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카데미의 노예가 살아남는 법-94화 (94/200)

94.

교황, 슈바츠도 아크의 말을 거들자 나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이놈들은 얼마 전에 그 사달이 났는데도 태평한 모양이네.’

전대 성녀인 헬렌이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저들은 잠잠했고.

거기다가 어찌 된 영문인지 죽을 것이라 생각했던 제이나 또한 멀쩡하게 살아 있었다.

‘아니, 오히려 제이나에 대한 인식이 더 좋아진 것도 같단 말이야.’

분명 한 달 전에는 대신전의 관계자들이 제이나를 무시하는 기류가 팽배했건만.

헬렌이 죽은 뒤로 제이나를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가 묘하게 달라진 것 같았다.

‘헬렌이 죽은 뒤 내려온 신탁 때문인 것 같긴 한데… 뭐, 나랑 상관은 없는 일이지만.’

제이나의 인식이 바뀌건 말건.

내게 중요한 건 눈앞의 상황이었기에 나는 웃으며 입을 뗐다.

“그렇습니까? 그거 희소식이군요.”

“그렇다네. 흑탑과 흑카데미에만 박혀 살던 놈인지라 시간이 더 걸릴 줄 알았는데, 레바논 님이 도우신 게지.”

“그런데 흑남을 어떻게 처리하실 겁니까? 분명 놈한테는 호위병들이 붙어 있을 텐데요.”

나의 물음에 슈바츠가 껄껄 웃는다.

“그건 걱정하지 말게. 놈은 불의의 사고로 죽게 될 것이니, 그때 갈프 자네가 아무렇지 않게 그 자리를 비집고 들어가면 될 걸세. 이해했나?”

“하지만 비집고 들어갔다가 흑마법사들에게 제 정체가 노출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전에 그 부분을 해결해 주신다고 하셨습니다만 아직 아무런 조치가 없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괜찮은 겁니까?”

내가 안전에 대해 우려를 표하자.

교황이 한쪽을 보며 손짓한다.

드르륵-

그러자 일단의 무리가 정교한 문양이 각인된 상자를 조심스럽게 들고 온다.

‘저건…….’

시종들이 뚜껑을 열자.

슈바츠가 안에 있던 잿빛 팔찌를 꺼내며 말한다.

“이 맹약의 팔찌는 레바논 님께서 우리에게 내려 주셨다는 세 가지 신기 중 하나일세.”

‘…신기라고? 저게? 그냥 평범한 팔찌처럼 보이는데…….’

내가 의아한 눈으로 팔찌를 바라보자.

교황은 희미한 미소를 보이며 말을 이어 간다.

“겉으로 보기엔 그저 허름한 팔찌처럼 보일 걸세. 하지만 이걸 착용한다면 갈프 자네가 대놓고 성마법을 사용하지 않는 이상, 흑마법사들에게 걸릴 일은 없을 거라네.”

‘호오… 레바논의 신기라…….’

내가 신기하다는 듯 팔찌를 바라보던 중.

아크 신관장이 나지막이 우려를 표한다.

“허허, 그래도 조심해서 행동하는 편이 좋을 거네. 맹약의 팔찌는 자네의 신성력만 가려 줄 뿐이야. 그러니 힘을 쓸 상황을 만들지 말게. 흑마법사들에게 의심할 여지를 주지 말라는 뜻이네.”

“그러죠.”

“갈프 신관, 크게 염려할 건 없을 거네. 검은 대지로 가거든 우리가 심어 둔 인재들이 자네를 도울 테니까 말이네. 그리고 무슨 일이 생기거든 멜크를 찾게. 그가 자네를 도와줄 걸세.”

교황과 아크 신관장에게 몇 시간이고 계획에 대해 설명을 듣고 서야.

난 비로소 이동할 준비를 할 수 있었다.

“준비가 끝나셨거든 마차에 타 주시면 됩니다!”

‘이제 이곳을 떠나는 건가.’

내가 마차에 오르기 전에 마지막으로 대신전 안을 바라보던 그때.

“돌아가는 건가요?”

제이나가 내게 다가와 작게 소곤거린다.

“돌아가다니요?”

“이제 연기 좀 그만하세요. 당신의 정체에 대해 침묵을 지켰는데 끝까지 그렇게 나올 건가요?”

그녀가 불평을 터뜨리자 난 피식 미소를 흘렸다.

“그래서, 왜 온 건데?”

“그냥… 생각이 많아져서요. 앞으로 전 어떻게 하는 게 좋을지… 조언이나 좀 구하러 왔어요.”

‘…나한테 조언을 구한다고?’

“그쪽은 적한테 조언도 구하나?”

내 물음에 제이나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뜬다.

“뭐 어떤가요? 인정하기 싫지만 어쨌건 그쪽은 흑탑에서 인정을 받았잖아요. 배울 게 있으면 배우는 거죠.”

“글쎄…….”

나는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툭 한마디를 던졌다.

“내가 너였으면 일단 교황부터 견제할 것 같은데.”

“…네?”

제이나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나를 보자.

나는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그렇잖아? 이제껏 교황 쪽 세력이 널 무시했던 것 같은데, 레바논의 신탁이 떨어진 뒤로 사람들의 태도가 달라졌잖아?”

“그렇죠?”

“그러니까 그 기회를 이용하라는 거야. 사람들이 네게 호의적이게 됐을 때, 교황이 잡고 있던 실권을 조금이라도 빼앗아 오라고. 그래야 네 발언권도 그만큼 강해지는 거지.”

제이나가 멀뚱히 나를 바라보자.

나는 한숨을 내쉬며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 무식한 힘은 어따 써먹게? 어차피 아크 신관장이 있는 이상, 걸리는 건 시간문제잖아? 그럴 바엔 그냥 네가 먼저 힘을 보이고 실권을 장악하라고, 이 답답한 인간아.”

“아…….”

“갈프 신관님! 이제 슬슬 가셔야 합니다!”

나를 재촉하는 성기사의 부름에 나는 마지막으로 한마디를 더 내뱉었다.

“내 조언은 여기까지야. 어떤 판단을 할지는 네 몫이고. 그럼 잘 살아라.”

“교황을 견제하라… 교황을…….”

* * *

3주 뒤.

‘후… 드디어 돌아왔구나.’

나는 감회에 젖은 눈으로 케이탈 요새를 응시했다.

몇 달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이곳은 여전히 대륙으로 나가고자하는 사람들로 바글거리고 있었다.

‘달라진 게 없네.’

“허… 내가 이 흑마법사들의 대지에 또 오게 될 줄이야…….”

그 와중 옆에 있던 골버린이 탄식하자.

나는 그를 보며 질문을 던졌다.

“검은 대지에 와 본 적이 있던 겁니까?”

“성마전쟁을 치렀을 때 이곳에 발을 디딘 적이 있었지. 다만… 그때는 저런 요새는 없었던 것 같은데… 흑마법사들도 발전을 하는 모양이군.”

나와 골버린이 대화를 나누던 중.

상인으로 변장해 있던 성기사가 우리에게 다가온다.

“갈프 신관님, 주변을 둘러보는 건 잠시 미루시고 바로 이동을 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저희는 어디로 가는 겁니까?”

“파프니르라는 곳으로 갈 겁니다. 내일 그곳에 흑남이 방문한다고 합니다.”

‘파프니르라…….’

파프니르.

케이탈 요새에서 마차 타고 하루 정도 달리면 있는 마을인데.

흑마력 포션의 재료 중 하나인 엘라고라는 식물을 재배하는 곳이기도 했다.

“알겠습니다. 바로 이동하죠.”

* * *

다음 날.

마차를 타고 동쪽으로 달린 끝에 우린 파프니르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곳이 파프니르인가. 직접 와 보는 건 또 처음이네.’

여느 마을과 크게 다를 것 없는 평범한 마을이 내 눈에 들어온다.

‘확실히 스켈레톤들로 농사를 지어서 그런지 사람들이 없네.’

그나마 이곳에 거주하는 거주민들도 스켈레톤들을 관리하러 모두 밭으로 나가 있을 터.

‘뭐… 그래서 이곳을 선택한 거기도 하지만.’

내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마을을 바라보던 중.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성기사가 내게 다가와 보고한다.

“이제 저희는 이곳에서 흑남이 오는 걸 기다리다가, 첩자가 소란을 피우면 그때 움직이면 됩니다.”

‘소란이라…….’

마을의 갓길에 마차들을 세우고 기다리기를 몇 시간.

“저기! 저기 옵니다!”

“드디어 흑남이 오는 모양입니다! 다들 준비해라!”

성기사들이 저 멀리서 달려오는 마차들을 보며 소리친다.

“놈이 마차에서 내리거든 곧장 첩자가 놈을 암살할 겁니다. 그럼 그 혼란스러운 틈을 타 무리에 섞여 들어가시면 됩니다. 이해하셨습니까?”

성기사가 나를 보며 묻자.

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과연 일이 그렇게 돌아갈까? 마차들은 곧 폭발할 텐데.’

내가 게슴츠레한 눈으로 달려오던 마차들을 응시하던 중.

콰과과과과광-

갑자기 큰 굉음과 함께 마차가 사방으로 터져 나간다.

“저. 저게 무슨……?”

성기사들이 흩날리는 마차 파편을 멍하니 바라보던 가운데 일단의 무리가 마차에 접근하더니.

휙, 휙-

우리를 보며 손을 흔들기 시작한다.

“갈프 신관님! 신호가 왔습니다! 지금입니다!”

마침내 사인이 떨어지자.

나는 로브를 뒤집어쓴 채 허겁지겁 마차로 달려갔다.

그러자 먼저 마차로 다가갔던 무리 중 한 명이 성기사에게 말을 건다.

“이 사람이 위장 흑남인가?”

“그렇긴 합니다만…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이 폭발은… 저희가 계획했던 일이 아니잖습니까?!”

“우리 말고도 흑남을 노리는 놈들이 있었던 모양이지. 어쨌건 수고를 덜었으니 우리 입장에선 좋은 거잖아?”

아무렇지 않게 말을 하던 남자가 로브를 벗자.

‘…어? 저놈은……?!’

어딘가 익숙한 모습을 한 흑마법사가 모습을 드러낸다.

‘멜크잖아?’

도대체 누가 레바논 왕국의 조력자인가 했더니.

설마 위대한 흑마법사들의 일원인 멜크가 그중 하나였을 줄이야.

‘이놈 봐라… 레바논의 끄나풀이었어? 그래서 교황 놈이 나보고 멜크를 찾아가라고 했던 거였나?’

내가 속으로 혀를 내두르던 중.

성기사가 멜크를 보며 소리친다.

“교황님께서는 반드시 흑남의 시체를 확보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시체? 이미 폭발에 죽었을 놈의 시체를 왜 찾아? 그런 수고를 할 시간에 빨리 움직일 생각이나 해. 그리고 너, 로브 벗어 봐.”

멜크가 나를 보며 고개를 까딱이자.

나는 천천히 로브를 벗었다.

“미친…….”

내 얼굴을 본 멜크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린다.

“헛소린 줄 알았더니 진짜 흑남을 빼닮았네. 아니, 흑남이라고 해도 믿겠어.”

“설마 저희 교황님께서 계획하신 ‘흑세계’ 계획을 의심하신 겁니까?”

“당연히 의심했지. 세상에 얼굴이 이렇게 똑같은 사람이 몇이나 있겠어?”

멜크는 연신 내 얼굴을 쳐다보면서도.

주머니에서 옷가지를 꺼내어 내게 내밀었다.

“갈프 신관이라고 했었지? 일단 이 옷으로 갈아입으면서 들어.”

“그러죠.”

“지금 댁은 바알의 세력에게 습격을 받은 거야. 그래서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흑탑으로 돌아가는 거지. 무슨 말인지 이해했어?”

멜크의 물음에 난 웃음을 참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했습니다. 근데 흑탑에 가거든 전 뭐라고 말을 해야 되는 겁니까?”

“일단 이걸 받아.”

멜크가 두터운 양피지 더미를 내게 내민다.

“그 안에 흑탑의 주요 인물들에 대한 정보들이 있으니까 웬만하면 흑탑에 도착하기 전에 싹 다 외워 둬. 알았어?”

“그러죠.”

* * *

3일 뒤.

나는 멜크와 기사들의 비호를 받은 채 흑탑으로 이동했다.

‘크… 이 망할 흑탑이 반갑게 느껴질 줄이야.’

골버린과 성기사들은 밑에 남겨 둔 채.

나는 멜크의 인도하에 익숙한 회의장 안으로 들어섰다.

“허, 랄프! 습격을 받았다고?! 몸은 괜찮은 건가?”

어딘가 어색한 걱정을 보내는 나가란 탑주를 보며.

나는 속으로 웃음을 흘렸다.

‘저 양반은… 왜 저렇게 연기를 못해?’

그 외에도.

“멀쩡하신 것 같아 다행입니다.”

“베논께서 흑남님을 지켜 주신 게지요.”

여러 흑마법사들이 걱정했다는 듯 나의 안부를 물어 온다.

“멜크 님께서 참으로 큰일을 하셨습니다!”

레논 부탑주가 멜크에게 칭찬을 던지자.

“하하하! 마침 내가 파프니르에 볼일이 있었으니 망정이지, 하마터면 흑남이 죽을 뻔했지!”

멜크는 당당히 가슴을 펴고 의기양양한 모습을 보였다.

“랄프, 자네는 당분간 어디를 나가기보단 쉬는 게 좋겠네. 그리고 멜크, 회의가 끝나거든 자네는 나를 좀 보지. 흑남도 무사한 것 같으니 회의는 이것으로 마무리하겠네.”

나가란 탑주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멜크는 내게 눈짓을 한 뒤, 그의 뒤를 쫓아 사라진다.

그러자.

“계획대로 잘된 것 같습니까?”

레논이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내게 말을 걸어온다.

“잘해 주셨습니다. 부탑주께서 마차를 잘 터트려 주신 덕에 편하게 속여 넘긴 것 같습니다.”

“하하, 그게 무슨 어려운 일이라고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애당초 흑남께서 사전에 연락을 주신 덕에 가능했던 일이지요.”

레논은 허허 웃다가 진중한 표정을 한 채 말을 이어 간다.

“그런데… 레바논의 첩자들이 많은 모양입니다.”

“많은 정도가 아닙니다. 그냥 더럽게 많습니다. 아무래도 이번 기회에 확실하게 솎아 내야 할 것 같긴 합니다.”

“그래도 흑남께서 레바논의 머저리들을 잘 속여 넘기신 덕에 이런 기회를 잡은 것 같습니다. 대체 어떻게 놈들을 속여 넘기신 겁니까?”

레논의 물음에 나는 레바논에서 있었던 일을 아주 간략히 설명해 주었고.

“허어… 아무리 생김새가 비슷하다고 해도 그렇지, 설마 그런 무모한 계획을 세웠을 줄이야…….”

레논은 나의 말에 연신 감탄사를 터트렸다.

“그리고… 레바논에 머무르는 동안 제 생각이 좀 많이 바뀌었습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놈들은 우리를 도구로밖에 보질 않더군요. 흑마법사는 자신들의 명예를 위한 도구다, 이 생각이 전반적으로 레바논에 퍼져 있던 걸 느꼈습니다. 저를 몰래 흑탑에 박아 넣으려고 한 것도 결국 그 일환이고요.”

레논이 낮게 침음하자.

나는 덤덤히 말을 이어 갔다.

“그래서 전 그런 그들을 보며 한 가지 결단을 내렸습니다.”

“결단이라 하심은…….”

“전 흑탑을 양지로 끌어올릴 생각입니다.”

나의 발언에 레논이 멍한 표정으로 날 바라본다.

“그게 무슨…….”

“전 대륙이 흑탑을 정식 마탑으로 인정하게 만들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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