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
“…네?”
제이나가 휘둥그레진 눈망울을 끔뻑거리자.
나는 손을 휘저으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아직 확실한 건 아니니까 일단 흥분 좀 가라앉혀.”
“그래도… 방법이 있긴 있다는 거잖아요?!”
“그렇긴 한데 가능성도 희박하고, 무엇보다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는 나도 몰라. 그러니 기대하진 않는 편이…….”
덥썩-
“고마워요. 정말로 고마워요.”
기쁨과 흥분을 주체하지 못한 것일까.
나를 끌어안은 제이나의 목소리에서 미세한 떨림이 느껴진다.
‘아직 뭐 하나 이뤄진 게 없는데 고맙긴 뭐가 고맙다는 건지…….’
나는 겸연쩍어하며 그녀를 밀어내며 입을 열었다.
“일단 진정해. 그렇게 흥분해선 내 말도 안 들릴 테니까.”
“후우, 후우… 그럴게요.”
그녀는 몇 번 깊이 숨을 들이쉬곤.
아까보다 차분해진 눈으로 날 응시한다.
“이제 계속 이야기를 해 보자고. 만약 그 희박한 가능성이 제대로 먹혀서 내가 널 성공적으로 돕는다고 치자. 그럼 넌 나한테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지?”
“…감정이라곤 조금도 없는 돌덩이 같으시네요.”
제이나가 나를 흘겨보다가 장난스러운 웃음을 짓는다.
“당신이 원하는 거라면 뭐든지 도울게요.”
“씁…….”
난 깍지 낀 두 손을 턱에 괸 채 이맛살을 찌푸렸다.
“제이나, 난 그렇게 애매모호한 답을 썩 좋아하지 않아. 좀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를 해 줬으면 하는데. 예를 들어 내 주머니를 두둑이 채워 주겠다거나, 레바논의 가슴에 일격을 먹일 수 있는 중대한 비밀을 알고 있다든가, 뭐 그런 것?”
“아아, 그런 도움을 말하는 거였군요?”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제이나가 테이블을 탁 내려치자.
테이블이 힘없이 주저앉는다.
‘이런 미친…….’
나는 앞으로 고꾸라지려던 몸을 겨우 붙잡곤 그녀를 흘겨봤다.
“미, 미안해요. 너무 기분이 좋아서 그만 주체를 못했네요. 흠흠, 여하튼 제가 당신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방법은 많죠. 저희 왕국만이 알고 있는 고대 신들의 무덤이라든가, 레바논이 비밀리에 관리 중인 광산의 위치도 알려 줄 수 있고요.”
그녀의 대답에 난 군침을 삼켰다.
‘호오… 아무리 레바논의 실세가 교황이라고는 해도, 제이나도 그 중추에 있던 여자인데 내가 너무 과소평가를 했네.’
내 눈에는 그저 괴물 같은 힘만 가진 아둔한 여자로 보였으나.
엄연히 그녀는 대륙의 찬사를 받는 성녀이잖은가?
‘가만있자. 이러면 일단 제이나를 레바논에게서 완전히 떼어 놓는 게 급선무고, 그다음에는…….’
내가 제이나를 보며 깊이 생각에 잠겨 가던 중.
그녀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내 귓전을 울려온다.
“그리고 또 도움을 드릴 만한 게 뭐가 있을까……. 아! 이건 당신과도 관련된 일이니 도움이 될 거예요!”
“나와 관련된 일?”
“대신관이 갈프 신관을… 정확히는 당신을 돕기 위해 검은 대지로 왔어요.”
‘…대신관이 검은 대지에 왔다고?’
대신관의 방문이라니.
이건 단순히 여길 사안이 아니었다.
‘설마 교황이 칼을 빼 든 건가…….’
레바논을 수호하는 열두 자루의 검이라고도 불리는 대신관들.
그들이 계약한 천사들은 저마다 권능을 갖고 있어.
소드마스터 몇 명과 싸워도 능히 감당할 수 있다고 들었다.
‘아냐, 그건 아닐 거야. 대신관이 나를 돕기 위해 검은 대지에 왔다고 했잖아? 이걸… 믿어야 하는 건가?’
솔직히 의구심이 들긴 했지만.
제이나가 이 상황에서 거짓말을 할 이유는 없을 터.
‘그렇다면 대신관이 날 도우러 온 이유를 생각해 봐야 할 텐데……. 혹시 교황 쪽에서 뭔가 수상쩍은 낌새를 느낀 건가?’
날 돕는다는 것은 그저 단순한 명분일 뿐이고.
나를 감시 혹은 제거하려는 게 대신관의 목적일 수도 있는 것 아닌가?
“대신관이 정말 날 도우려고 온 게 맞아? 다른 이유는 없고?”
“적어도 제가 그에게서 들은 바로는 그랬어요.”
제이나가 데우스 대신관과 나눴던 말들을 내게 간략히 설명해 주자.
나는 그제야 나름대로 판단이 서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내가 성녀와의 결혼을 밀어붙이다가 흑마법사들에게 탄핵당할 위기에 처했다고 자기들끼리 지레짐작을 했다? 이종족과 매칭을 한 것도 그 일환이라고 본 거고?’
나는 잠시 테이블을 톡톡 두드리다가.
곧 이 상황을 정의할 수 있는 한마디를 떠올렸다.
‘참 상상력이 풍부한 미친 새끼들일세…….’
대체 뭘 어떻게 하면 그런 착각을 할 수 있는 것이란 말인가?
‘도무지 납득이 가진 않는다만, 어쨌건 그나마 다행이긴 하네. 그렇다고 마음을 놓을 수 있는 상황도 아니지만…….’
“대신관은 지금 어디에 있는데?”
“아마 여관에서 쉬고 있을 거예요.”
“흠…….”
나는 곰곰이 생각했다.
‘만약 대신관이 약물에 절여진 첩자들을 보게 된다면 일이 귀찮아져. 흑마법사들을 모아서 처리를 해야 되나…….’
하나 검은 대지 안에서 대신관이 죽는다면.
레바논과의 전쟁은 피할 수 없으리라.
‘까짓것 전쟁이야 하면 그만이지만, 아직 내 이중 신분을 들키고 싶진 않은데……. 은밀하게 처리를 하고 발뺌을 하는 것도 생각을 해 봐야겠어.’
다만, 그 전에 먼저 첩자들이 사용하던 안가의 위치를 옮기는 게 급선무다.
‘이미 몇 번 옮기긴 했지만 이참에 또 옮기게 해야겠어.’
“어떤가요? 갈프 신관인 척하는 당신에게는 제법 도움이 되는 정보죠?”
제이나가 눈을 찡긋거리자.
‘뭐… 제이나가 말해 주지 않았다면 대신관에게 갈프 신관이 나라는 사실을 들킬 수도 있었을 테니까.’
나는 입을 달싹거리다가 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확실히 도움이 됐다.”
“그럼 절 도와줄 건가요?”
“좋아. 대신 일이 완벽히 끝나기 전까지는 내가 시키는 대로 해.”
* * *
다음 날, 아침.
‘어우… 피곤해 죽겠네.’
날밤을 새우며 아크가 만들었다던 포털을 찾아내어 폐쇄하고.
안가를 옮기고 첩자들을 통솔한 탓인지 짙은 피로감이 내 몸을 잠식해 온다.
‘이제 이쪽은 얼추 마무리가 되긴 했는데… 제이나는 대신관한테 잘 변명을 했을는지 모르겠네.’
일단 제이나에게는 아크 교수가 만들었던 포털도 막혀 있었고.
흑카데미의 경계가 워낙 철저하여 나를 만나 보지도 못했다 거짓말을 하라고 했었다.
‘그리고…….’
내가 잠을 깨기 위해 뺨을 후드리던 그때.
똑똑-
“랄프 님, 접니다.”
“들어오시죠, 부탑주님.”
나와 마찬가지로 피로한 기색이 역력한 레논 부탑주가 안으로 들어온다.
“위장 첩자들의 이동을 끝냈습니다. 흑탑 인근으로 경계 병력도 늘렸으니 대신관이라고 해도 섣불리 움직이진 못할 겁니다.”
“오밤중에 갑작스러우셨을 텐데 고생하셨습니다.”
“하지만…….”
잠시 말꼬리를 흐리던 레논이 슬며시 의문을 드러낸다.
“굳이 우리가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는지 의구심이 들더군요. 정말 대신관이 흑탑 인근에 머무르고 있다면, 놈을 찾아내어 죽이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부탑주님의 말씀도 맞습니다. 죽이는 게 빠르고 또 편하죠. 그저 여러 변수 때문에 놈을 살려 두고 있는 겁니다.”
이미 이쪽은 대신관을 맞이할 준비를 끝마쳤다.
다만…….
‘분명 레바논 그 쌍년이 대신관과 제이나를 주시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으니까 살려 둔 거지만.’
제이나를 레바논에게서 완전히 해방시키기 전까진.
대신관을 놔두는 편이 나을 거라 생각했다.
“변수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자세히 말씀을 드리기는 어렵고, 일단 저를 믿고 기다려 보시죠.”
“…알겠습니다. 나가시는 겁니까?”
나는 웃옷 위에 로브를 두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보라카 부탑주를 만나 봐야 해서 말입니다.”
* * *
흑탑 안.
레논과 헤어진 난 곧장 저주학파의 둥지가 있는 탑의 중심부로 이동했다.
내가 수백 명은 족히 수용할 수 있는 널따란 회장으로 들어서자.
“키키기긱! 키이익!”
“그, 그만! 그만해… 제발…….”
“차라리 그냥 죽여…….”
갖가지 저주에 몸이 반쯤 녹아내린 노예들과 이종족들의 비명 소리가 나를 맞이했다.
“이건 효과가 별론 것 같은데? 이것 봐, 아직 눈알이 굴러다니고 있잖아?”
“이상하네… 분명 이론상으론 완벽한 것 같았는데…….”
‘차라리 혼절시켜 놓고 하든가. 쯧…….’
내가 최소한의 자비조차 베풀지 않는 흑마법사들을 지나치려던 찰나.
“다시 해 봐. 이 정도 폭발력으로는 어디 가서 폭발 저주라고 말도 못 해. 흑마력을 더 불어넣어… 어어… 흑남님?”
저주 연구에 매진하던 젊은 흑마법사 한 명이 얼른 고개를 수그려 보인다.
“보라카 부탑주님은 어디 계시지?”
“항상 계시던 곳에서 연구에 몰두하고 계시는 중입니다.”
“그래? 알았다.”
나는 곧장 무리를 지나 지옥도 가운데로 걸음을 옮겼다.
“아아아아아악! 또! 또 실패야!”
이윽고 양손에 병을 든 채 괴성을 지르는 노인이 보이자.
나는 혀를 내둘렀다.
‘저 양반은 진짜 하루 종일 저주 연구만 하고 있네.’
보라카 부탑주.
저주학파의 수장으로 저주 외에도 전반적으로 박학다식한 인물이었으나.
연구에 워낙 미친 양반이라 회의가 열릴 때도 모습 보인 적은 거의 없었다.
아아아아아아악-
노인의 괴성이 다시금 공간을 울릴 무렵.
“보라카 부탑주님.”
난 슬며시 그의 옆으로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
“오, 자네인가? 마침 잘됐군! 잠시 이것 좀 보게!”
회색 빛깔의 액체를 담아 놓은 병을 흔들어 보이는 보라카 부탑주.
“이 물 말이네. 정말 어디서 구했는지 알려 줄 생각이 없는 건가? 대관절 이놈의 물을 누가 만들어 냈는지 궁금해서 미칠 것 같아서 그러네!”
“저도 잘 모르니 해박하신 부탑주님께 맡긴 것 아니겠습니까?”
하나 나의 변명에도 부탑주는 눈을 희번덕거리며 소리친다.
“거짓말하지 말게!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이 희한한 걸 몇 병이나 내게 줄 수가 있나?!”
“하하, 그렇게 말씀하셔도 저는 정말 모릅니다.”
나는 아무렇지 않게 거짓말을 늘어놓으며 생각했다.
‘내가 원산진데 그걸 알려 주겠냐?’
병 안에 있는 물의 정체.
그건 내가 갖고 있음에도 나조차 그 정체를 모르는 회색 힘을 담은 물이었다.
“…정말 모르는 겐가?”
보라카 부탑주가 여전히 의심의 끈을 놓지 않자.
나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정말 모릅니다. 그리고 오늘은 그 물 때문에 부탑주님을 찾아온 게 아닙니다.”
나는 주머니에서 물건 하나를 꺼내어 보라카 부탑주의 앞에 내놓았다.
덜그럭, 덜그럭-
헤드셋처럼 생긴 물건이 당장이라도 사슬을 풀어 버릴 듯 요동치자.
“흐음…….”
물건을 이리저리 살피던 보라카 부탑주가 고개를 돌려 나를 응시한다.
“저주받은 물건은 아닌 것 같은데. 이게 뭔가?”
“신성력 착즙기입니다.”
“아아, 근데 이걸 왜 내게 보여 주는 겐가?”
심드렁하게 대답하는 보라카 부탑주를 보며.
나는 얼른 대화를 이어 나갔다.
“이 물건에 대해서 잘 아시는 것 같으니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죠. 부탑주께서도 잘 아시겠지만 이 물건으로 신성력을 착취하면 착취당한 대상은 죽게 됩니다. 착취한 게 장비라면 장비는 박살이 나고요.”
“그렇지. 이보다 쓸데없는 물건이 있나 싶을 정도로 형편없는 물건이지. 그보다는 이 물에 대해…….”
보라카 부탑주가 화제를 돌리려 하자.
나는 잽싸게 그의 말을 끊어 버렸다.
“이걸 개조해 줄 수 있으십니까?”
“…나보고 개조를 해 달라고?”
“네. 신성력을 착취해도 그 대상이 안 죽도록 개조를 해 주셨으면 하는데, 가능할까요?”
내 물음에 보라카 부탑주가 구시렁거리기 시작한다.
“아니… 이보게, 흑남. 난 지금 자네가 준 희한한 물을 연구하기에도 바쁘네. 그러니 저런 괴이한 장비에 시간을 낭비할 수는…….”
“만약 부탑주께서 개조하는 데 성공하신다면, 저 물을 어디서 구했는지 알려 드리죠. 어쩌시겠습니까?”
‘이래도 안 넘어와? 이래도?’
내가 그의 눈앞에 지식욕이라는 미끼를 흔들어 보이자.
“당장 개조에 착수하도록 하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덥석 미끼를 물어 버리는 보라카 부탑주.
“전원! 지금 당장 하던 것들을 모두 멈추고 내 앞으로 집합해라!”
흑마법사들이 어리둥절해하며 그의 앞으로 모여들자.
보라카 부탑주는 신성력 착즙기를 가리키며 소리친다.
“오늘부터 모든 연구들은 잠정 중단 하고 이 물건의 개발을 우선한다! 카르단! 당장 감옥에서 성기사들과 신관들 좀 꺼내 와라! 그리고 안느! 넌 언데드 공방에 가서 드워프들을 불러오거라! 당장!”
“아… 예…….”
눈이 뒤집힌 보라카의 일갈에 흑마법사들 사이로 수군거림이 번진다.
“아오… 할 일도 많은데…….”
“부탑주님의 눈을 봐. 저건 이미 완전 맛이 간 눈빛이야. 저 상태가 되면 우리가 무슨 말을 해도 안 들어 먹으시는 것 잘 알잖아? 포기하면 편해…….”
“시끄럽다! 다들 가만히 있지만 말고 움직여!”
‘후우… 이만하면 이제 활시위는 당긴 셈이고. 이제 이 작업이 성공적으로 끝날지가 관건인데…….’
사뭇 긴장감이 들자.
나는 보라카 부탑주의 행동을 면밀히 주시했다.
* * *
한편, 같은 시각.
흑탑의 외곽 끝에 위치한 숲.
한 쌍의 남녀가 인적 없는 집을 바라보고 있다.
“…의아하군요. 갈프 신관의 보고에 따르면 분명 이 집이 첩자들이 사용하던 안가였을 텐데 말이죠.”
데우스 대신관이 의문을 표하자.
옆에 있던 제이나가 나지막이 말한다.
“흑마법사들에게 걸려 급히 자리를 뜬 건 아닐까요?”
“허… 그럴 수도 있겠죠. 하지만 집의 상태를 보시죠. 딱 봐도 낡아 빠진 게, 꽤나 오랜 시간 방치되어 있었던 것 같지 않습니까? 급히 자리를 뜬 건 아닐 겁니다.”
데우스 대신관이 게슴츠레한 눈으로 허름한 집을 응시하며 말을 이어 간다.
“첩자를 만나서 갈프 신관을 만날 수 있게 다리를 잇게 하려고 했건만… 아무래도 좀 더 상황을 살펴봐야 할 것 같군요. 어쩌면… 최악의 상황이 벌어진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최악의 상황이라니요?”
대신관은 도대체 낡은 안가를 본 것만으로 무슨 상황을 떠올린 것일까?
“그러지 않길 바라야겠습니다만, 첩자들이 레바논을 배신했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겠지요. 혹은 첩자들 사이에서 배신자가 나와 흑마법사들에게 걸려 전부 끌려갔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데우스 대신관이 흑탑이 있는 방향을 응시하며 싸늘히 말한다.
“갈프 신관이 우리를 배신하고 첩자들의 위치를 불었다든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