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카데미의 노예가 살아남는 법-105화 (105/200)

105.

‘…뭐? 저 미친년이 지금 뭐라는 거야?’

내기를 무승부로 돌리자는 것도 모자라.

나와 성녀를 혼인시키겠다니?

“네년은 지금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어머, 안 될 건 또 뭔가요?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이야기 아닌가요?”

“헛소리 집어치워라. 모든 일들이 네 뜻대로 돌아갈 거라고 생각하나?! 무승부?! 승자가 결정 나지 않는 승부는 아무 의미가 없다.”

베논이 단호히 선을 그으며 거부하자.

“이익…….”

입술을 깨물고 있던 레바논을 보며 나는 손을 꿈틀거리려다가.

‘이건… 언제 내 시간도 멈춰 놨었던 거지?’

나는 전과 마찬가지로 내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나마 정신은 멀쩡하니 다행이긴 한데, 둘이서 또 무슨 헛소리를 하려고 이 짓거리를 한 거야?’

“잘 생각해 봐요. 무승부는 우리 둘에게 득이 되는 일이라고요. 그런데 왜 자꾸 그렇게 반대하시는 거죠?”

“둘에게 다 득이 된다고? 네년에게만 좋은 일이겠지.”

“아니요. 다시 생각해 봐요. 내 말을 듣다 보면 분명 생각이 바뀌게 될 거예요.”

레바논의 거듭된 설득에도 불구하고 베논이 목석같은 태도를 유지하자.

사사삭-

레바논의 손짓에 반투명한 검들이 생겨나 어느새 나의 목을 겨누고 있었다.

“자, 만약 제가 이 자리에서 열쇠를 없애 버린다면 어떻게 될까요?”

“이년이…….”

“이제 왜 무승부가 우리 모두에게 좋은 일이라는 건지 이해했죠?”

막 나가는 레바논의 모습이 아니꼽고 어처구니가 없었던 걸까.

으하하하하하-

베논의 광소가 지면을 뿌리 뽑을 것처럼 자리를 뒤흔든다.

“해 봐.”

“…뭐라고요?”

“한번 해 보라고. 열쇠가 부서지는 순간 내가 됐건 네년이 됐건 둘 중 하나는 반드시 죽을 테니까.”

베논의 대검에서 그 깊이를 짐작할 수 없는 흑색의 아우라가 흘러나오자.

레바논은 어색하게 웃으며 내 목에 드리웠던 검들을 거두어들인다.

“…농담이었는데 그렇게까지 발끈할 건 없잖아요?”

“농담? 네년은 농담으로 한 말이었을지 몰라도 내 기분은 더러워졌다.”

눈을 부라린 채 말을 이어 가는 베논.

“네년의 농담으로 인해 이 시간부로 한시적이던 평화는 끝났다.”

“…뭐라고요?”

“성마전쟁을 다시 시작하지. 저번에는 인간들의 다툼만으로 끝났지만 이번에는 다를 거다. 죽기 싫다면 네년이 그리도 자랑하던 천사들을 모두 불러 모아야 할 거다.”

전쟁까지 할 생각은 없었던 걸까.

레바논이 굳은 미소를 보이며 말한다.

“그럼 이렇게 해요. 만약 이번 내기를 무승부로 마무리하면, 문을 공동소유로 두는 대신 당신에게 먼저 문을 이용할 권리를 줄게요.”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린 모양이로군.”

“알았어요! 알았다고요! 무승부로 하면 당신이 원하는 걸 한 가지 줄게요! 그럼 됐죠?!”

레바논이 신경질 내며 소리치자.

베논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린다.

“빛의 탈리스만 그리고 종말의 나무를 내놔라. 그럼 네가 원하는 대로 해 주지.”

“신물을 하나도 아니고… 두 개나 달라고요?”

벙찐 레바논을 보며 베논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네 억지를 들어주는 대가 그리고 날 불쾌하게 만든 값은 받아야지.”

“하…….”

“500년간 봉인을 당하기도 싫다, 신물을 내놓기도 싫다. 이거 원… 아무래도 내가 도둑놈을 상대하고 있는…….”

“알았어요! 알았다고요! 까짓것 주면 되잖아요!”

마침내 협상이 끝난 걸까.

나는 두 신의 상반된 표정을 보며 생각했다.

‘웃긴 놈들이네. 성녀랑 결혼하게 생긴 건 난데, 당연히 신물은 내가 받는 게 맞는 거지.’

물론 저들이 한낱 인간일 뿐인 내게 의견을 구할 일은 없겠으나.

어쨌건 기분이 더러운 건 더러운 거다.

‘내가 너희의 뜻대로 움직일 것 같아?’

내가 속으로 이를 갈던 중.

“일단 약속대로 두 개의 신물을 먼저 받도록 하겠다.”

“웃기지 말아요! 일이 성사되는 날에 주는 게 맞는 거죠!”

“네년이 또 약속을 어길지 어떻게 알고?”

“약속을 어기는 게 아니라 타협을 한 거죠. 당신도 수긍했잖아요?”

언쟁을 벌이던 두 신이 하나의 타협안을 놓고 서로를 응시한다.

“좋아요. 그럼 흑남과 성녀가 결혼하여 승부가 무승부로 돌아가는 그날, 신물도 넘기는 걸로 하죠. 제 힘을 걸고 맹세했으니 이젠 믿을 수 있겠죠?”

“그러지.”

두 신은 서로 약조를 어길 시에는 신력을 잃는다는 약속을 한 뒤.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균열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사사사삭-

곧 두 신이 자취를 감추자.

“분명 흑점을 말씀하시는 것이겠지요.”

“그럼 크라켄과 확실히 동맹을 맺게 된다면 흑남도 드디어 결혼을 하시겠군요!”

석상처럼 굳어 있던 수뇌부들이 연거푸 내게 말을 걸어왔다.

‘어떻게 해야 그 연놈들을 물먹일 수 있을까…….’

하나 나는 조금 전의 일을 고민하기 바빴기에.

저들의 말을 대충 흘려들었다.

* * *

베논의 탄생일이 있은 뒤.

어느덧 3주가 흘렀다.

“랄프 님! 여기 혓바닥이 뒤집히는 둥근 빵들은 슬슬 썩을 때가 된 같습니다만, 어떻게 할까요?”

“그런 건 버리라고 했잖아? 애매하다 싶은 건 그냥 버리든지 너희가 먹든지. 재량껏 움직여.”

“랄프 님, 이번 주 흑카지노의 매출입니다!”

그간 나는 매점과 흑카지노 운영을 비롯하여.

“랄프 원장님, 이번 주에는 원생들의 학부모들이 수업에 참관하는 날이 있는데… 혹시 원장님도 참석하시겠습니까?”

“그러지.”

흑립 유치원의 관리를 하는 등, 정말이지 부산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나. 오늘 일정은 이 정도로만 하고… 후, 달프 교수와의 토론은 저녁 때로 미뤄야겠어.’

내가 저무는 해를 보며 고개를 젓던 그때.

“흑남님! 흑남님!”

볼드 학장이 내 이름을 부르며 흑립 유치원의 정원으로 뛰어온다.

“무슨 일이야?”

“레바논에서 사신이 왔는데, 놈이 한 말이 아주 가관입니다! 놈들이 흑남님과 성녀의 결혼을 정식으로 제안해 왔습니다!”

민머리 학장의 호들갑에도 나는 별로 놀라지 않았다.

‘…드디어 이날이 온 건가?’

전에 두 신들의 대화를 엿들었던 데다가.

바로 며칠 전 레바논에서 지령까지 왔었기에 난 누구보다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교황 쪽에선 신탁이 내려왔으니 무조건 이 제안을 수락하라고 했다만…….’

내가 미치지 않고서야 이 정신 나간 결혼을 승낙할 리가 없잖은가?

“조금 당황스럽네. 일단은 이동하지. 이야기를 들어 봐야겠어.”

* * *

나는 곧바로 흑탑의 회의장으로 이동하여.

한창 논의 중인 수뇌부들을 대면했다.

“오, 랄프! 마침 잘 왔네. 꽤나 골치 아픈 일이 생겨서 말일세.”

탑주가 모호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맞이한다.

“레바논에서 사신이 왔다고 들었습니다. 저와 성녀를 엮으려 한다고요?”

“저쪽에서 그리 알려 오긴 했네만 가장 중요한 건 당사자인 자네의 의중 아니겠나?”

“전…….”

내가 입을 떼려던 찰나.

“성녀와의 결혼이라니요? 이건 미친 짓입니다!”

“성마전쟁 당시 놈들이 검은 대지를 짓밟았던 걸 잊은 겁니까?!”

“이건 전략적으로 거래를 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입니다! 결코 놈들의 제안을 승낙해선 안 됩니다!”

누구 할 것 없이 격한 반대 의사를 보인다.

‘이거… 반응이 좋은데?’

혹시나 나보고 성녀와 결혼을 하라 강요하진 않을까 했으나.

다행히 저들의 뜻도 나와 같은 모양이었다.

“으허허허, 자네들의 말이 맞네. 놈들을 이용하되 한배를 타는 일은 결코 없어야 할 게야.”

“탑주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흑남이 성녀와 그런 관계가 된다면, 놈들은 성녀를 핑계 삼아 검은 대지에 신관들을 밀어 넣을 것이고, 그리되면… 후, 생각만 해도 끔찍합니다.”

“아무렴요! 말도 안 되는 일이지요!”

탑주 비롯하여 흑마법사들이 결사반대를 외치던 중.

나가란 탑주가 지팡이를 바닥에 내려찍어 이목을 집중시킨다.

“거의 결정이 난 것 같군. 그럼 랄프, 자네에게 묻지. 자네의 생각은 어떤가?”

“당연히 저는 이 제안을 승낙할 생각이 조금도 없습니다.”

“그럼 됐군. 이번 제안을 확실하게 거절하여 놈들에게 우리의 뜻을…….”

나가란이 좌중을 쓱 둘러보며 선포하던 그때.

[제안을 받아들여라.]

어디선가 묵직한 목소리가 회장을 울려왔다.

“지금… 누가 이야기를 한 거지?”

탑주의 물음에 아무도 답하는 이가 없던 찰나.

[레바논의 제안을 받아들여라.]

다시금 어디선가 묵직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탑주님께서 이야기를 하고 계신데 누가 감히…….”

“저, 저기! 다들 저길 보십쇼!”

한 흑마법사가 손으로 어딘가를 가리키자.

모두가 그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다.

“오오… 이럴 수가…….”

그곳에는 베논의 신상이 자리하고 있었는데.

스스스슥-

어째선지 평소와는 달리 흑색의 아우라가 신상에서 피어오르고 있었다.

[레바논의 제안을 받아들여라.]

“맙소사……. 베논께서… 베논께서 강림을 하신 모양입니다!”

‘망할… 하필 이 타이밍에…….’

내가 신상을 노려보며 혀를 차던 중.

“미천한 종들이 위대하신 마신을 뵙습니다!”

“마신이시여!”

흑마법사들이 신상을 향해 엎드려 베논의 이름을 부르짖는다.

‘쯧…….’

나도 분위기를 따라 신상 앞에 무릎을 꿇던 중.

“그런데 조금 의아하군……. 말씀하실 게 있으시면 흑남께 이야기하시면 될 걸 왜 굳이…….”

“일단 조용히 하고 마신님의 말씀을 경청하게!”

몇몇 흑마법사들의 소곤거림이 들려왔으나.

“마신이시여! 이 어린 양들에게 갈 길을 인도하소서!”

나가란의 부르짖음에 저들의 속삭임은 금세 묻히고 말았다.

[레바논의 제안을 받아들여라.]

“레바논의 제안을… 말입니까? 하나 저들은 저희와 화합할 수 있는 놈들이 아닙니다. 저들은…….”

[레바논의 제안을 받아들여라.]

베논의 신상에서 같은 말이 반복하여 흘러나오자.

엎드려 있던 좌중 사이로 술렁임이 번져 간다.

“허어… 이를 어찌하면 좋을지 참으로 난감하군. 설마 베논께서 이런 말씀을 하실 줄이야…….”

“그래도 마신께서 직접 강림하시어 저희에게 말씀을 하신 건데, 따라야 하지 않을까요?”

“으음… 저리 말씀하신 데는 분명 이유가 있으시겠지.”

마신의 뜻에 복종하자는 의견이 점차 술렁임을 지배하려 하자.

나는 베논의 신상을 노려보며 생각했다.

‘흑마법사들이 뜻대로 안 움직이니까 직접 명령을 내리시겠다?’

물론 베논의 선택은 탁월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레바논의 제안을 지탄하던 자들이 지금은 고심에 빠졌으니 말이다.

‘망할… 상황이 안 좋게 됐네.’

이대로 간다면 흑마법사들은 베논의 의지에 굴복하게 될 것이고.

나는 두 신의 노림수대로 성녀와 결혼을 하게 될 터.

‘까짓것 성녀와의 결혼이야 못 할 것도 없다만…….’

나의 결혼으로 인해 두 신이 웃는 꼴은 죽어도 볼 수 없었다.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어.’

하지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게 있나?

‘만약 여기서 내가 반대하는 의견을 내면…….’

어쩌면 나는 베논의 뜻을 거역한 이단이 되어.

흑마법사들의 지탄을 받게 될지도 모른다.

‘흑남이 마신의 말을 거역하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일이긴 하지. 가만… 설마 베논이 그것까지 다 감안해서 나한테 신탁을 내리지 않고 신상에 강림한 건가?’

잠깐 의문이 들긴 했으나.

지금은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다.

성녀와의 결혼인가, 아니면 베논의 뜻을 거역한 이단이 될 것인가.

‘정말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가 두 개밖에 없는 걸까. 두 개… 두 개…….’

나는 어떻게든 이 상황을 타파하고자 머리가 타들어 갈 때까지 고심하고 또 고심했다.

‘다른 방법이…….’

내 머릿속이 재가 되어 하얗게 타들어 갈 무렵.

‘…아!’

불현듯 새로운 길이 나의 머릿속에 그려지기 시작했다.

‘그래. 물러날 길이 없다면… 뭐라도 해 봐야지.’

나는 굳은 결심을 하곤 천천히 바닥에서 일어나.

베논의 신상에 들려 있던 메이스를 빼내어 꽉 붙잡았다.

“…흑남님? 갑자기 메이스는 왜…….”

“무, 무얼 하시려고…….”

갑작스러운 나의 행동에 좌중의 얼굴에 물음표가 걸렸으나.

나는 아랑곳 않고 베논의 신상을 노려보며 메이스를 높이 쳐들었다.

‘너희의 뜻대로 놀아나기도 싫고, 이단이 되기도 싫다. 그렇다면… 네놈을 이단으로 만들어 버리면 되는 거잖아? 결혼?’

“흐, 흑남님?”

‘좆 까.’

콰자자자자자작-

메이스에 가격당한 신상의 얼굴 부분이 허물어지고 무너져 내리자.

“…….”

좌중은 입만 뻐끔거리며 누구도 감히 입을 열지 못했다.

‘그래. 저것까진 예상한 반응이고, 중요한 건 지금부터다.’

나는 다시금 메이스를 들어 신상을 가격하며 회장이 떠나가라 소리를 내질렀다.

“레바노오오온! 네년의 개수작을 내가 모를 줄 알았냐!”

“레… 레바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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