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카데미의 노예가 살아남는 법-124화 (124/200)
  • ◈ 124화

    내가 피식 웃으며 손을 까딱거리자.

    지면에 박혀 있던 창들 중 일부가 스스로 움직여 바알에게 쏘아져 나갔다.

    “으어어어어어어!”

    그에 바알이 고성을 지르며 두 주먹을 들고 힘껏 지면을 내려찍자.

    휘이이이이잉-

    놈의 몸 주변으로 모든 것을 삼킬 것만 같은 거대한 소용돌이가 일기 시작했다.

    ‘거참… 창에 소멸의 힘이 담겨 있다는 걸 눈치챈 건가.’

    그 어떤 커다란 성이라도 집어삼킬 것만 같은 소용돌이를 보며.

    나는 천천히 입꼬리를 올렸다.

    ‘쓸데없는 짓을 하고 있네.’

    어떠한 힘을 사용한다고 해도 결국 소멸의 힘 앞에선 모든 것이 무의미하건만.

    ‘그럼 깨닫게 해 줘야지.’

    나는 바닥에 꽂혀 있던 창 두 개를 빼 든 뒤.

    각각 소용돌이의 좌측과 우측 방면으로 힘껏 내던졌다.

    쇄애애액-

    그러자 내 손을 벗어난 창이 점점 커다래지더니.

    소용돌이 옆에 도달할 때쯤에는 어느새 소용돌이와 맞먹을 정도로 자라나 있었다.

    ‘끝이다.’

    짝-

    나는 바알이 그러했던 것처럼 소용돌이를 보며 손뼉을 마주쳤다.

    그러자.

    그그그그긍-

    거대한 관처럼 변한 창들이 점점 소용돌이를 향해 좁혀 들어갔다.

    “으아아아아아아아!”

    최후의 발악이라도 하고 있는 것일까.

    소용돌이 사이에서 바알의 괴성이 들려오는 것 같았으나.

    그것도 찰나의 순간에 불과했다.

    쿠우우웅-

    마침내 하나가 된 관이 완전히 소용돌이를 삼켜 버렸다.

    ‘이걸로 죽었겠지.’

    저건 그냥 관이 아니라 소멸의 힘이 담긴 관이다.

    하물며 아무리 바알이라고 할지라도 저 안에서는 결코 생존할 수 없을 터.

    ‘음… 설마 살아남은 건가?’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바알의 힘이 내게 들어오질 않자.

    나는 속으로 혀를 찼다.

    ‘분명 예전에 베논이 신이 신을 상대로 승리하면 힘을 앗아 올 수 있다고 했었는데…….’

    내가 바알의 생존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걸음을 옮기려던 그때.

    휘이이익, 툭-

    둥그스름한 무언가가 내 앞에 떨어졌다.

    ‘이건…….’

    눈만 사방으로 굴리는 바알의 머리통을 보며 난 실소를 금치 못했다.

    ‘재수도 더럽게 없는 놈이네.’

    하필 불시착을 한 곳이 내 앞이었으니 말이다.

    “어때? 이제 상황 파악이 좀 돼?”

    내 물음에 바알이 두 눈을 부릅뜬 채 나를 올려다본다.

    “네, 네놈이 어떻게 아가멤논의 힘을 사용하는 것이냐!”

    “궁금할 만도 해. 하지만 그건 말이야…….”

    스윽-

    나는 오른손에 두터운 창을 구현하여 쥐고는 빙긋 미소를 지었다.

    “지옥에 가서 물어봐.”

    “이런 망할 새……!”

    쇄애애애액-

    ‘…얼씨구?’

    바알의 머리통이 생선처럼 펄쩍 뛰어 나의 창을 피해 내자.

    그 모습이 하도 우스꽝스러워 난 피식 웃음을 흘렸다.

    “인간이 아가멤논의 힘을 계승해?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살려 달라고 애원해 보든가, 아니면 내 앞에 무릎을 꿇고 빌어 봐. 아, 꿇을 무릎이 없나?”

    내가 바알이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주며 놈에게 다가가던 그때.

    쩌저저저저적-

    갑자기 나와 바알의 주변으로 균열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건… 설마 다른 신들이 눈치챈 건가? 망할… 얼른 마무리를 짓고 떠나야겠어.’

    내가 균열을 보며 이맛살을 찌푸리던 중.

    바알이 굳은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며 말한다.

    “설마 다른 놈도 아닌 네놈이 아가멤논의 힘을 계승했을 줄은 몰랐다. 하지만 달리 생각하면… 네놈을 죽인다면 두 연놈의 계략을 원천 봉쇄 할 수 있다는 거겠지! 네놈은 나와 함께 간다!”

    얼굴만 남아 있던 바알이 포효하듯 소리 지르자.

    쩌저저저적-

    작았던 균열들은 순식간에 공간을 집어삼킬 정도로 커다래져.

    내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우리를 삼켜 버렸다.

    * * *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쩌저저적-

    ‘쯧… 설마 머리만 남았는데도 그런 힘을 발현할 줄은 몰랐는데. 다음부턴 머리만 남았다고 방심하지 말아야겠어. 근데 여긴 또 어디야?’

    난 열린 균열 사이를 비집고 나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쿠르릉-

    검은 하늘에선 계속 천둥소리가 울려왔으며.

    어디서 지진이라도 나고 있는 것인지 땅은 간헐적으로 크게 흔들렸다.

    ‘뭔가… 꼭 버려진 땅 같네.’

    생명체 하나, 하다못해 잡초 한 포기 안 보이는 이곳은 꼭 세상에 외면당하고 버려진 땅 같기도 했다.

    ‘씁… 근데 어디서 바알을 찾아야 되나.’

    바알이 이곳으로 도망친 것은 확실했으나.

    이 널따란 땅에서 놈을 찾아낸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음? 근데 저건 또 뭐야?’

    불모지 같은 대지를 걷던 중.

    전방의 웬 기이한 물체가 내 눈에 포착됐다.

    ‘저건…….’

    그곳에는 어지간한 건물보다 커다란 전사의 석상이 자리하고 있었는데.

    검을 쥔 채 왕좌에 앉아 있는 전사의 석상에서 난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희한하네. 이런 곳에 왜 이런 게 있는 거지? 뭐… 상관없나.’

    나는 석상에 대한 호기심을 접었다.

    ‘일단 여기가 어디인지부터 알아내야 돼. 그리고 무엇보다 바알을 찾아내서 죽이는 게 급선무야.’

    내가 이곳 어딘가에 있을 바알을 찾기 위해 발을 떼려던 찰나.

    쿠구구구궁-

    돌연히 앉아 있는 전사의 석상에서 기이한 울림이 일더니 돌들이 후드득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뭐야, 단순한 석상이 아니었어?’

    전사의 몸에서 돌들이 떨어져 나갈수록.

    전사의 몸도 점점 사람의 그것처럼 색이 들면서 생기가 맴돌았다.

    ‘근데 저건 몸 상태는 또 왜 저래?’

    전사의 몸 곳곳에는 검은 실선들이 자리하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꼭 금이 간 도자기 같았다.

    [음…….]

    마침내 완전히 탈피를 끝마친 전사가 목을 좌우로 틀더니 나를 내려다본다.

    [이 몸을 사용하는 건 참 오랜만이군.]

    ‘잠깐… 이 목소리는…….’

    어딘가 귀에 익은 목소리에 난 깜짝 놀라 눈앞의 거인을 올려다보며 생각했다.

    ‘설마 저놈이 바알이라고?’

    만약 저게 바알의 본체라고 한다면.

    이곳은 바알의 영역인 것일까?

    ‘음…….’

    하나 고민의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반드시 이 자리에서 네놈을 죽이고 말겠다.]

    어느새 하늘까지 닿을 정도로 거대한 검을 치켜 든 바알이 있는 힘껏 검을 휘두르자.

    엄청난 풍압이 나의 몸을 짓눌러 왔다.

    ‘이크…….’

    내가 황급히 몸을 피하기 무섭게.

    콰과과과광-

    바알의 일격이 지면을 크게 뒤흔들어 놨다.

    갈라진 땅에서 짙은 용암이 흘러나와 대지를 적셔 가던 중.

    [네놈의 죽음으로 세상을 본래의 자리로 되돌리겠다!]

    다시금 바알의 검이 나를 향해 빠른 속도로 쇄도해 왔다.

    ‘본체는 뭔가 더 엄청날 줄 알았더니, 생각보다 별건 없는 것 같은데.’

    스스슥-

    그에 난 이번에는 일격을 피하는 대신.

    소멸의 힘을 양 주먹에 싣고는 날아드는 검을 향해 힘껏 내질렀다.

    콰과과과과광-

    검과 주먹이 맞닿은 자리에선 천지를 뒤흔드는 굉음이 일었고.

    동강 난 거대한 검신이 하늘에서 팽그르르 회전하다가 지면에 힘없이 박혔다.

    [이 무슨…….]

    자신의 검이 두 동강 나 버린 탓일까.

    얼굴을 꿈틀거리던 바알이 나를 노려보며 일갈한다.

    [이치에 벗어난 괴물 새끼가……. 오늘 이곳이 내 무덤이 된다 할지라도 네놈만큼은! 반드시 죽이고 말겠다!]

    바알은 반밖에 남지 않은 검을 옆으로 던져 버리더니.

    쿠우우웅-

    갑자기 자리에서 힘껏 뛰어올라 검은 하늘 위로 사라져 버렸다.

    ‘…뭘 하려는 거지?’

    놈이 하늘 속으로 사라진 지 얼마나 지났을까.

    화아아아악-

    ‘으윽…….’

    갑자기 눈을 뜨는 것조차 어려울 정도로 주변의 모든 것들이 환하게 밝아졌고.

    무엇보다 엄청난 열기가 이 대지에 가득 차오르기 시작했다.

    ‘이게 무슨 일이……. 저건…….’

    나는 지면을 향해 낙하하고 있는 거대한 태양을 보곤 식겁했다.

    ‘저것도 바알의 능력인 건가?’

    역시 재앙의 신이라서 그런 건진 모르겠지만.

    장담하건대 저 태양이 흑탑 위로 떨어지기라도 한다면 아마 생존자는 전무하리라.

    ‘날 죽이려고 작정을 한 모양인 것 같은데… 이쪽도 크게크게 가 보지 뭐.’

    나는 천천히 심호흡을 하며 회색 마력을 끌어모은 뒤 지면에 손을 뻗었다.

    그러자 회색의 덩어리 같은 것이 튀어나와 위아래로 꿀렁거렸는데.

    드드드드드득-

    시간이 지날수록 회색 슬라임 같았던 것이 점점 하나의 모양새를 갖춰 갔다.

    덜그럭-

    이윽고 슬라임은 오간 데 없고 태산만 한 크기의 스켈레톤이 그 자리를 대신하자.

    나는 스켈레톤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흠… 스켈레톤은 좀 느낌이 없나? 백탑의 골렘들은 그래도 뭔가 느낌 있게 생겼던데. 외형은 고민을 좀 해 봐야겠어.’

    잡념을 접고는 거대한 스켈레톤을 향해 힘을 불어넣자.

    까가가가각-

    흑탑만 한 크기의 활을 잡고 있던 스켈레톤이 태양을 향해 활시위를 당기기 시작한다.

    이윽고 활시위가 팽팽해지자 나는 스켈레톤을 보며 힘껏 소리쳤다.

    [발사!]

    텅-

    마침내 활시위에서 떠난 화살은 하나의 유성이 되어 떨어지는 태양을 향해 쏘아져 갔다.

    곧 태양과 화살이 하늘에서 맞닿는 그 순간.

    키이이이이잉-

    눈을 뜨기 어려울 정도로 강렬한 빛이 대지를 뒤덮었다.

    ‘으음…….’

    빛이 어느 정도 사그라지자 나는 눈을 가리고 있던 손을 내렸다.

    ‘잘된 모양이네.’

    더 이상 하늘에 태양은 존재하지 않았다.

    [쿨럭… 쿨럭…….]

    대신 가슴에 커다란 구멍이 난 바알이 바닥에 누운 채 피를 토해 내고 있었다.

    파스슥-

    정말 죽음을 눈앞에 둔 것인지.

    발을 시작으로 놈의 몸은 서서히 소멸되어 갔다.

    [크킄… 크크크크크큭… 크하하하하하하하!]

    죽어 가는 놈이 한껏 광소를 터뜨리자.

    나는 놈을 내려다보며 나지막이 물었다.

    [뭐가 그렇게 웃겨?]

    [그야 그 연놈들이… 제 무덤을 파고야 말았는데… 웃기지 않나? 쿨럭…….]

    죽어 가면서까지 두 신을 견제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는 바알을 보며.

    난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아무래도 두 신을 향한 놈의 증오심은 내가 상상하는 것 이상이었던 모양이네.’

    [글쎄, 무덤이라……. 내가 두 신과 손을 잡을 수도 있단 생각은 안 해 봤어?]

    [그럴 리가 있나? 네가 아가멤논의… 힘을 갖고 있는 이상… 놈들은 결코 널 가만 놔두지… 않을 거다. 네 존재가 소멸하는… 그날까지 널 뒤쫓겠지.]

    바알의 말에 나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날 잡겠다고 세계도 멸망시키려는 놈들인데 당연히 그렇겠지.]

    [그럼 조만간… 놈들도 날 뒤쫓아… 온다고 보면 되나?]

    [언제가 될진 모르겠지만 그렇겠지.]

    내 대답에 바알의 입가에 흡족한 미소가 걸린다.

    [그거면… 됐다…….]

    스슥-

    나는 바알의 목숨을 끊기 위해 검을 만들어 내곤 조용히 물었다.

    [마지막으로 할 말은 없고?]

    [마지막이라……. 쿨럭… 내가 죽거든 내 신도들을… 네 신도들로 받아들여 줬으면 좋겠군.]

    의외의 대답에 나는 조금 놀라 놈을 내려다봤다.

    [의외네. 네게 신도들은 그저 사용하기 좋은 소모품 정도가 아니었어?]

    [그렇긴 하다만… 크크큭… 신의 마지막 자비 정도로 치지.]

    딱히 놈의 신도들을 챙길 생각은 없었으나.

    나는 한 가지 호기심이 들어 놈에게 질문을 던졌다.

    [근데 네 신도들을 내가 어떻게 알고 신도로 받아들이라는 건데?]

    [그건… 곧 알게 될 거다. 이만… 죽여라.]

    그 말을 끝으로 바알이 눈을 감자.

    나는 천천히 검을 쳐들며 입을 뗐다.

    [쉬어라.]

    서걱-

    바알의 머리가 힘없이 바닥을 구르다가 먼지처럼 사그라지자.

    ‘진짜 죽었네.’

    나는 비로소 바알이 죽었다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었다.

    그 와중.

    스스슥-

    바알이 있었던 자리에서 둥그스름한 구체가 하나 떠올랐다.

    ‘저게 베논이 말했던 신의 정수인가?’

    내가 슬며시 구체에 손을 뻗자.

    구체는 내 손에 빨려 들어오듯 들어와 삽시간에 내 몸에 흡수되어 버렸다.

    그러자.

    [베논!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아버지와 같은 아가멤논 님을 죽이자고?! 내 목에 칼이 들어온다고 해도 내가 네놈을 따를 일은 없을 거다!]

    ‘이건…….’

    [레바논! 베논! 내 모든 걸 불태우는 한이 있더라도 네놈들을 가만두지 않을 거다! 반드시! 반드시!]

    완전하진 않았지만 바알의 기억들 일부가 나의 머릿속으로 흘러 들어온다.

    ‘베논과 바알의 갈등 이면에는 아가멤논의 죽음이 있었던 건가. 뭐, 바알의 과거가 어떻건 간에 그건 내 알 바가 아니지만.’

    그보다 나는 흘러 들어온 바알의 기억들 중, 한 가지에 유독 관심이 갔다.

    ‘이게 정말 되려나?’

    나는 천천히 두 손을 들곤 허공을 잡아 뜯듯이 좌우로 힘껏 당겼다.

    쩌저저저적-

    ‘호오… 이게 진짜로 되네?’

    내가 열린 균열을 보며 흡족한 미소를 짓던 그때.

    쿠르르르르릉-

    검은 하늘이 무너지고 대지가 크게 뒤틀리기 시작했다.

    ‘바알의 죽음 때문인지 이 장소도 소멸되려는 것 같은데, 얼른 빠져나가야겠어.’

    나는 열어 놓은 균열 사이로 힘껏 몸을 던졌다.

    * * *

    몇 분 뒤.

    쩌저저저적-

    무너져 가는 바알의 영역 도처에 균열들이 생기기 시작하더니.

    균열 사이로 레바논과 베논 그리고 그들의 군세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건…….]

    [아무래도 우리가 늦은 모양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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