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카데미의 노예가 살아남는 법-98화 (98/200)

98.

“허… 이게 도대체 어찌 된 영문인지…….”

용병과 모험가들로 득실거리는 흑점을 보며 레논이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자.

나는 옅은 미소를 흘렸다.

“어찌 된 영문이라니요? 이렇게 될 줄 모르셨던 겁니까?”

“물론 흑남께서 어련히 알아서 하셨을까마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이 몰려오리라곤 상상조차 못 했습니다. 대체 뭘 어떻게 하신 겁니까?!”

레논의 물음에 나는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딱히 특별한 일은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미스릴 광산에서 나오던 작은 조각들을 이용했을 뿐이죠.”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그 조각들을 던전 안에 뿌리라고 지시했습니다.”

나의 말에 레논의 두 눈이 휘둥그레진다.

“허어… 아무리 작은 조각이라고 해도 엄연한 미스릴 아닙니까? 그러면 오히려 적자를 볼 것 같은데……. 심지어 이곳에 있는 던전만이 아니라 다른 던전들에도 조각을 뿌리라고 지시하신 것 아닙니까?”

“맞습니다. 흑점이 세워진 모든 던전들에 조각들을 뿌리라고 지시했죠. 하지만 부탑주님, 잘 생각해 보시죠.”

나는 텅텅 비다시피 한 진열대를 가리키며 말을 이어 갔다.

“기껏 뿌린 조각에 값을 매겨 봐야 500골드 남짓 정도입니다. 조각 자체는 그리 비싼 게 아니에요. 하지만 오늘 물건들을 팔아서 번 돈은 얼마인지 아십니까? 천 골드가 넘습니다. 그마저도 물건이 없어서 이 정도로 그친 거고요.”

“그렇게 보면 이득이긴 하지만…….”

레논이 말꼬리를 흘리자 나는 그의 심경을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렇다고 계속해서 조각들을 뿌리진 않을 겁니다. 조각을 뿌리는 건 당분간만입니다. 던전 주변에 어느 정도 마을이 형성되고 활성화되고 나면 그땐 멈춰야죠.”

“허어…….”

이제야 내가 조각을 뿌린 이유를 눈치챈 것인지.

레논이 탄식을 터뜨린다.

“과연… 크라켄의 국왕이 이쪽의 제안을 받아들인 이유가 있었군요.”

던전 주변에 마을이 만들어지고 활성화되며 활기가 돌기 시작하거든.

거기서 나오는 세금은 크라켄 왕국을 살찌우게 할 터.

“하지만 던전에서 미스릴 조각이 나오지 않는다면, 던전을 찾는 용병들의 숫자도 줄어들게 되는 것 아닙니까?”

레논의 합리적인 의문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 던전의 주인들은 던전의 경쟁력을 키워야 할 겁니다.”

“흑남의 말씀이 맞습니다. 경쟁력이 떨어지는 던전에 더 투자를 할 필요는 없으니 말이죠.”

“뭐, 돈도 돈이지만 이번 사업은 흑마법사에 대한 인식을 바꿔 놓고자 하는 것도 큽니다.”

나의 말에 레논의 얼굴에 물음표가 걸린다.

“흑점은 분명 훌륭한 계획입니다만… 흑점만으로는 우리에 대한 편견이 사라질 것 같진 않습니다만.”

“물론 이것만으로 사람들의 머릿속에 박혀 있는 인식을 뿌리 뽑는 건 어려울 겁니다. 애당초 그들을 노린 것도 아니고요.”

“그게 무슨…….”

흑마법사에 대해 인식을 바꾸겠다면서 정작 대중을 노리지 않는다는 나의 발언 때문일까.

레논이 벙찐 표정으로 날 바라본다.

“제가 노리는 건 크라켄 왕국의 국왕을 비롯하여 대신들의 인식입니다. 만약 흑점에서 거액의 돈이 세금으로 징수된다면, 분명 저들의 인식은 바뀌게 될 겁니다.”

“허어… 그게 정말 가능한 일입니까?”

레논의 우려에 나는 진열대에 붙은 먼지를 툭 털어 내며 입을 열었다.

“뭐, 무조건 된다는 확신은 없습니다. 그래도 크라켄의 국왕이 탑주님과 그리 사이가 나쁘지 않은 걸 봐선, 가능성은 있지 않겠습니까?”

“과연… 일리가 있습니다.”

레논은 탄복하면서도 내게 질문을 던져 온다.

“혹시 흑남께선 그 모든 것들을 다 감안하여 크라켄 왕국에 흑점을 세우겠다고 하셨던 겁니까?”

“하하하, 꼭 제가 다 계획했다고 보기보단 여러 요소들이 작용한 덕이죠. 탑주님의 도움도 컸고요.”

실제로 나가란 탑주가 크라켄의 왕과의 친분을 이용해 도움을 준 덕에.

이렇게 일이 수월하게 진행됐으니 말이다.

“여하튼 이만하면 가고일 던전의 확인은 끝내도 될 것 같군요. 슬슬 다른 흑점들도 둘러보러 가시죠.”

레논과 함께 흑점을 나가자.

퍼더덕, 퍼더덕-

아까 피워 뒀던 커다란 모닥불 위로 날갯짓 소리가 울려온다.

“저희가 때를 맞춰 잘 나왔군요.”

이윽고 불빛에 그림자가 드리운 커다란 언데드 와이번 두 마리가 지상에 착지하자.

“랄프 님, 계십니까?! 물건을 가지고 왔습니다!”

언데드 와이번의 목뼈 부근에 타고 있던 흑마법사가 얼른 내려 나를 찾는다.

‘짐이 많긴 하네.’

나는 언데드 와이번의 몸에 그득 걸려 있는 보따리들을 보다가.

슬쩍 시선을 돌렸다.

“고생하는군,”

“하하, 고생이라니요? 이것들만 흑점에 다 전달하면 돈을 많이 주신다는데, 당연히 웃으며 해야지요!”

껄껄 웃는 흑마법사를 보며.

나도 따라 미소를 짓다가 손을 들어 언데드 와이번을 가리켰다.

“그보다 와이번의 탑승감은 좀 어떤 것 같아?”

“처음에는 좀 두려웠었는데, 이게 계속 타다 보니 확실히 익숙해진 것 같습니다. 공방의 흑마법사들이 제법 괜찮은 걸 만든 모양입니다!”

“그렇군.”

“아차차, 일단 얼른 짐부터 풀겠습니다. 아이작! 뭐 해? 앞으로 네가 관리할 곳이잖아?! 얼른 짐 풀어!”

두 흑마법사가 언데드 와이번에서 바삐 짐을 풀기 시작한다.

이윽고 물건을 모두 내렸을 무렵.

한 흑마법사가 내게 다가와 조심스럽게 묻는다.

“저… 흑남 님. 앞으로는 제가 이곳을 관리하는 게 맞는지요?”

“그래. 앞으로는 네가 이곳의 흑점을 관리하면 된다. 주의 사항은 사전에 들었겠지?”

“물론입니다! 저 아이작! 최선을 다해 이곳을 운영해 보겠습니다!”

흑마법사의 당찬 포부에 나는 말없이 그의 어깨를 두드려 주곤.

레논과 함께 언데드 와이번에 탑승했다.

‘씁… 몇 번 시승을 해 봤었는데도 떨리네.’

이윽고 나와 레논을 태운 언데드 와이번이 세차게 하늘로 솟구치기 시작했다.

* * *

두 달 뒤.

크라켄 왕국의 왕성.

“허억, 허억…….”

한 남자가 손에 양피지를 꽉 쥔 채 복도를 내달린다.

“왕이시여! 왕이시여!”

이윽고 남자가 고함을 지르며 문을 박차고 회장 안으로 들어서자.

“그레고리 대신! 아무리 일이 바쁘다고 한들, 왕이 계신 곳에서 이 무슨 무례입니까? 체통을 지키십쇼!”

이미 회장 안에 있던 다른 대신들이 그에게 면박을 준다.

“허억, 허억… 죄송하게 됐습니다. 워낙 급한 일인지라…….”

그레고리 대신이 연신 고개를 숙이던 중.

“격식 차릴 것 없다. 무슨 일이지?”

왕좌에 앉아 있던 노인이 피로에 젖은 눈으로 그레고리를 보며 묻는다.

“왕이시여…….”

허겁지겁 그의 앞으로 달려가 무릎을 꿇는 그레고리.

“그것이… 방금 흑점에서 거두어들인 세금의 정산이 끝났습니다.”

“겨우 정산이 끝난 정도로 그리 호들갑을 떨었던 건가?”

“그게… 그 액수가 제 생각을 한참 뛰어넘은지라…….”

그레고리가 송구스럽다는 듯 고개를 숙이자.

오돈은 심드렁한 표정을 한 채 그를 내려다본다.

“경이 그리 난리를 치는 걸 보니 보통 액수는 아닌 모양이군. 1만 골드는 들어왔나?”

“그게… 10만 골드가량이 모였습니다.”

그레고리 대신의 말이 끝나자.

일순간 회장 안에 정적이 흐른다.

“…지금 뭐라고 했나? 10만 골드?”

“그렇습니다. 10만 골드입니다.”

그레고리가 재차 금액을 강조하자.

대화를 듣던 대신들도 깜짝 놀라 저들끼리 숙덕거린다.

“그깟 상점에서 10만 골드가 들어왔다니… 믿기질 않는군.”

“흑점이 들어선 지 겨우 두 달 정도 되지 않았나? 그럼 5만 골드 정도가 들어왔다고 보는 게 맞지.”

“5만 골드라고 해도 그게 어디 좀 적은가? 10만 병사에게 한 달분의 봉급을 지불해도 남는 돈일세!”

“어마어마하군. 솔직히 이 정도로 돈이 될 거라곤 생각조차 못 했는데 말이네.”

대신들이 숙덕거리는 가운데 오돈의 지쳐 있던 눈에 생기가 돌기 시작한다.

“10만 골드라…….”

“그것이 처음 한 달분을 거두어들인 것이니, 다음 달분도 종합하는 대로 보고를 올리겠습니다!”

“…음?”

한쪽 눈을 치켜뜨는 오돈.

“두 달분이 아니었나?”

“아닙니다. 첫 달분만 종합한 것입니다.”

그레고리의 보고에 대신들의 표정이 경악으로 물들어 간다.

“맙소사… 그럼 한 달 만에 10만 골드가 걷혔다는 건가?”

“허어… 미쳤군, 미쳤어…….”

“경들은 정숙하게.”

소란스러운 장내에 오돈의 외마디가 퍼지자.

대신들은 전부 입을 꾹 다물었다.

“사비.”

“예, 왕이시여.”

“자네는 현 상황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그러자 허리춤에 커다란 도를 꽂고 있던 남자가 허리를 살짝 숙인 채 답한다.

“나라 각지에서 기근에 시달리고 있는 만큼, 우리 왕국에 큰 보탬이 될 것 같습니다.”

“그렇겠지. 그러니 묻겠네. 그댄 아직도 내 선택을 반대하나?”

“…….”

사비가 대답하지 못하자.

옆에 있던 대신이 슬며시 입을 연다.

“왕국의 악재를 해결해 주는 단비를 내려 준 사람이 흑마법사면 어떻습니까? 설령 상대가 흑마법사라고 해도 국익에 도움이 된다면 손을 잡는 게 맞지요.”

“그 말인즉슨 자네는 돈에 영혼을 팔자는 건가?!”

사비가 으르렁거리자.

발언한 대신이 몸을 움찔거렸다가 고개를 쭉 세운다.

“대장군, 잘 생각해 보시지요. 우리 왕국이 기근으로 힘겨워하는 상황에서 대륙의 주인을 자처하는 레바논은 우릴 위해 뭘 해 줬답니까? 언데드들을 토벌한다는 명목하에 우리에게 막대한 돈이나 뜯어 갔잖습니까?”

“그건…….”

“어디 그것만 가져갔답니까? 흑마법사들의 대륙 진출을 저지한다는 명목으로 또 뜯어 가지 않았습니까?”

대신은 사비가 반박할 시간조차 주지 않고 폭풍처럼 말을 이어 간다.

“심지어 웃긴 게 뭔지 아십니까? 검은 대지가 우리 왕국과 이토록 인접해 있습니다만, 정작 우리가 흑마법사들에게 직접적으로 공격을 받은 적은 없다는 겁니다.”

“그야 그렇네만……. 그러니 더욱 흑마법사들을 죽여야 하는 것 아니겠나?! 흑마법사들을 죽인다면 더 이상 돈이 나가는 일도 없어질 터인데.”

사비의 반박에 다른 대신이 입을 열어 논쟁에 참전한다.

“그럼 검은 대지에 병력을 보냈다가 만에 하나 큰 피해를 입기라도 한다면 어쩐답니까? 다른 왕국들은 가만히 있을까요? 분명 우리 왕국을 날름 먹으려고 할 텐데요.”

“자네는 흑마법사들과 손을 잡는 것에 대해 반대하지 않았던가?”

사비가 끼어든 대신을 노려보며 나지막이 묻자.

“커흠… 그랬었지요. 하지만 이 정도로 세금이 걷힌다면 전 찬성하겠습니다.”

대신은 모른 척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돌린다.

“아무리 돈이 중요하다고 해도 그렇지! 자네는 돈에 영혼을 팔 셈인가?!”

“그럼 대장군께서는 식량이 없어 굶어 죽는 백성들을 외면하시겠다는 겁니까?”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이 그게 아닌 걸 자네도 알잖나?!”

대신들과 장군들이 얽혀 말다툼을 벌이던 중.

한 대신이 논쟁에 종지부를 찍으려는 듯 전쟁터 위로 폭탄을 던진다.

“그럼 이참에 레바논과의 관계를 털어 내고 흑탑과 손을 잡는 건 어떻겠습니까?”

“…….”

폭탄이 터진 자리 위로 침묵만이 맴돈다.

“지금… 흑마법사들과 동맹을 맺자는 겁니까?”

“뭐 어떻습니까? 왕국에 도움이 된다면 적과도 손을 잡을 수 있는 겁니다.”

“그럼 과연 레바논이… 아니! 대륙이 가만히 있을 거라고 보나?!”

격노한 사비의 일갈에 대신은 어깨를 으쓱인다.

“다들 내색만 안 했을 뿐, 레바논이 거둬 가는 막대한 세금에 꽤나 지쳐 있을 겁니다. 그리고 좀 더 솔직해지자면… 우리가 흑마법사들에게 엄청난 피해를 입은 적은 또 없지 않습니까?”

“하기야… 성마전쟁 때도 레바논만 호되게 당하긴 했었지…….”

“만약 레바논과의 관계를 정리하면 확실히 나가는 돈은 엄청나게 줄겠군.”

어느덧 의견이 한쪽으로 기울어지려 하자.

사비가 목에 핏대를 세운 채 소리친다.

“설령 그 모든 게 맞다고 한들 사람의 도리를 저버려선 안 되는 거다!”

“그럼 흑마법사와 이야기만 나눠도 도리를 저버리는 게 되는 겁니까? 말조심 하시지요, 대장군.”

대신이 짐짓 눈으로 왕을 가리키던 중.

쾅-

“이야기는 그쯤들 하지.”

오돈이 왕좌를 내려쳐 좌중의 이목을 집중시킨다.

“10만 골드는 결코 적은 돈이 아니다. 하지만 거래 상대가 흑마법사라는 게 마음에 걸린다는 것도 짐은 이해한다. 따라서 결론을 내리겠다. 만약 흑탑에서 달마다 10만 골드 상당의 금액을 지속적으로 보장해 준다고 한다면…….”

“왕이시여…….”

“현명하신 판단을…….”

대신들과 장수들의 시선이 복잡하게 오가는 가운데.

오돈이 무겁게 입을 연다.

“우리 크라켄은 흑탑과 손을 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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