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카데미의 노예가 살아남는 법-116화 (116/200)

116.

‘방금 무슨 소리가 들린 것 같은데……. 아라크네?’

새 힘을 얻은 부작용으로 환청이라도 들린 것일까.

‘뭐, 상관없겠지.’

나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곤 나의 뒤바뀐 몸을 확인하는 데 몰두했다.

‘확실히 두 힘이 완전히 합쳐진 것 같긴 한데, 이걸 어떻게 사용해야 되는 거지? 그냥 평범하게 마법을 사용할 때처럼 사용하면 되는 건가?’

나는 먼저 심장에 자리하고 있는 서클을 돌려 봤다.

스스슥-

그러자 전보다 확연히 진해진 회색 빛깔의 기운들이 내 손에 모여든다.

‘흠… 확실히 달라지긴 한 것 같은데. 이것만으론 좀 부족하단 말이지. 뭔가 더 입체감이 있으면 좋을 것 같… 어어?’

갑자기 응집되어 있던 힘이 나의 생각대로 둥그스름한 형태를 갖추자.

나는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뭐야, 이거? 그저 생각만 했을 뿐인데……. 재밌네.’

내 상상에 따라 회색 힘이 길쭉한 창이 되고.

또 원반 모양처럼 변하는 힘이라니.

‘음… 근데 계속 모양을 바꾸니까 이것도 은근 힘에 부치네. 아무래도 자주 바꾸는 건 어렵겠어.’

난 장난을 멈추곤 생각을 이어 갔다.

‘모양이야 그렇다고 쳐도 문제는 위력이란 말이지. 설마 위력도 내 상상만큼 나오는 건 아니겠지?’

나는 새로운 힘의 성능을 실험할 겸.

회색 힘을 창 모양으로 만들어 전방에 힘껏 내던졌다.

쇄애애애액-

허공을 가르던 창이 곧 바닥에 꽂히자 나는 눈을 부릅떴다.

‘…뭐야.’

분명 엄청난 굉음이 내 귀를 찢어놓을 정도로 울릴 것이라 생각했건만.

어째 창 주변은 고요하기 짝이 없었다.

‘설마… 이게 전부라고?’

그럴 리가 없다.

모양만 원하는 대로 바꾸는 힘이 무슨 신의 힘이란 말인가?

‘설마 신의 힘이 아니라 도플갱어의 힘을 얻은 건 아니겠지?’

내가 묘한 불안감에 휘감기어 가던 그때.

스스스슥-

갑자기 창 주변에 자리하고 있던 잔디들이 창과 함께 가루가 되어 사라져 간다.

‘오오…….’

어딘가 이질적이기까지 한 광경에 나는 속으로 혀를 내두르며.

창이 있던 자리를 살폈다.

‘이건 뭐 완전히 메말라 버렸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녹색 물결이 치던 대지가 불모지처럼 변해 버리다니.

이게 신의 힘인 것일까?

지금의 상황에 하나의 단어가 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지리네.’

겨우 창 주변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주변의 모든 생명이 소멸해 버릴 줄이야.

‘뭔가 실감이 나질 않아.’

분명 이만한 힘을 얻었으니 기쁜 감정이 들어야 할 텐데.

어째 기쁘기보단 묘한 설렘과 두려움이 내 안에 공존하고 있었다.

‘설마 나… 진짜 신이 된 건 아니겠지?’

나는 슬쩍 날붙이로 내 손가락을 베어 봤다.

‘음… 피는 잘 나오네. 통증도 있고.’

물론 신이 피를 흘리고 통증도 느끼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뜨겁고 붉은 핏방울이 아직 내가 인간이라는 증거이리라 난 믿었다.

‘에이씨… 신이면 어떻고 인간이면 또 어때? 중요한 건 지금 내가 이 자리에 있다는 거야.’

존재하고 생각한다.

그거면 족하지 않은가?

‘그보다 앞으로 이 소멸의 힘을 사용할 때는 주의를 해야겠어.’

자칫 힘을 남발하다가 내 주변의 것들까지 소멸시키고 싶진 않았으니 말이다.

‘음… 그런데 다시 복원을 할 순 없는 건가? 명색이 신들을 아우르던 신의 힘인데?’

이게 전부일 리 없다.

분명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을 터.

‘아까는 내 상상대로 됐잖아. 그럼 이번에는 역으로…….’

난 다시금 힘을 발현해 봤다.

그러자 아까와는 달리 어딘가 은은한 백색이 맴도는 창이 나의 손에 자리했다.

‘호오…….’

내가 창을 들어 불모지가 된 땅에 힘껏 꽂아 넣자.

스스슥-

메말라 있던 땅 위로 새싹들이 움트기 시작했다.

‘오오오! 이건… 미쳤네.’

신의 영역이라고만 생각했던 탄생과 소멸이 내 손에서 비롯되다니.

‘음… 그런데 불모지가 된 면적에 비하면 피어오른 새싹은 좀 많이 적은 것 같은데.’

설마 흑마력에 비해 부족했던 신성력이 이러한 결과를 만들어 낸 것일까?

‘좀 더 실험을 해 봐야겠어.’

나는 멋쩍게 뒤통수를 긁적이곤 다시금 실험에 몰두했다.

* * *

일주일 뒤.

이제껏 누구도 넘지 못했다는 유령의 문 앞에서.

새하얀 로브를 두른 이들이 저들끼리 웅성거리고 있다.

“그러니까 자네 말은 누군가가 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는 것인데, 지금 나보고 그 말을 믿으라는 건가?”

“자네야 곧장 곯아떨어졌으니 모르겠지만 내가 이 귀로 똑똑히 들었다니까 그러네? 분명 철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고!”

한 마법사가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두드리며 빈 공간을 가리켜 보인다.

“거기다가 이것 보라고! 문 앞에 서 있던 유령도 사라졌잖아? 이게 뭘 의미하는 거겠어?! 누군가가 유령의 시험을 통과하고 문안으로 들어간 게 분명해!”

“…시험? 온종일 멍청하게 서 있던 유령이 시험을… 알았네. 그렇다고 치지. 그럼 대체 누가 안으로 들어갔다는 건가?”

“지금 그걸 확인하려고 주구장창 서 있는 것 아닌가?! 자네는 대체…….”

마법사들이 온갖 의견과 의문을 펼치며 시끌시끌한 가운데.

멀찍이서 그들을 지켜보고 있던 제이나와 골버린이 조심스레 대화를 나눈다.

“정말 흑남이 저 안으로 들어간 걸까요?”

“적어도 그가 아무런 말도 없이 사라질 남자는 아니니 그럴 가능성이 높지 않겠습니까?”

“그렇긴 하지만…….”

흑남이 사라진 지도 벌써 일주일이나 지났지 않은가?

“물도 식량도 안 챙겨 간 것 같던데… 괜찮을지 모르겠네요.”

“그리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그는 저희의 생각보다 더 끈질긴 남자입니다. 문안에서 어떤 상황이 벌어지고 있을지 감히 추측할 수는 없겠지만, 그는 분명 잘하고 있을 겁니다.”

“그래야 할 텐데 말이에요. 그러게 흑남이 움직이는 걸 봤으면 따라갔어야죠!”

제이나가 가볍게 눈을 흘기자 골버린이 머쓱한 미소를 짓는다.

“허헣… 그저 가볍게 걷고 오겠거니 생각을 했습니다만, 확실히 제 불찰입니다.”

“아시면 기도를… 아니, 아무튼 끝까지 지켜봐요.”

두 사람이 걱정스럽게 문을 주시하며 대화를 나누던 그때.

그그그그긍-

급작스레 철문에서 흘러나온 기이한 소리가 사람들의 귓가에 울려왔다.

“…들었나?”

“오… 세상에…….”

문 지척에 서 있던 마법사들이 천천히 고개를 쳐들자.

그으으으응-

천천히 기울어져 가는 철문의 모습이 그들의 눈에 자리했다.

“유, 유령의 문이 무너진다! 문이 무너진다!”

“멍하니 서 있지들 말고! 당장 들어갈 준비들 해! 당장!”

마법사들이 고성을 지르며 문 주변에서 물러나면서도 태세를 갖추어 나가자.

“어쩌시겠습니까?”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골버린이 제이나를 보며 묻는다.

“어쩌긴요? 흑남이 어떤 상황에 놓여 있을지 모르는데, 당연히 우리도 들어가야죠.”

제이나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하자.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던 골버린이 툭 질문을 던진다.

“이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질문이긴 합니다만, 혹시 성녀님께선 그에게 마음이 있으신 겁니까?”

“네에?!”

깜짝 놀라는 제이나를 보며 골버린이 허허 웃는다.

“그저 궁금했을 뿐입니다.”

“그런 마음은… 없어요. 그냥 저를 도와주고 있으니 저도 도와주고 있는 거예요. 아시겠어요?”

“허헣, 알겠습니다.”

얼굴이 붉어진 제이나가 겨우 흥분을 가라앉히곤 말을 이어 간다.

“여, 여하튼 안에 어떤 변수가 있을지 몰라요. 그러니 먼저 마법사들이 들어가는 걸 보고 우리도 뒤따라가는 걸로 해요.”

“현명한 판단이십니다.”

골버린이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이던 찰나.

“굳이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그들의 등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 *

“세상에… 대체 언제 온 건가요?”

제이나가 유령 보듯 날 보며 놀라워하자.

나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문밖으로 나갔더니 무덤 입구 부근으로 이동이 될 줄은 나도 몰랐다만, 뭐 굳이 그 사실을 말할 필요는 없겠지.’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네.”

“이제껏 저 문 너머에 있었던 건가요?”

“그런 셈이지.”

내가 순순히 긍정하자 제이나가 눈을 반짝거린다.

“정말 유령이 당신한테 시험을 내린 건가요? 도대체 유령의 시험은 뭐였나요? 문안에는 또 뭐가 있었는지도 궁금해요.”

“질문은 나중에 받도록 하고 먼저 이동하자.”

“네? 그게 무슨 말이에요? 마법사들이 문안으로 들어가려고 하는데, 우리도 들어가야 하는 것 아닌가요?”

‘안에 들어가 봐야 아무것도 없는데 왜 또 저길 들어가?’

“아니. 그럴 필요는…….”

내가 입을 떼려던 찰나.

우르르르르릉-

거대한 문이 완전히 무너져 내려 엄청난 굉음을 일으킨다.

마침내 문의 이면이 모습을 드러내니.

“저건… 세상에…….”

“허어…….”

제이나와 골버린을 비롯하여 나도 당혹감을 느꼈다.

‘저건 좀… 의외네.’

어째서인지 문이 허물어진 자리에는 거대한 벽이 자리하고 있을 뿐이었다.

마치 문 너머에는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었다는 것처럼 말이다.

‘용도를 다했으니 더 이상 존재할 이유가 없다는 건가.’

나는 거대한 벽을 보다가 마법사들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아니,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왜 문 뒤에 아무것도 없는 거냐고!”

“우리가 단체로 환상을 보고 있는 걸지도 모르네! 마법을 시전해 보게!”

“마법은 뭔 마법입니까?! 벽 너머에 뭔가 숨겨져 있을지도 모르니 골렘을 동원합시다!”

나와 그들 사이에는 어느 정도 거리가 있었음에도.

저들의 난리 법석인 상황이 내 귀에 뚜렷이 들려왔다.

‘그래, 열심히 파 보면 뭐가 나올지도 모르지.’

나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이러면 들어갈 의미가 없어진 것 같은데. 일단 이동하자.”

“…네.”

나는 일행과 함께 무덤을 나가 다시금 무덤지기들이 있는 건물 안으로 돌아왔다.

우리가 한적한 곳에 들어서자 제이나가 냉큼 말을 걸어온다.

“이제 질문해도 되죠?”

“뭐가?”

“어떻게 문안으로 들어간 건지 묻고 있는 거예요.”

‘그거였냐.’

설명을 해 주자니 골치가 아프기도 하고 마음에 걸리기도 하여.

나는 상황을 무마하기 위해 대충 대답했다.

“그냥 운이 좋았을 뿐이야.”

“운이 좋은 것치곤 말도 안 되게 좋은 것 같은데요.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잖아요. 그렇죠?”

제이나가 눈을 빛내자 골버린이 웃으며 슬며시 대화에 끼어든다.

“누구에게나 비밀은 있는 법이지요. 아무래도 이야기하기보단 마음에 담아 두고 싶어 하는 것 같으니 더 이상 묻지 않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끙… 알았어요.”

나는 화제를 돌리기 위해 못내 아쉬워하는 제이나를 보며 물었다.

“그보다 넌 어때? 소득은 있었어?”

“…아뇨. 겨우 오리하르콘 조각이 붙어 있는 반지를 하나 찾은 게 전부예요. 어떻게 그리 싹싹 털어 갈 수가 있는 건지……. 도굴꾼들도 그렇게 털어 가진 않았을걸요?”

“그건 어쩔 수 없지. 우리가 조금 더 일찍 왔어야 했어.”

내 말에 분통을 터뜨리던 제이나가 눈을 번뜩인다.

“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아주 소득이 없던 건 아니에요. 제가 기가 막힌 정보 하나를 엿들었거든요.”

“기가 막힌 정보?”

“그래요.”

우쭐거리며 말을 이어 가는 제이나.

“제가 땅을 파다가 우연히 마법사들이 하는 말을 엿들었는데, 백탑에 오리하르콘이 그렇게 많다고 하더라고요.”

“호오…….”

‘백탑이라……. 하기야 놈들도 엄청나게 많은 무덤들을 파냈을 테니까 어찌 보면 당연한 거겠지. 살짝 구미가 당기긴 하네. 흑탑으로 돌아가는 길에 잠시 백탑에 들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아무리 내가 신의 힘을 얻었다고 해도.

베논과 레바논과의 싸움에서 우위를 점할 거라 장담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오리하르콘으로 힘을 더 늘린다면… 해볼 만하지 않을까?’

내가 머릿속으로 바삐 셈을 하던 중.

제이나가 당당히 말한다.

“흑탑으로 돌아가는 길에 백탑에 들러 오리하르콘을 팔라고 하는 거죠. 그럼 당신이 원하는 대로 우리는 오리하르콘을 갖고 돌아가게 될 수 있어요.”

“제법 괜찮은 생각이긴 하네. 하지만 과연 마법사들이 그 귀한 걸 팔려고 할까?”

“제 이름을 대면 팔지 않겠어요?”

그녀의 의견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안 돼. 네 상황을 잊었어? 이미 충분히 눈에 띌 만한 상황이 많았어. 더 이상 눈에 띄는 짓은 자제하는 편이 좋을 거다.”

“그렇긴 하지만… 달리 방법이 있나요? 당신 말대로 마법사들이 아무한테나 오리하르콘을 팔지는 않을 텐데…….”

나는 말꼬리를 흐리는 그녀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지. 하지만 적어도 가 볼 가치는 있을 것 같네.”

“그럼 백탑으로 가는 건가요?”

“그래야지.”

* * *

한편, 같은 시각.

레바논이 통치 중인 천계.

[이년이 도대체 또 어디로 사라진 거야!]

지상을 살피던 레바논이 참지 못하고 고성을 내지른다.

분명 얼마 전까지 그년이 검은 대지에 있는 것을 확인했건만.

[한낱 도구 따위가 감히…….]

[어머니, 성녀를 찾고 계신 건가요?]

멀찍이서 목소리가 들려오자.

레바논은 날이 선 목소리로 말한다.

[처음에는 그저 내 착각이겠거니 하고 넘어갔지만 이쯤 되니 확신이 섰다. 그년은 바알의 힘을 이용하고 있어.]

으르렁거리며 지상을 내려다보는 레바논.

[말을 듣지 않는 도구는 필요 없다.]

[그 말씀은…….]

[그년을 죽이고 새로운 도구를 만들어야겠어.]

레바논의 결단에 다시금 멀리서 목소리가 울려온다.

[어머니, 죽이더라도 흑남과 결혼은 시키고 죽여야 하는 것 아닌가요?]

[됐다. 조금 늦어지겠지만 혼인은 새 도구와 시키면 그만이야.]

레바논이 인간계를 노려보며 나지막이 중얼거린다.

[네년이 숨어서 무슨 작당을 하고 있는지는 찾아내면 알게 되겠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