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
“…흑남, 그게 무슨 말인가? 레바논이라니?”
좌중이 내게 조심스럽게 물어 오자.
나는 일부러 분노한 척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 신상을 가리켜 보였다.
“지금 여러분은 레바논의 개수작에 속고 있었습니다. 아주 교활한 년입니다.”
“…예? 그게 무슨…….”
“어허허, 랄프. 내가 너무 당황한 건지 잘 이해가 가질 않는데, 설명을 좀 해 주겠나?”
그에 나는 흥분한 척 언성을 높였다.
“여러분은 느끼지 못하신 겁니까? 그 역하고도 천박한 레바논의 힘을 말입니다.”
“힘이라니? 난 그런 건 전혀 느끼지 못했네만……. 혹시 느낀 사람이 있나?”
하나 아무도 대답하지 못하자.
나가란은 낮게 침음하며 고개를 젓는다.
“보아하니 아무래도 랄프 자네만 느낀 것 같네.”
“그런 것 같군요. 하지만 여러분, 한번 잘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께선 정말 베논 님이 우리에게 그런 말을 하셨을 거라 생각하십니까?”
“…그게 무슨 말인가?”
좌중의 의문에 나는 차분히 말을 이어 나갔다.
“베논 님이 누구십니까? 흑마법사를 수호하시는 절대 신이시자 누구보다 레바논을 혐오하시는 분 아닙니까?”
“그건 당연한 이야기 아닌가? 베논께서 레바논을 증오하시는 건 역사책에 적혀 있을 정도니 말일세.”
한 흑마법사의 대답에 나는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신상을 보며 소리쳤다.
“제가 하고 싶은 말이 바로 그겁니다! 여러분께선 누구보다 레바논을 증오하시는 베논 님께서 정녕 우리에게 이런 신탁을 내리실 거라 생각하십니까?!”
“그, 그 말은…….”
“바로 그겁니다! 방금 전 신상에 강림했던 건 베논 님이 아니라 레바논이었던 거지요! 그렇지 않고서야 베논 님께서 제안을 수락하라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셨겠습니까?”
확신에 찬 나의 외침이 회장을 울리자.
“과연 그런 것이었나……. 들어 보니 흑남의 발언이 굉장히 신빙성이 있는 것 같군!”
“내 말이 그 말이네! 계속 무언가 마음이 걸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는데, 이제야 이유를 알게 되니 해소가 되는 기분이야!”
“흑남이 없었으면 레바논한테 깜빡 속아 넘어갔을지도 모르겠어.”
좌중은 탄성을 터뜨리며 나의 결정력을 칭찬했다.
“근데… 정말 레바논이었던 걸까? 신성력을 느끼진 못했는데…….”
“나도 못 느끼긴 했다만 흑남이 거짓말을 하진 않았겠지. 다만 굳이 신상을 박살 낼 필요까진 있었나 싶네만…….”
다만 소수의 흑마법사들은 나의 행동에 약간의 의문을 품는 눈치였으나.
나는 개의치 않고 베논의 신상을 노려봤다.
‘어디 강림이건 신탁이건 또 내려 봐. 내가 너희 뜻대로 움직일 일은 없으니까.’
물론 신들의 수작질이 이번 한 번만으로 끝나지는 않을 터.
계속 대비를 해야만 한다.
‘그보다 내가 이 난리를 쳤으니 베논 쪽에서도 뭔가 반응이 있을 법도 한…….’
화아아아악-
‘이건…….’
돌연 나의 몸 주변으로 검고 강대한 기운이 터져 나오자.
“신탁이다! 베논 님의 신탁이다!”
그 모습과 힘을 느낀 흑마법사들은 얼른 나를 향해 엎드리며 소리친다.
‘후우… 역시 이럴 줄 알았다.’
내가 방금 전에 벌인 일 때문인 걸까.
이번에는 균열을 통해서가 아닌 찬란한 옥좌에 앉은 채 하늘에서 내려오는 베논.
“베논 님, 오셨습니까?”
나는 그런 베논을 보며 정중히 무릎을 꿇어 보였다.
“…지금 나와 장난을 치려는 건 아니겠지?”
베논이 서늘한 시선으로 나를 응시해 온다.
‘아무래도 방금 일로 화가 좀 난 모양이네. 신상 몇 개가 더 박살 나면 아주 눈이 뒤집히겠어.’
나는 송구스럽다는 듯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베논 님의 신상을 부순 부분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하나! 더러운 이단이 베논 님인 척하며 저희를 홀리려 드는 통에 도무지 분노를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
베논은 한참을 지그시 천장만 바라보다가.
조금은 풀어진 표정을 한 채 말문을 연다.
“그건 나였다.”
“…예? 방금 뭐라고…….”
“신상에 강림했던 건 바로 나, 베논이었다.”
‘그래. 당연히 너겠지.’
하나 속내와 달리 나는 경악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쳐들었다.
“그럼 정말로… 베논 님께서 저보고 레바논의 제안을 받아들이라고 하신 겁니까?!”
“이제야 이해를 한 모양이군. 그래, 그 제안을 받아들여 성녀와 결혼을 해라. 그것이 흑남이자 나의 진정한 종이 해야 할 일이다.”
나는 복종을 요구하는 베논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지금의 난… 미친놈이다. 미친놈이야.’
푸하하하하하-
미친놈처럼 웃음을 터뜨렸다가 뚝 멈추곤 베논을 쏘아보며 말했다.
“후우… 하마터면 깜박 속아 넘어갈 뻔했네.”
“…뭐라고?”
“네놈… 이단이었구나! 누구냐! 바알은 아닐 것이고… 역시 레바논이냐!”
나의 고함에 베논이 멍한 표정으로 날 바라본다.
“…뭐라고?”
“베논 님의 모습을 하고 거짓말을 하면 내가 모를 줄 알았나?!”
나는 베논의 입이 채 열리기도 전에.
주먹에 흑마력을 응집하곤 냅다 베논에게 달려들어 놈의 면상에 주먹을 꽂아 넣었다.
텅-
하나 어느새 뽑혀 나온 베논의 대검에 나의 공격은 가로막혔고.
대검 너머로 당황한 것 같은 베논의 음성이 들려온다.
“내가 마법의 종주 베논이다!”
“개소리! 더 이상 베논 님의 이름을 더럽히지 마라! 이 더러운 년아!”
“더, 더러운 년?”
흠칫하는 베논을 보며 난 생각했다.
‘이기는 건 무리겠지.’
신을 상대로 전투에서 승리할 수 없다는 건 나도 잘 알고 있었다.
하나 베논 또한 당장은 날 죽일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베논 님을 위하여!”
나는 온 힘을 다해 베논에게 주먹을 내질렀다.
“후우… 이래선 끝이 없겠군.”
미동조차 않고 내 공격을 피하던 베논이 삽시간에 내 시야에서 사라졌다가.
“크윽…….”
삽시간에 내 앞에 나타나 내 목을 꽉 붙잡는다.
‘시팔… 더럽게 빠르네.’
“죽여라. 베논께선 결코 나의 죽음을 좌시하지 않으실 거고, 언제고 네년은 지옥의 불길 속으로 떨어질 거다!”
“…도무지 영문을 모르겠군. 내가 베논이라는 사실을 정녕 모르는 건가? 아니면 성녀와 결혼을 하라 해서 날 거역하고자 하는 것이냐?”
베논의 물음에 난 픽 실소를 흘렸다.
“대가리가 없는 건 아니네. 그래! 내가 아는 베논께선 결코 그런 말을 하실 분이 아니다! 네년이 무슨 말을 하건 난 넘어가지 않는다. 그러니 죽여라! 죽여!”
나의 분노에 찬 일갈에 베논의 표정도 복잡해져 간다.
“후우…….”
이윽고 한숨을 내쉬며 나를 내려놓는 베논.
“상황이 조금 복잡해졌군. 네 녀석들이 이런 반응을 보일 거라 예상을 했어야 했는데. 착오가 있었구나.”
그는 씁쓸히 웃다가.
등을 돌려 다시금 하늘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일단 오늘은 이쯤에서 돌아가도록 하마. 다음에 다시 찾아오도록 하지.”
‘다음 같은 소리 하고 있네. 그냥 결혼을 취소하면 되잖아! 취소하라고!’
이윽고 베논이 나의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자.
다시금 회장과 흑마법사들의 모습이 나의 눈에 들어왔다.
“흑남, 베논 님을 뵙고 온 겁니까?”
“그분께서는 뭐라고 하셨는지요? 역시 방금 전에는 레바논이 왔다가 간 거라고 하셨습니까?”
좌중의 질문 공세에 나는 새삼 비통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후우… 이런 경우는 또 처음이군요.”
“처음이라니요?! 대체 무슨 일을 겪으셨기에…….”
“전 분명 베논 님을 뵈었습니다. 그건 분명한 사실이지요. 하나…….”
난 잠시 침을 삼키곤 고개를 저어 보였다.
“그것은 베논 님이 아닌 베논 님의 모습을 한 이단이었습니다! 제게 계속 성녀와의 결혼을 권유하더군요.”
“맙소사…….”
“제 생각에는 아마도 레바논이 저와 베논 님의 중간에서 어떠한 장난질을 친 게 아닐까 싶습니다.”
나의 말이 끝나자.
회장 안의 사람들 사이로 웅성거림이 번져 나간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레바논 그년도 참으로 웃긴 놈입니다. 성녀와의 결혼을 반드시 성사시키기 위해 저러는 것밖에 더 됩니까?”
“제 말이 그 말입니다. 명색이 선을 자처하는 신이 뒤에서 이렇게 수작질을 부릴지 누가 알았겠습니까?”
“으허허허허, 여신보단 도둑년이란 말이 더 잘 어울리겠군!”
껄껄 웃던 나가란을 보며 난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뭔가 저희가 모르는 계획이 있는 것 같습니다만, 차라리 잘됐습니다. 레바논이 이리 멍청하게 움직여 준 덕분에 이 결혼이 함정이라는 걸 알아차릴 수 있었으니 말이죠.”
“으허허허, 자네의 말이 맞네. 다만, 방심은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걸세. 언제 또 더러운 수를 써 올지 모르네.”
“명심하지요.”
* * *
다음 날.
“흑남님! 하마터면 성녀와 결혼을 할 뻔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다행히 흑남께서 레바논의 계략을 파악하셨다고요? 정말이지 베논께서 도우셨습니다!”
내가 흑탑 내부를 걸어 다니자.
여러 흑마법사들이 활짝 웃으며 문안 인사를 건네 온다.
‘베논이 돕긴 개뿔…….’
“하하, 그러게 말입니다. 베논께서 도우셨지요.”
나는 애써 미소를 지으며 저들에게 화답하곤.
깊이 고민하며 복도를 걸었다.
‘후우… 어제야 미친 척하고 베논을 이단으로 몰아서 어떻게 넘어갔다만…….’
베논과 레바논이 이대로 물러날 리 없다는 걸.
난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계속 신탁을 내리거나 내가 생각할 수 없는 짓거리들을 하려고 하겠지.’
방안이 필요하다.
‘두 신들의 계략을 피할 방안이 필요한데…….’
물론 지금도 그 방안들 중 하나를 진행하고자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만.
방안은 많을수록 좋은 것 아니겠는가?
‘일단 이 방법이 잘 통하면 좋겠는데.’
이윽고 한 문 앞에 도착한 나는 문을 두드리며 소리쳤다.
“아스칼! 아스칼!”
“흑남님?! 오실 줄 알았으면 미리 방을 좀 정리하는 건데…….”
어쩐지 눈 밑이 초췌해 보이는 아스칼이 문을 열자.
서류 더미로 가득한 방 안에서 퀴퀴한 냄새가 흘러나온다.
“냄새가 좀 심한데? 안 씻은 지 며칠 된 모양이야?”
“아하하… 그게, 요즘 업무가 너무 바쁜지라…….”
“일손을 늘렸는데도 이 정도야?”
나의 물음에 아스칼이 힘겹게 미소를 보인다.
“그나마 늘려 주셔서 이 정돕니다. 새로 늘어나는 회원들 관리도 그렇고, 자꾸 매칭 상대를 바꿔 달라는 사람들도 워낙 많아서요.”
“그럼 나한테 일손을 좀 더 늘려 달라고 하지 그랬어?”
“최근에 흑남님이 크라켄 왕국에서 바쁜 일정을 보내시는 것 같아서…….”
아스칼이 말꼬리를 흘리자.
나는 녀석의 어깨를 두드려 주며 말했다.
“언제든 부담 갖지 말고 필요한 게 있으면 말을 해. 말을 해야 네가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지 내가 알 수 있지. 말하지 않으면 모르잖아?”
“예! 일손이 필요합니다!”
녀석의 외침에 나는 피식 미소를 지었다.
“그래. 반드시 늘려 줄게.”
“근데 오늘은 어쩐 일로 찾아오신 건지요?”
“아, 별건 아니고, 그, 회원분들의 정보들을 좀 줄래? 여성분들로만 추려서.”
이윽고 아스칼이 산더미 같은 양피지를 쌓아 놓자.
‘으음…….’
나는 한참 양피지를 살피다가 고개를 저었다.
‘엄청나게 많네. 이대로 다 살피다간 끝이 없겠어.’
“아스칼.”
“예, 흑남님.”
“나도 흑혼해 듀오의 회원이 될까 하는데, 네 생각은 어떠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