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카데미의 노예가 살아남는 법-119화 (119/200)

119.

‘오오… 내 생각보다 훨씬 더 빨리 됐네.’

신성력 착즙기 개발.

솔직히 내가 너무 무리한 요구를 한 건 아닐까라는 생각도 했었지만.

보라카 부탑주는 내 예상을 넘어 오히려 나름의 결과물을 만들어 낸 모양이었다.

“좋아. 그럼 바로 가 보지.”

나는 곧장 걸음을 옮겨 흑탑 안에 위치한 저주학파의 연구실로 이동했다.

“오, 흑남. 마침 잘 왔네.”

어째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보라카 부탑주가 내게 힘없는 미소를 보인다.

“연구가 완성됐다고 들었습니다.”

“수많은 날들을 지새운 끝에 겨우 실마리를 잡을 수 있었지.”

“참 고생 많으셨습니다. 그런데 물건은 어디에 있는 겁니까?”

“바로 자네의 눈앞에 있지 않나?”

‘…저거라고?’

보라카 부탑주의 손끝에는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너무도 다른 물건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건 관이잖습니까?”

“큼… 외관은 크게 신경 쓰지 말게. 어차피 중요한 건 물건의 용도가 아니겠나?”

보라카 부탑주가 머쓱해하며 말을 이어 간다.

“여하튼 이걸 사용한다면 자네가 원하는 대로 상대를 죽이지 않고도 신성력을 강탈할 수 있을 걸세.”

“그렇군요. 부탑주님의 노고에 다시금 감사를 표합니다.”

“이런 말을 하긴 낯간지럽지만 내가 생각해도 엄청 고생을 하긴 했지. 저 능욕의 관을 만든답시고 오만 가지 마도구들과 저주들 그리고 고대의 문헌들까지 참조했으니 말이네.”

보라카는 그간의 고생을 떠올리기라도 하는 건지 눈썹을 파르르 떤다.

‘음… 확실히 개발은 성공한 모양인데… 문제는 성능이란 말이지.’

만약에 저 능욕의 관이 제이나의 신성력을 다 착즙하지 못한다면.

그녀는 영원토록 레바논의 인형으로서 살아가야 할 터.

‘당연히 그 부분도 실험을 해 봤겠지?’

나는 보라카 부탑주를 보며 입을 뗐다.

“성능은 어떻습니까? 살아남은 신관들이나 성기사들이 있다면 그들의 상태를 좀 확인하고 싶은데요.”

“…성능 말인가? 성능이라… 으음…….”

어째 부탑주가 시원하게 답하지 못하자.

나는 뭔가 싸한 느낌에 얼른 물었다.

“혹시 뭔가 문제가 있는 겁니까?”

“이런 말을 하기 조금 뭐하지만, 성능이 어떤지는 나도 모르네.”

“…예?”

“그게… 다른 마도구들과 접목을 하던 중에 실수로 저주가 걸린 마도구의 저주가 관으로 옮겨 갔네.”

내 표정을 본 보라카 부탑주가 얼른 손사래를 친다.

“다행히 목숨에 지장이 가는 저주는 아니니 그리 험악한 표정을 지을 필요는 없다고 보네만…….”

“무슨 저주입니까?”

내 물음에 보라카가 시선을 회피하며 나지막이 말한다.

“한번 능욕의 관을 사용하고 나면 더 이상 사용하긴 어려울 걸세.”

“…….”

‘그러니까… 1회용이라는 것 아냐?’

도대체 무슨 저주가 걸려 있었기에.

멀쩡하던 물건이 1회용이 돼 버렸단 말인가?

“커흠… 그 부분은 정말 미안하게 됐네. 하지만 어쨌건 자네가 원하는 대로 만들어 내긴 했잖은가?”

내가 홱 고개를 돌리자.

멋쩍게 웃던 보라카 부탑주가 몸을 움찔거린다.

‘후우… 그래. 이미 벌어진 일을 어쩌겠냐. 아쉬운 대로 제이나를 위한 1회용 도구가 완성됐다고 생각해야지.’

그리고 실수가 있었다곤 해도.

아무튼 보라카 부탑주가 능욕의 관을 완성한 것도 사실이었다.

‘좋게 생각하자.’

“그렇죠. 어려운 일을 잘 완성해 주셨습니다.”

“흐허허, 그렇지?! 그럼 자네가 원하는 대로 개발을 끝마쳤으니 이제 나도 노고의 대가를 받아야 하지 않겠나?”

“멀쩡하던 물건을 스크롤처럼 만들어 놓으시고 대가를 달라는 겁니까?”

“크흠…….”

‘그래도 어쨌건 만들긴 했으니 알려는 줘야겠지.’

“그래도 약속은 약속이니 알려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오오, 정말인가?!”

나는 눈을 반짝이는 부탑주를 보며 계속 말했다.

“제가 그 물을 발견한 곳은 크라켄 왕국이었습니다.”

“크라켄 왕국?!”

“흑점 관리를 위해 알던성에 잠시 들렀던 적이 있죠. 그때 우연찮게 한 동굴을 발견했었는데, 부탑주님께 드렸던 물이 바로 그곳에서 떠온 물입니다.”

애당초 처음부터 사실을 말할 생각이 없었기에.

나는 미리 준비해 뒀던 거짓말을 늘어놓으며 생각했다.

‘뭐… 그래도 동굴이 있었던 건 사실이니까.’

“오오! 알던성이라면 이곳에서도 그리 멀지 않은 곳이군! 동굴은 정확히 알던성의 어디에 있는 건가?!”

“이걸 받으시죠.”

나는 보라카 부탑주에게 양피지 하나를 내밀며 계속 말했다.

“동굴의 위치를 찍어 놓은 지도입니다. 찾는 데 도움이 되실 겁니다.”

“오오오! 고맙네! 정말 고맙네!”

득달같이 달려들어 양피지를 낚아채는 보라카 부탑주의 모습에 난 괜히 양심이 찔려.

약간의 변명을 늘어놨다.

“하지만 워낙 물이 조금 있었던 탓에 지금도 그곳에 그 물이 존재한다고 장담할 순 없습니다.”

“흐허허허! 걱정 말게! 설령 그곳이 비었다고 해도 자네를 원망할 일은 없을 거네.”

“다행이군요. 아 참, 그리고 능욕의 관의 사용법을 좀 알려 주시겠습니까?”

* * *

몇 시간 뒤.

쿵-

하인들이 내 집무실에 관을 내려놓고 사라지자.

“그건 뭔가요?”

마침 내 방을 청소 중이던 제이나가 관에 관심을 보여 왔다.

“네 신성력을 없애 줄 물건.”

“아…….”

제이나가 먼지떨이를 내려놓고는 복잡한 눈빛으로 관을 내려다본다.

“…드디어 이런 날이 오네요.”

“정말 괜찮겠어? 미리 말해 두겠는데, 사용하고 나면 다시는 전으로 못 돌아가. 넌 성녀가 아니라 그냥 평범한 여인이 된다.”

“그렇겠죠. 하지만… 그래서 좋은 것 아니겠어요?”

그녀가 배시시 웃으며 말하자.

나는 최후의 통첩을 날렸다.

“정말 평범해져도 괜찮겠어?”

“전 이제껏 저와는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고 있었어요. 이제야 원래의 옷을 입을 때가 온 것뿐이에요.”

‘음…….’

확고한 그녀의 대답에 나도 더 이상 질문을 던지지 않았다.

“좋아. 그럼 준비되면 말해.”

“당장 시작해도 좋아요. 뭘 하면 되죠?”

“일단 저 안에 들어가.”

제이나가 순순히 관 속으로 들어가자.

“불편한 건 없지?”

“네. 괜찮아요!”

“그럼 시작한다.”

웅웅웅-

나는 관을 단단히 봉하고 보라카가 알려 준 대로 나의 마력을 관에 주입하기 시작했다.

‘정말 마력만 주입하면 작동하긴 하는 걸까?’

내가 반신반의하며 관을 바라보던 중.

마침내 능욕의 관이 작동하기 시작한 건지 미세한 진동 소리가 관에서 울려왔다.

웅웅웅-

능욕의 관에서 제이나의 것이었던 신성력이 흘러나오자.

‘후우… 다행이다. 제대로 작동하는 모양이네.’

나는 그것들을 내 몸에 받아들이면서도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뭔가… 이상한데?’

이 기묘한 의식이 진행되면 될수록.

뭔가 이상한 느낌이 자꾸 나의 가슴을 자극해 왔다.

‘이게 도대체 무슨 느낌이야?’

마치 나와 관 속에 있는 제이나가 보이지 않는 실로 연결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는데.

이게 참으로 묘하고 또 신기했다.

‘전에 신성력 착즙기를 사용할 때는 이런 적이 없었는데… 설마 부작용 같은 건 아니겠지?’

나는 인체에 무해하다던 보라카의 말을 떠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래, 문제가 생길 거였으면 진작 생겼겠지. 마음 다잡고 계속 지켜보자.’

기묘한 의식을 진행한 지 몇 시간이 지났을 무렵.

웅웅-

관에서 흘러나오던 신성력이 점점 줄어들다가 완전히 나오지 않자.

‘후… 잘 끝난 건가.’

나는 제이나의 상태를 파악하기 위해 관에 손을 뻗었다.

쩌저저저적-

하지만 갑자기 내 손가락이 닿은 부분을 시작으로 관 곳곳에 금이 갔고.

바스러진 관을 보며 난 생각했다.

‘확실히 끝난 모양이네.’

이 기묘한 의식도, 관의 수명도 말이다.

툭툭-

바스러진 관짝을 걷어 내자 제이나의 몸이 조금씩 드러났다.

‘잠든 건가? 일단 생명에 지장이 없는 것 같아 다행이긴 한… 음?’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나는 잠들어 있는 제이나를 내려다보며 의아함을 느꼈다.

‘뭐야. 머리색은 왜 바뀐 거지?’

그녀의 금발머리가 어째선지 지금은 회색처럼 어딘가 우중충한 색이 돼 버렸다.

‘신성력을 다 빨려서 그런 건가? 뭐… 그래도 몸에 문제가 생기는 것에 비하면 싸게 먹힌 거지.’

“이봐, 일어나 봐. 제이나. 제이나!”

그녀가 좀처럼 일어나질 않아 난 그녀의 뺨을 몇 차례 툭툭 쳤다.

“으음…….”

그러자 천천히 눈을 뜬 제이나가 멍하니 나를 보다가 묻는다.

“…다 끝난 건가요?”

“그래. 다 끝났다. 그보다 몸은 좀 어떤 것 같아?”

천천히 몸을 일으킨 제이나가 이리저리 제 몸을 살피다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뭔가… 희한하네요.”

“무슨 문제가 생긴 건 아니지? 어디가 안 좋다거나 아니면…….”

“아니요. 그건 아니에요. 신성력은 확실히 사라졌어요. 근데… 대신 뭔가 희한한 게 제 몸 안에 자리하고 있네요. 원래 이런 건가요?”

‘희한한 거라고?’

본래의 계획대로라면 그녀의 몸 안에는 그 어떠한 힘도 없어야 함이 맞건만, 희한한 것이라니?

“잠시 몸을 좀 살펴봐도 될까?”

“그러세요.”

‘음… 겉보기엔 크게 이상이 없는 것 같은데. 역시 안을 들여다봐야 되나.’

나는 그녀의 등에 손을 올리고.

나의 힘을 그녀의 몸 안에 밀어 넣어 그녀의 몸 상태를 살펴 나갔다.

그러던 중.

‘…음? 이게… 진짜라고?’

나는 그녀의 몸 안에서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녀의 몸에서 신성력은 사라졌다.

그러나 미미한 힘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는데.

그 마력은 분명 나의 마력과 비슷한 것이었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이 상황에 어안이 벙벙한 가운데.

스스슥-

아까 전에 느꼈던, 제이나와 내기 실로 연결된 것 같은 느낌이 더 뚜렷하게 느껴졌다.

‘아니, 도대체 이 느낌은 또 뭔데?’

의문에 의문이 꼬리를 물고 찾아와 나를 혼란스럽게 만들던 그때.

갑자기 제이나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날 바라본다.

“지금 저한테 뭐라고 말하신 건가요?”

“무슨 소리야? 아무 말도 안 했는데.”

“방금 이 느낌은 도대체 뭐냐고 말하지 않았나요?”

그녀의 질문에 이번에는 내가 놀라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너… 설마 내 생각을 읽기라도 했어?”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당신이 저한테 그렇게 말했잖아요?”

“…….”

나는 설마 하는 마음에 다시 그녀를 보며 생각했다.

‘내가 정말 그렇게 말했다고?’

“…….”

그러자 제이나가 경악하여 나를 보며 입을 뻐끔거린다.

“당신… 당신… 도대체 정체가 뭔가요?”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어떻게 당신이… 당신이 저한테 신탁을 내릴 수 있는 거죠?”

“뭐?”

그녀의 말에 나는 헛웃음을 흘렸다.

“아직 잠에서 덜 깬 모양이네. 내가 어떻게 너한테 신탁을 내려?”

“하지만… 방금 그건 분명한 신탁이었다고요! 제가 그걸 구분 못 할 줄 알아요?! 그리고 제가 어떻게 당신의 생각을 알았겠어요?”

꽤나 설득력이 있다.

‘그럼 정말 내가 제이나한테 신탁을 내렸다고?’

하나 난 도무지 지금의 상황이 납득이 가질 않았다.

신탁은 신의 전유물이고, 무엇보다 난 신이 아니었다.

그런데 신탁이라니?

‘하지만 제이나가 내 생각을 알게 된 것도 사실이야. 희한하네……. 낮에는 이런 일이 없었는데. 설마…….’

나는 게슴츠레한 눈으로 부서진 관을 바라봤다.

설마 관에 주입한 나의 마력이 그녀에게 알 수 없는 영향을 끼치기라도 한 걸까?

‘어이가 없네.’

정말 그녀의 말대로 내가 그녀에게 신탁을 내린 거라면.

그녀는 내 신도가 되기라도 한 거란 말인가?

‘하… 뭐, 좋아. 신탁? 그렇다고 쳐. 그보다… 도대체 왜 제이나의 위치나 상황이 이토록 생생하게 느껴지는 거지?’

이것도 그놈의 신탁과 무언가 연관이 있는 걸까?

“제이나, 잠깐만 문밖으로 나가 볼래?”

“알았어요.”

끼이익-

제이나가 문밖으로 나가자.

“허…….”

나는 제이나가 있을 방향을 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아니… 이게 말이 되나?’

분명 제이나는 문밖으로 나갔건만.

도대체 그녀의 위치가 생생하게 느껴지는 건 뭐란 말인가?!

‘만약 신과 신도의 관계가 정말 이런 거라면… 아냐, 이건 말이 안 돼.’

신이 신도의 상황을 이토록 상세히 꿰뚫어 볼 수 있다면.

레바논은 진작 제이나의 상황을 알았어야 함이 맞고.

베논도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알고 있어야만 했다.

‘바알의 힘이 개입돼서 그런 건가?’

“제이나! 아직 들어오지 말고 바알의 신도가 쓰던 패를 발동해 봐.”

“알겠어요.”

그녀의 대답이 들리고 몇 분이 지났을 무렵.

“발동한 것 맞아?”

“네!”

“…….”

‘아니… 발동했는데도 느껴진다고?’

여전히 제이나의 상황이 생생히 느껴지자 나는 혀를 내둘렀다.

‘이러면 도대체 나랑 두 신 놈들이랑 무슨 차이가 있는 거지? 왜 나는 되고 놈들은 안 된 거지?’

내가 깊은 고민에 잠겨 있던 중.

다시 제이나가 방 안으로 들어온다.

“뭔가 좀 알아낸 게 있나요?”

“알아낸 거라……. 있긴 하지.”

‘근데 이걸 말해야 되나?’

나는 이것을 말해야 될지 말아야 될지 한참을 고민하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일단 이 의식 자체는 성공적으로 끝났어. 그건 네가 더 잘 알겠지.”

“맞아요. 신성력은 확실히 사라졌고 더 이상 레바논과 연결된 것 같은 느낌도 안 들어요.”

“그래. 거기까진 문제가 없어. 다만…….”

나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한마디를 던졌다.

“아무래도 네가 내 신도가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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