남님. 저는 레바논의 성기사 올란도라고 합니다.”
건장한 체격의 남성이 내게 인사를 건네 왔다.
“예, 반갑습니다. 그보다 앉으시지요. 그리고… 너희는 나가 봐도 좋다.”
내가 접객실에 있던 흑마법사들을 물리자.
올란도가 나를 빤히 보며 묻는다.
“갈프 신관님, 상황은 좀 어떻습니까?”
“그게…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전 지금 굉장히 혼란스럽습니다.”
“혼란스럽다고 하심은…….”
나는 침통한 표정을 지으며 말문을 이었다.
“얼마 전, 대신관과 성녀님께서 함께 사라져 버리셨습니다.”
“…예?”
“믿기 어렵다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 말에 한 치의 거짓도 없다는 걸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하나 나의 간곡한 발언에도 불구하고.
어째 올란도의 표정은 썩 좋지 않아 보였다.
‘씁… 나름대로 꽤 괜찮은 거짓말이라고 생각했는데. 안 먹힌 건가?’
내가 올란도의 반응을 살피던 그때.
올란도가 잔뜩 심각한 얼굴로 나를 보며 말한다.
“정말 믿기 싫었지만… 신탁이 정말 사실이었던 모양입니다.”
“신탁… 말입니까?”
“예… 그게…….”
침울한 표정으로 잠시간 말을 잇지 못하던 올란도가 힘겹게 입을 뗀다.
“얼마 전, 레바논에 하나의 신탁이 내려왔었습니다.”
“어떤 신탁이 내려왔기에…….”
“성녀님… 성녀가 레바논을 저버리고 배교를 했다는 신탁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