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카데미의 노예가 살아남는 법-109화 (109/200)

109.

아무리 갈프 신관이 위장 흑남이 됐다고 한들 그 뿌리는 신관이건만.

이종족과의 문란한 생활이라니?

“방탕한 생활을 하고 있다라……. 이 일을 어떻게 봐야 할지 모르겠군.”

“혹시 권력에 취해 타락의 길에 들어선 게 아닐는지요.”

“흠…….”

의견이 서서히 한쪽으로 치우치자.

슈바츠의 시선도 아크 신관장에게 향한다.

“아크 신관장, 갈프 신관은 누구보다 신실하여 타락할 일은 없을 거라고 내게 장담을 하지 않았었나?”

“허허…….”

아크 신관장이 아무런 답도 못 하자.

슈바츠는 좌중에게 질문을 던진다.

“만약 보고가 사실이라면 흑남과 성녀의 혼인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나?”

“허허, 반드시 성사될 겁니다. 갈프 신관이 타락한 건 별개로 치더라도, 아직 그가 우리를 배신하진 않았잖습니까?”

아크 신관장이 서둘러 스스로를 변호해 보고자 했으나.

“솔직히 전 잘 모르겠습니다. 저런 난해한 취향을 갖고 있는 갈프 신관이 과연 우리 명령을 따르려 할까요?”

“우리가 계속 성녀와 결혼을 하라고 압박한다면, 악에 받친 갈프 신관이 정말 우리를 배신할 수도 있을 겁니다.”

좌중 대부분이 그와 반대로 부정적인 의견을 내보인다.

“허허, 대신관님들의 말씀도 일리가 있습니다. 하나 설마 갈프 신관이 여자 때문에 우리를 배반하겠습니까? 제 생각은 다릅니다.”

“말해 보게.”

교황이 고개를 까닥이자.

아크 신관장은 좌중을 보며 자신 있게 소리친다.

“갈프 신관은 우리에게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고 있습니다.”

“그게 무슨…….”

“허허, 어째서 그 신실하던 갈프 신관이 저런 기행을 벌이고 있겠습니까? 갈프 신관은 우리에게 신호를 보내고 있는 겁니다!”

흐름이 넘어가지 않도록 계속 말을 이어 가는 아크 신관장.

“우리가 신탁으로 인해 갈프 신관과 성녀를 결혼시켜야 하기는 해도, 솔직히 다들 마음 한편이 편치 않으실 겁니다. 그렇지요?”

아무리 갈프 신관이 위장 흑남이라고 해도.

어쨌건 표면상으론 흑남과 성녀가 결혼을 치르는 것이다.

흑마법사가 그 더러운 발을 대신전에 들이미는 꼴인데 좋을 리가 없잖은가?

“크흠… 우리가 레바논 님의 뜻을 어찌 알겠나? 다 이유가 있으시겠지.”

“허허, 우리도 이렇게 거부감을 느끼는데 하물며 흑마법사들은 어떻겠습니까?”

“어떻고 자시고 간에 그게 무슨 상관인가? 본론을 말하게, 본론을!”

대신관의 역정에도 아크 신관장은 꿋꿋이 말을 이어 간다.

“허허허, 흑탑에 보냈던 사자가 아직도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이게 무얼 의미하는 것이겠습니까? 놈들도 이를 악물고 이 결혼을 반대하고 있다는 것이겠지요.”

아크 신관장은 좌중을 보며 최후의 한마디를 던진다.

“따라서 갈프 신관은 성녀와 혼인하길 누구보다 간절히 원하지만! 흑마법사들의 맹렬한 반대를 이기지 못하고 몸을 사리고 있다, 이게 저의 추측입니다.”

그의 설득이 어느 정도 효과가 있었던 것일까.

일부 대신관들이 고개를 주억거린다.

“흠… 그리 볼 수도 있겠지. 하나 이종족들과 방탕한 생활을 보내고 있다는 건 어찌 설명할 텐가?”

“그건… 허허…….”

그것만큼은 도무지 변호하기 어려웠던 걸까.

“흑마법사들의 압박을 피하기 위한 눈속임일지도 모르지요.”

아크 신관장이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던 중.

슈바츠가 넌지시 대화에 끼어든다.

“어쨌건 우리는 신탁을 따라 거룩한 혼약을 성사시킬 필요가 있다. 하나 아크 신관장의 말처럼 지금 갈프 신관이 흑탑에서 거센 압박을 받고 있어, 직접적으로 움직이지 못하는 상황에 놓여 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니 이렇게 하지.”

“오오, 좋은 방도가 있으신 겁니까?”

그에 슈바츠는 아련한 옛 기억을 떠올리며 운을 뗀다.

“자네들도 알겠네만 내 어릴 적엔 말일세. 식을 올릴 형편이 되지 않아 방에 촛불만을 하나 켜 두고 서로 사랑을 맹세하는 경우도 많았네. 그렇잖은가?”

“교황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나도 그리했는데 하물며 성녀와 갈프 신관도 그러지 말라는 법은 없잖은가?”

좌중의 얼굴에 의문들이 떠오르자.

슈바츠가 명쾌한 해답을 내어놓는다.

“다시 성녀를 검은 대지로 보내어 몰래 갈프 신관과 혼인을 올리게 하는 걸세! 그리하면 갈프 신관도 부담이 덜할 것이고, 우리도 신탁을 지키게 되는 것 아니겠나?”

“오오오오!”

“과연 그런 방법이!”

연륜이 만들어 낸 묘수에 좌중은 감탄을 금치 못한다.

“참으로 훌륭한 계획입니다! 레바논 님께서도 크게 기뻐하실 겁니다!”

“교황님께서 레바논의 중심에 굳건히 자리하고 계시는 이상, 레바논의 번영은 계속되겠지요!”

대신관들의 아부에 슈바츠의 입꼬리도 절로 올라간다.

“크흠… 성녀가 검은 대지로 건너가기 위해선 시간이 필요할 터이니, 먼저 갈프 신관에게 서신을 보내어 상황을 알리고 준비하게 하도록 하지. 그리고 데우스 신관장!”

“예, 교황님.”

“우리 성녀님께서 고초를 겪는 일이 없으시도록 성녀님을 보필하게. 그리고 갈프 신관이 겪는 어려움도 해결할 수 있으면 해결해 주게. 자네라면 흑마법사 수백과 싸워도 능히 감당할 수 있을 테니 말일세. 가능하겠나?”

슈바츠의 물음에 데우스 신관장이 무릎을 꿇은 채 소리친다.

“교황님의 명령을 따르겠습니다!”

* * *

삼 주 뒤.

‘하아… 어렵네.’

나는 양피지를 노려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대충 조금이라도 느낌이 오면 그냥 바로 결혼을 할 텐데. 어째 끌리는 여자가 없냐.’

이제껏 꽤나 많은 매칭을 했건만.

그녀들 중 내 마음을 흔들어 놓는 여성은 없었다.

물론 그녀들이 부족했던 건 아니다.

‘몇 가지 부족한 부분은 있더라도 그걸 상회하는 수십 가지의 매력들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 여자와 결혼해도 괜찮다는 느낌은 안 들었단 말이지.’

차라리 전에 만났던 마동타 공주가 오히려 가장 기억에 남을 정도였다.

‘씁… 언제 또 신들이 개짓거리를 할지 모르니 빨리 마무리를 하긴 해야 할 텐데.’

언제까지고 시간을 끌 수만은 없다.

슬슬 현실과 타협을 해야만 하는 걸까.

‘어느 세상이나 결혼이 쉽지 않은 건 매한가지구나.’

“아스칼! 난 이만 가 볼 테니까 수고해.”

“예, 들어가십쇼! 랄프 님!”

나는 아스칼의 집무실을 나가.

곧바로 나의 방으로 돌아왔다.

‘대체 누구와 결혼을 해야 하나…….’

내가 한편에 놓여 있던 촛대에 불을 붙이자.

화르륵-

촛대에 피어오른 불꽃을 기점으로 어둡던 방이 밝아져 간다.

그러던 그때.

“오랜만이네요.”

일렁이는 그림자 위에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암살자… 는 아니구나.’

나는 침대에 앉아 있는 제이나를 보곤 가슴팍까지 올렸던 주먹을 슬며시 내렸다.

‘근데 저년은 어떻게 또 여길 올 생각을 한 거지? 내 방에는 또 어떻게 들어온 거고?’

난 머릿속을 점거한 여러 의문들을 뒤로하곤 무덤덤하게 입을 뗐다.

“그러게. 오랜만이네.”

“별로 놀라지 않은 모양이네요? 당신을 죽이러 온 걸 수도 있잖아요?”

“그럴 생각이었으면 내가 방에 들어오자마자 날 죽이려 들었겠지. 그보다…….”

나는 배시시 웃는 제이나에게 무심히 질문을 던졌다.

“여긴 어떻게 들어온 거지? 경계가 꽤나 삼엄했을 텐데?”

“아크 신관장의 도움을 받았죠.”

‘…그 늙다리도 온 건가?’

“그 미치광이 노인네도 같이 온 건가?”

“아니요. 근데 전에 그가 이곳에서 교수 노릇을 할 때, 은밀히 포털을 하나 만들어 뒀다고 제게 알려 줬거든요. 그걸 이용했죠.”

제이나가 싱긋 웃으며 말하자.

난 순간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아니, 그 늙은이가… 그런 건 또 언제 만들어 둔 거지?’

“찾아서 없애야겠네.”

“몇몇 흑카데미 학생들도 포털을 사용하고 있던데요?”

“그럼 더더욱 없애야지.”

그 말을 끝으로 나와 제이나의 사이에 미묘한 침묵이 흘렀다.

“여하튼 아무 목적도 없이 날 찾아오진 않았을 것 아냐. 교황이 시킨 거겠지?”

“…맞아요. 당신과 비밀스럽게 혼인식을 올리고 돌아오라고 했죠.”

‘그럴 줄 알았다.’

나는 픽 조소를 흘리며 그녀를 응시했다.

“그랬겠지. 근데… 내가 할 거라고 생각해?”

내가 날을 세우고 묻자.

그녀는 조용히 고개를 젓는다.

“당연히 하고 싶지 않겠죠. 저도 원치 않는 걸 당신이라고 원할 리는 없을 테니까요.”

“신탁에 순종적으로 따르는 줄 알았더니 그건 좀 의외네.”

“그런 시절도 있었지만… 과연 레바논의 뜻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게 옳은 일인지… 전 알 수 없게 됐어요.”

어딘가 슬퍼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 가는 제이나.

“아무래도 레바논에게 있어 전 사랑받는 자녀가 아니라, 그저 좋은 도구일 뿐인 거겠죠.”

“…그년이 악독하긴 하지.”

“그래서 전 더 이상 레바논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으려고요.”

무슨 결심을 한 것인지.

제이나가 굳은 표정으로 날 보며 입을 뗀다.

“날… 도와줘요. 내가 레바논에게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줘요.”

제이나 간절한 애원에 나는 생각에 잠겼다.

‘진심으로 하는 소리인 건가? 다른 꿍꿍이가 있는 건 아니겠지?’

“당신도 나와 결혼하길 원치 않잖아요. 그렇죠?”

“…지금 이 상황을 레바논이 주시하고 있을 텐데?”

그러자 그녀는 품속에서 나무패를 꺼내어 내게 내보인다.

“그건…….”

“바알의 신도에게서 빼앗은 거예요. 이러면 괜찮은 거잖아요?”

“이제야 조금 사람다워 보이네.”

섬기던 신의 이목을 피하면서까지 신을 저버리겠다고 하니.

그녀의 마음이 어떠한지는 조금 짐작이 갔다.

“그래도 널 돕는 건 별개의 문제야. 널 레바논과 완전히 분리시키려면 일단 갖고 있는 그 힘부터 포기해야 할 텐데, 감당할 수 있겠어?”

“애당초 제 힘이 아니었어요. 그깟 힘이 없어도 살아가는 데 아무런 지장도 없고요. 난… 지쳤어요. 이젠 누군가의 의지대로 삶을 사는 게 아니라, 내 스스로의 의지로 이 세상을 살아가고 싶어요.”

그녀가 나와 비슷한 상황에 놓여 있어서 그런 걸까.

그녀의 간절한 호소에 난 마음이 조금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솔직히 내게도 나쁜 제안은 아니야. 제이나가 성녀가 아니게 되면 나도 다음 성녀가 선출되기 전까지 시간을 벌 수 있을 테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성녀가 자신을 배교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을 때.

레바논이 어떠한 표정을 지을지 너무도 궁금했다.

‘도구의 배반이라……. 재미있긴 하겠네. 다만 문제가 있다면…….’

어떻게 제이나의 신성력을 소멸시키느냐는 것이었다.

‘당장 내가 알고 있는 방법은 세 가지 정도인데…….’

레바논이 그녀의 목숨과 함께 신성력을 회수하는 법.

신성력이 담겨 있을 그녀의 심장을 끄집어내는 것.

그리고… 그녀를 죽이는 게 바로 그것이었다.

‘결국 세 방법 다 죽는 건 마찬가지네. 흠… 어쩐다. 그러고 보니 바알이 나한테 그런 말을 했었잖아.’

자신이 도와줄 테니 두 신이 준 힘을 포기하라고.

그러고 나서 자신을 따르라고 말이다.

‘만약 놈의 말이 거짓이 아니었다면 확실히 놈이 제이나가 신성력을 포기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지도 몰라. 하지만…….’

그렇게 되면 제이나 또한 전대 성녀인 헬렌과 똑같은 결말을 맞게 되는 것 아닌가?

‘그래,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건 아니야. 후… 정말 아무런 방법도 없는 걸까?’

우리는 신이 만든 굴레에서 죽을 때까지 순환해야만 하는 것인가.

‘아니야! 신의 도움을 받지 않고서도 반드시 제이나를 자유롭게 만들어 줄 수 있을 거야.’

그녀를 위해서도.

그리고 무엇보다 나를 위해서라도 말이다.

‘제이나가 죽지 않으면서 그녀의 신성력만 떼어 놓을 수 있는 법. 망할… 그런 게 있긴 한…….’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로 머리를 굴리던 나의 뇌리에 불꽃이 튀었다.

‘있다! 있어! 하지만… 무조건 된다는 보장도 없어.’

내 계획에는 여러 변수들이 존재지만.

그래도 실낱같은 가능성이 그것에 있다면 도전해 봐야 하지 않겠는가?

“떠올랐다.”

“…네?”

제이나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난 희미한 미소를 흘리며 대답했다.

“널 해방시킬 방법이 떠올랐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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