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네가… 성녀라고?”
“그렇다니까?”
언행은 투박하기 짝이 없었고.
생김새도 성녀와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여인이 갑자기 자신을 성녀라 주장하다니.
‘미친년인가?’
지금 저 말을 나보고 믿으라고 하는 소리인 걸까?
“내 말이 믿기지 않겠지. 하지만 사실이야! 사실이라고!”
“…….”
분명 그녀의 말은 신빙성이 떨어진다.
하지만 묘하게 그녀의 말이 신경 쓰이는 이유는 왜일까.
“하… 그래. 네 말이 사실이라고 치자고. 네 말을 증명할 수는 있고?”
“아니. 지금의 난 레바논의 노여움을 사서 신성력을 사용할 수 없어. 증명하는 건 어렵겠지.”
‘흠… 노여움이라…….’
“레바논의 노여움을 산 이유가 뭔데?”
“그야…….”
여인의 입꼬리가 위아래로 실룩거린다.
“내가 그년을 배신하고 바알을 섬겼기 때문이지.”
‘확실히 이 부분은 내가 알던 정보랑 일치하는 것 같긴 한데…….’
내가 여인에 대한 확신을 가지지 못하고 있던 그때.
쾅-
갑자기 위층으로 올라가는 통로가 거칠게 열리더니.
“더 이상의 안내는 필요 없어요! 이제 제가 알아서 할 테니까 물러나 있어요! 아시겠어요?!”
누군가가 최하층 안으로 걸어 들어온다.
‘이런… 저년은 왜 이 시간에 여길 온 거야?’
몸을 숨길 시간적 여유가 없었기에 나는 제이나를 빤히 바라봤고.
“…누구시죠?”
제이나 또한 당혹한 기색이 역력하여 나를 노려본다.
드드득-
그녀의 몸이 점점 우락부락해지려던 찰나.
“오늘따라 날 찾는 손님이 많네. 중요한 이야기를 하려던 참인데 마침 잘됐어! 너도 일로 오든가.”
헬렌이 피식피식 웃으며 제이나에게 손짓한다.
“감히… 한낱 죄인 따위가 지금 누구보고…….”
“죄인? 죄인이기 전엔 네 전임자였어, 이 얼간이 같은 년아. 그리고 너라고 평생 그 자리에 앉아 있을 것 같아?”
“…전임자라고요?”
여인의 말에 제이나는 나를 경계하면서도.
조심스럽게 여인이 갇혀 있는 철창 앞으로 다가왔다.
“그보다 당신은 누구죠? 누군데 이곳에 있는 건가요? 감옥의 관리자인가요?”
제이나가 내게 질문을 해 오자.
“어차피 밖으로 나가면 원치 않아도 싸워야 할 텐데 뭘 싸우려고 해?”
헬렌이 대신 웃으며 대답한다.
“당신이… 헬렌이라는 거죠?”
“그래. 내가 헬렌이다. 네 전임자이기도 하고. 왜, 못 믿겠어? 그럼 믿게 해 줘야지. 어디서부터 이야기해 볼까. 아, 그래. 슈바츠에 대해서 좀 이야기해 볼까?”
여인의 입에서 교황의 이름과 그가 행했던 과거의 업적들이 상세히 흘러나오자.
제이나의 눈빛이 점점 표독스럽게 변하기 시작했다.
“당신… 정말 헬렌이 맞군요……. 전부… 전부 당신 때문이에요.”
“…뭐?”
“전부 당신 때문이라고요! 당신만 아니었어도 전 이곳에 올 필요도 없었다고요!”
제이나가 악다구니를 내지르자.
여인은 어안이 벙벙한지 그녀를 바라보다가 어깨를 으쓱인다.
“오, 그래? 그거 안타까운 일이네. 근데 어쩌라고?”
“뭐라고요?!”
“왜 내가 네 불운까지 신경 써야 되는 건데?”
헬렌의 빈정거림에 분노한 제이나의 눈동자가 뒤집히려던 찰나.
“일단 이야기를 좀 들어 보자. 왜 그녀가 죽지 않고 아직까지 살아남아 이곳에 갇혀 있는지 너도 궁금하지 않아?”
나는 나지막이 말하며 그녀를 제지했다.
“이 목소리… 당신… 설마…….”
나름 변조한다고 낮게 내리깐 내 목소리에서 무언가 가닥을 잡은 걸까.
흥분한 제이나가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키다가 곧 고개를 끄덕인다.
“당신이 헬렌이라는 전제하에 질문을 하지. 재앙의 문에 대해 아는 게 있나?”
“…….”
나의 물음에 시종일관 태연한 표정을 유지하던 헬렌의 표정이 확연하게 달라졌다.
“너… 흑남이구나?”
“역시…….”
헬렌의 중얼거림에 제이나도 확신에 찬 눈빛으로 날 바라봤으나.
나는 아랑곳 않고 문답을 이어 갔다.
“왜 그렇게 생각한 거지?”
“그야 이제껏 그 사안에 대해 물어본 사람이 교황 외에는 없었으니까. 재미있네, 재밌어. 설마 네가 진짜로 오다니. 푸하하하하하!”
헬렌은 미친 듯 폭소하다가 웃음을 그치곤 날 올려다본다.
“재앙의 문이 뭐냐고? 너… 감당할 수는 있겠어?”
“뭘 감당해야 한다는 건데?”
내 물음에 헬렌이 손을 들어 천장을 가리켜 보인다.
“신들이 널 지켜보고 있을 텐데 그 여파를 감당할 수 있겠냐고.”
“아, 무슨 말을 하나 했더니…….”
내가 피식 웃으며 마녀들에게서 얻었던 나무패를 꺼내어 보이자.
“호오…….”
헬렌의 눈이 휘둥그레졌다가 천천히 곡선처럼 휘어진다.
“아주 멍청한 놈은 아니었던 모양이네.”
“배교했다가 걸린 너만 할까.”
“여하튼 그걸 갖고 있다면야 이야기하기 편하겠네. 재앙의 문이 뭔지 궁금하다고?”
헬렌이 입가를 달싹거리자.
나는 괜히 긴장감이 들어 고개를 끄덕였다.
“간단해. 그건 다른 세계와 이곳을 연결하는 문이지.”
‘…다른 세계와 연결을 하는 문이라고?’
그런 게 가능하긴 한 거란 말인가?
‘내가 이 세상에 있는 걸 생각하면 아주 헛소리는 아닌 것 같기도 한데…….’
수많은 의문들이 머릿속에 피었다 지기를 반복하던 중.
나는 가장 큰 의문 하나를 그녀에게 던졌다.
“그럼 그쪽이 그 문을 열었다는 건가?”
“재앙의 문을? 내가? 뭐… 아주 살짝 연 것도 연 거라면 그렇다고 봐야겠지. 하지만 난 실패했다.”
“이유가 뭔데?”
내 물음에 헬렌은 순순히 대답한다.
“그야 내게는 열쇠가 없었으니까.”
‘…열쇠?’
불현듯 두 신들이 나를 열쇠라 칭하며 다투던 상황이 주마등처럼 스쳐 가던 중.
“그럼 왜 그 문을 열었던 거지?”
제이나가 내 대신 그녀에게 질문을 던진다.
“그야 나는 이 세상이… 정확히는 레바논 그 빌어먹을 년이 뼈에 사무치도록 싫으니까.”
“…뭐라고요? 아니, 당신은 성녀였잖아요! 그런데 왜……?”
‘그래. 나도 그 부분이 의문이야.’
농부, 나무꾼, 장사치 등 잡다한 타이틀이 아닌.
성녀라는 인생의 성공이 보장된 타이틀을 갖고 있던 그녀에게 아쉬울 게 있었던 걸까.
“난…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성별이 바뀌었다.”
“…네?”
‘…뭐라고? 잠깐… 그럼……?’
나는 슬며시 그녀의 바지 언저리를 내려다봤다.
“설마… 남자였던 건가…….”
“그래, 난… 남자였다. 하지만 레바논 그 미친년이 자기 마음대로 날 여자로 바꿔 놨지.”
“하,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성별이 삶의 전부는 아니잖아요?”
제이나의 위로 같지 않은 위로에 헬렌의 입가에서 조소가 흘러나온다.
“그래. 성별이 삶의 전부는 아니지. 하지만 내 삶의 전부였던 여인을… 성별이 바뀌었다는 이유로 놓쳤을 때… 그때의 심정을 너희가 알까? 아니, 당연히 모르겠지. 알 턱이 있나?”
“그건…….”
“내 삶을 빼앗고 내가 세웠던 모든 계획들을… 그년이 모두 망쳤다. 그런데도… 그런데도 내가 이 세상을 사랑할 것 같아?”
울분과 통한이 느껴지는 헬렌의 넋두리에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성남 성남 하더니… 진짜로 성남이 실존했을 줄이야…….’
내가 속으로 침음하던 중.
헬렌이 날 보며 실실 웃는다.
“너도 안도할 처지가 아니야. 지금 레바논 그년이 무슨 짓을 하려는지 알고는 있고?”
“성남을 만들…….”
“그년은 널 이용해서 재앙의 문을 완벽히 열려고 하고 있어. 나랑은 달리 아주 활짝 말이야.”
‘…뭐라고?’
“그게 무슨 말이지?”
“왜, 몰랐어? 너는 열쇠야. 재앙의 문을 여는 열쇠.”
“…….”
신들이 나를 보며 내뱉었던 말이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오자.
나는 게슴츠레한 눈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인간일 뿐인 네가 그걸 어떻게 확신하는데?”
“그야 바알 님께 들었으니까.”
헬렌이 실실 웃으며 말을 이어 간다.
“어느 시점이 되면 레바논은 네 목숨을 이용해서 문을 열려고 할 거고, 그럼 지금의 세상과 다른 세상이 완벽하게 이어지게 될 거야. 그럼 당연히 이 세상에도 엄청난 여파가 오겠지. 예를 들면 멸망이라든가.”
“그래서… 바알이 날 죽이려고 했던 건가?”
“그랬었어? 뭐, 그것까진 나도 모르지. 사람 속내도 모르는데 하물며 신들의 속내를 내가 어떻게 다 알겠어? 여하튼 확실한 건, 너도 신들의 손에 이용당하다가 죽게 될 거라는 거지.”
‘…어지럽네.’
그녀의 말을 단순히 정신 나간 사람의 망상이라 치부하기엔.
걸리는 점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정말 두 신이 내게 그런 축복을 준 것도… 날 보고 열쇠라고 했던 것도… 정말 이것 때문이었다고? 만약 헬렌의 말이 정말 사실이라면…….’
이 개 같은 신들이 내 목숨을 두고 내기를 했다는 것 아닌가?
‘아직 확실한 건 아냐. 하지만… 망할…….’
나는 애써 복잡한 머릿속을 진정시키곤 입을 뗐다.
“그럼 레바논이 재앙의 문을 열려고 하는 이유는 또 뭔데? 뭔가 이유가 있으니 그런 걸 것 아냐.”
“내가 그 쌍년이 아닌데 그걸 어떻게 알겠어? 그냥 단순한 유희거나 아니면 다른 세계의 신으로 군림하고 싶은 걸지도 모르지.”
“허…….”
“지금 그 말을… 우리보고 믿으라는 건가요?”
제이나가 목소리를 높이자.
헬렌이 피식 웃으며 그녀를 응시한다.
“믿고 안 믿고는 너희의 자유지. 어떤 선택을 할지 결정하는 것도 너희의 자유고.”
“…….”
제이나가 입만 벙끗거리자.
나는 그녀를 대신하여 입을 열었다.
“주제를 바꾸지. 레바논을 배반한 자는 사형을 당할 텐데, 대체 넌 어떻게 살아 있는 거지?”
“그야… 여기에 재앙의 문이 있는 장소가 들어 있기 때문이지.”
헬렌이 제 머리를 톡톡 건드리며 말을 이어 간다.
“말했잖아? 실틈이긴 해도 난 재앙의 문을 연 적이 있다고.”
“그건 그렇다고 쳐요! 그럼 에밀라는 왜 죽은 거죠?”
제이나의 외침에 헬렌이 픽 웃는다.
“그야 존재해서는 안 될 사람을 봤으니까. 내 존재 자체가 레바논에 있어 치부인데, 레바논을 우선시하는 광신도들이 날 보면 무슨 생각을 할까? 그러니 사전에 소문이 나지 않게 차단을 하는 거지.”
“하지만 에밀라는… 에밀라는…….”
제이나가 혼란과 비탄에 잠겨 있던 와중.
헬렌이 묘한 눈빛을 한 채 날 응시한다.
“이제 어떻게 할 거지? 계속 신들의 노리갯감으로 이용당할 거야? 잘 생각해. 너는 그들에게 있어 그저 열쇠에 불과할 뿐이니까.”
“…….”
“그렇다고 해도… 달리 방도가 있나요?”
제이나의 물음에 헬렌이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당연히 방도가 있지. 제일 간단한 방법은 바로 저놈이 자살하는 거지. 아니면 네가 그를 죽이든가. 그럼 되겠네. 그렇지?”
“그건…….”
하나 헬렌의 부추김에도 제이나는 내 눈치만 볼 뿐 차마 대답하지 못한다.
“이것도 싫고 저것도 싫으면 차라리 네가 이 세상을 멸망시키는 것도 방법이겠네.”
“그게 무슨…….”
“세상을 멸망시키려고 움직이다 보면 누군가는 널 죽이려고 들 것 아냐? 그럼 신들의 계획도 물거품이 되지 않겠어?”
헬렌이 실실 웃으며 묻자.
나는 그런 그녀를 보며 툭 한마디를 던졌다.
“아니면 문을 부술 수는 없나?”
“…뭐?”
“그 재앙의 문을 제거할 방법은 없냐고 묻고 있는 거다.”
내 물음에 헬렌은 크게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멍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건… 불가능해! 인간의 힘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라고!”
“그걸 네가 어떻게 가늠해?”
“그렇기야 하다만…….”
헬렌이 말꼬리를 흘리자.
나는 무릎을 굽혀 그녀의 시선을 마주하며 단호히 말했다.
“재앙의 문은 어디에 있지?”
“하… 그래, 좋아. 문을 부순다? 제법 괜찮은 생각이네. 근데 과연 레바논이 그걸 보고만 있을 것 같아?”
“당연히 가만히 안 있겠지. 하지만 안 부수면? 내 목숨이 날아가게 생겼는데 가만히 있으라고?”
내 말에 헬렌은 잠시간 말을 않더니.
“너, 잠깐 가까이 와 봐.”
내게 다가오라 손짓을 한다.
그러고는…….
“그래. 한번 추태를 부리면서 살아남아 봐. 재앙의 문이 어디에 있냐면…….”
그녀는 내게 들릴 정도로만 작게 소곤거리곤.
고개를 돌려 제이나를 보며 실실 웃는다.
“너도 잘 생각하는 게 좋을 거야. 레바논이 선? 그거야말로 아주 개 같은 소리지. 신들에게는 선도 악도 없어. 그냥 자기들 좋을 대로 사는 놈들에게 그딴 게 있을 리가 있나?”
“하지만…….”
“네가 믿는 신이 재앙의 문을 열어서 이 세상을 멸망의 길로 끌고 간다고 해도, 이 세상이 파멸해도 넌 레바논을 찬양하려고?”
헬렌이 비꼬듯 묻자.
“그, 그럼 바알은 정의로운가요? 아니잖아요!”
제이나가 바알을 언급하며 반박한다.
“누가 바알이 정의롭대? 하지만 적어도 체면치레나 하는 다른 신들보단 바알이 낫긴 하겠네.”
“그건… 당신의 생각일 뿐이에요.”
“네가 뭐라고 하건 상관없어. 여하튼 이제 내 일은 전부… 끝났으니까.”
헬렌이 기괴한 미소를 흘리다 우리를 보며 다시 희미한 미소를 지은 후.
투두두둑-
무언가가 잘리는 소리가 울림과 더불어.
헬렌의 입 사이로 짙은 선혈이 흘러나온다.
‘…뭐야. 설마… 자살한 건가?’
설마 갑자기 그녀가 저런 선택을 할 줄이야.
“이제… 어쩌죠?”
제이나가 날 보며 묻자.
난 어처구니가 없어 그녀를 바라봤다.
“어쩌긴 뭘 어째. 각자 알아서 갈 길 가는 거지.”
“당신은 그녀의 말을 믿나요?”
“…반쯤은.”
그 말을 끝으로 나는 등을 돌렸다.
‘일단 돌아가자. 돌아가서 생각을 정리해야겠어.’
두 신이 정말 날 재앙의 문을 열 열쇠로 사용하려고 하는 건지.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난 어떻게 대처를 해야 할지 고민이 필요하다.
내가 얼른 자리를 벗어나려 하자.
“잠깐만요! 잠……!”
제이나가 나를 붙잡으려 황급히 움직이려던 찰나.
웅웅웅웅웅웅웅웅-
갑자기 그녀의 몸 주변으로 찬란한 신성력이 퍼져 나간다.
‘저건… 신탁이라도 받은 건가?’
하지만 그녀가 신탁을 받았건 말건.
나의 관심사가 아니었기에 난 황급히 움직였다.
* * *
한 달 뒤.
대신전의 실세들만이 자리한 백린 안.
“허허, 레바논 님께서 저희를 도우시는 모양입니다.”
아크가 나를 보며 환한 미소를 짓는다.
“갈프 신관, 이제 당신이 움직일 때가 됐습니다.”
“그렇다네. 흑남이 흑탑에서 나와 검은 대지를 순회 중이라는군. 바로 지금이 자네가 위장 흑남으로 들어갈 절호의 기회라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