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
왕의 선포가 떨어지자.
“허… 흑마법사 따위와 동맹이라니…….”
“장군, 아직 확정된 사안은 아니니 너무 개의치 마시지요.”
일부 대신과 장군들은 눈을 질끈 감았고.
“참으로 현명한 판단이십니다!”
“이제 레바논과의 관계를 재정립해야만 합니다! 신의 이름을 팔아먹으며 크라켄의 고혈을 빨던 도둑놈들을 완전히 쳐 내야 할 것입니다!”
일부는 반색하며 왕의 결정에 찬사를 보낸다.
* * *
5일 뒤.
흑탑의 회의장.
“크라켄 왕국에서 서신이 왔다.”
나가란 탑주가 좌중을 쓱 훑어보며 말을 이어 간다.
“흑점에서 지속적인 수입을 확보하는 게 가능해진다면, 레바논과의 관계를 정리하고 우리의 굳건한 우방이 되어 주겠다고 하는군.”
“허…….”
나가란 탑주의 발언에 좌중 사이에 술렁거림이 번진다.
“그러니까 돈만 주면 크라켄 왕국은 우리 흑탑을 지지하겠다는 뜻 아닙니까?”
“맙소사… 이게 정말 가능한 일이었을 줄이야.”
“적당히 돈만 벌거든 우리를 쳐 낼 줄 알았건만……. 믿기지가 않는군.”
좌중이 경악하여 저들끼리 숙덕거리던 중.
나가란 탑주가 소리친다.
“소란 피울 것 없다. 어디까지나 지속적인 수입이 보장됐을 때의 이야기일 뿐이야. 흑점이 안정적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저들의 제안은 백지장이라고 봐야 해. 그래서 묻겠네. 랄프?”
“예.”
“자네는 이 사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탑주가 나의 의견을 구해 오자 나는 천천히 입을 뗐다.
“오돈 왕이 어떠한 생각을 갖고 우리에게 그런 서신을 보낸 건진 확실치 않습니다만, 일단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흑점은 완벽한 계획이 아닙니다.”
“완벽한 계획이 아니라니? 그게 무슨 말인가?”
나가란의 물음에 난 내가 생각하던 바를 입 밖으로 내뱉었다.
“그럴 확률은 낮겠습니다만 막말로 크라켄 왕국이 갑자기 태도를 바꾼다면 어떻게 될까요?”
“어떻게 되다니? 그야…….”
일부 좌중의 얼굴에 선명한 느낌표가 걸리자.
나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저들이 돌변해서 흑점의 소유권을 주장할 가능성도 있다는 겁니다.”
“확실히 얼굴에 철판을 깔고 그런 짓을 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에 대한 대책까지 생각하고 흑점을 계획한 것 아닌가?”
‘대책이야 있지. 시련의 탑에 연락해서 던전을 폐쇄해 버리면 되니까.’
물론 크라켄이 흑점을 먹는다는 건 어디까지나 내가 생각한 최악의 가정일 뿐.
그런 일이 벌어질 가능성은 실질적으로 희박했다.
“물론 대책은 있지요. 크라켄이 강압적으로 나올 가능성도 낮고요. 다만 제가 구태여 흑점이 완벽한 계획이 아니라고 언급한 데는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다른 이유?”
“그렇습니다. 흑점은 어디까지나 크라켄에 우리의 능력을 각인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했다는 겁니다.”
좌중의 눈이 휘둥그레지자.
나는 덤덤히 말을 이어 갔다.
“이제 저들에게 어느 정도 성과를 보여 줬으니, 우리는 다음 단계로 넘어가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음 단계라 함은…….”
“우리가 크라켄을 필요로 하는 게 아니라 크라켄이 우리를 필요로 하게 만들 겁니다.”
나의 발언에 나가란 탑주가 의아함을 내비친다.
“자네의 말대로 된다면야 더할 나위 없이 좋겠네만, 저들이 뭐가 아쉬워서 우리를 필요로 하겠나? 전쟁이라도 벌어지지 않는 한 저들이 우리를 필요로 할 일은 없을 것 같은데.”
“저는 요 근래 흑점의 운영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크라켄 왕국을 돌아다녔습니다. 그 덕분에 저는 그들이 안고 있는 고질적인 문제를 발견할 수 있었죠.”
“설마… 식량을 말하려는 건가?”
탑주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맞습니다. 크라켄은 다른 왕국들에 비해 유독 기근에 시달리는 경우가 잦더군요. 그래서 저는 그 부분을 해결하고자 합니다.”
“어떻게 해결을 하겠다는 건가?”
“크라켄은 식량 대부분을 레바논과 페른 왕국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레바논의 역할을 대신 하는 겁니다.”
나의 의견에 나가란 탑주가 눈을 빛낸다.
“레바논보다 더 싼 값에 식량을 팔자는 거군.”
“정확합니다. 검은 대지에는 비교적 노는 땅이 많으니 그 땅들을 농지로 개간하여 사용하면 될 겁니다.”
“과연……. 식량을 이용해 레바논과 크라켄의 연결점을 완전히 끊어 내자 이 말이군. 참으로 괜찮은 계획인 것 같네만, 당장 실행에 옮기기엔 힘들 것 같군.”
나가란이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신다.
“왜 힘든 겁니까?”
“그야 우리는 전에 레바논에 언데드들을 팔아넘기지 않았나? 대량의 농지를 개간하기 위해선 그만한 스켈레톤들이 필요할 터인데, 당장 스켈레톤들을 제작하려면 시간이 걸리네.”
‘그러니까 일손이 부족하다 이거네?’
“그 부분은 제가 해결하겠습니다.”
“자네가 말인가? 무슨 수로…….”
게슴츠레한 눈으로 날 바라보던 나가란이 순간 의자 손잡이를 탁 친다.
“그렇군. 좋네! 그럼 랄프 자네가 한번 해결해 보게.”
* * *
나는 흑탑을 나와 북쪽으로 이동했다.
‘여긴 여전히 덥네.’
확연하게 달라진 날씨에 절로 땀이 흘러나온다.
열기가 피어오르는 대지를 걷던 중.
‘다 왔나.’
나는 곧 커다란 건물 한 채를 발견할 수 있었다.
덜그럭-
‘많이도 만들었네.’
나는 눈으로 숫자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스켈레톤들을 훑곤.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오늘은 여유 있게 50구만 제작한다! 몇 구라고?”
“50구!”
안으로 들어서니 바삐 스켈레톤들을 제작하는 흑마법사들을 비롯하여.
그들을 통제하는 제른의 모습이 내 눈에 드리웠다.
“제른!”
“…랄프 님?!”
나의 방문에 깜짝 놀란 것일까.
제른은 허겁지겁 달려와 나를 반가이 맞이한다.
“오랜만에 오셨습니다.”
“워낙 일이 돌아가는 게 바빠서.”
“하하, 바쁘다는 건 좋은 일이지요. 그보다 이곳에는 어쩐 일로 오신 겁니까?”
제른의 물음에 나는 눈으로 스켈레톤들을 가리키며 입을 뗐다.
“일손이 좀 필요해서 말이야.”
“일손이라 하심은… 전쟁입니까?”
제른이 눈을 번뜩이자.
나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전쟁은 전쟁이지. 정확히는 식량 전쟁이지만.”
“…식량 전쟁 말입니까?”
제른의 물음에 나는 그간의 일을 간략하게 설명해 주었고.
제른은 그제야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린다.
“크라켄을 우리 편으로 만들기 위해 작업 중이다, 이렇게 이해하면 되겠습니까?”
“잘 이해했네. 그보다 네가 원하던 전쟁은 아닌데, 괜찮겠어?”
나의 물음에 제른이 희미한 미소를 짓는다.
“피와 시체가 낭자한 곳만이 전쟁터는 아니잖습니까? 이 또한 레바논을 부수기 위한 준비 단계의 일환이니 기쁘게 일하겠습니다.”
“좋아. 그럼 지금 제작한 언데드가 몇이지?”
“스켈레톤만 5천 구가 넘고, 누더기 골렘도 수십 기를 만들어 놨습니다.”
제른의 보고에 나는 눈을 둥그렇게 떴다.
“호오… 제법 많이 만들어 놨네.”
“흑남께서 뒤를 봐주신 덕에 편히 제작에만 임할 수 있었습니다.”
‘재료 조달을 많이 해 주긴 했지.’
“여하튼 그 정도면 충분하겠어. 일단 지도를 보자고.”
나는 지도를 꺼내어 제른의 앞에 펼치며 계속 말했다.
“여기 흑탑의 서쪽 부근 빈 땅들 있지?”
“저곳을 개간하면 되는 겁니까? 꽤나 큰일이 되겠군요.”
“아무래도 그럴 거야, 워낙 척박한 곳이니까. 할 수 있겠어?”
제른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여 보인다.
“물론입니다. 반드시 해 보이겠습니다.”
‘좋아. 이러면 이제 농지도 얼추 확보된 것 같으니… 상황을 좀 지켜보다가 크라켄과 협상을 진행하면 되겠어.’
스켈레톤 대농장이 본격적으로 가동되기 전에.
미리 오돈 왕을 만나 해당 사안을 논하는 것이 좋으리라.
* * *
두 달 뒤.
레바논 왕국, 대신전 안.
“영문을 모르겠군…….”
교황이 양피지를 노려보며 나지막이 중얼거리자.
“오돈은 미친 게 분명합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우리의 보호가 필요 없다는 통보를 보내왔겠습니까?”
“레바논의 비호 아래에서 평화와 번영을 누리더니 이제는 눈에 뵈는 게 없어진 모양입니다. 단죄와 심판을 내려야만 합니다!”
대신관들이 득달같이 목소리를 내며 크라켄을 지탄했다.
“허허, 갑자기 저들이 태도를 바꾼 연유가 궁금하군요. 근래에 크라켄에 흑점이라는 상점들이 대거 생겨났다던데… 혹시 그게 영향을 끼친 것 아닙니까?”
“아크 신관장, 지금 놈들이 그깟 상점 때문에 우리의 보호를 거절했다는 건가?!”
“노여움을 푸시지요. 흑점 뒤에 흑탑이 자리하고 있다는 소문을 접한지라, 의문을 던져 본 것뿐입니다.”
아크 신관장의 대답에 대신관들의 입가에 명백한 비웃음이 걸린다.
“신관장은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문을 믿는 건가? 흑탑과 손을 잡거든 스스로 대륙의 공적이 되는 셈인데, 놈들이 미치지 않고서야 그랬겠나?”
“근거 없는 소문에 휘둘리는 것도 보기 좀 그렇군.”
대신관들이 비꼬듯 말하던 중.
교황이 한 대신관을 보며 나지막이 묻는다.
“멜크에게서 정보가 들어온 건 없나?”
“평소와 마찬가지로 별다른 변화는 없다고 알려 왔습니다.”
흑탑에 큰 변화는 없다.
흑마법사들은 여전히 조용하며 딱히 무언가를 하려는 것 같진 않다.
그것이 멜크가 보내온 정보의 전부였다.
“아, 그리고 여기 어제 도착한 멜크의 긴급 서신입니다.”
“흐음…….”
양피지를 받아 든 교황이 내용을 훑는 와중.
아크 신관장이 좌중을 보며 슬며시 의견을 피력한다.
“허허, 그렇다면 이참에 흑탑을 이용하여 크라켄 왕국에 순교의 물결을 일으키는 건 어떻겠습니까?”
“흑탑을 이용해 크라켄을 치자는 건가? 좋은 생각이지만 흑탑이 순순히 따를지 의문이군.”
“갈프 신관이 활약해 준다면 충분히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하나 대부분의 대신관들은 부정적인 태도를 고수했다.
“힘들게 넣은 첩자네. 만약 그가 크라켄과의 전쟁을 주도하다가 흑탑에서 제거되기라도 한다면, 그 손해는 어떻게 책임질 셈인가?”
“허허, 그럼 크라켄의 오만한 작태를 방관하실 겁니까?”
아크 신관장과 대신관의 눈이 부딪치며 그 사이에서 불꽃이 튀는 가운데.
어째선지 얼굴이 딱딱하게 굳은 교황이 그들을 중재한다.
“흑탑을 이용하는 건 최후의 수단으로 삼도록 하지. 일단 크라켄 왕국에 사신을 보내 우리의 불편한 심기를 보여 주고, 그 뒤에도 저들이 레바논에 의지하지 않거든 그땐 흑탑을 이용하도록 한다.”
“그리하겠습니다!”
좌중이 고개를 조아리던 그때.
“그보다… 미카엘 대신관.”
“예, 교황님.”
“멜크가 보낸 서신 말이네. 뭔가 이상하지 않나?”
슈바츠는 양피지의 끝자락을 가리키며 말을 이어 갔다.
“항상 멜크의 서신 끝에는 작은 탑 문양이 그려져 있었네. 하지만 최근 들어선 서신에서 문양을 찾아볼 수가 없군.”
“그건… 놈이 깜박 잊은 게 아니겠습니까?
“한두 번이라면 그럴 수 있겠지. 하지만 같은 일이 반복된다면 의심을 해 봐야 하는 게 마땅하지 않겠나?”
싸늘한 교황의 물음에 대신관은 퍼뜩 고개를 숙인다.
“죄,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무신경했던…….”
“쯧… 난 멜크가 정체를 들켜 숙청당했을 가능성에 대해 논의하고자 하는 것이지, 자네를 탓하고자 이런 말을 꺼낸 게 아닐세.”
“하지만 그건 가능성이 낮습니다. 이제껏 속아 넘어갔던 놈들이 어떻게 갑자기 멜크의 정체를 알 수 있었겠습니까?”
한 대신관이 강하게 반박하자.
잠자코 대화를 듣고 있던 교황이 슬며시 입을 뗀다.
“만약 흑마법사들이 정말 멜크의 정체를 알았다고 한다면… 그 이유는 하나밖에 없겠군.”
“이유가 하나라 하심은…….”
아크 신관장을 지그시 응시하는 교황.
“아무래도 우린 뒤통수를 맞은 모양이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