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카데미의 노예가 살아남는 법-113화 (113/200)

113.

‘저게 내가 줬던 거라고?’

내가 넘겨줬던 물병과는 생김새가 판이하게 다르잖은가?

“오오오… 느껴지나?”

나는 감탄을 금치 못하는 보라카 부탑주를 보며 물었다.

“뭐가 느껴진다는 겁니까?”

“저 회오리 속에 감춰져 있는 강력한 힘 말일세! 자네는 느껴지지 않는 건가?”

보라카는 호통치듯 말하고는.

몽롱한 표정을 한 채 회오리 앞으로 다가간다.

“부탑주님, 너무 가까이 가시는 것 같습니다. 아직 저것의 정체가 파악되지 않았는데, 조금은 거리를 두시는 게…….”

“…….”

하나 수하들의 말이 들리지 않는 것일까.

“압도적인 힘… 오오…….”

도리어 보라카는 회오리를 향해 손을 뻗는다.

그러자.

사사사사삭-

제자리에서 잠자코 있던 검은 회오리 주변으로.

시커먼 구체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톡-

이윽고 검은 구체가 거품 방울처럼 톡 하고 터지자.

구체가 있던 자리가 둥글 게 파여 있는 것 아닌가?

“어이쿠…….”

그 모습에 화들짝 놀란 보라카 부탑주가 얼른 손을 거두어들였으나.

“…놀랍군. 아니, 그야말로 세상이 경탄할 일이 눈앞에서 벌어질 줄이야.”

그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진중해 보였다.

“흑남, 저 힘을 보고 나니 더욱 궁금해지는군. 도대체 자네는 저 물을 어디서 가져온 겐가?”

“아직 신성력 착즙기의 개발이 안 끝나지 않았습니까?”

“방금 구체가 범위 내에 있던 모든 것을 소멸시키는 걸 자네도 봤잖은가?! 그런데도 지금 그런 말이 나오나?”

‘아니, 놀랍긴 한데, 저렇게 호들갑을 떨 일인가?’

내 눈빛을 본 보라카 부탑주가 한숨을 내쉰다.

“흑남, 아무래도 방금 그 힘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 듯한데, 저건 보통의 힘이 아니네.”

“그럼 어떤 힘입니까?”

사뭇 긴장한 것처럼 보이는 보라카 부탑주가 무겁게 입을 뗀다.

“저건… 신의 힘일세.”

“예? 신의 힘이요?”

“창조와 소멸. 그것들은 오롯이 신들만이 다룰 수 있는 영역이라고 하지. 그런데 방금 우리 눈앞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소멸…….’

내가 서서히 사라져 가는 회오리를 멍하니 바라보던 중.

보라카 부탑주가 옆에 있던 흑마법사를 추궁하기 시작했다.

“에르텔!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내게 낱낱이 설명을 하거라. 당장!”

“죄, 죄송합니다. 저는 그저…….”

흑마법사가 고개를 못 들고 연신 허리를 수그리자.

보라카는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두드린다.

“지금 내가 네 녀석의 사과나 받으려고 이런 질문을 했을까?! 대체 뭘 했기에 저런 변화가 생긴 건지 설명을 하라는 게다!”

보라카가 이글거리는 눈동자가 부담스러웠던 건지.

에르텔이 주눅이 든 채 조심스레 설명을 시작한다.

“그게… 전 그저 몇 가지의 재료를 배합해서 물에 섞었을 뿐인데 갑자기 사고가 발생하고 말았습니다.”

“배합한 재료를 넣었다고? 뭘 넣었는지는 당연히 기억을 하고 있겠지?”

허겁지겁 양피지를 집어 드는 보라카 부탑주를 보며.

에르텔이 고개를 끄덕인다.

“경탄의 열매 조금과 에인션트 드래곤의 뼛가루 조금 그리고 오리하르콘의 조각 일부를 사용했습니다.”

“…뭐라고? 경탄의 열매? 거기다가 드래곤의 뼛가루에…….”

양피지에 조합법을 받아 적던 부탑주가 손을 덜덜 떤다.

‘그 구하기 어려운 것들을 배합해서 때려 넣었다고? 저놈도 제정신은 아니네.’

에인션트 드래곤의 뼈야 말할 것도 없거니와.

경탄의 열매도 엘프들이 보배 중의 보배로 여기는 귀물이었다.

“그것들이 얼마나 구하기 어려운 건지는 알고 가져다 쓴 게냐?”

“원하는 재료가 있으면 얼마든지 갖다가 쓰라고 부탑주님께서… 죄송합니다…….”

“후우…….”

귀 뒤쪽까지 팔을 들었던 보라카가 무겁게 한숨을 내쉬자.

나는 슬며시 그에게 말을 걸었다.

“확실히 재료들이 하나하나 화려하긴 하지만, 여하튼 에르텔이 지대한 발견을 한 것도 사실입니다. 노여움을 푸시지요.”

“그렇긴 하네만……. 할 수 없군. 카르단! 창고에 가서 방금 이 녀석이 말한 재료들 좀 가져와라.”

“예, 부탑주님.”

곧 흑마법사가 은 쟁반을 들고 우리에게 돌아왔는데.

쟁반 위로는 은은한 금빛을 발하는 열매와 커다란 뼈마디 한 개 그리고 보랏빛이 맴도는 광석이 자리하고 있었다.

“후우… 이게 다 얼마인지 모르겠구만.”

“돈 걱정은 마시지요. 재료비가 얼마가 나오건 제가 지불하겠습니다.”

“말은 고맙네만 저 재료들은 돈이 있다고 구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네. 당장 경탄의 열매만 해도 내가 구하는 데에 얼마나 애를 먹었는지 아나? 저걸 구하려고 내가 엘프들의 마을을 얼마나 쑤시고 돌아다녔는지 자네는 모를…….”

부탑주의 투덜거림이 길어지려 하자.

나는 빙긋 웃으며 물었다.

“그럼 지원은 필요하지 않다는 말씀이시군요?”

“어허이! 누가 필요하지 않다고 했나. 그만큼 귀하디귀한 재료들이라는 게지. 크흠… 여하튼 당장 진행해 보지.”

보라카가 은 나이프로 열매의 과육 일부를 떼어 내자.

나는 호기심이 들어 툭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은을 고집하는 이유가 있습니까?”

“경탄의 열매는 사람의 손이 닿으면 삽시간에 녹아 없어져 버리지. 은을 쓰는 건… 내 취향일세.”

“아하…….”

보라카 부탑주가 떼어 낸 과육을 조심스레 물에 담그자.

모든 이들의 얼굴에 긴장감이 맴돈다.

“흠…….”

그러나 어째 몇 분을 기다려도 별 반응이 없다.

“아무래도 경탄의 열매는 정답이 아닌 모양입니다.”

“그런 모양일세.”

이번에는 드래곤의 뼛가루를 물에 투입했지만.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이렇다 할 변화는 없었다.

“흠, 이것도 아니라면 남은 건 이것뿐인데…….”

보라카는 미심쩍어하면서도 오리하르콘을 물속에 집어넣는다.

부글부글-

그러자 잠잠하던 회색빛의 물이 갑자기 끓어오르며 급속도로 검게 변하기 시작한다.

오오오오-

“다들 물러나라!”

보라카 탑주의 외침이 끝나기 무섭게 유리병이 산산조각이 났고.

조금 전에 봤던 검은 회오리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정답은 오리하르콘이었던 모양이군.”

“그러게 말입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에 잠겼다.

‘신의 광물이라고 불리는 오리하르콘이 내 힘을 증폭시키는 원천이었을 줄이야……. 설마 그래서 신의 광물이라고 이름이 붙은 건 아니겠지?’

물론 오리하르콘에 그런 이름이 붙은 데는 워낙 구하기 어려워서겠지만 말이다.

‘그럼 다량의 오리하르콘을 구할 수만 있다면… 나도 저런 힘을 가질 수 있는 건가?’

나는 사그라지는 회오리를 보며 생각을 이어 나갔다.

‘하지만 무슨 수로 오리하르콘을 구하지?’

그나마 광산이라도 존재하는 미스릴과 달리 오리하르콘은 광산도 없다.

‘간혹 드래곤의 레어에서 발견된다고는 하는데 신빙성이 있는 말인지도 모르겠고. 그래도 오리하르콘을 지속적으로 얻을 수만 있다면…….’

나는 두 신의 목에 꽂아 넣을 비수 하나를 얻을 수 있을 터.

“푸하하하하! 그래도 이제 단서 하나를 얻었으니, 물의 정체를 파악하는 일만 남았군.”

보라카 부탑주가 게슴츠레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자.

“근데 오리하르콘을 입수할 방법이 있습니까?”

나는 넌지시 말을 돌렸다.

“뭐, 보통 부호들이나 왕족들을 상대로 열리는 경매에서 낙찰을 받거나 왕궁의 보물 창고를 터는 것 정도가 있겠지. 그 외의 방법은 나도 해 본 적이 없어 잘 모르겠네.”

“그렇습니까?”

부탑주의 경험담을 듣고 나니 더욱 고민이 된다.

‘현실적으로 경매는 힘들어. 언제 그 많은 경매장들을 다 돌아다니겠어? 흠… 왕궁의 보물 창고라……. 진짜로 보물 창고라도 털어야 되나?’

* * *

몇 시간 뒤.

쿵-

나는 집무실로 돌아와 주먹 크기의 오리하르콘을 테이블에 내려놨다.

‘망할 노인네. 기왕 주는 김에 조금만 더 줄 것이지.’

내가 실험을 핑계로 오리하르콘을 좀 달라고 했더니.

보라카 부탑주는 아주 기겁을 하며 겨우 저만한 양을 줬다.

‘뭐, 그래도 이만하면 실험하기엔 충분하겠지? 근데 이걸 어떻게 섭취해야 하지? 갈아서 물에 타 먹어야 되나?’

나는 단도를 잡고 오리하르콘의 표면을 깎아 내어 보려고 했다.

팅-

그러나 얼마나 단단했는지 미세한 흠집은커녕 생채기조차 나질 않는다.

‘아오… 마법을 써 볼까? 그러기엔 장소가 안 좋은데. 자리를 옮겨야 하나.’

내가 팔짱을 낀 채 오리하르콘을 노려보던 그때.

똑똑-

“흑남님, 들어가도 될까요?”

바깥에서 제이나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들어와.”

“네!”

평범한 시녀의 차림을 한 제이나가 안으로 들어오자.

난 그녀를 보며 생각했다.

‘은근 시녀 차림이 잘 어울리네.’

대신관 사건 이후로 노예 연기를 했던 그녀는 아직도 노예 연기를 지속하는 중이었고.

나는 그런 그녀를 내 전속 시녀로 배치해 놓은 상태였다.

‘그 덕에 탑주한테 한 소리 듣긴 했지만.’

이제껏 흑카데미에서 시녀를 쓰는 일이 없었기에.

나가란 탑주가 한 소리를 한 것도 어째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청소하러 온 거지?”

“그렇긴 한데, 혹시 뭔가 희소식은 없나 해서요.”

익숙하게 빗자루질을 하며 말을 이어 가는 제이나.

“아직은 괜찮다고 하지만… 언제 레바논에게 걸릴지 모른다고 생각하니 걱정이 가시질 않아서요. 대신관도 레바논이 죽였다고 했잖아요?”

“그렇긴 한데 아직 개발 중이니까 조금만 더 기다려 봐.”

“…알겠어요.”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던 제이나가 갑자기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런데 테이블에 놓여 있는 저건 뭔가요?”

“오리하르콘.”

“네? 오리하르콘이요? 검을 만드려는 건 아닐 테고……. 지팡이를 만들려고 하시는 건가요?”

그녀의 물음에 난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니고. 근데 왜 갑자기 무기 이야기를 해?”

“그야 소드마스터들이 가장 갖고 싶어 하는 무기가 오리하르콘으로 만든 검이잖아요?”

“아, 무슨 말을 하는 건가 했네. 그거야 그렇지. 그런데 그런 용도로 사용하려는 건 아니야.”

나는 미간을 찌푸린 채 오리하르콘을 내려다보다가.

슬며시 제이나의 두 눈을 응시했다.

‘흠… 혹시 제이나의 괴력이라면 오리하르콘을 조금이라도 떼어 낼 수 있지 않을까?’

“잡아 봐.”

“네?”

“잡아 보라고.”

제이나가 엉겁결에 오리하르콘을 받아 들자.

나는 두 손으로 비트는 시늉을 해 보이며 말했다.

“이제 그걸 이렇게 반으로 쪼개 볼래?”

“…갑자기요?”

“네 힘이면 가능할 수도 있겠다 싶어서. 실패해도 상관없으니까 편하게 해 봐, 편하게.”

내 말에 그녀가 배시시 웃는다.

“농담이죠?”

“진담인데.”

“…정말 오리하르콘을 쪼개고 싶은 거라면 드워프들에게 맡기면 되잖아요?”

‘그게 됐으면 진작 그렇게 했지.’

“그러잖아도 물어는 봤는데, 자기네들은 블랙스미스가 아니라고 입에 거품을 물며 거절하더라.”

블랙스미스.

오직 최고의 드워프 대장장이만이 얻을 수 있는 칭호로서.

드워프들에게 있어선 가장 영예로운 자리이기도 했다.

“아아, 그랬군요. 알았어요. 그럼 시도는 해 볼게요.”

턱-

거침없이 오리하르콘을 잡아 든 제이나.

“이이익…….”

그녀가 이를 악물고 오리하르콘을 비틀기 시작한다.

‘오오! 되나?’

투드득-

“으으으으!”

하지만 그녀의 팔이 점점 통나무처럼 굵어지고 두터운 핏줄이 솟아올랐음에도.

오리하르콘에는 그 어떤 변화도 없었다.

“후우… 미안해요. 아무래도 무리인 것 같아요.”

“그래 보이네. 수고했다.”

‘씁… 그냥 블랙스미스가 올 때까지 기다려야 되나. 이걸 어떻게 참으라고?’

정녕 방법이 없는 것일까.

나는 답답한 마음에 뒤통수를 긁적이다 문뜩 한 가지 생각을 떠올렸다.

‘흠… 잘라 내서 직접 섭취하는 게 어렵다면, 차라리 역으로 오리하르콘에 내 힘을 집어넣어 보는 건 어떨까. 많이는 그렇고… 조금만 해 볼까?’

고민의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좋아. 맛만 보자.’

나는 오리하르콘을 덥석 잡고 흐리멍덩한 회색의 마력을 흘려 넣기 시작했다.

‘흠… 별 반응이 없네. 내가 섭취하는 것만이 정답인 건가?’

화아아아악-

‘이건…….’

내가 오리하르콘에서 손을 떼려던 찰나.

갑자기 오리하르콘에서 검은빛이 흘러나오더니.

‘이런 미친…….’

거친 폭풍 같은 강대한 기운이 역으로 내 몸에 쏟아져 들어온다.

‘크으윽…….’

어지간하면 이 힘을 수용하려고 했겠으나.

이건 도저히 버틸 수 있는 수준의 힘이 아니었다.

‘일단 손을……. 이건 또 왜…….’

어째선지 오리하르콘을 놓으려고 해도 손에 달라붙은 것처럼 떨어지질 않는다.

“크으윽…….”

투드드득-

오리하르콘에서 흘러나오는 강대한 힘의 소용돌이에 내 팔의 핏줄이 터져 나가던 그때.

“흐으으읍!”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낀 것인지.

제이나가 오리하르콘을 있는 힘껏 발로 후려 차자.

텅, 텅, 텅텅텅-

“후우… 후우…….”

나는 뒤로 자빠져 비로소 격한 숨을 몰아쉴 수 있었다.

‘죽는 줄 알았네…….’

“고맙다.”

“방금 그건 뭔가요?”

“그걸 알면 내가 이렇게 넝마가 되진 않았겠지.”

나는 바닥에 피를 뱉어 내며 몸서리를 쳤다.

‘어우씨… 다음에는 진짜 손톱보다도 작은 걸로 시험을 하든가 해야겠어.’

“저 오리하르콘 말이에요. 많이 위험해 보이는데 멀리 떨어뜨려 놔야 하지 않을까요?”

“떨어뜨려 놓긴? 오히려 못 구해서 문제인데 왜 떨어뜨려 놔?”

“…그래요?”

나의 몸 상태를 살피던 제이나가 갑자기 손가락을 튕긴다.

“그 말인즉슨, 오리하르콘이 필요하다는 거죠?”

“많으면 많을수록 좋지. 퉤!”

“저… 오리하르콘이 좀 많이 있는 곳을 알고 있어요.”

‘…뭐라고?’

“그게 어딘데?”

내가 큰 관심을 보이자 제이나가 빙긋 미소를 지어 보인다.

“고대 용사들의 무덤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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