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카데미의 노예가 살아남는 법-111화 (111/200)

111.

“…….”

대신관의 말에 제이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느낌을 받았다.

흑남이 첩자들을 어떻게 처리했는지 그녀가 알 도리는 없었으나.

만약 데우스가 흑남을 위협하는 일이 생긴다면 흑남과 함께 구상했던 계획들에 차질이 생기고 만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가요?”

“이 안가 말입니다. 딱 봐도 버려진 지 오래됐습니다. 그런데 갈프 신관이 우리에게 알렸던 위치는 이곳이었죠. 성녀께선 이게 과연 뭘 의미하는 거라 생각하십니까? 갈프 신관이 진작 레바논을 배신하고 흑마법사들의 편에 붙었을 거란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데우스 대신관의 말은 분명히 일리가 있었으나.

제이나는 그의 말에 결코 동의할 수 없었다.

“고작 안가 한 채잖아요? 이것만으로 갈프 신관의 상황을 어떻게 다 파악할까요. 서신에는 미처 담지 못한 사정이 있을 수도 있어요.”

“저도 그러길 바랍니다만… 시작부터 연달아 차질이 생겨 버리니 참 난감하군요. 어쨌건 갈프 신관을 만나야 의심도 풀고 혼인도 거행을 할 텐데 말이죠.”

뭘 시작해 보기도 전부터 계획이 막힌 탓인지.

데우스 대신관은 팔짱을 낀 채 한참 동안 안가를 노려본다.

“이곳 말고도 몇 군데에 다른 안가도 있다면서요. 일단 그곳들을 둘러보는 건 어때요? 뭔가 단서를 찾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안가를 전부 다 둘러보자고요?”

픽 비웃음을 흘리는 데우스 대신관.

“안가가 뭉쳐 있는 것도 아닌데 그걸 언제 다 둘러보고 있습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는 삼가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럼 어쩌자는 건가요?”

“지금 생각 중이니 조용히 좀 해 주시죠.”

데우스 대신관이 짜증스럽게 답하자.

제이나는 입을 꾹 다물어 버렸다.

“흐음… 이거 좀처럼 답이 나오질 않는군요.”

데우스 대신관이 흑탑 방면을 향해 고갯짓한다.

“일단 흑탑 주변으로 가서 상황을 좀 지켜보는 게 좋겠습니다. 혹시 압니까? 레바논 님의 은혜로 곧바로 갈프 신관을 직면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

‘랄프, 제발 흑탑에서 나오지 마. 제발…….’

* * *

데우스와 함께 흑탑 인근으로 이동한 제이나.

“흠…….”

그들은 몇 시간이고 흑탑 인근을 배회했으나.

그토록 고대하던 갈프 신관의 모습은 찾아볼 수조차 없었다.

“이제 좀 있으면 해가 질 거예요.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하나요?”

“저라고 좋아서 이러고 있는 줄 아십니까? 애당초 성녀님께서 성공적으로 일을 끝마치셨다면 이 고생을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건 아크 신관장이…….”

“그 멍청한 늙은이의 책임도 있지만, 성녀님의 책임도 있는 겁니다. 아시겠습니까?”

모욕에 가까운 대신관의 언사에 언성을 높일 법도 하건만.

제이나는 이번에도 입만 꾹 다물 뿐이었다.

“입을 다무시니 좀 낫군요. 이제 날도 저무는 것 같으니 여관으로 돌아가시죠.”

‘그건 방금 내가 한 말이잖아!’

하나 아직 분노를 표출할 시간이 아니다.

지금은 좀 더 기다려야만 한다.

“그래요. 여관으로 돌아가요.”

“잠깐…….”

데우스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한쪽을 우두커니 바라보자.

‘뭘 보고 있는 거지?’

제이나도 그를 따라 같은 방면을 쳐다봤다.

“이 새끼들! 똑바로 안 걸어?!”

“빨리빨리 움직여라! 늦장 부리는 놈은 즉각 목을 날려 버린다!”

시선의 끝자락에는 밧줄에 줄줄이 엮여 흑탑으로 끌려가는 노예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설마 노예들을 구해 줄 생각이라도 하고 있는 걸까? 대신관이 그럴 사람은 아닐 텐데…….’

“저겁니다.”

“…네?”

제이나가 이해하지 못했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자.

대신관은 곱지 않은 시선으로 그녀를 보며 역정을 낸다.

“말을 하면 빨리 이해를 좀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뭐라고요? 적어도 최소한의 설명이라도 해 줘야…….”

“하아… 지금 우린 언제 갈프 신관을 만날 수 있을지 확신이 없는 상황 아닙니까?”

제이나가 입술을 꽉 깨문 채 고개를 끄덕인다.

“…그렇죠.”

“그러니 우리가 직접 갈프 신관을 찾아 나서자는 겁니다.”

“그 말은… 설마 노예로 변장하기라도 하자는 건가요?”

당황한 제이나를 보며 데우스는 후련한 표정을 짓는다.

“이제야 이해를 하신 모양이군요.”

“하지만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 줄 알고요? 너무 위험한 계획이에요.”

그에 데우스가 픽 조소를 흘린다.

“우리엘 님께서 우리와 함께하고 계시는데 뭐가 걱정이십니까?”

“그렇긴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천사를 소환했을 때의 이야기 아닌가?

“대신관님께서 천사님을 소환하시기도 전에 당할 가능성도 있는 것 아닌가요?”

“그 말씀은… 지금 우리엘 님의 권능을 의심하시는 겁니까?”

불쾌감을 감추지 않으며 말을 이어 가는 데우스 대신관.

“그런 상황이 벌어지면 그때는 성녀께서 갖고 계신 완력을 사용하시면 되겠지요. 물론 그런 일이 벌어질 일은 없겠지만 말입니다.”

“아아…….”

제이나가 고개를 끄덕이자.

대신관은 그녀가 들으라는 듯 허공에 대고 툭 한마디를 내던진다.

“도대체 레바논 님께서 주신 힘을 왜 숨기고 다녔던 건지. 쯧…….”

“…….”

이제는 대놓고 보이는 멸시에 제이나는 당장이라도 대신관을 후려치고픈 마음을 애써 억눌러야만 했다.

‘조금만 더 참자. 조금만 더…….’

“오늘은 일단 물러나고 내일부턴 놈들이 다시 노예를 안에 들일 때를 기다립시다.”

“…그래요.”

먼저 앞장서서 걷는 데우스 대신관의 등을 차갑게 노려보는 제이나.

‘이 사실은 무조건 흑남에게 알려야겠어.’

* * *

일주일 뒤.

절그럭, 절그럭-

“거기 늙은이! 멈추지 말고 계속 걸어!”

후줄근한 차림을 한 제이나와 데우스가 노예 행렬 사이에 끼어 걷고 있다.

“어째 일이 생각보다 쉽게 풀린 것 같네요.”

주변을 힐끔거리며 말을 이어 가는 제이나.

“저번에 비해 뭔가 노예들을 호송하는 흑마법사의 숫자도 줄어든 것 같지 않나요?”

“전부 레바논 님께서 도우신 겁니다. 괜히 이상한 말을 하기보단 흑탑 안에서 어떻게 갈프 신관을 찾을지 고민이나 하시지요.”

데우스는 차갑게 대꾸하곤 함께 걷는 노예들을 슬며시 관찰했다.

‘흠… 일이 잘 풀려서 다행이긴 하다만… 뭔가 느낌이 이상하군.’

보통 사람이 이런 최악의 상황에 처해 있으면 체념하거나 울상을 짓기 마련인데.

어째서 노예들의 표정은 저리도 담담해 보이는 것일까.

‘…단순히 기분 탓인가?’

괜히 알 수 없는 불길함이 피부를 자극하자.

대신관은 분위기를 전환하고자 성녀에게 슬며시 말을 걸었다.

“성녀님, 다시 말씀드리지만 저희는 크라켄 왕국에서 잡혀 온 가족입니다. 그리고 흑탑 안으로 들어가거든 상황을 보고 제가 해야 할 일을 알려…….”

데우스가 진중히 계획을 읊조리던 그때.

덜그럭, 따아아악-

갑자기 스켈레톤의 손바닥이 데우스의 뒤통수에 작렬했다.

“이런 하찮은 언데드 따위가 감히……!”

데우스의 눈에서 불꽃이 치솟던 중.

한 흑마법사가 그들에게 다가와 묻는다.

“머리를 숙이고 있으면 내가 못 볼 줄 알았나 본데, 빨리 걸어라. 아니면 당장 이 자리에서 죽여 줄까?”

“죄, 죄, 죄송합니다.”

데우스 대신관이 모욕감에 몸을 떨며 겨우 사과하자.

제이나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린다.

그그그그긍-

어느덧 거대한 흑탑의 문 앞에 도달한 노예들.

“이제 곧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겠군요. 제가 생각한 거지만 참 괜찮은 계획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잖습니까?”

“아… 네.”

대신관이 자신이 짠 계획에 도취되어 흐뭇해하던 중.

“다 저쪽으로 이동해라!”

갑자기 노예들을 통제하던 흑마법사가 진로를 틀어 옆의 공터로 노예들을 인도하기 시작한다.

“여자는 왼쪽, 남자는 오른쪽에 서라! 빨리 움직여!”

난데없는 통제에 제이나가 그를 흘끔 보며 묻는다.

“어쩔까요?”

“어쩔 수 없군요. 일단은 놈들의 통제를 따르도록 하죠.”

흑마법사의 통제에 따라 삽시간에 인원이 분리되자.

“남자들은 저기에 보이는 건물 안으로 들어가라!”

남자 노예들을 비롯하여 대신관 또한 명령에 따라 커다란 건물 안으로 걸음을 옮긴다.

‘여긴…….’

대신관은 건물 곳곳에 널브러져 있는 뼈다귀들보다도.

눈앞의 상황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설마 저놈들은 전부 흑마법사들인가? 대체 뭘 하려고 저렇게 모여 있는 거지?’

그가 이미 건물 안에 자리하고 있던 흑마법사들을 의구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던 중.

흑마법사들 사이에서 일단의 무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저, 저건!’

무리의 중심에서 흑마법사들을 통솔하고 있는 갈프 신관의 모습이 보이자.

데우스는 속으로 탄성을 내질렀다.

‘드디어 찾았다!’

도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나 했더니.

설마 이런 곳에서 노예들을 관리하고 있었을 줄이야.

‘그래도 명색이 흑남인 놈이 이런 잡일이나 하고 있다니. 뭐… 됐나.’

어쨌건 갈프 신관이 무사하다는 건 확인했다.

이제 그와 접선할 방법만 찾으면 될 터.

“이번 노예사냥도 참 풍년이네.”

“개중에는 아주 큰 사냥감도 섞여 있으니 참으로 그렇습니다.”

갈프 신관이 중년의 남자와 정겹게 대화를 나누자.

데우스는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큰 사냥감?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지? 설마 내가 온 걸 눈치채고 은밀한 신호를 보내고 있는 건가?’

데우스 대신관이 눈알을 데굴데굴 굴리던 그때.

어째선지 갈프 신관이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질문을 해 온다.

“데우스 대신관, 노예 생활은 좀 재미있었나?”

“…….”

갈프 신관의 한마디가 건물을 울리자.

데우스의 표정이 순간 멍해졌다.

‘지금 이게 무슨……. 왜 내 이름을……. 잠깐… 아주 큰 사냥감이라는 게 설마…….’

찰나의 순간 동안 오만 가지 생각이 흘러가는 가운데.

마침내 한 가지 결론이 머릿속의 경종을 울려왔다.

‘이건… 함정이다!’

“우, 우리엘!”

당황한 대신관이 황급히 계약한 대천사를 소환하려던 찰나.

따아아아악-

묵직한 굉음이 건물을 뒤흔들어 놓는다.

“저, 저건…….”

흑마법을 발현하려던 흑마법사들이 당황하는 가운데.

‘어휴, 속이 다 시원하네.’

제이나는 눈을 까뒤집은 채 쓰러진 데우스의 몸 위로 구부러진 미스릴 봉을 던지곤.

잽싸게 자리를 벗어난다.

* * *

털썩-

불의의 일격에 데우스 대신관이 반응조차 못 하고 쓰러지자.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아니, 기절만 시킨다더니 아주 진심으로 때렸네. 저거… 죽은 건 아니겠지?’

솔직히 제이나의 힘을 감안하면 죽었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호오… 살아 있네?’

대신관의 몸이 간헐적으로 떨리는 걸 보아하니 죽진 않은 모양이다.

‘저 정도면 당장 깨어나는 건 무리겠지.’

“이제 됐다. 다들 연기는 그만해도 돼.”

내가 노예들을 향해 소리치자.

노예를 연기하던 흑마법사들이 저들끼리 낄낄거리기 시작한다.

“거참… 노예로 생활하는 것도 의외로 신선하네.”

“그렇긴 한데, 또 하라고 하면 난 못 할 것 같다. 일주일 동안 사람 취급도 못 받고 살았잖아?”

“그래도 이번 일이 잘 끝나면 흑남께서 상금을 두둑이 챙겨 주신다고 하셨잖아? 그 정도 돈이면야 난 몇 번이고 할 것 같은데?”

‘난 그 생활을 5년이 넘게 했다, 이것들아.’

내가 흑마법사들을 보며 혀를 차던 중.

레논이 내게 조심스레 말을 걸어온다.

“그런데 랄프 님, 놈이 정말 대신관이 맞는 겁니까? 아무리 천사가 없다고 해도 그렇지…….”

“뭐, 제 힘도 아닌데 주제를 모르고 까불던 놈의 말로인 거죠. 그리고 놈이 정말 대신관인지 아닌지는 놈의 심장을 까 보면 알지 않겠습니까?”

내 물음에 레논은 수긍하곤 흑마법사들을 향해 소리친다.

“놈에게 심장 적출 저주를 걸어라.”

“예!”

이미 대기 중이던 흑마법사들이 대신관의 몸에 저주를 구현하려던 그때.

화아아아악-

갑자기 대신관의 몸에서 환한 빛이 흘러나오기 시작하더니.

빛이 점점 천사의 형상을 띠어 가는 것 아닌가?

‘이건 또 무슨 상황이야. 설마 기절한 척하고 있었던 건가?’

하나 생각할 시간은 없었다.

천사가 이곳에 소환되기라도 한다면 필시 많은 피가 흐르게 될 터.

“펠기누스.”

나의 나지막한 읊조림에.

콰자자자작-

열두 장의 흑백 날개를 단 천사가 균열을 찢고 나와 내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오랜만이네요. 자주 좀 불러 달라니까…….]

“인사는 나중에. 눈앞의 저것 보이지? 해결할 수 있겠어?”

[흐음… 여기서 우리엘을 보게 될 줄이야…….]

펠기누스가 선명한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죽이는 건 불가능하겠네요.]

“죽일 필요도 없어. 천사가 튀어나오지 않기만 하면 돼.”

[계약자는… 기절해 있네요? 이러면 잠깐 손만 보면 되겠네요.]

펠기누스가 미소의 잔상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고 몇 초나 지났을까.

아아아아아아아-

난데없이 대신관의 몸에서 여인의 기이한 울부짖음이 터져 나오더니.

건물을 뒤덮던 빛이 점차 잦아들어 간다.

“지금이다! 놈을 수호하던 천사의 힘이 약해졌을 때 빨리 심장을 빼내!”

“예!”

흑마법사들이 다시 대신관의 몸에 달라붙어 저주를 퍼붓자.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여인의 울부짖음이 귀를 찢을 것처럼 울려오다 한순간 정적이 흐른다.

‘…성공한 건가?’

“흑남님! 무사히 저주를 걸었습니다!”

한 흑마법사가 활짝 웃으며 환하게 빛나는 심장을 들어 보인다.

‘후우… 저주가 잘 통한 모양이네. 심장을 빼앗겼으니 이제 대신관도 일반인이나 다름없겠어.’

어차피 놈도 천사를 소환하기 위해선 막대한 양의 신성력을 필요로 할 것인데.

내가 신성력을 담아 두는 심장을 빼앗았으니 놈은 천사는커녕 성마법조차 사용할 수 없을 것이다.

“심장을 갖고 와라.”

“예, 흑남님. 여기 있습니다.”

나는 대신관의 심장을 큰 병에 잘 담으며 생각했다.

‘제이나에게도 저주가 먹혔다면 차라리 편했을 텐데. 그건 아쉽네.’

나는 그 어떤 저주도 우습게 튕겨 내는 제이나의 질긴 피부를 떠올리며 혀를 찼다.

* * *

다음 날, 아침.

“으으으… 으으으으…….”

침대 위에 죽은 듯 누워 있던 남자가 몸을 비튼다.

‘이제 일어난 건가.’

대신관이 깨어날 조짐을 보이자.

나는 의자를 빼내어 침대 옆에 앉아 놈을 관찰했다.

“으으으… 으아아아! 크윽…….”

이윽고 벌떡 일어난 대신관이 다시 뒤통수를 잡고 쓰러지자.

난 픽 실소를 흘렸다.

“으으… 여긴…….”

반쯤 감긴 눈이 상하좌우로 구르더니 곧 나를 응시한다.

“갈프… 신관?”

“예, 하루를 꼬박 누워 계셨습니다.”

“으으… 여기는 어디지?”

대신관의 물음에 나는 느긋하게 입을 뗐다.

“어디긴요? 지옥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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