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
“…랄프 님이 말입니까?”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아스칼이 피로에 찌든 미소를 보인다.
“흑혼해 듀오를 책임지고 있는 제 입장에선 두 팔 벌려 환영할 일이긴 합니다만… 아마도 저는 과로로 죽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사람을 더 늘려 준다고 했잖아?”
“흑남께서 가입을 하시게 되면 분명 수많은 여성 회원들이 랄프 님과 매칭을 시켜 달라고 할 것인데, 인원이 늘어도 감당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 정도라고?’
내가 울상을 짓는 아스칼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리던 중.
“그런데 말입니다. 랄프 님께선 왜 갑자기 회원이 되려고 하십니까? 전에는 저한테 좀 더 순수한 사랑을 찾겠다고 하셨는데 말이죠.”
앓는 소리를 내던 아스칼이 슬며시 호기심을 내비친다.
“그랬었지. 하지만 요즘 내 상황이 어떤지는 너도 잘 알잖아?”
“아아…….”
아스칼이 나의 옆에 양피지들을 쌓아 놓으며 푹 한숨을 내쉰다.
“레바논 그놈들이 미쳐도 아주 단단히 미친 거죠!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랄프 님께 그런 제안을 할 수 있을까요?!”
“그러게 말이다. 세상에 정신이 멀쩡한 사람들이 드문 건지, 아니면 내 주변에는 그런 놈들밖에 없는 건지 모르겠다.”
“저, 저도 미쳤습니까?”
당황한 아스칼이 스스로를 가리키자.
나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왜? 찔리는 거라도 있어?”
“아뇨, 그건 아닌데…….”
“말이 그렇다는 거지. 아무튼 그런 정략결혼들을 피하기 위해 가입하려는 거야. 이해했어?”
사랑 그리고 결혼.
참으로 아름답고도 고결한 말이다.
‘그저 마음에 맞는 사람을 만나 연애를 하고 결혼한다는 건, 지금의 내게는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겠지.’
지금의 내가 서로의 조건을 따지지 않고 사랑 하나만 갖고 결혼한다는 건.
불가능하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그래. 조건을 따지는 게 나쁜 것만도 아니니까 그건 상관없어. 하지만…….’
적어도 누군가의 목적 때문에 이용당하는 결혼만큼은 사절이다.
“이해는 했습니다. 다만… 랄프 님께서 결혼을 하신다고 하더라도 과연 다른 사람들이 가만히 있을지는 잘 모르겠네요.”
“그게 무슨 소리야?”
“그야 랄프 님은 최고의 사윗감이시잖습니까?”
‘이 녀석… 그새 아부만 늘었나.’
수긍하자니 겸연쩍고 아니라고 하기도 뭐했기에.
나는 의뭉스럽게 물었다.
“…그래?”
“물론이죠! 미스릴 광산의 소유주이신 데다가, 흑탑에서도 가장 영향력이 있는 사람 중 한 사람이 바로 랄프 님 아니십니까?! 그런 랄프 님께서 흑혼해 듀오에 가입하시게 된다면 당연히 다들 가만히 있지 않으려고 들 겁니다! 막말로 옆에 몇 명의 부인이 있다고 해도 말이죠.”
“흠…….”
나는 슬며시 자리에서 일어나 거울 앞으로 걸어갔다.
‘이 정도면 얼굴도 반반한 편이고. 그래, 솔직히 나 정도면 괜찮은 편이긴 하지.’
슬며시 입가가 올라가려고 하자.
난 입술에 힘을 콱 주며 말을 이어 갔다.
“뭐, 네 말대로 그런 일들이 벌어질 수도 있겠지. 하지만 아스칼, 난 말이다. 결혼 상대는 한 명으로 족해.”
“…….”
털썩-
무엇이 그리도 충격이었던 걸까.
아스칼은 떨어뜨린 양피지를 주울 생각도 않고 망치를 맞은 것 같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혹시 랄프 님… 이런 말씀을 드리기 외람되지만, 어디 몸이 불편하신 겁니까? 제가 그 방면으로 유능한 약초꾼을 한 놈 알고 있습니다. 가서 약이라도 받아 올까요?”
“아스칼, 네가 뭔가 오해를 한 모양인데, 내가 한 명으로 족하다고 말한 건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니야.”
‘만약 내가 여러 명의 여인들과 결혼을 하게 된다면, 성녀와도 결혼을 할 수 있는 명분이 생기게 되겠지.’
내가 아스칼을 찾아온 것도 성녀와의 혼인을 막기 위함이건만.
스스로 불구덩이에 들어가는 짓을 내가 할 리가 없잖은가?
‘거기다가 내가 여러 명과 결혼을 하게 된다면… 처가가 엄청나게 늘어나게 될 거고, 그럼…….’
나는 손바닥을 펴고 셈을 해 보기 시작했다.
‘만약에 내가 3명의 여인과 결혼한다면… 적어도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처가에 들러야 할 테니까… 한 달에 3번에서 4번… 1년에… 얼추 50번?!’
50번도 최소한으로 잡은 것이지 어쩌면 그 이상이 될지도 모른다.
‘거기다가 막말로 장인어른이 나한테 앓는 소리를 하면 또 안 들어줄 수도 없는 노릇일 거고. 장인어른 3명이 동시에 앓는 소리를 내면…….’
지옥이다.
지옥도 그런 지옥이 없을 거다.
‘아… 생각만 해도 끔찍하네.’
나는 속으로 혀를 내두르곤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어쨌건 아스칼, 난 한 명이면 충분해. 여러 명을 담기엔 내 가슴이 넓지도 않고.”
“여러 명을 담기엔 내 가슴이 넓지 않다… 참 낭만적인 말이군요. 이따가 제 부인에게도 한번 써먹어 봐야겠습니다.”
아스칼이 내가 했던 말을 잽싸게 적어 놓곤 씨익 미소를 짓는다.
“누가 랄프 님과 결혼을 하게 될지는 잘 모르겠지만, 부인 되시는 분은 참으로 좋겠습니다.”
“글쎄… 그건 겪어 봐야 알 일이지.”
“근데 랄프 님, 부인 되실 분은 제가 뭐라고 불러야 하는 겁니까?”
아스칼의 질문에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뭐라고 부르긴? 그냥 이름으로 부르면 되지. 귀족들도 그냥 가문의 이름 뒤에 부인을 붙이거나 하잖아?”
“그렇기야 하지요. 하지만…….”
눈을 번뜩이는 아스칼.
“흑남님의 부인이 되실 분은 엄연히 달라야지요! 그래서 제가 좋은 생각을 하나 떠올렸는데, 들어 보시겠습니까?”
“그래. 한번 이야기해 봐. 괜찮다 싶으면 차용할 테니까.”
“흑녀! 흑녀는 어떻습니까?”
‘…뭐?’
뒤통수를 강타하는 아스칼의 발언에 나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흑남이라는 말에 적응하는 데도 한참 시간이 걸렸는데… 뭐? 흑녀?’
당장이라도 아스칼의 머리통을 한 대 올려 치고 싶은 마음이 들었으나.
“어떠십니까? 괜찮지요?!”
눈을 반짝이는 아스칼의 모습에 난 슬며시 쳐들었던 손을 내렸다.
“어… 뭐… 나쁘진 않긴 한데 그냥 이름을 부르는 게 나을 것 같다. 그리고 아직 결혼은커녕 마음에 둔 상대도 없는데 부인의 호칭을 논하는 것도 좀 이른 것 같고.”
“아! 일단 흑녀님이 되실 분을 구하는 게 맞겠군요!”
“아니, 그러니까 그 흑녀는 나중에…….”
하나 나의 결혼 상대를 물색한다는 사실이 아스칼의 가슴에 불을 지른 것인지.
아스칼은 허겁지겁 양피지와 깃펜을 들고 돌아와 내 앞에 내민다.
“그럼 일단 등록을 하시겠습니까? 흑남께서 원하시는 여성분을 자세히 적어 주시면 됩니다!”
“그러지.”
* * *
다음 날.
푸더더더더덕-
흑탑에서 수많은 전서구들이 날아오르던 그 시각.
“이야기 들었나? 흑남께서 드디어 짝을 구하시는 모양이더군.”
“그래?! 그것참 경사로구만. 흑남께서도 슬슬 결혼을 하실 때가 되긴 했지. 그래서 누구랑 결혼하시는 건데?”
“설마 성녀와의 결혼이라면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반대하겠네.”
흑탑 안에선 많은 흑마법사들이 제 할 일들을 제쳐 놓고.
바삐 대화를 나누고 있다.
“결혼 상대가 누구인지는 아직 나도 잘 모르네.”
“모른다니? 아니, 상대가 누구인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결혼을 하나?!”
“흑혼해 듀오의 매칭으로 이성을 구하시려는 것 같으니 나도 모를 수밖에 없지.”
흑마법사들이 너스레를 떨며 대화를 나누던 중.
일단의 무리가 그들의 옆을 지나간다.
“아스칼 님! 아스칼 님! S등급을 받은 회원만이 흑남님과 매칭을 할 수 있다는 게 사실인가요?! 문 좀 열어 줘 봐요!”
“저는 A등급인데 S로 등급을 올릴 수는 없는 건가요?!”
“문 열어!”
쾅쾅쾅-
여인들이 아스칼의 집무실을 매섭게 두드리자.
그걸 지켜보던 흑마법사들은 다들 혀를 내두른다.
“흑남님의 인기가 높은 거야 알고 있었다만… 저건 어마어마하군.”
“그러게 말일세. 평소에는 연구에 매진한다고 처박혀 있던 녀석들까지 다 튀어나온 모양이야.”
“내게도 저런 시절이 있었긴 하지만… 흑남님이 부럽긴 하군.”
“…자네에게 저런 시절이 있었다고? 혹시 나와 다른 세상을 살다 온 건가?”
* * *
흑남이 흑혼해 듀오를 통해 짝을 구한다는 소식이 흑탑을 강타하고.
어느덧 일주일이 흘렀다.
짹짹-
‘날 좋네.’
난 창틀에 몸을 기대어 아침 햇살을 바라보던 중.
‘허참…….’
불현듯 며칠 전의 일들이 떠올라 헛웃음을 삼켰다.
‘진짜 지난 일주일은 어딜 나가기도 어려웠었지.’
매칭 등급을 올려 달라고 애원하던 여흑마법사들은 기본이고.
나이가 찬 딸을 둔 노인네들이 보내는 무언의 눈빛 등.
무수히 많은 시선들이 내게 쏠린 탓이었다.
‘당분간은 계속 흑카데미에 머무르면서 아스칼의 보고만 받아야겠어.’
내가 고개를 흔들며 창문을 닫으려던 그때.
“랄프 님! 랄프 님!”
대체 언제 온 건지, 아스칼이 양피지가 가득 쌓인 수레 옆에서 손을 흔드는 모습이 내 눈에 들어왔다.
‘저 양피지들은 또 뭐야. 설마…….’
“아스칼, 옆의 양피지들 말이야. 내가 생각하는 그건 아니겠지?”
나의 물음에 아스칼이 활짝 웃어 보인다.
“여기에 있는 양피지들이 랄프 님과 매칭하길 원하는 여성분들의 정보지입니다! 추리고 또 추린 게 이 정도예요!”
“…뭐라고?”
‘저게 추린 거라고?’
어림잡아 양피지의 숫자가 몇백 장은 되는 것 같은데.
그럼 난 저 숫자만큼 매칭을 당해야 한다는 것 아닌가?!
‘그냥 어느 정도 들어오겠거니 생각은 하고 있었는데… 이건 예상 밖인데.’
“이제 여기에 있는 양피지들을 다 읽어 보시고 마음에 드는 이성분과 만나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잠깐… 저걸 다 읽어야 한다고?’
저 정도 양피지를 다 읽으며 검토하려면 엄청난 시간이 소요될 터인데.
대체 아스칼은 저 많은 양피지들을 어떻게 추린 건지.
‘읽는 거야 그렇다고 쳐. 저 정도 숫자의 사람들을 다 만나려면 도대체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 감도 안 오네.’
하루에 한 명씩 만난다고 쳐도 1년은 족히 넘을 게 뻔했다.
‘아무리 결혼이 일생일대의 대업이라고 하지만… 이건 대업의 수준을 넘어섰는데?’
이대로는 안 된다.
이 결혼은 신속하고도 빠르게 진행되어야만 한다.
‘두 신이 방해를 할 가능성도 있으니 시간을 너무 오래 끌어선 안 돼.’
하지만 저 수많은 매칭 상대를 도대체 어떻게 상대한단 말인가?
‘일이 이렇게 커질 줄 알았으면 좀 더 신중히 일을 진행했어야 했는데.’
나의 엄청난 인기가 도리어 나를 곤란하게 하는 상황을 만들 줄이야.
‘뭔가 좋은 방법이 없을까? 뭔가 괜찮은 방법이…….’
“랄프 님?”
“가만있어 봐. 생각 중이니까.”
나는 아스칼을 제지한 뒤.
이 사안을 해결할 수 있는 묘수를 찾고자 미친 듯이 머리를 굴렸다.
‘빠르고 신속하게 결혼을 할 수 있는 법. 으음… 근데 나한테 매칭을 신청한 여인들을 꼭 다 만나 볼 필요는 없잖아? 그냥 이중에서 몇십 명 정도만 만나 보는 쪽으로 할까?’
양피지들을 몇 장 집어 매칭 상대의 프로필을 훑던 중.
‘…음? 이건 좀… 의왼데?’
난 약력이 다소 특이한 양피지를 보곤 눈을 둥그렇게 떴다.
‘이런 여성들이 내게 관심을 보일 줄이야. 뭐, 큰 의미는 없다만……. 잠깐.’
나는 대수롭지 않게 양피지를 내려놓으려다 퍼뜩 다시 양피지를 읽어 갔다.
‘그래! 왜 내가 이걸 생각하지 못했을까?! 이건 성녀와의 결혼을 거부할 수 있는 충분한 명분이 될 수 있을 텐데 말이야!’
“아스칼.”
“예, 랄프 님.”
“나와 매칭할 여성들을 선택했다.”
나의 말에 조금 놀란 듯 날 바라보는 아스칼.
“벌써 말입니까? 아직 얼마 안 보신 것 같았는데…….”
“네가 크게 수고해 줬지만, 더 볼 필요가 없어졌어. 내 마음에 딱 드는 여성들을 찾았거든.”
“오오오! 그게 누굽니까?!”
나는 대답 대신 택했던 수십 장의 양피지를 아스칼에게 넘겼다.
“음… 오호… 흐음…….”
양피지를 하나하나 살피던 아스칼의 표정이 점차 오묘해져 가더니.
“어… 랄프 님?”
이제는 얼굴에 뚜렷한 물음표를 단 채 내게 질문을 해 온다.
“저… 여기에 적혀 있는 여성분들의 정보 말입니다. 하나같이 전부 이종족의 여성들이던데… 혹시 뭔가 착각하신 게 있다거나, 아니면 양피지를 잘못 집으셨다거나…….”
“아아, 그거?”
나는 피식 미소를 흘리며 답했다.
“정확하게 봤네. 그대로 진행해.”
“…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