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
‘분위기가 완전히 넘어갔는데 어떻고 자시고 할 게 있나?’
이미 베논의 강림으로 인해 전쟁을 준비하자는 기류가 만연한 가운데.
내가 반대하는 의사를 보이면 어떻게 되겠는가?
‘베논의 뜻을 거역하는 거냐고 거품을 물며 달려들 게 뻔하지,’
그리된다면 이제껏 내가 쌓은 탑들은 무너져 내릴 것이며.
나에 대한 이미지도 순식간에 바닥을 칠 터.
‘베논이 무슨 이유로 그런 짓거리를 한 건지 확실히 알기 전까진 몸을 사리는 게 좋겠어. 일단 여기선 한발 물러나자.’
“베논 님의 뜻이 그러하시다면 응당 따르는 것이 도리 아니겠습니까?”
“으허허허, 자네라면 당연히 그리 말할 줄 알았네.”
만족스러운 미소를 보이던 나가란이 좌중을 보며 소리친다.
“오늘부터 우리 흑탑은 베논 님의 명령을 따라 3년간 전쟁 준비에 박차를 가한다! 레논!”
“예, 탑주님.”
“공방에 인원을 더 보내 주겠네. 지금보다 더 많은 언데드들을 생산해 내게.”
레논이 고개를 조아리자.
나가란이 보라카 쪽으로 시선을 돌린다.
“보라카!”
“말씀하시지요.”
“자네도 마찬가지일세. 지금보다 더 독한 저주를 개발하게. 제물이나 촉매제, 필요한 게 있다면 뭐든 지원하지.”
보라카 또한 정중히 고개를 숙이자.
탑주의 시선이 새로운 파멸학파의 부탑주에게로 향한다.
“이반.”
“예.”
“자네는 지금부터 별동대를 꾸리고 훈련시켜 언제든 왕족과 귀족들을 암살할 수 있도록 만들어 놓게. 베논께서는 3년을 언급하셨지만 그 전에 어느 정도 사전 작업을 해 놔야 할 것 아닌가?”
“탑주님의 명령을 따르겠습니다.”
그 외에도 나가란 탑주는 위대한 흑마법사들에게도 임무를 부여하곤.
지그시 나를 바라본다.
“랄프.”
“예, 탑주님.”
‘나한테는 뭘 시키려고 할까. 그냥 아무것도 안 시키는 게 최고긴 한데.’
“자네는 3년간 크라켄 왕국을 우리 흑탑의 완전한 우방으로 만들어 놓게. 우리가 원조를 요청하거든 언제든 달려올 수 있을 정도가 됐으면 좋겠군. 가능하겠나?”
나가란 탑주가 눈을 번뜩이자.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아니… 이쪽에서 부르는 대로 원조를 보내오면 그게 동맹이냐? 속국이지.’
하나 난 속내를 삼키곤 덤덤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으허허허! 자네들에게 거는 기대가 크네!”
* * *
몇 시간 뒤.
회의를 끝마친 뒤 곧바로 난 집무실로 돌아와 곰곰이 생각했다.
‘크라켄 왕국과 지금보다 더 관계개선을 해라? 뭐… 중요한 일이지. 중요하긴 해.’
그러나 지금은 나가란의 명령보다 더 중요한 안건이 있었다.
‘도대체 왜 베논이 갑자기 전쟁을 준비하라고 한 걸까? 대체 왜?’
이제껏 잠잠하던 놈이 난데없이 이런 일을 벌인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을 터.
‘다만 그게 뭔지 아직 내가 모른다는 게 문제지. 음… 아무리 생각해도 레바논과의 사이가 틀어져서 그런 명령을 내렸을 것 같진 않은데.’
만약 레바논과의 관계에 균열이 생긴 것이었다면.
놈은 대륙 정벌이 아니라 레바논 왕국을 멸망시키라고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놈은 대륙 정벌을 원했지. 뭔가 이유가 있는 걸까? 하… 모르겠다.’
내가 쓰다 만 양피지를 칼로 조각내며 한숨을 내쉬던 중에.
똑똑-
누군가가 나의 방문을 두드려 왔다.
“흑남님, 안에 계십니까?”
“무슨 일이야?”
“레바논에서 새로운 지령을 보내왔는데 아무래도 흑남께서 읽어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새 지령이라……. 아마도 대신관과 성녀의 행방이 묘연해져서 내게 지령을 보낸 거겠지?’
나는 문을 열곤 첩자가 건넨 양피지를 풀고 내용을 살폈다.
‘역시…….’
아직 저들은 대신관의 죽음과 제이나의 배반을 몰랐던 것인지.
지령서 안에는 그들의 안부를 묻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만약 이 사실을 알게 되면 대신전에서 난리가 나겠어.’
모르긴 해도 대신관과 성녀를 검은 대지로 보내자는 의견을 낸 놈은 목이 잘려 나갈 것이다.
‘어떤 멍청한 놈이 그딴 의견을 제안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완전한 오판… 잠깐…….’
난 양피지를 보며 피식 웃다가.
중단에 적혀 있는 글귀를 보곤 몸을 움찔거렸다.
‘이건 뭐야. 내가 제대로 읽은 게 맞는 건가?’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재차 글귀를 읽었다.
[…두 사람이 도착하는 대로 즉시 레바논에 서신을 보내게. 그리고 이 안건은 굉장히 중요한 일이네. 얼마 전, 레바논께서 대신전에 친히 강림하셔서 이런 말씀을 남기셨지. 앞으로 3년간은 다른 왕국의 국력을 최대한 약화시키라고 말이야. 그러니 자네도 은밀하게 흑마법사들을 동원하여 다른 왕국의 고위 인사들을 암살해 줬으면 좋겠군. 행운을 비네.]
‘…이것 봐라?’
뭔가 냄새가 난다.
그것도 아주 썩은 듯한 구린내가 말이다.
‘친히 강림을 해? 3년간?’
분명 베논도 몸소 하늘에 나타나 3년간 전쟁을 준비하라는 말을 하지 않았던가?
한데 레바논도 비슷한 말을 남겼다고 하니 절로 의심이 피어올랐다.
‘도대체 두 연놈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한 놈은 전쟁을 준비하라고 하고.
한 년은 다른 왕국을 견제하라고 했다.
‘이래선 꼭… 레바논이 베논을 도와주는 것 같잖아? 도대체 이유가 뭐지?’
혹시 레바논이 베논에게 약점이라도 잡힌 걸까?
‘그건 아닐 거야. 약점을 잡히느니 차라리 싸움을 했을 년이니까. 갑자기 두 신이 손을 잡아야만 했던 이유, 분명 이유가 있으니까 놈들이 손을 잡은 걸 텐데 그게 뭔지 도무지 감이 잡히질…….’
나는 장난감처럼 다루던 단도를 내려놓고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설마 이 모든 게 나 때문에 일어난 일들은 아니겠지?’
만약 내가 아가멤논의 힘을 얻은 것을 놈들이 어떻게 눈치를 채고.
위협이 되리라 판단하여 그러한 결정을 내린 것이라면…….
‘씁… 그건 좀 아닌가? 하긴, 내가 아가멤논의 힘을 얻은 걸 알았다면 진작 날 죽이려 들었겠지. 하지만 그러지 않았잖… 잠깐, 이 미친놈들이… 설마?’
3년간 다른 왕국들을 약화시킨다.
그리고 3년간 흑마법사들의 전력을 강화시킨다.
스스슥-
그 외에도 내 머릿속에 흐트러져 있던 정보의 조각들이 퍼즐처럼 맞물려 갔고.
마침내 나는 하나의 가정을 도출해 낼 수 있었다.
‘설마 대륙을 송두리째 멸망시켜서 아가멤논의 힘을 갖고 있는 자를 찾겠다는 건가?’
솔직히 내가 생각해도 허무맹랑한 가설 같았으나.
모든 정보들을 조합하고 나니 이것 말곤 딱히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만약 내 가설이 맞다고 한다면… 이거 완전 미친 새끼들 아냐? 나 하나 잡자고 대륙을 작살내 놓겠다고?’
어떻게 신이라는 놈들이 그런 발상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아니면 오히려 신이기에 아무렇지 않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는 걸까.
‘빌어먹을……. 그렇다면 무슨 수를 써서든 놈들의 계획을 망쳐야만 해.’
만약 놈들의 의도대로 대륙이 멸망했는데도 불구하고 놈들이 목적을 이루지 못한다면.
그다음은 어디로 화살이 쏘아질지 너무도 자명했다.
‘그나마 살아남았을 생존자들을 모조리 제거하려고 할 게 뻔해.’
멸망을 결정한 놈들이 하물며 인간의 멸종을 신경 쓸 일은 없을 터.
‘하지만… 무슨 수로 이 계획을 저지하지?’
아직 인간과 신 사이에 서 있는 내가 무슨 수로 놈들의 계획을 망친단 말인가?
‘흑마법사들을 설득해 봐? 후… 그것도 좀 어렵겠지. 아니면 검은 대지에 있는 베논의 신도들을 내가 포교해서 흡수하는 건 어떨까?’
베논의 신도들을 빼앗아 와 놈의 힘을 약화시킨다면.
레바논과 베논 사이의 묘한 균형을 무너뜨릴 수도 있을 것이다.
‘씁… 역시 금방 걸리겠지? 가만…….’
나는 미간을 찌푸린 채 생각을 이어 갔다.
‘안 걸릴 방법이 하나 있긴 하잖아?’
내가 떠올린 한 가지 방법.
그것은 바로 바알이었다.
‘바알의 힘이 정확히 어떤 형식의 힘인 건진 모르겠지만, 놈의 힘은 신들의 이목을 속이는 데 특화돼 있어. 만약 그걸 내 걸로 만들 수만 있다면…….’
바알이 그랬던 것처럼 나를 비롯하여 나의 신도들도 두 신의 이목을 끌지 않고 활동할 수 있을 게 분명했다.
‘그래도 바알 정도는 내가 이길 만도 하지 않을까?’
예전이야 어땠을지 몰라도 지금의 나라면.
인간의 몸에 기생하여 살아가는 신 정도는 처리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곧바로 놈을 찾기에는 어려울 테니까, 음… 좋아. 결정했다. 일단 갖고 있는 자본으로 오리하르콘을 최대한 구매하고, 바알의 위치가 파악되는 대로 놈을 찾아가 끝장을 보면 되겠지.’
* * *
3일 뒤.
레논의 집.
“…….”
제법 널따란 방 안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서로 눈치를 보며 찻잔을 홀짝거린다.
“음…….”
그러던 중.
“자네들도 부탑주님의 부름을 받고 온 건가?”
이마에 두건을 두르고 있던 남자가 어색하게 질문을 던진다.
“그래.”
“혹시 부르신 이유도 알고 있나?”
남자의 물음에 맞은편에 앉아 있던 여인이 찻잔을 놓으며 고개를 젓는다.
“그건 나도 모르지. 하지만 이 구성원들만 봐도 대충 짐작이 가지 않아?”
“으음…….”
여인의 물음에 남자는 낮게 침음했다.
“도저, 란나, 하이츠… 뭐, 적어도 서로 얼굴 정도는 알고 있었잖아?”
“불쾌하군. 도굴꾼 나부랭이 따위가 거론할 정도로 내 이름이 가벼웠던가?”
“…뭐라고?!”
발끈한 여인이 테이블을 치며 일어나자.
그녀를 도발한 남자가 피식 실소를 흘린다.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닌데 성질 좀 죽이지.”
“이거 웃긴 새끼네? 왕국에 몰래 무기나 팔아먹는 놈들이 얼마나 대단하다고? 너흰 그냥 왕국에서 나오는 부스러기나 주워 먹는 쥐새끼들이잖아?”
“…다시 지껄여 봐라.”
남자가 눈을 번뜩이며 검을 꺼내어 들자.
여인 또한 양손에 단검을 잡으며 고개를 까딱였다.
“못 할 줄 알고?”
“어허! 거기까지들 하게!”
분위기가 점점 파국으로 치닫자.
보다 못한 노인이 그들 사이에 끼어들어 중재를 시작한다.
“도굴꾼이면 어떻고 전쟁 상인이면 또 어떤가? 그리고 자네들… 여기가 어딘지 잊었나?”
“아…….”
그들이 흠칫하여 무기를 거두어 들이자.
노인은 그제야 표정을 펴며 말한다.
“잠시 감정들은 내려놓고 생각들을 해 보게. 부탑주님께서 우리를 불러 모으신 이유가 뭔지, 뭘 원하시는지.”
“뭐… 평범한 걸 원하셨으면 우리를 불렀겠습니까? 당연히 정상적인 방법으론 손에 넣기 힘든 물건을 구하고자 우리를…….”
덜컥-
갑자기 문이 열리자.
방에 있던 사람들은 누구 할 것 없이 입을 다물고 문 쪽을 응시했다.
“인원은 이게 끝인가?”
약관 정도 될 법한 청년이 묘한 미소를 머금은 채 그들을 바라보자.
“허업… 그렇습니다!”
청년의 얼굴을 본 노인은 기겁하여 얼른 허리를 숙여 보였다.
“이봐, 영감. 아직 피도 안 마른 것 같은 놈한테 왜 그렇게 얼어붙었어?”
그 모습을 본 여인이 옆에서 질문을 하자.
얼굴이 잔뜩 일그러진 노인이 속삭이듯 답한다.
“이 얼빠진 년……. 일단 예의를 지켜라. 어서!”
“아씨… 도대체 뭔…….”
노인 외에도 방 안의 모든 사람이 허리를 숙이고 있자.
구시렁거리던 여인도 슬며시 예의를 갖추며 노인에게 묻는다.
“부탑주도 아니고, 저놈이 도대체 누군데 그래?”
“흑남님이시다.”
“…흑남?”
* * *
나는 허리를 바짝 숙인 사람들을 보며 생각했다.
‘생각보다 시간이 걸릴 줄 알았는데 금방 모아 줬네.’
이 근방에서 저명한 도굴꾼들과 상인을 모아 달라고 부탁한 지 며칠이나 됐다고.
이만한 사람들을 모았을 줄이야.
‘레논에겐 따로 감사의 인사를 해야겠어.’
“격식을 차리는 건 그쯤이면 됐다. 일어나라.”
“…….”
나는 쭈뼛쭈뼛 허리를 세우는 무리를 보며 계속 말했다.
“부탑주가 아니라 내가 와서 당황한 것 같은데, 내가 너희를 불러 모아 달라고 했다.”
“…흑남께서요?”
“그래. 오늘 내가 너희를 이 자리에 불러 모은 이유는 한 가지 제안을 하기 위해서다.”
나의 말에 모든 이들의 얼굴에 물음표가 걸린다.
“제안이라 하심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난 오리하르콘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