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카데미의 노예가 살아남는 법-103화 (103/200)
  • 103.

    성점이 무너지면 가장 큰 이득을 보는 건 흑마법사들이었기에.

    슈바츠의 의심은 지극히 타당했다.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닙니다. 하나 그 어떤 성점에서도 흑마법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 그렇다면 다른 세력이 이 사달을 벌였을 수도 있겠군. 그런데 말이네… 크라켄 놈들은 성점이 그 지경이 되도록 대체 뭘 한 건가?”

    “…….”

    대신관이 침묵으로 답하자 교황은 이마를 짚은 채 한숨을 내쉰다.

    “후우… 어쨌건 레바논에 큰 치욕을 준 범인들을 반드시 찾아내야 할 걸세. 반드시 말이네!”

    “명심하겠습니다!”

    * * *

    한편, 같은 시각.

    ‘오오… 엄청나게도 자랐네.’

    덜그럭-

    대지에 일렁이는 황금빛 물결과.

    그 물결을 잘라 내어 바삐 옮기는 스켈레톤들의 모습은 한 폭의 그림처럼 보였다.

    ‘작물이 계속 이 정도 속도로 자라 주면, 지속적으로 크라켄에 식량을 팔 수 있겠어.’

    나는 크게 만족하여 옆에 있는 흑마법사를 보며 미소 지었다.

    “아주 잘해 줬다. 네 이름을 기억해 둘 테니까 앞으로도 이렇게만 관리해.”

    “감사합니다! 이 크레이크! 최선을 다해 흑남께서 맡기신 농지를 책임지겠습니다!”

    감동한 크레이크가 넙죽 허리를 숙이자.

    나는 그의 어깨를 두드려 주곤 등을 돌렸다.

    ‘이걸로 이곳에서의 일정은 전부 마무리됐네. 돌아갈까.’

    내가 묶어 뒀던 말이 있는 쪽으로 걸음을 옮기려던 찰나.

    “마법사님! 마법사님! 잠시만 이 노파의 말을 좀 들어 보시겠습니까?”

    늙고 추레한 노파가 손을 흔들며 내게 다가온다.

    ‘…이 근방에 마을이 있었던가?’

    나는 슬며시 지팡이를 잡곤 노파를 보며 입을 뗐다.

    “무슨 일이지?”

    “현실을 깨닫게 된 기분이 어떠신지요?”

    “…뭐?”

    이해할 수 없는 노파의 질문에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이 노파… 재정신이 아닌 것 같은데. 설마 이 노파도 소드마스터인 건 아니겠지?’

    레바논에서 정신 나간 소드마스터들을 접했던 탓일까.

    그날 이후로 정신이 이상한 노인들을 보면 괜히 의심이 들었다.

    ‘검은 없는 것 같은데…….’

    내가 눈대중으로 노파의 차림을 살피던 그때.

    “이봐, 늙은이! 멀찍이 떨어지지 못해?! 이분은 네년 따위가 감히 말을 붙일 수 있는 그런 분이 아니란 말이다!”

    크레이크가 노파의 앞을 가로막고 지팡이를 흔들어 보인다.

    “감히… 말을 붙일 수 없는 분이라고요?”

    “그래! 이분이 어떤 분인지 모르는 것 같은데, 이분으로 말할 것 같으면…….”

    “당연히 알고 있지요! 흑남이시지요?”

    ‘…음? 저 노파가 어떻게 날 알고 있는 거지?’

    노파의 옷차림새는 영락없는 농부의 차림이었건만.

    어떻게 그녀가 나를 알고 있는 걸까?

    ‘어디서 우연히 나를 봤었나?’

    “허어, 괘씸하네. 이분이 누구인지 잘 알고 있다면 더욱 예의를 갖출 생각을 해야 할 것 아냐? 이봐, 늙은이! 정신 줄 놨…….”

    크레이크의 삿대질이 점점 심해지던 그때.

    “네놈은 말이 너무 많구나.”

    노파가 벼락같이 크레이크에게 달려들어.

    그의 머리를 붙잡고 바닥에 힘껏 찍어 눌렀다.

    콰자작-

    “…….”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몸만 간헐적으로 떠는 크레이크를 보며 나는 혀를 내둘렀다.

    ‘평범한 노파가 아닌 모양이네. 설마… 진짜 소드마스터인 건가? 망할… 하필 골버린이 부재중일 때 이런 일이 생길 줄이야.’

    암중에서 나를 은밀히 경호하던 늙은 성기사가 사적인 이유로 자리를 비운 사이에 이런 일이 발생하다니.

    ‘아쉽긴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스스슥-

    나는 노파를 경계하며 두 주먹에 흑마력을 불어넣곤 고개를 까딱였다.

    “누구의 명령을 받고 온 거지?”

    “명령?”

    재미난 농담을 들었다는 듯 낄낄 웃는 노파.

    “그 누구도 그분께 명령을 내릴 수는 없지.”

    ‘…그분?’

    노파가 갑자기 웃옷을 확 걷어 올리자.

    노파의 복부 한복판에 웬 사람의 얼굴이 자리하고 있는 것 아닌가?

    “오랜만이군.”

    “바알…….”

    단숨에 놈의 정체를 파악한 나는 피식 비웃음을 흘렸다.

    “전에는 머리에 붙어 살더니, 이제는 머리보다 배가 더 살기 편한 모양이지?”

    “좋을 대로 생각해라.”

    “그러지.”

    놈의 대답이 끝남과 동시에 나는 지면을 박차고 내달려.

    노파의 얼굴에 힘껏 주먹을 내질렀다.

    “이런… 성미가 급하군.”

    하나 노파는 허리를 낮춰 내 일격을 피하곤.

    몸을 뒤로 날려 나와의 거리를 벌렸다.

    “진정하지. 오늘은 그저 대화를 나누려고 찾아온 것뿐이다.”

    “개소리하고 있네. 지금 나보고 그 말을 믿으라고?”

    “진실을 대면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날 의심하는 모양이군. 랄프, 나는 너를 도우려고 온 거다.”

    ‘날 도우러 왔다고?’

    갑자기 심경에 무슨 바람이 불었기에 저놈이 날 돕는다고 하는 걸까.

    ‘놈의 의중을 모르니 섣불리 말을 꺼낼 수가 없네.’

    “곧 베논이 눈치를 챌 테니 짧게 말하마. 나는 이제껏 네 녀석의 행보를 유심히 지켜봐 왔다. 그 덕에 네 녀석의 심경에 큰 변화가 생겼다는 걸 알 수 있었지.”

    바알은 이미 모든 걸 알고 있다는 듯 자신 있게 말을 이어 간다.

    “레바논을 완전히 배척하려고 하는 것 같던데. 두 신에게 환멸을 느꼈던 모양이야. 그렇지 않나?”

    ‘뭐… 틀린 말은 아니지.’

    실제로 두 신이 내 목숨을 재앙의 문을 열기 위한 열쇠로 사용하겠다고 한 뒤로.

    난 두 신을 물먹일 방법만 떠올렸으니까.

    “내가 환멸을 느끼건 말건 그게 네놈이랑 무슨 상관이지?”

    “당연히 상관이 있지. 너와 나의 목적이 정확히 일치하고 있잖나? 너는 두 신을 고까워하고 있고, 나 또한 그 역한 놈들을 증오하고 있으니 너와 나는 결국 한 몸이라고 볼 수 있지.”

    놈의 말 같지도 않은 궤변에 나는 피식 실소를 흘렸다.

    “그렇게 말하는 너도 두 신과 별반 차이가 없는 것 같은데. 원하는 것만 다르다 뿐이지 너도 날 죽이려고 했잖아?”

    “그랬었지. 하지만 네가 지금과 같은 행보를 유지하는 한, 내가 널 건들 일은 없을 거다. 장담하지.”

    바알이 입가에 반달을 그린 채 계속 말한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너를 돕기 위해 온 거다. 저 역한 신들의 목을 치고 싶지 않나? 내 손을 잡아라! 우리가 힘을 합친다면 단언컨대 능히 못 할 일이 없을 거다!”

    바알의 포효에 나는 놈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계속 신자들 몸에 빌붙어서 겨우 연명이나 하는 놈이 나를 도와주겠다고?”

    “지금의 나는 확실히 허약하다. 하지만 내가 완전한 힘을 되찾기만 한다면 나는 다시 두 신과 버금가는 존재가 될 것이다.”

    ‘완전한 힘이라…….’

    “힘을 되찾을 방도는 있고?”

    “그럼! 있고말고! 하지만 지금 당장은 알려 줄 수 없다. 네가 나의 신도가 되어 나를 섬기게 됐을 때 알려 주도록 하지.”

    바알의 말에 나는 순간 의문이 들었다.

    ‘왜 신도가 되면 알려 준다는 거지? 뭔가 말 못 할 비밀이라도 있는 건가?’

    내가 의문에 잠겨 있던 중.

    “이걸 받으시지요.”

    노파가 다가와 내게 무언가를 내민다.

    ‘이건…….’

    그녀의 손바닥 위에 있는 것은 작고 검은 구슬 같은 것이었다.

    “본래는 나를 섬기는 대사제들에게만 주는 것이지만, 특별히 네게도 주마.”

    “그게 뭔데?”

    “보옥에 네 피를 바르면 네가 원할 때 신들의 이목을 피할 수 있을 거다.”

    ‘호오… 그러잖아도 더 이상 나무패를 사용하기 어려워서 어쩌나 고민을 하고 있었는데, 저건 계속 사용할 수 있다는 거잖아?’

    물론 저 보옥에 바알의 함정이 도사리고 있을 가능성도 있었으나.

    ‘함정을 팔 거였으면 아까 노파가 내게 접근했을 때 진작 수를 썼겠지.’

    나는 고민 끝에 보옥을 낚아채어 주머니에 넣었다.

    “잘 생각했다. 또한 나의 말을 진지하게 고민해 보거라. 조만간 다시 찾아오겠다.”

    이윽고 웃옷을 내린 노파가 멀찍이 사라지자.

    ‘음… 어쩐다…….’

    나는 혼절해 있던 크레이크의 입에 흑마력 포션을 밀어 넣으며 고민에 잠겼다.

    ‘두 신이 내 목숨을 갖고 장난질을 치는 것도 기분이 더럽긴 한데, 그렇다고 바알 저놈을 믿자니 그것도 그렇고…….’

    고민은 점점 깊어져만 간다.

    * * *

    다음 날.

    “아, 진짜……. 숙제 정리 하기에도 바빠 죽겠는데 의식은 무슨 의식이야?”

    “내 말이 그 말이야. 귀찮아 죽겠네.”

    ‘많이도 모였구나.’

    오늘은 흑마법사들에게 있어 특별한 날이었기에.

    학생들도 행사에 참여해야만 했다.

    “조용히들 하거라!”

    “달프 교수님? 다 모인 것 같으니 슬슬 이동하죠.”

    “그러지요. 자, 지금부터 다들 광장으로 이동한다!”

    교수들의 인도하에 학생들과 원생들은 흑탑 앞에 위치한 광장으로 이동한다.

    ‘어마어마하네…….’

    이미 광장에 모여든 흑마법사들을 비롯하여.

    학생들까지 무리에 합류하니 그 숫자를 눈으로 다 헤아리기조차 어려웠다.

    ‘대충 물이나 떠 놓고 기도나 할 것이지, 뭔 놈의 탄생일을 이렇게 거창하게 축하하는 건지 모르겠네.’

    “흑남님! 곧 의식을 시작하니 앞으로 나와 주시겠습니까?!”

    “그래, 곧 가마.”

    내가 인파를 뚫고 신상 앞으로 걸어가자.

    이미 신상 앞에 서 있던 탑주와 대다수의 수뇌부들이 나를 응시한다.

    “랄프 왔나? 마침 의식의 준비가 끝났네.”

    “원생들을 통제하느라 조금 시간이 걸렸습니다. 죄송합니다.”

    “으허허허, 괜찮네. 그보다 예법에 대해선 레논에게서 들었을 터이니 들은 대로만 하면 되네.”

    나가란 탑주는 내게 눈을 찡긋거리고는.

    엄청난 숫자의 군중을 보며 소리치기 시작했다.

    “오늘은 위대하신 베논께서 그 육신을 벗어던지시고 진정한 마신으로 거듭나신 날이다! 참으로 기쁜 오늘, 우리는 피와 육신으로 그의 이름을 찬미할지니! 베논이시여! 오소서! 흑탑에 새로운 비전과 영예를 허락하소서!”

    한참을 신상 앞에서 부르짖던 나가란 탑주.

    몇십 분이나 지났을까.

    마침내 나가란 탑주의 부르짖음이 끝나자.

    촤아아악-

    흑마법사들은 기다렸다는 듯 데리고 온 양들의 목을 내리친다.

    “나가란 님, 여기 있습니다.”

    “분명 베논께서도 흡족해하실 게야.”

    나가란 탑주가 피를 담은 그릇을 베논의 신상 앞에 공손이 올리고는.

    내게 슬며시 손짓을 해 온다.

    “랄프, 이제 자네 차례일세.”

    탑주의 사인이 떨어지자.

    나는 천천히 신상 앞으로 다가갔다.

    “보아라! 이제 여기에 있는 흑남이 베논 님과 소통을 하여, 우리 흑탑이 가야 할 길을 알려 줄 것이다!”

    오오오오오!

    베논이시여! 우리의 위대하신 마신이시여!

    흑마법사들의 열띤 함성이 나의 귓가를 울려오자.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씁… 내키지는 않지만 어쩔 수 없나.’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고는.

    하늘을 향해 손을 뻗으며 소리쳤다.

    “마신 베논이시여! 저희의 제물을 기쁘게 받아 주시옵고! 저의 기도에 응답하여 주십시요!”

    내가 목이 터져라 베논의 이름을 부르짖던 그때.

    “…….”

    나는 내 볼 주변을 살랑거리던 바람이 갑자기 멎었음을 느꼈다.

    ‘이건…….’

    시간이 멈췄다.

    일시 정지를 누른 것처럼 멈춰 있는 군중의 모습에 나는 확신했다.

    ‘베논이 왔구나.’

    쩌저저적-

    곧 허공에 커다란 균열이 생기더니.

    그 안에서 검은 장발머리의 남자가 느긋하게 걸어 나온다.

    “베논 님을 뵙습니다.”

    내가 슬며시 고개를 숙이자.

    베논은 무뚝뚝하게 대꾸한다.

    “기도를 자주 한다면 오랜만에 만날 일도 생기지 않겠지.”

    “…그러겠습니다.”

    “그리고 다음부터 의식을 거행할 땐, 산 제물의 피를 바칠 바엔 차라리 싸움판을 열라고 전해라. 몇 년째 똑같은 걸 보고 있자니 지겹기 짝이 없다.”

    연거푸 불만을 내비치는 베논.

    “그러지요.”

    그는 계속 의식에 대해 불만을 늘어놓다가.

    갑자기 지그시 나를 보며 툭 질문을 던진다.

    “그런데 말이야. 가끔 네 녀석을 관찰하다 보면, 네가 내 시야에서 사라지는 경우가 있더군.”

    ‘설마… 내가 바알의 힘으로 시야에서 사라진 걸 눈치챘던 건가.’

    내가 가슴이 뜨끔하여 베논의 눈치를 살피던 중.

    베논이 무심한 눈으로 나를 보며 묻는다.

    “너… 설마 바알과 접촉을 했다거나 한 건 아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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