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카데미의 노예가 살아남는 법-100화 (100/200)

100.

“허허… 뒤통수라니요?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생각해 보게. 이제껏 잘 활동하던 멜크가 갑자기 당했다고 한다면, 이유야 하나밖에 없잖은가?”

“…….”

질문을 가장한 슈바츠의 추궁에 아크 신관장은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만에 하나 갈프 신관이 정말 우리를 배신한 것이라면…….’

멜크를 비롯하여 흑탑에 심어 뒀던 첩자들은 대거 제거를 당했을 것이고.

그에 따르는 책임은 흑세계를 계획한 그의 몫이 되는 셈이었다.

“허허, 당연히 그리 생각하실 수도 있겠지요. 하나 아직 멜크가 죽었는지 살았는지는 알 수 없지 않습니까?”

아크 신관장이 애써 반론을 내 봤으나.

교황의 시선은 여전히 싸늘하기 짝이 없었다.

“자네는 흑마법사들이 배신자를 살려 뒀을 거라고 보나?”

“갈프 신관이 우리를 배반한 건지는 아직 확실치 않습니다.”

“정황상 그럴 가능성이 높지.”

교황이 좀처럼 뜻을 꺾지 않자.

식은땀을 흘리던 아크 신관장이 황급히 소리친다.

“허허… 그럼 이렇게 하는 건 어떻겠습니까?! 제가 다시 검은 대지로 들어가도록 하지요. 그래서 멜크가 정말 죽었는지, 갈프 신관이 우리를 배신한 건지 제가 직접 확인을 하고 돌아오도록 하겠습니다!”

“이미 자네의 신분은 검은 대지에 전부 퍼졌을 텐데… 감당할 수 있겠나?”

그에 아크 신관장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만약 갈프 신관이 레바논의 뜻을 저버리고 타락의 길에 들어섰다면… 반드시 제 손으로 그를 죽이겠습니다.”

* * *

3주 뒤.

퍽, 퍽-

돌과 잡초가 무성하던 지면에 곡괭이가 사정없이 파고 들어간다.

‘잘들 일하고 있네.’

나는 버려진 땅들을 고르고 있는 수천의 스켈레톤들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 얼추 땅 고르는 건 다 된 것 같으니 시작해 볼까.’

“이제 땅 다지는 건 그만하고 씨앗을 뿌려. 그리고 너희! 이쪽으로 와.”

내가 손을 까딱이자.

후줄근한 차림을 한 남녀 수십 명이 흑마법사들의 손에 끌려 내 앞에 선다.

“살고 싶지?”

“…예?”

“아니면 다시 감옥 안으로 돌아갈래?”

나의 물음에 화들짝 놀란 사내가 허겁지겁 고개를 젓는다.

“아… 아닙니다.”

“그래, 너희도 살고 싶잖아? 지금부터 너희가 살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주겠다.”

나는 스켈레톤들이 개간한 땅을 눈짓으로 가리키며 계속 말했다.

“너희 드루이드들은 식물들을 빠른 속도로 키우는 게 가능하다며? 3주. 그 안에 이 땅에서 곡식을 거둘 수 있을 정도로 작물들을 키워 놔.”

“그게 무슨…….”

“만약 작물들을 성공적으로 키워 낸다면 너희에게 안락한 삶을 보장할 거다. 하지만 실패한다면…….”

나는 손을 들어 스윽 목을 그어 보였다.

“너희의 몸은 학생들의 교보재로 사용되겠지.”

“…….”

수십 명의 드루이드들이 멍하니 나를 응시하자.

나는 픽 미소를 흘리며 입을 뗐다.

“뭘 멍하니 서 있어? 3주라니까?”

나의 경고에 그제야 정신을 차린 걸까.

웅웅웅-

드루이드들은 헐레벌떡 농지로 뛰어 들어가.

저마다 갖고 있던 기운들을 대지에 불어넣기 시작했다.

스스슥-

잠잠하던 토지 위로 새싹들이 고개를 내밀자.

나는 속으로 감탄을 금치 못했다.

‘오오… 효과 확실하네.’

“자국에선 존경받던 드루이드들이 이러고 있는 모습을 페이크 왕국에서 봤다면 거품을 물었겠습니다.”

드루이드들의 노동을 지켜보던 레논 부탑주가 슬며시 운을 떼자.

나는 피식 미소를 흘렸다.

“그럼 드루이드들을 잘 관리를 했어야지요.”

“하하하, 랄프 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레논이 껄껄 웃더니 슬며시 내게 질문을 건넨다.

“그런데 말입니다. 정말 농사가 끝나거든 드루이드들을 풀어 주실 겁니까?”

“그럴 리가요? 전 저들에게 안락한 삶을 보장해 준다고 했지 풀어 준다고 한 적이 없습니다. 풀어 줄 생각도 없고요. 저들은 앞으로도 흑탑을 위해 계속 식량을 생산해 줘야만 합니다.”

내 대답에 레논이 혀를 내두른다.

“저는 왜 흑남께서 드루이드들을 필요로 하는지 의문이 들었었는데… 설마 이런 식으로 드루이드들을 사용하실 줄은 생각도 못 했습니다.”

“저도 크라켄과의 거래가 없었다면 드루이드들을 생각하진 못했을 겁니다.”

“하하하, 겸손함이 과하신 것 아닙니까?”

‘…진짠데?’

만약 식량을 필요로 하는 상황이 생기지 않았다면.

내가 감옥 안의 드루이드들을 떠올릴 일도 없었을 것이다.

“여하튼 만약 랄프 님의 계획대로 식량 생산이 원활해진다면, 확실히 크라켄도 우리 쪽으로 마음을 돌릴 가능성이 높아지겠습니다.”

“그렇게 만들기 위해 이 고생을 하고 있는 건데, 당연히 그렇게 돼야지요.”

* * *

몇 시간 뒤.

‘안정적으로 식량 생산이 가능해지면 크라켄뿐만이 아니라 다른 왕국과의 관계도 개선해 나갈 수 있을지도 몰라.’

나는 서부의 척박한 대지에서의 일정을 끝마치곤.

흑카데미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히히히히힝-

‘으윽… 갑자기 뭐야?’

그러던 중 갑자기 달리던 마차가 급정거를 하자.

나는 지팡이를 쥔 채 마차에서 내렸다.

“어이, 무슨 일이야? 동물이라도 쳤어?”

내가 마부를 향해 다가가던 그때.

“오랜만이네, 갈프 신관.”

아크 신관장이 메이스에 묻은 피를 닦으면 내게 인사를 건네 오는 것 아닌가?

‘뭐야, 왜 저놈이 여기에 있는 거지?’

나는 갑자기 나타난 아크 신관장에 당혹감을 느꼈다.

‘여기까진 어떻게 온 거야? 분명 놈의 몸에 현상금까지 걸어 뒀을 텐데?’

하나 당혹감도 잠시뿐.

난 최대한 무심한 표정을 유지한 채 입을 열었다.

“오랜만입니다, 아크 신관장님. 한데 이 위험한 곳에는 어쩐 일로 오신 겁니까?”

“허허… 지금 내게 어쩐 일로 왔냐고 물은 건가?”

아크 신관장이 손에 메이스를 쥔 채 내게 다가오기 시작한다.

“왜 레바논을 배신한 겐가?”

“…배신이라니요?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내가 모른 척 되묻자.

아크 신관장은 쓴웃음을 흘린다.

“그것 아나? 이래 봬도 난 자네한테 꽤나 큰 기대를 하고 있었네. 자네가 흑탑에 변혁의 바람을 일으켜 줄 거라고 믿었었지. 하나 자네는 내 기대를 저버렸네. 권력이… 그리도 달콤했나?”

“제가 레바논을 배신했다니요?!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멜크 말일세. 확인을 해 보니 죽었더군. 첩자들의 정신도 온전치 않은 것 같았네. 이래도 계속 모른 척할 셈인가?”

‘흠… 거기까지 파악하고 온 건가…….’

나는 순간 갈등에 휩싸였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이참에 저 늙은이를 잡아 버릴까?’

암중에서 나를 호위하고 있던 골버린과 함께 협공을 한다면.

충분히 아크 신관장을 잡아 볼 만하지 않겠는가?

‘그래, 그게… 아니지. 가만…….’

내가 결단을 내리려던 중.

돌연 한 가지 묘수가 나의 머릿속을 스치고 갔다.

‘만약 내가 아크를 완벽히 속여 넘길 수만 있다면? 그렇게만 된다면… 살려서 돌려보내는 게 득이 될 것 같은데. 흠…….’

아크를 죽이는 건 차라리 쉬운 일이다.

하지만 그를 완벽히 속인다면 이는 레바논에 더한 혼란을 야기할 수도 있을 터.

‘그렇다면…….’

“아, 무슨 소리를 하시나 했더니… 그 머저리 새끼 때문에 제가 얼마나 곤혹을 치렀는지는 아십니까?”

내가 인상을 팍 쓰고 목청을 높이자.

아크 신관장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거린다.

“…그게 무슨 말인가?”

“멜크 그 등신 같은 놈이 활동을 하던 중에 탑주에게 정체를 들켰었습니다. 그래서 그쪽 세력도 완전히 작살이 났고요.”

나는 분통을 터뜨리며 아크 신관장을 노려봤다.

“목 끝에 칼이 들어오는 기분이 어떤지 아십니까?! 신관장님은 그 머저리 놈 때문에 걸릴 뻔했던 제 기분을 모르실 겁니다! 심지어 아직도 전 탑주의 의심을 받고 있습니다!”

“허허…….”

나의 분노가 아크 신관장의 심경을 자극한 데 성공한 것인지.

아크 신관장은 아까보다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한다.

“그럼 멜크가 독단적으로 일을 벌이다가 탑주에게 걸렸다는 겐가?”

“그렇다니까요? 더 억울한 건, 전 멜크가 무슨 짓거리를 하다가 걸렸는지도 모른다는 겁니다! 전 그냥 그 등신의 헛짓거리에 휘말려 죽을 뻔했을 뿐이지, 놈의 죽음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흐음…….”

나의 단호한 외침에 아크 신관장의 표정이 한층 더 심란해져 간다.

‘아마도 내 말을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을 하고 있는 것 같은데… 여기서 쐐기를 박아야겠어.’

“생각해 보십쇼. 무엇보다 배신을 하면 제 정체가 검은 대지에 퍼질 게 뻔한데 제가 왜 레바논을 배신하겠습니까?”

“…….”

나의 결정타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 것일까.

갈등에 휩싸였던 아크 신관장이 마침내 메이스를 내려놓는다.

“…좋네. 그렇게까지 이야기를 하니 자네의 말을 믿어 보겠네. 또한 앞으로는 자네가 멜크의 공백을 대신하게.”

“반드시 신관장님의 믿음에 보답하겠습니다!”

“허허, 이것 참…….”

‘어째 잘 속아 넘긴 모양이네.’

내가 속으로 미소를 흘리던 중.

아크 신관장이 내게 한 가지 질문을 던진다.

“그런데 말이네. 흑점이 자네의 작품이라는 말이 검은 대지에 떠돌던데… 그건 어떻게 된 일인가?”

‘그건…….’

난 잠시 고민에 잠겼다가 아무렇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제가 고안한 일입니다.”

“…뭐라고?”

아크 신관장의 눈가가 다시 싸늘해졌으나.

나는 오히려 목소리를 높였다.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니?! 그게 무슨 말인가?”

“멜크가 헛짓거리를 한 터라 저도 큰 위험에 빠졌었습니다. 살기 위해선 뭐든 해야 했죠. 그래서 저들의 의심에서 벗어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그런 제안을 꺼내 놓은 것입니다.”

내가 죽은 멜크에게 모든 짐을 떠넘기며 나의 무고함을 강조하자.

아크 신관장의 주름이 크게 물결친다.

“음…….”

“저라고 좋아서 한 일이 아닙니다! 살아남아야만 계속 레바논을 위해 활동하는 게 가능하니 저로서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습니다.”

나의 간곡한 설득에 아크 신관장은 한참이고 입을 떼지 못하다가.

한결 온화해진 표정으로 날 응시한다.

“허허, 자네의 사정은 잘 알았네. 하나 흑점은 좀 선을 많이 넘은 것 같네만… 다른 방도는 없었나?”

“턱밑에 지팡이가 드리운 상황에서 생각난 방법은 그게 전부였습니다.”

“허허…….”

아크 신관장은 한참 나를 보다가 이윽고 깊은 한숨을 내쉰다.

“후우… 일단은 자네의 사정은 잘 알겠네.”

“…가시는 겁니까?”

“자네가 변심하지 않았다는 걸 확인했으니 그것으로 족하네.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기거든 곧바로 서신을 보내게. 알았나?”

그의 물음에 나는 씨익 미소를 지었다.

“물론입니다.”

* * *

3주 뒤.

대신전으로 돌아온 아크 신관장.

그는 검은 대지에서 있었던 모든 일을 교황과 대신관들 앞에서 보고했다.

“그러니까 자네 말은… 흑점은 갈프 신관이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내놓은 계책이었다는 건가?”

교황의 질문에 보고를 올리던 아크 신관장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렇습니다.”

“후우… 그건 그렇다고 치세. 그보다 크라켄 이놈들은… 정말 역하기 짝이 없군. 과정이야 어찌 됐건 놈들이 흑탑의 제안을 덥썩 물었다는 것 아닌가?!”

교황의 일갈에 좌중은 침묵을 지킨다.

“어이가 없군, 어이가 없어……. 다른 놈들도 아니고 흑탑과 손을 잡아? 이 정신 나간 놈들을 봤나!”

물론 흑탑과 손을 잡은 것은 비단 크라켄 왕국뿐만이 아니었으나.

어쨌건 이 사안은 교황으로서 결코 넘어갈 수 없는 것이었다.

“…어쩌시겠습니까?”

한 대신관의 물음에 슈바츠의 눈썹이 반달을 그렸다.

“크라켄 왕국은 타락했다. 흑마법사들과 잡은 손은 결코 깨끗해질 수 없다. 따라서 크라켄 왕국에 단죄의 불을 내리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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