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
‘쯧…….’
나는 그녀를 보며 속으로 혀를 찼다.
‘대신전에 온 이상 언제고 마주칠 거라고 생각은 했다만…….’
설마 이렇게 빨리 그녀를 마주치게 될 줄이야.
“저를 아십니까?”
“…네? 아니,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어떻게 여기에 있는 거냐니까요?!”
제이나가 언성을 높이자.
나는 도통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그녀를 바라봤다.
“그야 아크 신관장님께서 오라고 해서 온 것뿐입니다만… 문제될 게 있습니까?”
“아니… 그게 뭔…….”
내 말에 제이나는 입만 뻐금거리다가.
“잠깐 나 좀 따라와요.”
갑자기 내 팔목을 손으로 잡아챈다.
“지금 신관님께 무슨 짓을 하시는 겁니까?”
골버린이 단호히 외치며 제이나를 제지하려던 중.
“이분들은 교황님을 접견하러 가시던 중입니다. 방해하지 마십쇼.”
우리를 안내하던 성기사가 정색하며 제이나의 얼굴에 일침을 쏘아 낸다.
“…….”
제이나가 성기사를 빤히 노려봤으나.
성기사의 얼굴에는 명백한 비웃음만이 걸려 있을 뿐이었다.
‘…뭐지?’
직급으로 따지면 한참 밑에 있을 성기사가 성녀를 비웃는다니?
‘아, 설마 그런 건가?’
제이나는 전대 성녀들에 비해 그 능력이 월등히 떨어진다고 들었다.
아마 저 비웃음의 이면에는 그러한 이유가 깔려 있을 것이리라.
“갈프 신관께서는 신경 쓰지 마시고 백린 안으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다만 기사분께서는 여기서 잠시 기다려 주셔야 합니다.”
“그러죠.”
“잠깐만요! 잠깐……!”
내 등 뒤로 성녀의 외침이 들려왔으나.
나는 아랑곳 않고 백린의 입구로 걸어 들어갔다.
‘흠…….’
나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백린 안을 살폈다.
‘생각보다 평범하네. 신전이랑 크게 다를 게 없는 것 같은데?’
천장과 바닥을 잇는 하얀 기둥들과 널따란 복도 안을 지나자.
어디선가 작은 노랫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저건…….’
이윽고 나의 눈에 레바논과 열두 대천사들의 신상이 들어올 무렵.
“어서 오게. 기다리고 있었네.”
신상 밑에서 노인의 낮고 온화한 음성이 울려온다.
‘저 노인이 교황인 것 같은데. 저놈들은 그럼… 대신관들인가?’
하얗지만 어딘가 고품스러운 예복을 차려입은 노인을 필두로.
면사포를 쓴 12명의 사람들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갈프 신관이라고 했던가?”
“그렇습니다.”
내가 살짝 묵례를 해 보이자.
“슈바츠네.”
교황은 내게 간단한 인사를 건네곤.
옆에 자리하고 있던 아크 신관장을 보며 묻는다.
“그래서 어떤 것 같나? 자네는 정말 가능성이 있다고 보나?”
“허허, 물론이지요. 갈프 신관이 제대로 협조만 해 준다면야, 전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봅니다.”
‘내가 협조만 하면 충분히 가능하다고?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지?’
내가 속으로 의아해하던 중.
슈바츠가 나를 보며 나지막이 묻는다.
“내가 듣기로 자네는 우리 왕국의 백성들을 위해 변방을 돌며 헌신하는 신관이라던데, 그게 사실인가?”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하나 더 질문을 하겠네. 백성들을 위해, 왕국을 위해 그 목숨까지도 바칠 수 있겠나?”
‘아니, 무슨 말을 하려고 저렇게 밑밥을 까는 거야?’
교황의 속내가 궁금하긴 했으나.
난 일단 아무렇지 않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곳에 레바논 님의 뜻이 임하신다면야 그리할 것입니다.”
내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말하자.
“자네는 이미 준비가 된 신관이로군.”
교황은 만족스럽다는 듯 날 바라보며 말을 이어 간다.
“아크 신관장이 내게 이런 말을 했었네. 자네를 처음 봤을 때, 자네의 얼굴이 흑남의 얼굴과 너무도 닮아 오해를 했었다고.”
“흑남… 말입니까?”
내가 불쾌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자.
교황이 허허 웃으며 손사래를 친다.
“그 쓰레기와 얼굴이 닮았다는 건 자네에게 있어 분명 저주스러운 일이겠지. 레바논 님의 뜻을 따르면서도 온갖 오해와 핍박을 받는 것도 모자라 잦은 습격을 받았겠지.”
“이미 지난 일이며, 또 제가 지나가야 할 길일 뿐입니다.”
내가 덤덤히 대답하자.
교황의 눈이 이채롭게 빛난다.
“으허허허허! 담대하군! 맞네. 자네의 얼굴은 자네에게 있어 시련에 가깝겠지. 하지만!”
갑자기 슈바츠가 두 손을 하늘로 쳐들며 소리친다.
“그건 저주스러우면서도 동시에 축복을 받을 일이네.”
“축복… 말입니까? 그게 무슨…….”
“자네의 얼굴이 흑남과 같다, 그 말이 곧 무얼 의미하는 줄 아나? 자네가 흑남이 되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는 뜻일세!”
‘…뭐?’
슈바츠의 선언에 나는 순간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아니… 이건 또 무슨 개소리야?’
“많이 놀랐을 거라 생각하지만 잘 들어 보게. 만약 지금 흑탑에 있는 흑남을 처리하고 자네가 그 자리에 앉게 되면 어떻게 될 것 같나?”
“…흑탑의 실권을 장악하길 원하시는 겁니까?”
나의 물음에 슈바츠가 웃으며 박수를 친다.
“정확하네! 바로 우리 레바논이! 흑탑을 통제할 수 있게 되는 게지!”
“그 말씀은… 지금 저보고 위장 흑남 노릇을 하라는 뜻입니까?”
“그렇다네! 흑세계! 그것이 이번 계획의 이름이네.”
‘…흑세계? 위장 흑남이라는 것도 어처구니가 없는데, 계획 이름도 참… 가관이네.’
내가 속으로 고개를 젓던 중.
슈바츠가 눈을 번뜩이며 말을 이어 간다.
“물론 이 계획을 실행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네. 특히 가장 큰 난관이라고 한다면, 역시 자네의 협조를 구하는 일이겠지. 그래서 자네에게 묻겠네. 갈프 신관, 자네는 왕국을 위해 그 한 몸 내던질 수 있겠나?”
“저는…….”
황당무계한 저들의 계획에 내가 섣불리 입을 열지 못하자.
“잘 생각해 보게. 만약 자네가 위장 흑남이 되는 데 성공한다면, 우리는 흑마법사들의 동향을 면밀히 파악할 수 있게 될 걸세. 그리되면 대륙은 지금보다 더욱 평화로워지겠지.”
슈바츠는 살살 날 구슬렸고.
“허허, 혹시 불운의 사고로 인해 걸릴지라도 괜찮을 거네.”
아크 신관장도 얼른 말을 덧붙인다.
‘호오… 걸렸을 경우도 생각해 둔 건가?’
“자네가 흑마법사들에게 걸려 죽게 되더라도 그것은 단순한 죽음이 아닐세. 그 무엇보다 영예로운 죽음인 순교를 하게 되는 셈이지.”
“…….”
아크 신관장의 말에 내가 속으로 실소를 흘리던 중.
교황이 나를 보며 근엄히 묻는다.
“자, 그래서 자네는 이 위대한 계획에, 흑세계의 일원이 될 의사가 있나?”
“…제 입장을 밝히기에 앞서 궁금한 점 몇 가지를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물론일세. 편히 물어보게.”
슈바츠의 허락이 떨어지자.
나는 갖고 있던 의문점들을 던지기 시작했다.
“저는 레바논 님의 은총을 덧입은 신관입니다. 제가 갖고 있는 신성력 때문에라도 금방 놈들에게 걸리고 말 텐데 어떻게 흑남이 되라는 겁니까?”
나의 물음에 교황이 허허 웃는다.
“그 부분은 개의치 말게. 자네가 계획에 참여한다고 하면 그 부분부터 해결할 거라네.”
‘…뭐? 대체 그걸 어떻게 해결하겠다는 건데? 설마 레바논을 배반하게 해서 신성력을 없앤다는 개소리를 하려는 건 아니겠지?’
“그게… 가능한 겁니까?”
“적어도 이론상으로는 가능하다고 보네.”
교황의 대답에 난 할 말을 잃었다.
‘이론상으로는… 가능하다고? 그럼 지들도 될지 안 될지 확신이 없다는 것 아냐? 진짜 이 새끼들은 전부 미친놈들인가?’
“좋습니다. 그럼 제가 어떻게 운이 좋아 위장 흑남이 됐다고 치죠. 그때의 전 뭘 해야 하는 겁니까?”
“간단하네. 흑탑을, 나아가 검은 대지를 레바논 님의 뜻대로 움직여 주면 되겠지. 너무 걱정할 건 없네. 자네가 위장 흑남이 되는 데 성공한다면, 우리 쪽의 인재들을 흑탑에 심어 자네를 돕게 할 걸세.”
“허…….”
내가 탄식을 흘리자.
교황은 너그러이 웃으며 말한다.
“이만하면 이해하는 데 부족함은 없었을 것이니, 이제 자네의 의사를 듣고 싶군. 어쩌겠나? 위대한 흑세계 계획에 동참하겠나?”
“너무 갑작스러운지라… 생각할 시간을 주셨으면 합니다.”
“물론이네. 우리도 당장 결정하길 바라고 한 말은 아니네. 그러니 충분히 고민해 보고 답을 주게.”
*
갈프 신관이 곧 시야에서 사라지자.
슈바츠의 입가에 자리하고 있던 미소 위로 왕의 무심함이 드리운다.
“아크, 정말 저 떠돌이 신관 놈을 믿어도 되는 건가?”
“허허, 물론입니다.”
“놈이 신관이 아니라 정말 흑남일 가능성은 없는 것이겠지?”
슈바츠의 물음에 아크 신관장은 단호히 고개를 젓는다.
“허허… 놈이 신성력을 사용하는 걸 제 두 눈으로 똑똑히 봤습니다. 절대 흑남일 순 없습니다. 하지만 만약의 상황을 대비해 검은 대지에 첩자를 보내 뒀습니다.”
아크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웃으며 말을 이어 간다.
“만약 갈프 신관이 정말 흑남이라면 지금 검은 대지는 흑남의 부재로 난리가 났을 것입니다. 그러니 일단 흑세계 계획을 진행하면서 첩자가 정보를 갖고 돌아오길 기다리면 되겠지요.”
“과연…….”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슈바츠.
“어차피 갈프 신관이 거절할 일은 없을 것이고, 문제는 흑남의 제거와 갈프 신관을 어떻게 저들 사이에 심을지인데…….”
그는 아크 신관장을 바라보다가 눈을 빛낸다.
“흑남의 제거는 몰라도 갈프 신관을 흑탑에 심을 좋은 방법이 떠올랐다.”
“허허, 좋은 방법이라 하심은…….”
“자네가 도망쳐 온 탓에 흑탑에서 항의가 들어온 건 알고 있나?”
교황의 일침에 아크 신관장은 어색한 미소를 보인다.
“허허, 그게…….”
“자네를 타박하고자 한 말이 아니네. 어쨌건 저들이 100명의 흑마법사들을 보내 준 것은 사실이고, 자네가 도망친 것도 사실이지. 그러니 우리는 이 부분을 이용하는 걸세.”
“좋은 방도가 있으신 겁니까?”
아크 신관장의 물음에 슈바츠가 고개를 끄덕인다.
“사죄의 뜻으로 이쪽에서 선물을 보내는 걸세. 놈들이 침을 흘릴 만한 것으로 말이야. 그리고 그 사이에 갈프 신관을 끼워 넣어서 보내면 되지 않겠나?”
슈바츠의 의견에 아크 신관장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짝짝짝-
백린 안이 크게 울릴 정도로 손뼉을 치며 말한다.
“허허, 이토록 뛰어난 방법을 생각하시다니, 레바논 님께서 지혜의 은총을 내려 주신 게 분명합니다.”
“흠흠… 조금만 고민하면 충분히 생각해 볼 수 있는 일이지. 그보다 어떻게 흑남을 제거할지 생각해 보게.”
*
한편.
‘후…….’
나는 백린에서 나가며 고개를 저었다.
‘아크야 미친놈인 걸 알고 있었으니 그렇다고 쳐도, 설마 교황이 저런 미친 소리를 해 올 줄은 몰랐네.’
설마 내 얼굴이 흑남과 닮았다는 걸 이용하여.
흑남을 쳐 내고 위장 흑남을 세운다는 계획을 구상했다니.
‘솔직히 꽤나 그럴싸한 계획이긴 해. 근데… 이 미친놈들아! 흑남인 내가 위장 흑남이 되는 게 가당키나 한 일이냐?!’
정말 듣는 내내 어처구니가 없어 웃음이 나오려던 걸 겨우 참았다.
‘그만큼 놈들이 잘 속아 넘어갔다고 봐도 되는 거겠지. 씁… 하지만 이건 이것대로 문제긴 해.’
어쨌건 지금의 난 갈프 신관이고.
저들의 제안을 받아야 할지 말아야 할지, 결정을 해야 하는 상황이다.
‘냉정히 따지면… 놈들의 제안을 거절하긴 어렵겠지. 애당초 나한테 계획을 자세히 설명한 이유가 뭐겠어?’
물론 내가 흑세계의 핵심적인 열쇠이니 말한 것도 있겠으나.
무엇보다 거절하면 죽일 생각으로 모든 정보를 알려 준 것 아니겠는가?
‘그렇지 않고서야 한낱 떠돌이 신관에게 정보를 다 알려 줄 이유가 없지. 흠… 어쩐다. 제안을 수락하는 거야 상관없긴 한데 어떻게 해야 이 말 같지도 않은 계획을 망쳐 버릴 수 있을까…….’
내가 깊이 고민에 잠겨 있던 중.
“…봐요! 이봐요!”
제이나가 나를 보며 소리친다.
‘뭐야, 설마 아직도 안 가고 기다리고 있었어?’
“…뭡니까?”
“뭐긴요? 그러는 당신이야말로 뭔데요? 당신이 대체 왜 이곳에 있냐고요?!”
제이나의 물음에 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뗐다.
“대체 왜 이러시는 겁니까? 제가 여기에 있는 게 문제라도 되는 겁니까?”
“당연히 문제가 되죠!”
“왜죠?”
“그야 당신은… 당신은……!”
머뭇거리던 제이나가 나만 들릴 정도로 작게 속삭인다.
“그야 당신은 흑남이잖아요?! 혹시 흑탑에서 정식으로 보낸 사절단인가요?”
“아아, 그런 거였습니까? 하하… 요새 들어 그런 말을 많이 듣는 것 같네요.”
“…네?”
“전 흑남이 아니라 갈프 신관입니다.”
나의 말에 제이나의 두 눈이 휘둥그레진다.
“갈프… 신관이라고요?”
“그렇습니다.”
“거짓말하지 마요! 어떻게 흑마법사가 신관이 될 수 있죠? 이것도 레바논 님과 베논이 벌인 유희의 일환인 건가요?”
그녀의 물음에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유희라니요.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의문이 풀리셨다면 전 이만 가…….”
“잠깐만 좀 기다려 봐요! 정말 흑남이 아닌 건가요?!”
“하아… 정말 아닙니다. 제가 흑남이면 어떻게 대신전에 올 수 있었겠습니까? 진작 죽었겠죠.”
내가 불쾌하다는 듯 답하자.
“아아…….”
어째선지 제이나의 얼굴에 실망한 기색이 역력하다.
‘뭐야. 왜 실망을 해?’
그녀는 한참이고 말이 없다가.
이내 허탈한 미소를 지으며 내게 말하기 시작했다.
“당신이 정말 신관인지 아니면 신관인 척하고 있는지는 몰라도, 저는 당신을 흑남이라 생각하고 이야기할게요. 당신 말이 맞았어요.”
“…예?”
“당신 말대로 지하 감옥에는 전대 성녀가 있는 모양이에요. 그녀는 안식의 대지로 가지 않았던 것 같아요. 아마 에밀라는…….”
제이나가 씁쓸함을 삼키며 계속 말한다.
“그 사실을 확인하려다가 죽은 것 같고요.”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헬렌은… 내일 죽게 될 거예요.”
갑자기 전대 성녀의 죽음을 언급하는 제이나를 보며.
난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예?”
“제 손으로 그녀를 죽일 생각이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