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네가 갑자기 왜 그녀를 죽인다는 건데?’
심지어 나는 헬렌을 만나기 위해 이곳까지 온 것이건만.
대체 저년은 무슨 생각으로 내게 이런 말을 꺼내 놓은 걸까?
“저한테 신탁이 내려왔었어요. 전대 성녀를 죽이라는 신탁이 말이죠. 그래서 전 반드시 그녀를 죽여야만 해요. 다만…….”
입술을 잘근 깨문 제이나가 씁쓸히 웃으며 말을 이어 간다.
“아마 그녀를 죽이고 나면… 에밀라가 대신관에게 죽었던 것처럼 저도 죽게 되겠지만요.”
“…….”
그녀의 갑작스러운 고백에 난 순간 할 말을 잃었다.
“그런데 그런 사안을 왜… 저한테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야…….”
제이나가 대신전 정경을 둘러보더니.
슬픈 눈빛을 한 채 대답한다.
“이곳에는 믿을 사람 한 명 없으니까요.”
‘아니… 믿을 놈 하나 없다니? 성녀씩이나 되는 양반이 왜 믿을 놈이 없어? 그리고 그 괴물 같은 힘을 갖고 있는 년이 죽긴 뭘 죽어?’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그녀의 발언에 나는 머릿속이 복잡해지는 것 같았다.
‘이년이 내 정체를 떠보려고 이러는 거야, 아니면 진심으로 하는 소리야?’
*
‘후…….’
제이나는 복잡한 시선으로 갈프 신관을 바라본다.
‘이렇게까지 말했는데도 별로 반응이 없네. 그는 진짜 신관인 건가…….’
이쪽에선 나름대로 사실을 말한 것이건만.
아무래도 그의 반응을 보아하니 그는 흑남이 아닌 모양이었다.
‘기대한 내가 바보지.’
대체 뭘 기대했던 걸까.
아니. 설령 그가 진짜 흑남이라도 한들 뭐가 달라질까.
실망감 때문인지 아니면 그간의 심적 고통이 누적된 탓인지 속이 쓰리다.
‘결국… 신탁을 따를 수밖에 없나…….’
제이나는 얼마 전 레바논에게서 내려왔던 신탁을 떠올렸다.
신탁의 내용은 간단했다.
지하 감옥에 있는 전대 성녀 헬렌을 죽이라는 것.
그것이 레바논이 그녀에게 내린 신탁의 전부였었으나.
그녀는 신탁을 이행할 수 없었다.
‘에밀라도 지하 감옥에 갔다가 죽었는데……. 레바논 님이 정말 나를… 버리려고 하시는 걸까.’
지하 감옥에 가면 교황의 세력에 의해 죽게 된다.
그런데 레바논 님은 지하 감옥으로 가라고 하신다.
‘하아…….’
최근 혹시나 하는 마음에 대신 일을 처리해 줄 용병을 찾아보기도 했으나.
감히 나서는 용병은 없었다.
‘전대 성녀를 죽이는 거야 그렇다고 쳐도… 내가 대신관 전원을 상대로 이길 수 있을까?’
신탁을 따르자니 눈앞의 죽음이 두렵고.
따르지 않자니 레바논의 신벌이 무섭다.
‘에밀라… 아무래도 난 그른 것 같아.’
만약 눈앞의 남자가 흑남이었다면.
그에게 대신 헬렌을 처리하는 걸 부탁해 보려고 했었으나 아무래도 잘못 짚은 모양이다.
“…그래요. 갈프 신관이라고 했던가요? 수고하세요.”
* * *
제이나가 몸을 축 늘어뜨린 채 멀어지자.
나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지하 감옥에 들어가면 죽는다라…….’
물론 제이나의 말을 맹신하긴 어렵다.
하지만 저 반응을 보아하니 마냥 거짓말만 한 것 같진 않아 보였다.
‘저 괴물 같은 여자가 죽음을 두려워할 정도라……. 곤란한데…….’
나도 지하 감옥에 들어가야 하건만.
웃으며 오우거의 목을 꺾어 버릴 제이나가 저리도 두려워하는 걸 보니 괜히 불안감이 든다.
‘확실히 정식으로 들어가는 건 삼가는 편이 좋을 것 같긴 한…….’
내가 고민에 잠기려던 와중.
“방금 그녀는 지인인 모양이지?”
골버린이 넌지시 내게 질문을 해 온다.
“…예? 모르셨습니까? 방금 그분은 성녀님이잖습니까?”
“아, 저분이 성녀님이셨나? 헬렌 님은 기억을 하겠는데 새로운 성녀님은 처음 뵙는군. 으허허허…….”
멋쩍게 웃으며 말을 이어 가는 골버린.
“아무래도 내가 기억이 온전치 못한 사이에 많은 일이 있었던 것 같군. 근데 자네도 특이하군.”
“특이하다니요?”
“성녀님과 인연이 있었으니 성녀님께서 자네에게 말을 건넨 것 아닌가?”
골버린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설마요? 그냥 외지에서 온 사람에게 호기심을 가지셨던 것뿐입니다.”
“허허, 그런 거였나?”
나는 골버린의 허허로운 웃음을 뒤로하곤.
다시금 생각에 잠겨들었다.
‘제이나가 헬렌을 죽이려는 입장은 잘 알겠어.’
레바논에게 신탁을 받았으니.
그녀의 입장에선 반드시 신탁을 수행해야 할 터.
‘뭐, 좋아. 그것까진 이해해. 근데 왜 그렇게 지하 감옥으로 가는 걸 두려워하는 걸까.’
제이나는 그녀가 대신관들의 손에 죽을 것을 염려했다.
‘그럼 지하 감옥에 들어가는 걸 대신관들과 교황이 막고 있다고 봐야 하는 건데…….’
그 부분은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는다.
‘왜 그들은 헬렌을 죽이지 않고 가둬 놓은 거지? 그리고 헬렌을 만나려는 사람들을 죽이는 이유는 또 뭔데?’
헬렌이 뭔가 엄청난 정보를 알고 있어서 차마 죽이지 못하고 살려 두고 있는 건가.
만약 그렇다면 나도 더더욱 지하 감옥 안으로 들어가야 할 터.
‘하지만 무슨 수로 들어가지?’
비밀 통로는 막혔다.
그렇다고 정식으로 들어가고자 하면 의심만 살 게 뻔하다.
‘다른 방법을 강구하기엔 시간도 여의치 않고…….’
내가 우물쭈물하면 그사이에 신탁을 받은 제이나가 헬렌을 죽일 것이다.
“지하 감옥으로 가는 다른 비밀 통로는 없습니까?”
“미안허이……. 내가 아는 건 그게 전부였네.”
골버린의 사과에 난 뒤통수를 긁적였다.
‘씁… 어쩐다.’
적어도 제이나가 움직이기 전에 몰래 지하 감옥으로 들어가야 한다.
‘하지만 그게 현실적으로 어렵단 말이지……. 제이나에게 행동을 미루라고 설득이라도 해야 되나?’
하지만 만약 그 모든 게 내 정체를 까발리기 위한 그녀의 수작질이라면?
‘아냐. 내 정체를 알리는 건 너무 위험해.’
정녕 지하 감옥에 몰래 들어갈 방도는 없는 걸까.
‘차라리 대신전에 불이라도 질러 볼까? 불을 질러서 시선을 끈 다음에 몰래 들어가는 건… 아냐… 불은 금방 눈에 띄잖아.’
불을 지르기도 전에 성기사들의 눈에 걸릴 가능성이 다분하다.
‘뭔가 좋은 방법이 없을까…….’
내가 다른 방도를 찾아 깊이 고민하던 중.
저벅, 저벅-
대신관을 필두로 수십 명의 신관들이 한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내 눈에 들어왔다.
‘흠…….’
나는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옆에 있던 성기사에게 슬쩍 질문을 던졌다.
“혹시 말입니다. 대신관님과 신관님들은 모두 한 공간에서 생활하시는 겁니까?”
“아닙니다. 신관님들은 신관님들끼리 따로 지내는 곳이 있습니다.”
“…그래요? 그럼 누가 대신관님의 시중을 드는 건지… 조금 의아하군요.”
내 물음에 성기사가 허허 웃으며 답한다.
“그야 하인들이 잡일을 도맡아서 하고 있습니다.”
“…그래요?”
‘하인이라…….’
“혹시 하인들의 거처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겠습니까?”
* * *
당일 밤.
대신전 외곽에 위치한 허름한 통나무집 안으로.
검은 그림자가 드리운다.
‘어딜 가나 하인들 대우가 형편없긴 하네.’
몰래 하인들의 거처로 들어온 나는.
잠들어 있는 하인들을 내려다보다가 슬며시 촛대에 불을 붙였다.
“기상.”
“으… 으음… 음?”
“누… 누구?”
복면 너머로 당황한 하인들의 모습이 보이자.
나는 나지막이 말했다.
“조금이라도 움직이거나 수작을 부리려는 모습을 보이면 바로 죽이겠다.”
나의 엄포에 하인들은 감히 입을 열 생각조차 못 하고.
멍한 눈으로 날 바라볼 뿐이었다.
“여기서 가장 오래 지낸 하인이 누구지?”
“저… 접니다.”
구석에 있던 노인이 조심스럽게 손을 들자.
나는 그를 보며 고개를 까딱였다.
“이곳에서 일한 지 얼마나 됐지?”
“아마… 10년은 넘은 것 같습니다.”
“그럼 지하 감옥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겠네.”
내 말에 노인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곳에 대해 궁금하신 겁니까? 저희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다면 무엇이든 알려 드리겠습니다.”
“이야기해 봐.”
그에 노인은 경계를 서고 있는 성기사들의 숫자와 성기사들의 교대 시간 등.
비교적 상세한 정보들을 내게 설명해 주었다.
‘호오… 생각보다 자세히 알고 있네.’
“제가 알고 있는 건 이게 전부입니다.”
‘그래, 그렇겠지.’
비록 오늘 처음 노인을 본 것이지만.
난 조금은 노인을 신뢰하고 있었다.
‘애당초 하인들에게 제일 중요한 건 자기 목숨이지 소속감 따위가 아니니까.’
하인들에게는 목숨이 곧 지켜야 할 재산이자 전부였고.
나는 그걸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여기에 약간의 보상을 뿌려 주기만 하면…….’
“그럼 질문을 바꾸지. 한 달에 얼마나 벌지?”
“…예? 아… 한 달에 2실버 정도를 보수로 받고 있습니다.”
“그래?”
찰랑-
나는 주머니에서 금화를 가득 꺼내어.
노인의 손에 쥐여 주며 말했다.
“정보값이다.”
“이게… 예?”
난데없는 돈벼락에 말을 잃은 하인들을 보며.
난 말을 이어 갔다.
“방금 이 노인이 말한 정보보다 더 중요한 정보를 내게 알려 주면 이것보다 더 많은 돈을 주지.”
내가 금화를 더 꺼내어 옆에 쌓아 놓자.
“저, 저도 중요한 걸 알고 있습니다! 하렌 신관이라고 아주 음흉한 놈이 있는데, 이놈이 글쎄 자기 아내를 놔두고 다른 신관이랑 바람을 피우고 있지 뭡니까?”
“저는 더 대단한 걸 알고 있습니다! 이튼 성기사가 무기고에서 무기들을 빼돌려 갖고 대신전을 나서는 걸 제 두 눈으로 똑똑히 봤습니다!”
서로의 눈치만 살피던 하인들이 앞다투어 비밀들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좋아, 그 정도 정보면 10골드는 줘야겠지.”
정보의 사실 여부를 떠나.
나는 정보를 제공한 하인들에게 모두 금화를 지급했다.
‘거의 다 쓸데없는 정보들이긴 하지만 내가 정보값을 확실히 지불한다는 인식을 심어 주는 게 중요하니까.’
이윽고 모든 하인들이 손에 금화를 쥐고 있을 때쯤.
난 다시금 입을 열었다.
“그보다 지하 감옥에 대해 더 상세한 정보를 아는 사람은 없나? 있으면 지금 준 돈보다 더 많은 돈을 주마.”
나의 말에 금화를 쥔 채 밝은 미소를 짓고 있던 노인이 번쩍 손을 쳐든다.
“제가 알고 있는 게 하나 있습니다!”
“오, 그래? 말해 봐.”
“교황님의 방을 청소하던 중에 있었던 일입니다. 저는 평소처럼 교황님의 거처를 청소하고 있었지요. 그런데 청소를 하던 중, 한 가지 이상한 점을 발견했습니다.”
노인은 내 손에 들린 금화를 탐욕스럽게 바라보며 말을 이어 갔다.
“이상하게도 바닥 한 곳이 다른 곳이랑 달리 유독 튀어나온 게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전 호기심에 튀어나온 부분을 자세히 살펴봤지요. 그랬더니… 그곳에 지하로 가는 길이 있었던 것 아니겠습니까?”
“오, 그래? 그 안으로 들어가 봤어?”
내 물음에 노인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 길은 틀림없이 지하 감옥과 이어진 길이었습니다.”
“…그래?”
‘교황의 방에 왜 그런 통로가 있는지는 모르겠다만… 거길 어떻게 들어가지?’
나는 다시금 노인의 손에 금화를 가득 쥐여 준 뒤.
천천히 입을 뗐다.
“너희는 지금 생활에 만족하나? 열심히 일을 하고 신관들의 수발을 들어 봐야 고작 얻는 돈이라곤 몇 실버에 불과하잖아?”
“확실히 신관님들과 성기사님들의 눈치를 봐야 하는 건 불편합니다만… 이만한 일도 없긴 합니다.”
노인의 대답에 나는 주머니에서 남은 금화를 싹 다 꺼내어 그들 앞에 내보였다.
“하지만 이 정도 돈이 있으면 어떨 것 같아? 안락한 여생을 보내기엔 충분하지 않겠어?”
“그, 그렇지요……. 그 정도 돈이면 고향에 여관을 차리고도 넉넉한 삶을 보낼 수 있을 겝니다.”
하인들의 눈빛이 크게 흔들거리자.
나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만약 너희가 날 돕는다면 이 돈은 전부 너희 게 될 거다. 전부 말이야.”
“…….”
거절하기엔 너무도 큰 액수였던 걸까.
아니면 각박한 현실이 그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은 걸까.
“워, 원하는 게 뭡니까?”
서로의 눈치만 살피던 하인들이 마침내 반응을 보이자.
나는 노인을 보며 빙긋 웃어 보였다.
“내가 그 비밀 통로에 안전하게 들어갔다가 나올 수 있게 도와주면 돼. 간단한 일이지?”
“저, 저희가 신관님들께 이 사실을 알릴 거란 생각은 안 해 보신 겁니까?”
노인의 말에 나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래서 이렇게 협상을 하고 있는 거잖아. 아, 혹시 돈이 부족해서 그런 건가?”
나는 금화를 더 꺼내어 놓으며 말을 이어 갔다.
“이 정도면 한 명당 50골드 정도는 돌아가겠지. 막말로 하인 생활을 때려치우고 고향으로 돌아가도 충분히 먹고살 수 있을 정도의 돈이기도 하고. 어쩔래?”
“음… 잠시만 상의할 시간을 주시겠습니까?”
* * *
“어르신, 어쩐답니까?”
“어쩌긴 뭘 어째? 당연히 수락해야지!”
“하지만… 놈이 누군 줄 알고 제안을 받는단 말입니까?”
“저 남자가 누구건 간에 우리랑 무슨 상관인가? 중요한 건 우리에게 득이 되느냐지.”
걱정하는 하인에게 노인이 일침을 놓으며 말을 이어 간다.
“50골드가 누구 개 이름인 줄 아나? 우리는 평생을 일해도 못 벌 돈을 얻을 기회를 잡은 게야!”
“하지만 저 남자가 무슨 짓을 저지르면 저희 책임으로 돌아오는 것 아닙니까?”
“책임? 우리가 책임을 질 게 있나? 우리는 그를 통로 안으로 보내 주기만 하면 되네. 고작 그 일을 할 뿐인데 50골드를 준다는 거고! 자네는 이 기회를 걷어찰 셈인가?”
노인의 물음에 하인들은 반박하지 못한다.
“우리는 우리 인생에서 다시없을 기회를 잡은 셈이네. 잘 생각하게.”
“그렇긴 합니다만……. 후… 알겠습니다. 딱 이번만입니다.”
“당연히 이번만이지! 50골드를 받는다면 나는 곧장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이네.”
* * *
잠시간 하인들은 저들끼리 숙덕거리더니.
곧 노인이 대표로 나와 내게 말한다.
“그쪽의 제안을 수락하겠습니다. 하지만 일이 끝나거든 우리는 서로 제 갈 길을 가는 겝니다. 저희는 서로 본 적도 없고, 만난 적도 없는 사이인 것이지요.”
“여부가 있나? 일만 잘해 준다면야 돈도 더 얹어 주지.”
내 말에 노인이 실실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좋습니다. 그럼 내일 새벽에 움직이는 걸로 하시지요.”
“…새벽에 움직이는 이유가 있나?”
“그야 그 시간에 대신전의 모든 사람들이 예배를 드리기 때문입니다.”
* * *
다음 날, 새벽.
나는 하인들이 입는 허름한 의복으로 갈아입고 얼굴에 복면까지 걸친 뒤.
노인을 따라 백린 안으로 이동했다.
‘호오… 정말 텅텅 비어 있네.’
노인의 말대로 전원 예배를 드리러 이동한 탓일까.
백린 안은 고요했다.
“이곳이 교황님의 거처입니다.”
이윽고 노인이 한 방문을 열어젖히며 안으로 들어간다.
“이렇게 막 들어와도 되는 건가?”
“안의 기물들만 건들지 않으면 괜찮습니다. 그보다 얼른 들어오시지요.”
노인을 따라 안으로 들어서니.
교황의 거처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평범한 침실이 나의 시야에 들어왔다.
‘뭔가 엄청 화려할 줄 알았더니 그렇지만도 않네.’
내가 방을 두리번거리는 와중.
끼긱, 끼긱-
노인은 바삐 바닥 한 곳을 건드린다.
툭-
이윽고 바닥 한 곳이 뚜껑 열리듯 뒤로 젖혀지자.
노인이 다급히 내게 손짓하며 말한다.
“이곳입니다.”
“정말이었군.”
슬쩍 안을 살피니 캄캄한 통로와 밑으로 내려가는 사다리가 보인다.
“재차 말씀드리지만 두 시간 내로, 예배가 끝나기 전에는 돌아오셔야 할 겁니다. 만약 조금이라도 늦게 된다면… 전 모르는 일로 치부할 겁니다.”
“걱정할 것 없어. 반드시 시간 내로 돌아올 거니까.”
나는 곧장 사다리를 타고 지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끼익, 끼익-
얼마나 내려갔을까.
‘다 내려온 건가.’
마침내 다 내려온 건지 바닥에 발이 닿자.
나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여긴…….’
작은 방 같은 곳을 나가니.
넓적한 복도와 더불어 쇠창살이 달린 방들이 보인다.
‘확실히 감옥 안인 것 같긴 한데… 여기가 몇 층인지 모르겠네.’
내가 감옥을 둘러보던 그때.
“저, 저놈은 뭐야?! 어떻게 나온 거야!”
“이봐! 야! 나도 풀어 줘! 나도 내보내 달라고!”
두터운 사슬에 사지를 결박당한 남자가 나를 보며 고성을 질렀으나.
나는 죄수들의 아우성을 무시하곤 감옥 안을 둘러봤다.
‘흠… 내려가는 길은 없고 올라가는 통로만 있는 걸 봐선… 여기는 최하층인 것 같은데. 이제 남은 건 헬렌을 찾는 일뿐인데.’
분명 골버린의 말에 의하면.
그녀는 굉장히 수려한 외모를 갖고 있다고 했으니 헬렌을 찾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10분 뒤.
‘씁… 이 층에는 없는 건가?’
나는 최하층에 있는 죄수들을 전부 살폈으나 전원 수려한 외모와는 거리가 있었던 데다가.
그나마 여성 죄수라곤 화상을 입은 여인 한 명이 전부였다.
‘쯧… 아무래도 위층으로 올라가 봐야겠네.’
내가 속으로 혀를 차며 통로로 걸음을 옮기려던 그때.
“이봐, 너… 정문이 아니라 교황의 통로로 온 거지? 그렇지?”
화상을 입은 여인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바빠 죽겠는데 이건 또 뭐야?’
내가 그녀의 말을 무시하자.
그녀가 화급히 소리친다.
“네가 어떻게 교황의 통로를 이용한 건진 몰라도 내 말을 좀 들어 봐! 난 성녀야! 성녀라고!”
그녀의 고성이 귓가를 울리자.
나는 걸음을 멈추곤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뭐라고? 네가 성녀라고?”
“그래! 그렇다니까! 내가 전대 성녀인 헬렌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