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
“길 막지 말고 좀 비켜 주실래요?”
제이나가 여인에게 얼른 나오라는 듯 손을 휙휙 흔들어 봤지만.
여인은 아랑곳 않고 날 보며 묘한 미소를 짓는다.
“난 내 마음에 든 건 절대 놓치지 않아. 그게 뭐가 됐건 간에 말이야.”
“호오… 그래? 나도 그런데.”
내가 어깨를 으쓱이자.
그녀는 언짢은 표정을 지으며 내게 손을 내밀었다.
“네가 지불한 금액 그 이상을 지불할 테니까 오리하르콘을 넘겨.”
‘…돈이 없어서 경매에서 밀려 놓고 그 이상을 지불한다고?’
내가 어이가 없어 픽 실소를 흘리던 중.
“이봐요! 경매에서 졌으면 인정하고 물러날 것이지 뭐가 그렇게 미련이 많아요? 그리고 그 이상의 금액이요? 당신 돈 없잖아요?”
제이나가 여인에게 삿대질을 하며 호통을 친다.
“오리하르콘의 낙찰가가 80만 골드였지? 100만 골드를 줄게. 그만하면 너희한테도 충분히 이득이잖아?”
“헛소리 좀 그만해요! 애당초 당신한테 그만한 돈이 있을 리가 없잖아요?”
“맞아. 그러니까 이렇게 해. 먼저 70만 골드를 너희에게 주고 며칠 내로 잔금도 지불할게. 그럼 되잖아?”
어딘가 자신감이 느껴지는 여인의 모습에 제이나가 내게 속삭인다.
“100만 골드를 아무렇지 않게 부르는 걸 봐선 보통 여자가 아닌 모양이에요. 아까 경매장에서 분명… 엘레노아라고 했었죠. 엘레노아… 엘레노아… 아!”
여인의 이름을 곱씹던 제이나가 눈을 부릅뜬다.
“뭐 생각난 거라도 있어?”
“레드 우드 상단의 상단주 이름도 엘레노아거든요.”
“…레드 우드 상단?”
“간단히 설명을 하자면 대륙의 상단들 중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꼽을 만큼 엄청난 재력을 갖고 있는 상단이에요.”
‘그냥 경매에서 패배하여 오기를 부리는 줄만 알았더니. 레드 우드 상단이라…….’
눈앞의 여인이 조금 새롭게 보이긴 했으나.
신선함보단 여러 의문들이 나의 머릿속에 들어찼다.
“보통 높은 자리에는 나이가 지긋한 양반들이 앉는 게 정상일 텐데.”
눈앞의 여인은 아무리 봐도 나와 나이 차이가 크게 나지 않아 보였다.
“보통은 그렇죠. 하지만 당신이 그런 말을 하면 안 되는 것 아닌가요?”
“뭐, 그렇긴 하지. 근데 저 여자가 정말 상단주가 맞긴 해? 그 흔한 용병 한 명 안 보이는데?”
저 여인이 정말 그 정도 자리에 있는 자라면.
당연히 엄중한 호위가 그녀의 뒤를 따랐어야 맞는 것 아닌가?
“확실히 이상하긴 하지만 그렇지 않고서야 백탑에서 그 정도 대우를 해 줄 리는 없을 것 같은데요.”
“아마 둘 중에 하나겠지. 자존심이 몸을 지배했거나 혼자 다녀도 괜찮을 정도의 실력자거나.”
‘어느 쪽이 됐건 상관은 없지만.’
나는 제이나와의 밀담을 끝마치곤 여인을 보며 말했다.
“그쪽이 얼마를 부르건 간에 난 팔 생각이 없어.”
“120만 골드.”
엘레노아가 어떠냐는 듯 눈썹을 까딱이자.
나는 속으로 웃음을 흘렸다.
‘누가 이 상황을 보면 무슨 생각을 할까.’
작은 왕국이라면 몇 년도 쓸 운영비를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하는 우리를 보고 미친년놈 보듯 봤을 것이다.
“120만 골드가 아니라 1,200만 골드를 불러도 팔 생각 없으니까 다른 오리하르콘을 알아봐.”
“…….”
그녀가 계속 금액을 높였음에도 내가 연달아 거절을 놓은 탓인지.
엘레노아의 표정이 점차 굳어 갔다.
‘이 정도로 말했는데도 포기할 생각이 없다면…….’
나는 만일의 상황을 대비하여 슬며시 팔을 들어 올렸다.
“그럼 어떻게 하면 팔 건데?”
“그쪽이 돈이 아니라 왕국을 준다고 해도 팔 생각 없다니까?”
“…….”
나의 단호한 대답에 엘레노아가 멍한 표정으로 날 바라본다.
‘뭘 저렇게 쳐다봐? 거절당한 게 그렇게도 충격이었나?’
하나 그녀의 심경이 어떻건 그건 내 알 바가 아니었다.
“이쪽의 입장은 확실하게 알았을 테니 이제 그쯤하고 돌아가.”
나는 그녀에게 툭 한마디를 내뱉곤.
멍하니 우리를 바라보고 있던 마부에게 손짓했다.
“마차를 옆으로 돌려서 여인을 우회해서 가죠.”
“아… 알겠습니다.”
히히힝-
마차가 엘레노아의 옆을 지나가는 동안.
나는 유사시의 상황을 대비하여 계속 엘레노아를 살폈다.
“…….”
다행히 마차가 지나가도 그녀에게서 별 반응이 없자.
난 속으로 생각했다.
‘막무가내로 나와서 혹시나 했는데 그래도 아주 말이 안 통하는 여자는 아니었네.’
그녀는 우리가 탄 마차가 멀어질 때까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고.
나는 오늘의 상황을 그저 우연히 일어난 일 정도로 치부하며 넘어갔다.
* * *
당일 밤.
‘음… 슬슬 시작해도 되겠지?’
나는 잠든 일행 몰래 잠자리에서 일어나.
모닥불이 아득한 점이 되어 눈에서 보이지 않을 때까지 걸음을 옮겼다.
‘이만하면 거리는 충분히 벌린 것 같은데. 슬슬 시작해 볼까.’
나는 주머니에서 조심스럽게 오리하르콘을 꺼내어 들었다.
‘크… 영롱하구나.’
이제 남은 일은 이걸 취하는 것뿐이다.
나는 오리하르콘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슬며시 손을 뻗어 힘을 불어넣기 시작했다.
스스슥-
그러자 백염에 넣어도 녹지 않는다는 오르하르콘이 서서히 녹아 들어.
나의 몸 안으로 흘러들어 온다.
‘크음… 이건 전이랑 확실히 느낌이 다르네.’
알갱이만 한 것을 취했을 때보다 더 강대한 힘이 나의 몸 안을 휘몰아치기 시작하자.
나는 눈을 감고 파도 같은 힘을 나의 심장 쪽으로 이동할 수 있게 제어해 나갔다.
웅웅웅-
‘으음… 뭔가 기분이 묘하네.’
오리하르콘에서 흘러온 힘이 심장에 모이면 모일수록.
어째 내 몸도 점점 무거워지는 것 같았다.
‘뭔가 몸이 무겁게 느껴지는 건 기분 탓인가?’
허물을 탈피하려는 나비가 이러한 것인지.
뭔가 내 육체가 허물이 아닐까라는 생각도 들었다.
‘무언가 이 허물을 벗겨 내고 나면 엄청난 해방감이 찾아올 것 같은데…….’
쩌저적-
순간 내 몸 어디에서 금이 가는 것 같은 소리가 울려오자.
난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내 영혼이 갑갑한 육체를 벗어던지고 다음 계단으로 올라가고 싶어 한다는 걸 말이다.
‘으음…….’
하나 육신의 세계를 넘어 영의 세계로 이르기엔 힘이 부족했던 건지.
영혼을 옭아매던 허물은 생각보다 잘 벗겨지지 않았다.
‘그런데 이대로 가면 어떻게 되는 거지? 난 정말… 신이 되는 건가?’
이대로 완전한 탈피를 이루게 된다면.
나의 육신은 완전히 소멸하고 영혼만이 남게 되는 걸까?
‘씁… 그건 좀 그런데. 아직 못다 이룬 일들도 많고.’
스스슥-
아직 내 마음에 남아 있던 미련들이 많았던 탓일까.
몸 어딘가에서 들려왔던 균열이 다시금 봉합되자.
나는 힘을 완전히 갈무리하곤 생각에 잠겼다.
‘음… 뭔가 아쉬운 것도 같은데 다행인 것 같기도 하고…….’
더 지고한 단계로 넘어가지 못했단 아쉬움도 들었지만.
그보단 아직 내가 인간이라는 사실에 안도감을 느꼈다.
‘그래. 오늘만 날도 아니고, 언젠가 또 이런 날이 올 테니까.’
나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감았던 눈을 뜨려고 했다.
그러던 그때.
“아무 말도 없이 사라지지 말라니까 여기서 또 뭘 하고 있는 건가요?”
앞에서 툴툴거리는 제이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야?”
“무슨 일이라뇨? 그게 밤사이에 사라진 사람이 할 소린가요?”
‘…뭐야. 벌써 아침이라고?’
아무래도 시간의 흐름조차 잊고 힘의 흐름에 몰두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나…….”
“무슨 말이죠? 당신… 설마 하루 종일 그러고 있었던 건가요?”
제이나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갑자기 사라진 건 미안하게 됐다.”
“…알면 됐어요. 그보다 일어났으면 얼른 움직이죠. 골버린도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요.”
“그러지.”
나는 그녀와 함께 마차가 있던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 * *
마차가 평원을 떠나고 몇 시간이나 지났을까.
쩌저저저적-
갑자기 고요하던 평원 곳곳에서 무언가 금이 가는 것 같은 소리가 울리더니.
“영광! 영예! 그리고 찬란한 최후를 위하여!”
갈라진 허공의 틈에서 레바논을 위시한 천사들이 찬란한 나팔 소리를 따라 균열 사이에서 걸어 나온다.
“…….”
평소와는 달리 갑옷과 무기로 무장한 레바논이 평원 일대를 살핀다.
“분명 이곳일 텐데…….”
그녀가 어딘가 불안한 눈빛으로 주변을 살피던 그때.
쩌저저저적, 화르륵-
균열 속에서 피어오르는 짙은 화염을 찢고.
악마들과 베논이 그 안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
군세를 이끌고 온 두 신이 말없이 서로를 응시하던 중.
레바논이 무겁게 입을 뗀다.
“아무래도 최악의 상황은 피한 것 같네요.”
그녀의 물음에 베논이 미간을 찌푸린 채 고개를 끄덕인다.
“피한 건지 유예기간이 생긴 건진 아직 모르는 일이다.”
“그럼 당신은… 정말 아가멤논이 부활했다고 생각하는 건가요?”
“그럴 리가. 놈은 부활할 수 없다. 그건 네년도 잘 알고 있을 텐데?”
베논의 강한 부정에 레바논은 긴장을 풀며 피식 미소를 짓는다.
“그래요? 그럼 저보다 잘 알고 있으면서 뭐가 그리 두려워서 군세까지 대동해서 왔을까요? 어머, 당신의 수족만 다섯이 왔네요?”
레바논이 대악마들을 보며 비꼬듯 말하자.
베논은 불쾌함을 감추지 않았다.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아가멤논의 영혼은 분명 산산이 조각나 완전한 소멸을 맞이했었다!”
“그랬었죠. 하지만… 이곳에서 아가멤논의 힘이 느껴진 것도 엄연한 사실이죠. 정말 그가 부활한 건 아닐까요?”
레바논의 물음에 지면을 노려보던 베논이 나지막이 중얼거린다.
“아니. 아무리 봐도 부활을 한 것 같진 않아.”
“그럼 우리가 느낀 그 힘은 어떻게 설명하려고요?”
“…아마 놈이 마련해 뒀던 안배가 각성을 한 게 아닐까 싶다.”
베논의 의견에 레바논이 피식 웃음을 흘린다.
“의외로 당신도 순진한 면이 있네요. 오만의 끝을 달렸던 놈이 안배 같은 걸 마련해 뒀을 거라 생각하나요? 정말로요?”
“그럼 이곳에서 느껴진 아가멤논의 힘은 무슨 수로 설명할 거지?”
“그건…….”
레바논이 답하지 못하자 베논이 코웃음을 친다.
“아무래도 이렇게 된 이상 놈이 남긴 안배를 찾아내는 게 급선무겠어.”
“정말 당신 말대로 안배가 있다고 한다면 무조건 찾아내서 죽여야죠. 하지만 어떻게 놈이 남긴 안배를 찾아내려고요? 놈의 기운을 따라 추적을 한다고 해도 한계가 있어요.”
레바논의 말이 맞다.
그들은 전지전능하지만 완벽하진 않았으니 말이다.
“만약 놈이 남긴 안배가 작정하고 숨기라도 한다면 일이 귀찮아지긴 하겠군.”
“그건 모르는 일 아닌가요? 이제껏 잠잠했다가 갑자기 힘을 발현한 걸 보면, 갓 태어난 아이가 무의식적으로 힘을 사용한 걸 수도 있겠죠.”
레바논이 눈을 희번덕거린다.
“신탁을 내려서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아이들을 싹 다 죽이라고 하는 건 어떨까요?”
“속단하지 마라. 안배가 뒤늦게 아가멤논의 힘을 자각한 걸 수도 있다.”
“그럼 우리가 찾아야 할 범위가 더 넓어지잖아요. 언제 찾으려고요?”
레바논의 일침에 베논은 무심히 대꾸한다.
“간단한 방법이 있다. 세상에 종말을 일으키면 된다. 그럼 안배도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힘을 쓸 것이니 찾아내기도 쉽겠지.”
“당신이 생각한 것치곤 제법 괜찮은 생각이네요. 하지만 감당할 수 있겠어요? 종말이 도래하면 신도들 대부분이 죽을 거고 우리의 힘도 약해지게 될 텐데요?”
“뭔가를 얻으려면 당연히 뭔가를 잃을 각오도 해야지. 그리고 아가멤논의 안배를 처리하는 대가라 치면 나쁘지 않다고 본다.”
베논의 말에 레바논은 나지막이 한숨을 내쉰다.
“좋아요. 그건 그렇다 쳐요. 그런데 어떻게 종말을 일으키려고요? 재앙은 바알의 영역이잖아요?”
“당연히 굴복시켜 우리의 뜻을 따르게 만들어야지.”
“그렇게 단순하게 접근할 사안이 아니잖아요? 당신이 바알을 그 꼴로 만들어 놨는데 놈이 우리의 말을 따르겠어요?”
레바논의 우려에 베논이 눈살을 찌푸린다.
“그럼 네년이 그럴듯한 계획을 세워 봐라.”
“계획이 잘못됐다고 말한 게 아니잖아요? 바알이 격렬히 거부할 걸 생각해서 대책을 더 마련하자는 거죠. 아니면 흑남을 이용하는 건 어때요?”
“…그건 무슨 말이지?”
레바논이 어깨를 으쓱인다.
“슬슬 열쇠로 이용을 할 정도로 성장하지 않았나요?”
“그건 도박수다. 재앙의 문이 어떠한 결과를 초래할지는 우리도 알 수 없어. 아가멤논의 안배를 처리하기 전까지는 관심을 꺼라. 안배를 처리하는 게 더 급한 일이다.”
그 말을 끝으로 잠시 침묵하던 베논이 다시 입을 뗀다.
“3년. 그 안에 나의 신도들을 성장시킨 뒤 그들을 이용해서 종말을 만들어 보겠다.”
“3년이요? 3년은커녕 몇십 년을 투자해도 힘들 것 같은데… 가능하겠어요?”
“그사이에 네년도 대륙의 다른 왕국들의 전력을 약화시켜 놔라. 침공이 수월해질수록 아가멤논의 안배도 더 빨리 모습을 드러내겠지.”
* * *
2주 뒤.
마침내 흑립 유치원에 있는 내 집무실로 돌아온 나는 가장 먼저 침대로 몸을 던졌다.
‘그래, 이게 잠자리지!’
내가 침대 위를 한껏 뒹굴며 여독을 조금이나마 풀던 그때.
똑똑-
누군가가 나의 방문을 두드린다.
‘에이씨… 이제 좀 쉬려고 했더니.’
“누구야?”
“흑남님! 기쁜 소식을 알려 드리려 왔습니다!”
‘…기쁜 소식?’
“무슨 소식인데?”
내가 문에 대고 소리치자.
바깥에서 다시금 남자의 음성이 울려온다.
“신성력 착즙기의 개발이 다 끝났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