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
“…뭐라고요?”
그녀가 어이없다는 듯 나를 바라보자.
나는 머쓱하여 말을 이어 갔다.
“당황스럽겠지. 나도 그런데 너라고 오죽할까. 하지만 정황상 그것 말곤 답이 없잖아?”
“그건 그렇지만… 확실히 다른 의미로 당황스럽긴 하네요.”
나를 지그시 응시하는 제이나.
“당신은 인간이 아니라 신이었던 건가요?”
“아니, 그건 아니야. 아직은 사람이지.”
“아직이라……. 그럼 지금은 인간과 신, 그 사이의 어딘가에 서 있다는 말이 되겠군요.”
그녀의 예리한 추리에 난 부정하지 않았다.
“당신이 그렇단 건… 베논과 레바논도 인간 출신이었다는 말에 설득력이 생기네요.”
“그 둘도 본래는 인간이었어?”
“문헌상으로는 그랬죠. 물론 확인할 길은 없었지만요.”
‘호오… 그럼 모든 신들이 인간에서부터 시작해서 그 경지까지 올랐던 건가?’
내가 홀로 고개를 끄덕거리던 중.
제이나가 나를 보며 조심스럽게 묻는다.
“그보다 이제 어쩌죠?”
“뭐가?”
“제가 정말 당신의 신도가 된 거라면, 당신을 위해 교리라도 설파하고 다녀야 하나 싶어서요.”
레바논이 들었다면 입에 거품을 물 법한 제이나의 발언에.
“푸하하하하하!”
나는 그만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왜 웃어요?”
“그냥 뭐랄까… 레바논의 성녀였던 네가 지금은 내 신도가 된 이 상황이 좀 웃겨서.”
“뭐, 자주 있는 상황은 아니죠.”
생각보다 그녀가 덤덤한 반응을 보이자.
나는 호기심을 감추지 않았다.
“그래서 넌 어떻게 하고 싶은데?”
“무슨 의미죠?”
그녀의 물음에 난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이어 갔다.
“애당초 이 짓거릴 한 이유가 레바논에게서, 성녀라는 무거운 자리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였잖아. 그런데 이젠 레바논이 아니라 날 섬겨야 할 판국인데 괜찮냐는 거지.”
“솔직히 원하던 상황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전보단 낫지 않을까요?”
“레바논보단 내가 낫다, 그런 말인가?”
나의 솔직한 질문에 제이나가 피식 미소를 짓는다.
“어쩌면요? 적어도 당신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가 있잖아요?”
“음…….”
“그리고 무엇보다 당신이 절 부릴 일도 없을 거고요.”
‘호오… 그러니까 일을 시킬 일이 없으니까 내가 더 좋은 것 같다는 거네?’
제이나의 당찬 발언에 나는 게슴츠레한 눈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글쎄? 만약에 내가 포교 활동을 하라고 명령을 내리면 어떡하려고?”
“…해야 되나요?”
“됐어. 신도들이 있어 봐야 귀찮기만 할 텐데 왜 그런 짓을 시키겠어?”
까딱거리는 손가락들 사이로 휘둥그레진 그녀의 눈동자가 내 눈에 들어왔다.
“…네? 그런 짓이라니요? 설마 신도를 늘리는 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모르시는 건가요?”
“그게 중요한 일이라고? 그냥 신들이 할 게 없으니까 구경이나 하려고 만든 게 신도 아니야?”
아득히 높은 곳에서 인간들의 활동을 TV 보듯 쳐다보다가.
인터넷 방송인에게 돈을 쏴 주는 것처럼 신도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게 신들의 유희가 아니고 뭐란 말인가?
“아니요. 신에게 있어 신도들은 굉장히 중요한 존재들이에요. 없어서는 안 될 존재이기도 하고요.”
“그렇게 말하는 걸 보니 뭔가 이유가 있긴 한가 보네.”
“레바논이 저한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어요. 신이 갖고 있는 고유의 힘도 중요하지만, 신도들의 숫자야말로 신의 근간이라고 했죠.”
‘신도들의 숫자가… 신의 근간이라고?’
그 말인즉슨 신도가 많으면 많을수록 해당 신의 힘이 증폭된다는 걸까?
“그럼 신도가 많으면 좋겠네?”
“물론이죠! 많으면 많을수록 신의 권능 또한 강해진다고 들었어요. 다만 그 반대의 경우에는… 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소멸한다고 들었어요.”
“…소멸?”
‘그럼… 만약 내가 신이 됐는데 날 믿는 신도들 하나 없으면 난 곧바로 소멸하게 되는 건가?’
만약 인간과 신, 그 어딘가에 서 있는 지금의 시간이 사실 예비 신에게 신도들을 끌어모으라고 준 일종의 유예기간이라면?
‘이런 미친…….’
전지전능한 줄만 알았던 신이라는 자리에 그런 변수가 도사리고 있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표정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모르고 계셨던 모양이네요. 하지만 걱정 말아요. 신도만 있으면 문제될 건 없으니까요.”
“그렇겠지. 다만…….”
‘어디서 신도를 구해야 하는 거지? 그리고 포교는 또 어떻게 하고?’
“누군가에게 포교한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죠.”
“그래, 나도 알아. 그래서 고민 중이잖아.”
‘어떻게 해야 신도들을 늘릴 수 있지? 진짜로 제이나에게 포교 활동이라도 부탁해 봐야 되나? 아니면 뭔가 괜찮은 방법이…….’
내가 제이나를 보며 깊은 고민에 잠겨 가던 그때.
쿠르릉-
‘가만…….’
한 가지 방법이 벼락처럼 나의 머릿속을 스쳐 갔다.
‘포교 활동이라는 게 꼭 무교인 사람들을 상대로 할 필요는 없는 거잖아?’
당장 흑카데미와 흑탑에 있는 사람들만 포교한다고 해도.
그 숫자가 몇인가?!
‘거기다가 베논의 신도들을 빼앗아 오는 데 성공하면 베논의 힘도 약해질 테고. 좋은데?’
하지만 무슨 수로 저들의 마음을 빼앗아 올 수 있을까.
‘더군다나 흑남이라는 타이틀을 갖고 있는 내가 다른 신을 믿으라고 했다간 난리가 나겠지. 베논이 가만히 있을지도 의문이고.’
내가 직접적으로 움직이긴 어렵다.
하지만 신도들은 확보해야 한다.
상반된 상황이 내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내가 움직이지 않고 확실하게 신도들을 포섭할 방법이…….’
“제가 도와드릴까요?”
제이나의 물음에 난 그녀를 멍하니 바라봤다.
“…뭐?”
“아직 힘을 잘 통제하지 못하셔서 그런지 다 들려요.”
제이나가 배시시 웃으며 제 머리를 가리켜 보이자.
“아… 들었어?”
나는 어색한 미소로 나의 실수를 무마하고자 했다.
“마음은 고맙긴 한데… 감당할 수 있겠어?”
“원하던 결과는 아니었지만 어쨌건 도움을 받은 값은 지불해야죠.”
“포교를 할 방법은 있고?”
나의 물음에 제이나가 당차게 고개를 끄덕인다.
“당연하죠. 의외로 간단해요.”
“좋은 방법이 있나 보네.”
“믿을 때까지 찾아가면 돼요.”
“…뭐?”
제이나의 말인즉슨.
날이면 날마다 똑같은 집을 찾아가 설교를 하겠다는 말이잖은가?
“그건 안 돼.”
“왜요? 이제껏 레바논에선 그렇게 해 왔는걸요?”
“여긴 레바논이 아니잖아. 그리고 장담하는데, 베논의 신도들은 물론이고 베논도 고깝게 보지 않을걸?”
이곳은 베논의 영역이다.
하물며 그런 영역에서 눈에 띄는 짓을 해서 좋을 일이 없을 터.
“그럼 어떡할까요?”
“글쎄……. 당장 신도들을 늘리는 게 급한 건 아니니까 일단 추이를 지켜보자.”
* * *
다음 날, 점심.
“랄프 님! 아무래도 날이 풀려서 그런지 매점의 재고들이 썩는 경우가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습니다.”
“그래? 이번에 백탑에서 얼어붙은 선반이라는 마도구를 개발했다고 하던데, 그걸 들여와. 그럼 썩는 일도 줄어들 거다.”
간만에 나는 매점과 흑카지노를 비롯하여.
“랄프 님! 다음 달에는 원생들의 부모님들께서 흑립 유치원에 방문할 예정인데, 참관하시겠습니까?”
“그러지. 일정이 자세히 잡히는 대로 다시 나한테 보고해.”
흑립 유치원의 운영 등, 내가 설립했던 시설들의 운영 상황을 점검하고 있었다.
‘안팎으로 일이 끊이질 않는구나. 이걸 마무리하고 나면 결혼도… 아니지. 이제 굳이 결혼에 목맬 필요가 없어졌잖아?’
제이나는 신성력을 잃었고 나의 신도가 되었으니.
이제 굳이 성녀와의 결혼을 피하기 위해 누군가와 결혼을 할 필요도 없었다.
‘이게 맞지. 솔직히 이종족들이랑 결혼은 좀… 쉽지가 않았어.’
내가 전에 이종족들과 했던 매칭을 떠올리며 고개를 젓던 그때.
콰자자자작-
갑자기 마른하늘에서 벼락 소리가 귀를 찢을 듯이 울려왔다.
‘뭐지? 비가 오려고 그러나? 비가 올 날씨는 아닌 것 같은데…….’
나는 잠시 하늘을 바라보다가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넘어가려 했다.
스스스슥-
하지만 벼락 소리가 울린 하늘에 점점 검은 점들이 생겨나기 시작하자.
‘…저건 뭐야?’
나는 생각을 바꿔 먹을 수밖에 없었다.
“어어어? 저건 뭐죠?!”
“기이하군…….”
비단 의문을 가진 게 나뿐만이 아니었던 건지.
야외에 나와 있던 학생과 원생들은 물론이고 교수들까지 고개를 쳐들고 하늘을 응시했다.
사사삭-
이윽고 검은 점들의 숫자가 점점 불어나더니 곧 하나의 형상을 만들어 냈는데.
‘저건… 베논이잖아?’
긴 장발을 한 남자의 형상은 누가 봐도 베논임이 분명했다.
[나의 종들은 똑똑히 들어라.]
하늘에서 울리는 중후한 음성이 지면을 흔들자.
“베, 베논 님이시다! 베논께서 강림하셨어!”
“오오… 세상에…….”
사람들은 누구 할 것 없이 형상이 있는 곳을 향해 엎드려 경배를 올리기 시작했다.
[이제껏 너희는 핍박과 고난 속에서 오랜 시간을 견뎌 냈다. 하지만… 더 이상은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저놈이 무슨 말을 하려고…….’
[마침내 때가 도래했다. 너희가 어떠한 존재들이었는지, 너희의 이름이 대륙에 어떠한 의미를 갖고 있었는지 다시금 놈들에게 깨달음을 줄 때가 되었다.]
모든 이들이 멍하니 베논의 형상만을 바라보고 있는 가운데.
베논의 형상에서 모든 이들을 흥분케 하는 한마디가 흘러나온다.
[3년. 너희에게 3년이라는 시간을 주겠다. 그 안에 모든 준비를 끝마쳐라. 대륙은 오만했던 대가를 치러야만 할 것이다.]
파스슥-
그 말을 끝으로 베논의 형상은 홀연히 사라지고 하늘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쾌청해졌다.
그러나 그와 반대로 내 심경은 복잡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니까… 3년의 기간을 줄 테니 그사이에 전력을 정비하고 대륙을 침공할 준비를 하라는 뜻이잖아? 왜지?’
레바논과 베논 사이에 내가 모르는 균열이라도 있었던 걸까?
‘아니면 뭔가 다른 이유가 있는 건가?’
베논이 어째서 저런 행동을 한 건지 지금의 나로선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근데 어째서 이번에는 신탁이 아니라 저렇게 대놓고 모습을 보인 거지? 설마 내가 전에 이단 취급을 해서 그런 건가?’
그건 아무래도 좋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도대체 베논이 왜 저런 행동을 취했느냐는 것이다.
‘흑마법사들을 움직여 대륙을 침공하게 하는 게 뭔가 득이 되니까 그런 건가?’
하나 전쟁이 베논에게 어떠한 득이 되는 것이란 말인가?
나는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다가 황급히 흑탑으로 발길을 돌렸다.
‘아무래도 레논 부탑주를 만나 봐야겠어.’
* * *
이윽고 내가 흑탑으로 들어서자.
“3년이라고 하셨지?”
“그래, 3년! 그 안에 준비를 하고 그 뒤에는 우리가 그토록 고대했던 대륙 정벌을 시작하는 거지!”
잔뜩 흥분한 흑마법사들의 대화 소리가 나의 귀를 자극해 왔다.
‘분위기는 좋네. 뭐… 당연한 일인가.’
대륙 정벌.
그 단어는 흑마법사에게 있어 이루지 못할 꿈이자 숙명 같은 것이었으니까.
나는 그런 그들을 뒤로하고 곧바로 레논의 집무실로 이동했다.
“부탑주님, 계십니까?”
내가 레논의 집무실 문을 두드리자.
“오, 랄프 님! 마침 잘 오셨습니다. 얼른 회장으로 가시지요. 탑주님께서 간부들 전원을 소집하셨습니다.”
어딘가 급해 보이는 레논이 나를 보며 말한다.
“…그러지요.”
나는 레논과 간단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회장으로 이동했다.
“다들 빨리 모였군.”
나와 레논을 본 나가란 탑주가 그 어느 때보다 밝은 미소를 보이며.
좌중을 향해 소리친다.
“다들 방금 전 있었던 일은 잘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하네.”
“베논 님께서 몸소 강림하시여 저희에게 나아갈 길을 알려 주셨지요.”
한 흑마법사의 대답에 나가란 탑주가 흐뭇한 미소를 짓는다.
“3년 안에 모든 준비를 끝마쳐라, 베논께선 그리 말씀하셨지. 자네들의 생각은 어떤가?”
“더 말할 게 있습니까? 마신께서 말씀하신 대로 3년간 준비를 하고 그 뒤에는… 대륙을 손에 넣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베논이 몸소 강림했다는 이유 때문인지.
간부들은 그 어느 때보다 들떠 있는 눈치였다.
“랄프, 레논, 자네들은 어떻게 생각하나?”
“…저도 동의합니다.”
레논이 별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이번에는 나가란 탑주가 나를 응시하며 묻는다.
“랄프, 자네의 생각은 어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