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카데미의 노예가 살아남는 법-123화 (123/200)

123.

“그간 잘 지냈나?”

바알이 허물없는 친구처럼 인사를 건네 오자.

나는 어이가 없어 실소를 흘리며 입을 뗐다.

“이곳이 어딘지는 알고 기어 들어온 거겠지?”

“물론. 하물며 내가 못 갈 곳은 세상 그 어디에도 없다.”

바알은 로브에 묻은 고기 조각들을 툭툭 털어 내곤.

사뭇 진지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인사치레는 이쯤 하지. 그보다 그리 경계할 필요 없다. 오늘은 그저 약간의 충고를 하러 온 것뿐이니까 말이지.”

“…충고?”

“상황이 바뀌고 있다.”

달그락-

바알은 제집처럼 찻잔을 가져와 차를 따르며 말을 이어 갔다.

“두 신은 완전히 미쳤다. 알고 있나?”

“고작 그딴 이야기를 하려고 여기까지 온 건 아닐 거고. 본론을 말해.”

“아직 놈들이 무슨 짓거리를 하려는지 모르는 모양이군. 물론 놈들이 말해 줬을 리 없겠지만. 놈들은 세계를 멸망시키려 하고 있다.”

태연히 티스푼으로 차를 젓던 바알이 지그시 나를 응시했다.

“만약 놈들을 그대로 놔둔다면 3년 뒤에는 이 세계에 멸망이 도래할 거다.”

‘뭘 이야기하나 했더니……. 다 알고 있는 걸 갖고 뭘 저렇게 대단한 걸 이야기하듯 말하고 있어?’

그러나 난 짐짓 놀란 척을 하며 놈에게 되물었다.

“…그럼 3년 뒤에 두 신이 재앙의 문을 열려고 한다는 건가?”

“그건 아니다. 간단히 이야기해 주지. 그러니까…….”

바알이 이상하리만치 친절하게 설명을 해 주자.

나는 의심의 눈길을 던지면서도 놈의 말을 귀 기울여 들었다.

“한마디로 네 말을 정리하면 레바논과 베논의 위에 그보다 힘이 있는 신이 있었는데, 두 신이 작당하고 그 신의 뒤통수를 후려쳤다는 거잖아? 근데 그게 뭐 어쨌다고?”

“놈들에게 있어 아가멤논은 결코 존재해서는 안 될 존재다. 하지만 얼마 전, 소멸했다고 생각했던 아가멤논의 힘이 어디선가 태동했었다.”

차를 한 모금 삼킨 바알이 계속 말한다.

“만약 그 태동이 아가멤논의 부활이었다면, 혹은 아가멤논의 유지를 이었던 누군가가 각성한 거라면 두 신의 입장이 어떨 것 같나?”

“그야… 당연히 불안하겠죠. 어쨌건 두 신이 배반을 한 거잖아요?”

옆에 있던 제이나가 넌지시 한마디를 던지자.

바알은 정답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거린다.

“맞다. 놈들은 어떻게든 아가멤논의 잔재를 찾아내길 원한다. 설사 세계를 뿌리째 뽑아 갈아엎는다고 해도 말이야.”

‘두 신이 갑자기 3년을 언급한 게 그럼… 정말 나 때문에 그런 거였어?’

내 가설이 바알의 입을 통해 완전히 맞아떨어지자.

나는 속으로 혀를 내두르며 입을 열었다.

“좋아. 그건 그렇다고 치자고. 그 사안을 내게 알려 주는 이유가 뭔데? 너랑 무슨 상관이 있다고?”

“무슨 상관이냐고? 당연히 나와도 상관이 있다. 재앙과 멸망, 그것은 엄연한 나의 영역이고 놈들은 내 영역을 침범한 거나 다름이 없다. 그러니…….”

잠시 뜸을 들이던 바알이 씨익 웃음을 흘린다.

“응당 놈들에게 보답을 해 줘야지. 그렇잖나?”

“…보답을 해 준다고?”

보답이라니?

도대체 놈은 무슨 보답을 해 주겠다는 걸까?

달각-

유유히 찻잔을 손에서 놓은 바알이 내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렇다. 바로 내가 놈들보다 한발 먼저 세계를 멸망시키는 거지. 꽤나 적절한 보답이라고 생각하는데, 의견이 있으면 이야기를 듣지. 괜찮은 의견이라면 반영하겠다.”

“…….”

‘이 새끼도 어지간히 돈 놈이네.’

두 신이 세계를 멸망시키는 게 싫어서 자신이 직접 멸망을 시키겠다니.

“놈들이 신도들에게 3년이라는 유예기간을 준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을 거다. 하지만 3년이 채 지나기도 전에 세계가 멸망해 버리면 어떨까. 분명 놈들도 기뻐 날뛰겠지.”

‘근데 잠깐… 3년이 지나기 전에 먼저 세계를 멸망시키겠다는 건…….’

불현듯 한 가지 가정이 머릿속을 스쳐가자.

나는 싸늘한 시선으로 놈을 응시했다.

“네놈… 설마…….”

“이해한 모양이군.”

씨익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바알.

“난 널 데리고 재앙의 문으로 향할 것이다. 어차피 막을 수 없는 멸망이라면 차라리 내가 멸망시키는 게 낫겠지.”

“미친 건 레바논만인 줄 알았더니… 당신도 돌았군요! 신들은 다 미친놈들밖에 없나요?!”

우리의 대화를 옆에서 듣고 있던 제이나가 화들짝 놀라 소리치자.

바알의 표정이 사뭇 딱딱해져 갔다.

“그년과 날 같은 취급 하는 건 굉장히 거북하군. 성녀여, 나는 그저 나의 본분을 다하려고 하는 것뿐이다.”

“본분인 건 맞지만…….”

잠깐 주저하던 제이나가 다시 입을 뗐다.

“차라리 두 신을 없애면 되는 것 아닌가요?”

“…….”

그녀의 물음이 너무도 예상 밖의 것이었던 걸까.

시종일관 여유를 보이던 바알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두 신을… 없애라고?”

“네. 세상을 멸망시킬 자신감으로 차라리 두 신과 싸우시라고요. 왜요? 그건 자신이 없으신가요?”

“…푸하하하하하!”

제이나의 맹랑한 발언에 한참을 웃던 바알이 겨우 웃음을 멈추곤.

정색하듯 그녀를 바라봤다.

“그래. 네 말이 맞다. 두 신과 싸우기에 내 힘은 터무니없이 부족하고, 그렇기에 이곳을 찾아온 것이다.”

“…….”

바알의 빠른 인정에 제이나가 입을 꾹 다물어 버리자.

바알의 시선이 다시 내게로 쏠렸다.

“넌 나와 함께 재앙의 문으로 간다. 가서 문을 열고 두 신의 계략을 저지하는 거다.”

“후우…….”

놈의 단호한 발언에 나는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집중해서 들은 나만 등신이 됐네.”

“…뭐?”

“하도 진지해서 뭔가 했더니 결국 시종일관 개소리만 한 거잖아?”

내가 귀를 후비적거리자.

바알의 안색이 점점 싸늘하게 굳어 간다.

“그럼 두 신이 세계를 멸망시켜도 좋다는 건가?”

“또 개소리를 하네. 차라리 두 신을 죽이고 멸망을 막겠다고 했으면 이쪽도 흔들렸을 텐데, 뭐? 먼저 멸망을 시켜?”

난 픽 웃으며 한마디를 던졌다.

“거기다가 한술 더 떠서 내 목숨을 바치고 재앙의 문을 열겠다는데 너 같으면 하겠냐?”

“음… 아무래도 말로 설득하긴 불가능할 것 같군.”

바알이 곁눈질로 슬쩍 제이나를 살피더니.

갑자기 팔을 그대로 바닥에 박아 넣는다.

‘망할 새끼가… 대화만 하러 와? 내가 이럴 줄 알았다.’

“탐닉의 망토.”

혹시라도 바알의 태도가 돌변할 걸 대비하여 언제든 마법을 사용할 수 있도록 준비해 뒀기에.

난 곧장 방어 마법을 펼쳤다.

“성녀까지 상대하긴 거북하니 장소를 옮기지.”

스스스슥-

그러나 내 예상과 달리 바닥에 박힌 놈의 팔 주변으로 검은 그림자가 흘러나와.

순식간에 놈과 나를 덮어 버렸다.

* * *

이윽고 내 주변을 덮고 있던 그림자가 사라지자.

집무실의 광경은 오간 데 없고 울창한 숲속이 나의 눈동자에 자리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곳은…….’

전에 한창 이종족들과 매칭을 한다고 이곳을 누비고 다닌 덕인지.

나는 금세 이곳이 어딘지 눈치챌 수 있었다.

‘검은 숲으로 이동한 건가. 차라리 잘됐네.’

적어도 바알과 싸우다가 흑카데미를 비롯한 시설물들이 작살날 일은 없을 터.

나는 지팡이를 다잡곤 멀찍이 서 있는 바알을 응시했다.

“결국 이렇게 될 걸 뭘 그렇게 주절주절 말이 많았던 건지 모르겠네.”

“결국 넌 재앙의 문으로 가게 될 거다. 저항해도 의미가 없건만……. 사지가 없어도 열쇠로써의 가치가 손상되진 않겠지.”

의미심장한 바알의 발언에 난 피식 실소를 흘렸다.

“네 뜻대로 될까?”

“결과가 이리도 선명하건만. 어리석은 놈.”

바알은 날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말하며 손을 들어 하늘로 뻗는다.

스스스슥-

신들의 이목을 차단하는 검은 장막이 삽시간에 우리의 주변을 덮어 갔지만.

‘지금만큼은 저 힘에 감사해야겠어.’

난 오히려 검은 장막이 완전히 우리를 가려 주기만을 기다렸다.

탁-

이윽고 검은 장막이 완전히 하늘을 덮었다.

더 이상의 대화도 염탐도 무의미해진 이 공간 속에서.

‘선빵 필승.’

나는 마법사라면 반드시 지켜야 할 덕목을 지키고자 한 손을 들어 놈을 향해 뻗었다.

“망자의 탄식.”

나의 영창이 끝나자.

콰자자자자자작-

지면에서 망자들의 뒤틀린 손들이 솟아올라 바알의 전신을 옭아맸다.

‘찰나라도 붙잡아 둘 수 있다면 그걸로 족하다.’

뒤이어 나는 검은빛이 맴도는 지팡이를 위에서 아래로 힘껏 휘두르며 소리쳤다.

“파멸의 일격!”

그러자 지팡이 끝에서 천둥소리가 울림과 동시에.

쩌저저저저저적-

검은 번개가 갈래처럼 분산되어 바알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린다.

“흐읍!”

그러자 놈은 어째선지 용암처럼 붉어진 두 팔을 머리 위로 쳐들어 교차했고.

치이이이이익-

검은 번개가 놈의 팔을 찢어 놓을 듯 강타할 때마다.

매캐한 연기가 피어올라 바알의 주위를 휘감아 갔다.

‘설마 이걸로 죽었다든가 그런 건 아니겠지?’

내가 게슴츠레한 눈으로 연기를 주시하던 가운데.

연기 사이로 걸어 나온 바알이 목을 좌우로 꺾으며 씨익 웃는다.

“역시 인간은 참 재미있어. 그 짧은 시간 동안 성장할 수 있는 건 단언컨대 인간밖에 없겠지. 하지만…….”

바알이 느긋하게 두 팔을 들며 말을 이어 간다.

“우리 사이에는 결코 넘을 수 없는 벽이 있다. 네가 아무리 발버둥 친다고 해도 영원히 넘을 수 없는 벽 말이다.”

짝-

놈의 두 손이 완벽하게 포개어지자 난 의아함을 감출 수 없었다.

‘…뭘 하려는 거지?’

설마 내 공격에 감탄하여 찬사를 보내려는 것은 아닐 것인데.

그럼 저 행동도 공격의 일부란 걸까?

쿠르르릉-

하나 내 발밑이 크게 뒤흔들리더니 갈라지는 지면 사이로 시뻘건 무언가가 요동치는 게 보이자.

‘이런 미친…….’

나는 생각을 접곤 황급히 옆으로 몸을 날렸다.

콰과과과광-

내가 옆으로 몸을 날리기 무섭게 갈라진 땅에서 용암이 분출되어.

순식간에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씁…….’

지면에 발 디딜 곳이 없어진 탓에 난 잽싸게 커다란 바위 위로 뛰어 올라갔다.

치이이익-

나는 물에 떠밀리듯 용암에 밀려가다가 사라져 가는 나무들을 보며 생각했다.

‘고작 박수 한번 쳤다고 이게 말이 돼?’

이게 재앙의 신이라 불리는 바알의 실체였던 걸까.

“이제 이해가 됐겠지? 너는 결코 날 이길 수 없다.”

용암 위를 산책하듯 걷던 바알의 조롱에 난 비웃음으로 화답했다.

“그러는 너는 두 신을 못 이기니까 이런 같잖은 개수작밖에 못 부리는 거잖아?”

“…뭐라고?”

“그냥 솔직하게 말해, 두 신한테 벽을 느꼈다고. 그래서 이렇게 뒤에서 놈들의 행보를 방해하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말이야.”

내가 날아드는 바위 파편들을 지팡이로 쳐 내며 도발하자.

바알의 표정이 점점 일그러져 갔다.

“…아직 입을 놀릴 여유가 있나 보군.”

스스슥-

갑자기 놈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아니, 사라졌다고 생각했었다.

‘이런…….’

놈은 어느새 내 앞에 와 있었고.

오른팔을 허리 부근까지 뺀 상태로 내게 한마디를 던졌다.

“날 그런 식으로 생각하고 있었다니, 참 유감이다.”

쇄애애애액-

그 말을 끝으로 놈의 오른팔이 대기를 찢으며 나의 복부로 쇄도해 오자.

“좆 까!”

나도 흑마력이 넘실거리는 팔을 힘껏 휘둘렀다.

주먹과 주먹이 허공에서 정면충돌을 하자.

키이이이잉-

일순간 주변의 공기 흐름이 팽창했다가 폭발하듯 터져 나갔고.

“크윽…….”

그 반동으로 내 몸은 뒤로 한참을 날아갔다.

‘이런 씁…….’

내 몸이 점차 용암과 가까워지는 가운데.

“탐닉의 망토!”

난 황급히 발밑에 방어 마법을 시전했고, 검은 막이 용암에 타들어 가던 찰나의 시간 동안 가까스로 옆에 있던 바위에 오를 수 있었다.

‘망할… 환경이 불리하니까 마법을 쓰는 게 쉽지가 않네.’

도처에 용암이 끓는 환경에서 전투를 치를 수 있는 마법사가 몇이나 되겠는가?

‘역시 평범한 마법으로는 신을 이길 수 없는 건가. 아무래도 인간과 신 그 사이에 존재하는 벽이 지대하다는 건 인정해야겠어.’

인정한다.

흑마법으로, 사용하지 않은 성마법으로도 바알을 제압하긴 어려울 것이다.

‘살짝 부담되긴 하지만… 어차피 놈이 장막을 펼쳤으니 사용해도 괜찮겠지.’

나는 느긋하게 용암 위를 걸으며 내게 다가오는 바알을 보고 천천히 그 마력을 끌어 올리기 시작했다.

* * *

“음…….”

그저 바위에 멍하니 서서 흐르는 용암을 바라보는 흑남을 보며 바알은 생각했다.

‘이제야 포기한 건가.’

그래. 인간치곤 제법이었지만 결국 그뿐이다.

‘열쇠는 열쇠답게 있어야지. 레바논… 베논… 내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네놈들이 잘되는 꼴은 볼 수 없다. 절대로…….’

다시금 속으로 굳은 결심을 한 바알.

이미 승기를 다잡았다고 생각한 것인지 그의 입가에 미소가 만연했다.

“아까의 그 기세는 다 어디로 갔지? 하지만 이해한다. 말하지 않아도 네 좌절감, 굴욕감이 이곳에까지 느껴지니까 말이지. 네가 열쇠로써의 소명을 다하고 죽게 되더라도 슬퍼할 필요는 없다. 세상의 그 누구보다 네 이름이 널리 알려질 것이…….”

바알이 제 가슴을 가리키며 계속 말을 이어 가던 그때.

사사사사사사사삭-

돌연 흑남의 몸 주변으로 수백 개의 창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는데.

‘으음… 숨겨 둔 수가 있었나. 그런데 저건… 어딘가 그리우면서도 불쾌하군.’

희한하게도 회색빛의 창들에서 묘한 기운이 느껴졌다.

‘하나 달라질 건 없다.’

아무리 놈이 발악을 해도 결국 놈은 열쇠로써의 소명을 다하게 될 터였으니까.

“답답하군. 그만큼의 차이를 느꼈으면 포기를 할 법도 하건만…….”

바알이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내쉬던 중.

흑남의 몸 주변에 생성됐던 창들이 하늘로 솟구치더니.

파바바바바박-

창들은 저마다 한줄기의 빗물이 되어 지면에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허… 이깟 공격으로 날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기가 막히… 잠깐…….’

뭔가 이상하다.

분명 이 일대는 그의 임시 영역이 되었다.

‘그런데 어째서…….’

창이 박힌 곳마다 주변 모든 것이, 하물며 그의 용암마저도 소멸하고 있는 것 아닌가?

‘저 힘은… 설마……!’

퍼억-

그 와중 하늘에서 쏟아져 내리던 창날 하나가 그의 팔에 틀어박히자.

바알은 흑남의 입가에 걸린 선명한 미소를 볼 수 있었다.

“네, 네놈은 대체…….”

“등신 새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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