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
“지옥… 이라고? 그게 무슨…….”
머리를 붙잡고 오만상을 짓던 데우스의 표정이 점차 딱딱하게 굳어 간다.
“그래… 기억났다……. 네놈이… 네놈이 우리를 배신했구나!”
데우스가 휘청거리며 침대에서 일어나 한 손을 내게 뻗으며 소리 지른다.
“이단에게 빛의 심판을! 빛의 심판을!”
몇 번이고 악을 쓰는 데우스를 보며.
나는 피식 실소를 흘렸다.
“신성력이 모이질 않으니 당혹스럽지?”
“네놈… 내게 무슨 짓을 한 거냐!”
“글쎄. 나보다도 네가 더 잘 알지 않을까?”
나의 물음에 가슴을 꽉 움켜쥐고 있던 데우스가 떨리는 목소리로 묻는다.
“레바논을 배신할 정도로 흑남의 자리가 그리도 달콤했나? 네놈이 신관의 도리를 저버리고 여인과 명예에 타락할 줄 알았다면 네놈을 결코 그 자리에 앉히지는 않았을 터인데…….”
“배신?”
난 어깨에 묻은 먼지를 떼어 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난 배신을 한 적이 없는데?”
“…끝까지 날 우롱하려는 건가.”
“애당초 네놈들과는 같은 배를 탄 적이 없는데 어떻게 배신을 할 수가 있겠어?”
“한배를 탄 적이 없다니? 그게 무슨…….”
간헐적으로 떨리던 데우스의 몸이 석상처럼 굳어 간다.
“네놈… 그럼 갈프 신관은…….”
“내가 만들어 낸 가상의 존재지.”
“설마 네놈은 신성력과 흑마력을 전부……! 아니, 그건 불가능해! 불가능하단 말이다!”
현실을 부정하듯 포효하는 데우스에게 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래. 불가능한 일이지. 세상이 불합리하지만 않았다면 말이야.”
“아크 신관장… 이 병신 같은 늙은이가 대신전에 독을 풀었구나…….”
침음하던 데우스가 이를 갈며 죽일 듯 나를 노려본다.
“…대체 언제부터 계획한 거지? 아크 신관장도 타락한 건가?”
‘언제부터 계획하긴? 그저 우연이 만들어 낸 산물이지. 그리고 흑세계는 너희가 기획한 건데?’
“그런 걸 궁금해하기보단 네 처우부터 걱정해야 할 텐데?”
“…죽여라. 날 죽여라! 더 이상 날 모욕하지 말고 죽이란 말이다!”
나는 악다구니를 내지르는 대신관을 싸늘히 바라봤다.
‘요놈 봐라? 진짜로 죽을 생각도 없는 놈이 말은 잘하네.’
“그것 알아? 헬렌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혀를 깨물고 죽었어.”
“그게 무슨……. 아니, 네가 그 사실을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내가 대신전의 최고위 관계자들만이 알고 있을 비밀을 풀어서 그런 건지.
데우스 대신관은 크게 당혹한 모습을 보인다.
“죽고 싶다는 놈이 그걸 알아서 뭐 하려고?”
나는 다리를 꼰 채 고개를 까딱였다.
“진짜 죽길 원하는 거라면 네게 기회를 줄게. 자결해. 레바논의 의지가 꺾이지 않았단 걸 내게 보여 달라고.”
“…….”
얼굴이 딱딱하게 굳은 데우스가 입을 쩍 벌리자.
나는 의외라는 듯 그를 바라봤다.
‘호오… 정말 죽을 각오를 하고 있었던 모양이네. 그래도 대신관은 대신관이라 이건가?’
내가 그를 조금은 높이 평가하려던 중.
“으으… 빌어먹을… 빌어먹을!”
놈의 입술 사이에서 핏물이 아닌 고성이 터져 나온다.
‘역시 그럼 그렇지.’
“거봐. 진짜 죽고 싶어 하는 놈은 죽이라는 말도 안 한다니까?”
“이… 이 애새끼가!”
치욕으로 얼굴이 일그러진 대신관이 고성을 지르며 내게 달려오자.
나는 놈의 두 팔을 가볍게 피하곤 놈의 얼굴을 붙잡으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마인드 브레이커.”
심장과 함께 모든 힘을 빼앗겨 버린 탓일까.
“으으으으으으…….”
곧 대신관의 입에서 미약한 신음 소리가 흘러나온다.
‘좋아. 저주는 잘 걸린 모양이네. 이제 본격적으로 심문을 시작해 볼까. 흠, 뭐부터 질문을 해 볼까…….’
내가 데우스의 몽롱해진 눈을 보며 고민에 잠겨 있던 그때.
우드드드드득-
‘…음?’
갑자기 놈의 무릎 부근에서 뼈 비틀리는 소리가 울려오는 것 아닌가?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이야?!’
무슨 영문인지 놈의 몸이 허물어지는 집처럼 무너지기 시작하자.
나는 놈의 몸에 손을 뻗으려다가 급히 손을 회수했다.
으지지지지직-
무형의 힘이 대신관의 몸을 찌부러뜨리고 있는지라.
혹시나 나도 저 힘에 휘말릴 가능성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씁… 도대체 누가 저런 힘을 사용하는 거지? 심문실에 있는 사람이라곤 나와 데우스 대신관이 전부일 텐데…….’
으지지직-
이윽고 뼈 분질러지는 소리가 멎었고.
데우스 대신관이 있던 자리에는 찌그러진 시체만이 덩그러니 자리하고 있을 뿐이었다.
‘영문을 모르겠네. 설마 무슨 금제 같은 거라도 걸려 있었던 건가?’
너무도 황망한 죽음에 내가 도무지 갈피를 잡지 못하던 중.
[…멍청한 놈.]
어디선가 여인의 희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가 바람처럼 사라져 버렸다.
‘방금 그 목소리는…….’
언뜻 부드러워 보이지만 날이 서 있는 목소리.
나는 그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금세 눈치챘다.
‘이런 미친… 레바논이 개입을 한 거였어?’
나는 그제야 대신관의 죽음을 납득할 수 있었다.
‘하지만 레바논이 개입을 한 이유가 뭐지? 나한테 경고를 하려고? 아니면 내가 알아선 안 될 정보를 대신관이 알고 있었나?’
그마저도 아니면 천사와 계약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렇다 할 전투조차 해 보지 못하고 패배한 대신관에게 징벌을 내린 것일까?
‘에이씨, 지금 그깟 이유가 중요한 게 아니잖아!’
나는 대신관이었던 고기 조각을 내려다보며 계속 생각했다.
‘만약 언제고 두 신의 내기가 끝나고 나면 나도 이렇게 될 수 있다는 거잖아. 아니지, 만약 두 신이 본격적으로 내게 개입하게 되는 날이 오기라도 한다면…….’
그땐 나도 피 곤죽이 될 수 있다는 것 아닌가?
‘빌어먹을.’
어째 대신관의 죽음이 마냥 남 일처럼 느껴지지가 않는다.
‘빨리 보라카 탑주의 연구에 진전이 있어야 할 텐데…….’
내가 갖고 있는 회색의 흐리멍덩한 힘.
그것은 신성력도 흑마력도 아닌, 두 신이 준 힘과는 궤를 달리하는 상식 밖의 힘이었다.
‘만약 내가 그 힘을 완벽히 이해하고 통제할 수 있다면 난 두 신의 간섭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질지도 몰라.’
* * *
2일 뒤.
나는 잠시 흑탑에서 나와 개간한 농지로 나와 있는 상태였다.
‘그간 정신이 하나도 없었는데 그래도 이곳을 보고 있자니 힐링이 되네.’
요 2일간, 갑작스러운 대신관의 죽음을 두고 흑탑에선 연일 회의가 벌어졌었다.
‘그래서 나온 결과물은 결국 모른 척하자는 거였지만. 솔직히 그게 제일 나은 방법이긴 하지.’
이쪽에서 아무것도 모른다는 태도로 나오면 레바논이 뭘 어쩌겠는가?
‘이제 당장 남은 건 제이나를 해방시키는 일인데…….’
보라카 부탑주에게 의뢰를 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아직은 좀 더 기다려 봐야 할 것이다.
‘얼마나 걸릴는지…….’
내가 스켈레톤들의 땀방울과 드루이드들의 눈물로 일궈 낸 비옥한 토지를 멍하니 바라보며 간만의 여유를 누리고 있던 그때.
탁, 탁-
지팡이를 짚고 있는 노파가 내가 있는 곳으로 걸어온다.
‘저 노파는…….’
바알이 기생하고 있는 신도가 아닌가?
‘설마 아직도 저 노파의 몸에 기생을 하고 있는 건가?’
내 의문은 노파가 배를 훌렁 까는 동시에 해결됐다.
“바알…….”
“오랜만이군. 그런데 그리 매섭게 쳐다볼 정도로 우리 사이가 가볍진 않았을 텐데.”
노파의 복부에 자리하고 있는 얼굴이 뚜렷한 미소를 짓는다.
“또 무슨 헛소리를 지껄이려고 온 거지?”
“어제 흑탑에서 레바논의 힘이 느껴져서 말이지. 너라면 뭔가 알고 있을 텐데?”
바알의 물음에 나는 내심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여기서 흑탑까지 거리가 얼만데 그걸 느꼈다고?’
“고작 그딴 거나 물으려고 왔다고?”
“고작이라니? 네가 아무것도 몰라서 그러나 본데, 그건 엄연한 중대 사안이다. 넌 내가 왜 이리저리 신도들의 몸에 옮겨 다니는지 모르는 건가?”
“베논한테 패배하고 힘을 회복하지 못해서 그런 거겠지.”
내가 귀찮다는 티를 내며 퉁명스럽게 대꾸하자.
바알은 껄껄 웃으며 눈을 치켜뜬다.
“물론 그게 결정타였다는 건 동의한다. 그러나 내가 베논한테 패배한 결정적인 이유가 신도들에게 개입했기 때문이라는 걸 알면, 네 생각도 바뀔 수밖에 없겠지.”
‘신도들에게 개입을 했기 때문에 패배한 거라고?’
대관절 저게 무슨 개소리란 말인가?
“믿지 않는 모양이군. 하지만 엄연한 사실이다. 신이 인간에게 직접 개입하면 할수록, 신은 점점 힘을 잃고 인간과 가까워져 가지.”
‘음… 확실히 놈의 꼬락서니를 보면 묘하게 일리가 있는 것 같긴 한데…….’
놈은 왜 나한테 저런 말을 하는 것일까.
“그래서, 나한테 그런 말을 하는 이유가 뭔데?”
“별다른 이유는 없다. 그저 단순한 조언일 뿐.”
“…조언이라고?”
내 말에 복부의 얼굴이 위아래로 출렁거린다.
“레바논을 거부하고 있는 네게는 큰 조언일 텐데? 막말로 네가 레바논의 직접적인 개입을 지속적으로 끌어낼 수만 있다면…….”
바알은 음흉한 웃음을 지으며 말을 하곤 날 응시한다.
“너는 네가 원하는 그 이상의 결과를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레바논을 소멸하는 것도 가능하겠지.”
“그러니까 나보고 레바논의 화를 돋우어서 개입을 하게 하라?”
내가 어이없어하며 놈을 바라보자.
바알의 눈썹이 좌우로 으쓱거린다.
“나는 불씨를 건넸을 뿐, 그걸 키울지 아니면 밟아서 끌지는 네 몫이다.”
‘허…….’
놈은 진심으로 내게 조언을 한 것일까?
‘이제는 놈이 내 편으로 보이기까지 하네.’
아무리 영원한 친구도 적도 없다고 해도 그렇지.
놈의 말을 마냥 믿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더 쉬운 길이 있다면 네놈이 나의 신도가 되는 것이겠다만. 이만하면 됐다. 이제 돌아가지.”
“예, 바알 님.”
공손하게 대답한 노파가 옷자락을 내리려 하자.
나는 갖고 있던 의문 하나를 바알에게 던졌다.
“나도 하나 묻자. 신이 인간에게 직접 개입하면 할수록 인간과 가까워진다고? 그럼 반대로 신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 건데?”
하나 바알에게선 어떠한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꾸벅-
노파가 조용히 왔던 것처럼 조용히 사라지자.
나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개입을 하면 할수록 힘을 잃는다라…….’
그럼 레바논이나 베논이 개입할 상황을 많이 만들어 내면.
그만큼 두 신의 힘이 약해진다는 뜻일 터.
‘하지만 놈의 말을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모르겠네. 사실을 확인할 방법도 마땅찮고.’
그저 고민만 깊어지는 하루다.
* * *
3일 뒤.
흑탑의 중심 층.
저주학파의 거대 연구실 안.
“아직 별다른 소식은 없습니까?”
내가 옆에서 하품을 하며 묻자.
보라카 부탑주가 들고 있던 공구 따위들을 내던지며 한숨을 내쉰다.
“아직 이렇다 할 진전이 없네.”
신성력 착즙기를 노려보며 말을 이어 가는 보라카 부탑주.
“자네도 알다시피 우리와 마찬가지로 신관 놈들도 심장에 신성력을 축적하지 않나? 고로 신성력을 빼내려 하면 당연히 심장에도 영향이 가서 그런지 전부 죽어 버리더군.”
“…그렇습니까?”
“그런데 말일세. 자네는 대체 이걸 어디다 써먹으려고 이런 난제를 내게 맡긴 건가?”
보라카의 물음에 나는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어떤 물건이건 간에 다 쓸데가 있기 마련이죠.”
“신관들의 신성력만 빼내고 노예로 굴리는 취미가 있다면야 이해를 하겠네만, 그럼 심장 적출 저주를 쓰는 편이 나을 거고. 흠…….”
보라카가 턱수염을 어루만지던 그때.
콰아아아앙-
갑자기 요란한 굉음이 연구실 안을 뒤흔들어 놓는다.
“이번에는 또 누구냐!”
그러나 보라카 부탑주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폭음이 들려온 방향에 대고 삿대질을 한다.
“이런 일이 익숙하신 모양입니다.”
“저런 일을 하루 이틀 보는 것도 아니니 말이네. 어떤 얼간이인지는 몰라도 내가 단단히 혼쭐을…….”
투덜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던 보라카 부탑주가 갑자기 몸을 움찔거린다.
“저, 저건! 이보게, 흑남! 흑남! 저걸 보게! 오오… 맙소사…….”
보라카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헐레벌떡 달려가자.
나는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대체 뭔데 저러는 거야?’
나도 곧장 보라카의 뒤를 쫓았다.
“당장 뒤로 나와라! 당장!”
어느새 몰려든 흑마법사들을 쫓아낸 보라카가 내게 손짓을 해 온다.
“빨리 오게!”
“대체 무엇 때문에 그러시는 겁니까?”
“저걸 보게! 저것 말이네!”
‘저 회오리 같은 걸 말하는 건가? 근데 엄청 작긴 하네.’
내가 깨진 유리 파편들 위의 웬 작고 검은 회오리 같은 걸 바라보던 중.
“드디어… 드디어 변화를 보였구나.”
보라카 부탑주가 감격하여 조용히 중얼거린다.
“부탑주님, 저게 도대체 뭔데 변화를 보였다고 하시는 겁니까?”
“정말 몰라서 묻는 겐가? 저게 자네가 줬던 그 물 아닌가?!”
“…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