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카데미의 노예가 살아남는 법-102화 (102/200)

102.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흑탑과 레바논의 돈 싸움을 뒤에서 지켜보다가, 둘 중에 크라켄에 더 이득이 되는 쪽의 손을 잡으려는 거겠죠.”

“이런 괘씸한 놈들이…….”

레논이 크라켄의 병사들을 노려보며 으르렁거리자.

나는 덤덤히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이건 크라켄을 완전한 아군으로 만들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죠. 우리가 경쟁자를 완전히 밀어내는 모습을 보여 준다면, 크라켄도 우리를 다시 평가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내가 지그시 성점을 주시하자.

레논도 나를 따라 성점을 보며 나지막이 묻는다.

“놈들을 밀어낼 방법이 있겠습니까? 무력을 사용한다면 편하긴 하겠습니다만…….”

“힘의 논리를 드밀기엔 환경이 좋지 않죠. 애당초 이곳은 검은 대지도 아니고요. 더욱이 아직 대부분의 사람들은 흑점의 뒤에 흑탑이 있다는 사실을 모릅니다. 그러니 굳이 흑마법을 써서 정체를 들킬 필요도 없죠.”

레논은 나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의문을 내비친다.

“흑남께선 어떻게 저놈들을 밀어낼 생각이신지요?”

“저도 고민 중입니다. 그런데… 조금 의아하네요.”

나는 호객 행위를 하는 신관들을 보며 한 가지 의문을 던졌다.

“우리는 흑점을 운영하기 위해 언데드 와이번까지 동원해서 물자들을 운송하고 있는데, 대체 저놈들은 무슨 수로 물자를 채우는 건지 모르겠군요.”

“그건 아직 저희도 파악을 하진 못했습니다. 다만 제 생각에는 크라켄에 있는 신전들에서 성점에 물자를 지원해 주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흠…….”

‘확실히 신전 말고는 성점을 지원해 줄 데가 없는 것 같긴 해.’

“그럴 가능성도 있겠네. 좋아, 그럼 일단 성점에 들어가 보자고.”

나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며 말을 이어 갔다.

“놈들이 어떤 걸 팔고 어떤 식으로 성점을 운영하고 있는지 파악한 뒤에 대책을 세우면 되겠지.”

“저도 동행하지요.”

레논도 나를 따라 몸을 일으키자.

나는 흑점에 진열되어 있는 투구 두 개를 챙기곤 그중 하나를 레논에게 내밀었다.

“놈들에게 얼굴을 보여서 좋을 건 없을 테니 가리고 가죠.”

“좋은 생각입니다.”

투구로 얼굴이 확실히 가려진 것 같자.

난 레논과 함께 용병들 사이를 뚫고 겨우 성점 안으로 들어갔다.

“성점에 어서 오십쇼! 저희 성점에는 모험가 여러분이 편히 던전 공략에 임하실 수 있도록 다양한 물품들을 팔고 있습니다! 으허허허허!”

정갈한 차림을 한 신관이 활짝 웃으며 손님들을 환대하자.

나는 속으로 픽 실소를 흘렸다.

‘누가 보면 신관의 차림을 한 상인인 줄 알겠네.’

“항상 어깨에 힘주고 다니던 놈들이 저러고 있으니 재미있긴 합니다.”

그 역시 나와 비슷한 생각이었던 걸까.

레논도 신관들의 행태를 보며 조용히 비웃음을 흘린다.

“뭐, 그만큼 저쪽도 급했던 거겠죠. 여하튼 일단 안을 좀 둘러볼까요.”

나는 붐비는 용병들 사이를 거닐며 성점을 살피기 시작했다.

‘엄청나게 특별한 건 없네.’

말린 고기, 대장간에서도 팔 법한 평범한 무구 등.

성점이 취급하는 품목들은 흑점의 것들과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단 하나만 빼면 말이지…….’

“어이구, 손님! 가죽띠를 구매하셨군요?! 그럼 성수를 같이 구매하시는 건 어떨까요? 지금 성수를 평소보다 1실버 더 저렴하게 구매하실 수 있는데 말이죠. 아. 성점을 나가시면 이 기회도 없어집니다!”

“으음… 기회라……. 그럼 최하급 성수로 5개만 주쇼!”

“여기에 있는 식량 묶음을 사 가는 손님께는 제가 무료로 한 번 치유를 해 드리겠습니다! 자자!”

‘…얼씨구?’

자신들의 능력과 상품들을 묶어 패키지로 팔고 있는 신관들을 보며.

나는 혀를 내둘렀다.

‘신성력으로 사골까지 우려먹겠네.’

용병들 대부분이 물건을 사며 덤으로 성수를 구매하고 있었다.

아니, 오히려 성수를 저렴하게 사기 위해 물건을 사는 것 같았다.

‘성수 하나 때문에 운영에서 이렇게 차이가 난다고?’

성수를 제작하는 데 돈이라도 많이 들면 차라리 이해라도 하겠건만.

겨우 드는 것이라곤 신관의 노동력뿐인데 성점과 흑점에 이토록 큰 차이를 만들어 낼 줄이야.

‘이대로 놔두면 흑점이 망하는 건 확실하겠어.’

놈들이 성수를 영업 전략으로 내세운 이상.

흑점도 이렇다 할 무언가를 내놓지 못한다면 분명 망하고 말리라.

‘대책을 세워야겠는데…….’

“볼 건 다 본 것 같으니 일단 흑점으로 돌아가죠.”

나는 레논과 함께 흑점으로 돌아가 대책 회의를 열었다.

“성점을 살피고 나니 한 가지는 확실하게 알겠더군요. 만약 우리가 이대로 손을 놓는다면 흑점은 망할 겁니다.”

“흑남님의 말씀이 맞습니다만… 그렇다고 우리가 성수를 만들어 낼 수도 없는 노릇이니 참 문제군요.”

레논이 한숨을 토해 내며 참담한 심경을 드러내자.

흑점을 관리하는 흑마법사들 중 한 명이 조심스럽게 손을 든다.

“그럼 우리도 흑마력 포션을 팔아 보는 건 어떻겠습니까?”

“…뭐라고? 지금 자네… 흑점을 완전히 망하게 하려고 작정한 건가?!”

“죄, 죄송합니다…….”

레논의 일갈에 그렇잖아도 무거웠던 분위기가 더욱 가라앉자.

나는 분위기를 환기하고자 입을 열었다.

“어쨌건 지금 이대로는 안 됩니다. 흑점을 살리기 위해서 우리는 반드시 성점을 작살내야 합니다.”

“하지만 흑마법도 사용하기 어려운데 어떻게 성점을 작살을 낼지…….”

“그러니 다른 방법을 찾아야지.”

나를 비롯하여 모든 이들이 깊은 고민에 잠겨 있던 중.

‘가만…….’

얼마 전, 흑립 유치원에서 있었던 일이 나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분명 원생들이 부패약을 만들었었지. 그래! 이걸 이용해 보자.’

“성점의 명성에 흠집을 냅시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놈들이 파는 상품들에 부패약을 바르자는 거다.”

나의 말에 흑마법사들이 눈을 번뜩인다.

“오오오오! 저주를 사용하면 신관 놈들에게 걸릴 가능성이 있으니 부패약을 쓰자는 말씀이시군요?!”

“정말 좋은 생각인 것 같습니다!”

하나 나는 그들을 자제시키며 고개를 저었다.

“이 계획이 반드시 성공한다는 보장은 없다. 놈들이 성점을 지키고 있다면 일이 번거로워질 테니까.”

“그건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제게 좋은 수가 있습니다!”

“…그래? 그럼 한번 말해 봐.”

* * *

6일 뒤.

“어서 오십쇼! 어서 오십쇼!”

“다른 건 됐고, 성수만 몇 개 주시오! 아, 그리고 이 녀석이 어제 잔부상을 입었는데 그것도 좀 봐주시고.”

오늘도 성점 앞은 던전에 들어가기 전에 채비를 끝마치려는 용병과 모험가들로 붐비고 있다.

‘으흐흐흐. 오늘도 떼돈을 벌겠구나.’

이윽고 잠시 사람들이 빠지자.

로토 신관은 휘파람을 불며 빈 진열대에 새 장비들을 놓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오늘은 뭔가 장비들의 모양새가 좀 달라진 것 같은데?”

동료의 물음에 로토 신관은 고개를 끄덕였다.

“거래하던 대장간을 바꿨다고 하더라고. 아무래도 전 대장간의 주인이 신관장님에게 밉보인 게 있는 모양이야.”

“아니면 기부금을 받았다든가. 여하튼 어제도 고생 많았어. 그 먼 거리를 왕복하는 게 쉽지 않은데 말이야.”

“별수 있나? 계속 성점을 운영하려면 이 정도 고생은 해야지.”

어깨를 으쓱이는 로토를 보며 동료 신관이 나지막이 혀를 찬다.

“물건 파는 게 재미있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언제까지 이 짓을 해야 하는지 원…….”

“그래도 흑점에 사람 한 명 없는 걸 보고 있으면 뭔가 보람차지 않나? 놈들도 꽤나 당혹스러울걸? 흑점 옆에 성점이 생길지 누가 알았을까?”

“그건 그렇지. 근데 말이야… 요 며칠간 뭔가 놈들의 표정이 좀 이상하지 않았어?”

동료 신관의 물음에 로토 신관은 의아하다는 듯 그를 바라본다.

“이상하다니? 평소처럼 울상을 짓고 있던데?”

“…그래? 흠, 내가 잘못 본 건가. 울상이라기보단 뭔가 웃는 낯에 가까운 것 같았는데…….”

“별 시답잖은 걱정 할 시간에 물건 진열하는 거나 좀…….”

로토가 동료에게 손짓을 하려던 그때.

콰아아아앙-

갑자기 성점의 문이 거칠게 열리더니 일단의 무리가 안으로 들어온다.

“어서 오…….”

“로토 신관! 이 개 같은 새끼 어디 있어?! 당장 나와! 내가 오늘 반드시 그 사기꾼 새끼들의 목을 딴다!”

“감히 우리한테 그딴 썩은 장비를 팔아 처먹어?!”

어째선지 분노로 눈이 뒤집힌 용병들이 고성을 지르며 성점 안을 뒤집어 놓자.

“왜, 왜들 이러시는 겁니까?”

당황한 신관들은 어떻게든 용병들을 진정시키고자 했다.

“왜애? 이 새끼들 봐라. 지금 왜라는 말이 나와?!”

“어디 이걸 보고도 헛소리를 지껄일 수 있나 보자. 자루 풀어!”

팅, 팅-

용병이 푼 가죽 자루에서 부러진 장비들이 쏟아져 나온다.

“이것들이 뭔 줄 알아? 전부 너희가 팔아먹은 장비들이야.”

“너희가 섬기는 레바논이 이딴 쓰레기를 팔아먹으라고 했냐?”

“우, 우리는 그런 장비를…….”

로토가 얼른 변명을 하려 했으나.

“몸이 재산인 용병한테 장비로 장난질을 쳐?”

“어쩐지, 장비를 사면 성수를 싸게 주는 게 전부 이유가 있었구만. 저런 쓰레기 같은 걸 팔아넘기니까 성수를 싸게 주는 거였어!”

모든 상황을 지켜보던 용병들도 분노의 물결에 편승하기 시작했다.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없습니다.”

로토는 진심으로 억울함을 호소했다.

분명 그가 가져온 장비들은 신전에서 직접 가져온 장비들이었다.

거기다가 장비들을 모두 신전에서 검증까지 한 것이건만 왜 두 동강이 난단 말인가?!

“그래! 좋게 생각해서 검 한두 자루 정도는 부러질 수 있다고 쳐! 근데 우리 용병단이 샀던 검들이 몽땅 두 동강이 났다고! 이 병신 같은 검 때문에 우리 용병단이 전멸할 뻔했다고, 이 새끼들아!”

용병들의 분노가 꺼지기는커녕 성점 안을 뒤덮자.

‘설마 대장장이가 장난질을 쳤나? 아니면 혹시 신전에서 나를 쳐 내려고…….’

오만 가지 생각이 로토의 머릿속을 스쳐 간다.

‘아니면 설마… 흑점에서?! 그래! 성점이 잘나가니 흑마법사들이 성점을 견제하려고 이런 짓을 벌인 걸지도 몰라!’

오밤중에 놈들이 성점에 침입하여 장비들을 건드렸을지 어떻게 아는가?

‘하지만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장비에서 흑마법의 기운이 느껴졌어야 하는데…….’

장비들 그 어디에서도 흑마법의 흔적은 안 보이지 않았던가?

‘빌어먹을… 흑점도 아니라고 하면 도대체 누가 이런 짓을 한 거야?!’

콰아아아앙-

“로토 이 개새끼야!”

그 와중 눈이 뒤집혀 있는 또 다른 용병 무리가 괴성을 지르며 상점 안으로 들어오자.

‘아… 망했다…….’

로토 신관은 그만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 * *

한편.

“용병들이 아주 단단히 화가 난 게, 부패약이 제대로 효과를 발휘했나 봅니다.”

“보기 좋네요.”

나와 레논은 성점이 난장판이 되는 모습을 지켜보며 빙긋 미소를 지었다.

“에라이씨! 이젠 내가 다시는 이곳을 이용하나 보자!”

“튀겨 죽여도 시원찮을 놈들! 퉤!”

“그냥 흑점으로 가자고! 거긴 적어도 장비로 장난질하진 않잖아?!”

용병들이 성점 입구에다 침을 뱉곤 흑점으로 발길을 돌린다.

“이제 이곳의 성점은 실질적으로 끝났다고 봐도 좋겠군요.”

“그렇긴 하죠. 하지만 이곳에만 성점이 있는 게 아닙니다. 다른 성점들도 죄다 박살을 내야죠.”

나의 말에 레논이 동의하며 미소 짓는다.

“이미 다른 흑점의 장들에게도 은밀하게 성점을 무너뜨리라고 지시를 내렸으니, 곧 좋은 결과가 나올 겁니다.”

“그래요? 그럼 남은 일들은 각 점장들에게 맡기고 돌아가도 되겠군요.”

* * *

두 달 뒤.

레바논 왕국, 대신전 안.

“지금 뭐라고 했나? 성점들이… 무너졌다고?”

보고를 받던 교황이 미간을 짚으며 실소를 흘리자.

대신관이 힘겹게 말을 이어 간다.

“서른 곳 중 살아남은 곳은… 세 곳뿐이라고 합니다.”

“…세 곳? 세 곳이라……. 으허허허허허! 그래서, 무너진 이유가 뭔가? 이유가 있으니 무너진 거겠지. 그렇잖나?”

“그게… 성점에서 팔던 장비들 대부분에 문제가 있다는 소문이 용병들 사이에 퍼진 뒤로… 아무도 성점을 이용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대신관의 보고에 슈바츠의 미간에 짙은 혈관이 잡힌다.

“그러니까 자네 말은… 신관들이 말 같지도 않은 장비를 팔다가 입소문이 난 탓에 망했다는 이야기군.”

“…예.”

“대부분의 성점들이 비슷한 상황을 겪었다라……. 그렇다면 누군가가 우리를 방해했다고밖에 생각이 들지 않는데. 예를 들면 흑마법사들이 이번 일에 개입했다거나 말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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