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카데미의 노예가 살아남는 법-90화 (90/200)

90.

흑세계.

빛과 어둠이 공존하지만 어둠을 하수인처럼 부리는 이상적인 세계.

어쩌면 그러한 세계가 그의 대에서 실현될 수도 있을 터.

‘허허, 그리한다면 더 많은 신도들을 순교시키는 것도 가능하겠지.’

어둠을 체계적으로 움직여 많은 신도들을 순교시킨다면.

레바논 님께서도 필히 흡족해하실 것이다.

‘다만 그러기 위해선 확인이 필요하긴 하겠군.’

다른 무엇보다 흑탑에 흑남이 돌아갔는지.

흑남의 안위 여부에 대해 확인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건 갈프 신관을 끌어들인 뒤에 확인해도 늦지 않다.’

* * *

눈을 번뜩이는 아크 신관장을 보며 나는 생각했다.

‘저 눈빛을 보니 또 무슨 이상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은데. 씁… 일단 얼른 자리를 뜨는 게 좋겠어.’

“이만하면 의심은 충분히 풀린 것 같습니다만, 이제 저희는 가 봐도 되겠습니까?”

“허허… 잠시만 기다려 보게.”

나의 물음에 아크 신관장은 허겁지겁 나를 만류한다.

“자네… 소속된 신전은 없다고 했지?”

“그렇습니다만.”

“허허, 그럼 자네가 떠돌았던 지역들에 대해 이야기해 줄 수 있겠나?”

‘흠… 아직 완전히 의심을 풀진 않은 건가?’

나를 시험하는 것 같은 그의 질문에 나는 머릿속에 지도를 떠올리며 천천히 입을 뗐다.

“에이린을 시작으로 알르탄, 헤자르 그리고 에크만을 순회했습니다.”

“허허, 변방 중에서도 변방들만 떠돌아다녔군. 그 노고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겠지. 하지만 불현듯 한 가지 의문이 드는군.”

게슴츠레하게 눈을 뜬 아크 신관장의 눈가가 싸늘해진다.

“변방만을 떠돌던 자네가 왜 갑자기 빅토리아성으로 온 건가?”

“잠시 고향에 방문하려고 들른 겁니다.”

“허허, 고향이라……. 고향이 어디인가?”

“할브람입니다.”

내 입에서 할브람이라는 단어가 튀어나오자.

아크 신관장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고향이 할브람이라면… 자네의 부모님도 제법 유명하신 신관이나 성기사겠군. 혹시 부모님의 이름을 들을 수 있겠나?”

‘씁… 무슨 놈의 질문이 이렇게 많아?’

질문이 많다는 것은 궁금한 게 많다는 것이기도 하겠으나.

아직 여전히 나에 대한 의심이 풀리지 않았단 것일 터.

‘하지만 여기서 가문까지 거짓말로 꾸며 내면 골치 아파져. 거짓말이 더 길어지기 전에 이쯤에서 끊어 내자.’

“부모님에 대해선… 이야기할 게 없습니다. 하고 싶지도 않고요.”

내가 한기를 풀풀 흘리며 말하자.

아크 신관장도 아차 싶었는지 멋쩍은 미소를 흘린다.

“허허… 가족사는 함부로 묻는 것이 아닌데, 미안하게 됐군.”

“이제 저희는 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내가 불쾌하다는 티를 내며 골버린과 자리를 뜨려던 그때.

“잠깐 기다려 보게. 혹시 자네… 내 밑에서 일해 볼 생각은 없나?”

아크 신관장의 입에서 뜬금없는 질문이 튀어나온다.

“…예?”

‘저 늙은이가 진짜 무슨 생각이지?’

혹시 속은 척하고 날 대신전으로 낚으려는 고도의 수인 걸까?

‘아니, 그건 아닐 거야. 만약 내가 진짜 흑남이라는 걸 알았다면 당장 이 자리에서 잡으려 들었겠지. 하지만… 왜 한낱 떠돌이 신관을 포섭하려는 거지?’

내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아크 신관장을 바라봤으나.

사각, 사각-

아크 신관장은 양피지에 글자를 휘갈기더니.

작은 직인까지 찍고서 양피지를 내게 내밀었다.

“내 추천서네. 결정이 서거든 그걸 갖고 대신전으로 찾아오게.”

“허…….”

“허허, 하지만 많이 기다려 줄 수는 없네. 일주일, 그 안에 결정하고 찾아오게. 찾아오지 않거든 생각이 없는 걸로 판단하여 이 일은 없던 걸로 하겠네.”

그 말을 끝으로 성기사들을 대동한 아크 신관장이 포털 안으로 걸어 들어간다.

“어쩔 건가?”

“어쩌긴요? 이유 모를 호의는 받는 게 아닙니다.”

내가 단호히 말하자 골버린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하기야… 자네 말이 맞네. 분명 무언가 속셈이 있으니 자네에게 그런 말을 한 것이겠지.”

“흑남이라고 의심 아닌 의심을 한 사람을 어떻게 믿겠습니까?”

나는 피식 실소를 흘리곤 포털을 보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보다 얼른 저희도 움직이죠.”

* * *

2일 뒤.

우리는 대신전 옆에 있는 작은 동산에 도착했다.

‘그래도 경계병이 몇은 있을 줄 알았는데, 없어서 다행이네.’

동산이 대신전 옆에 위치한 터라 경계병이 많지 않을까 걱정했었으나.

다행히 그것은 내 기우일 뿐이었다.

“이곳에 비밀 통로가 있는 거, 확실한 거죠?”

“정말이네! 얼른 큰 나무를 찾아보게. 그 밑을 파 보면 내 말이 사실이라는 걸 알 걸세.”

다행히 큰 나무를 찾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이건가 본데? 확실히 크긴 크네.’

골버린의 호언장담대로.

우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나무들보다 몇 겹은 두터운 나무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이건가 보네요?”

“으허허허, 것 보게. 내 말이 맞았지? 이제 남은 건 입구를 찾는 일인데… 어디쯤이었더라……. 아마 여기 어디쯤이었던 것 같은데…….”

골버린이 이리저리 땅을 쑤시고 다니던 중.

텅-

“음?! 이곳인 모양이군! 갈프! 와 보게!”

갑자기 그가 황급히 나를 부른다.

“찾으셨습니까?”

“그렇네! 여기네! 손이 짜르르 울리는 걸 보아하니 이곳이 틀림없어!”

골버린의 말을 따라 우리는 거침없이 땅을 파기 시작했으나.

텅-

곧 커다란 바위에 삽이 걸리고 말았다.

“정말 여기가… 맞는 거죠?”

“허어! 확실하네! 잠깐 기다려 보게!”

쾅-

골버린의 주먹이 바위와 맞닿자.

바위가 흔적도 없이 박살이 나 사방으로 튀어 나간다.

“…음?”

하나 바위를 치웠음에도 불구하고 밑으로 드러난 건 짙은 흙뿐이었다.

“…골버린?”

“이상하군……. 분명 이곳이 맞을 텐데…….”

당황한 골버린이 다시 땅을 파기 시작했으나.

비밀 통로는 도통 나오질 않는다.

‘설마 진짜 노망나서 한 소리였던 건 아니겠지?’

내 가슴에 스멀스멀 의심이 피어오르기 시작하던 그때.

“이건……. 갈프! 이것 좀 보게!”

골버린이 주변의 흙과는 어딘가 색이 확연하게 다른 부위를 가리키며 소리친다.

“이건… 쇠붙이군요.”

“그렇네! 근처에 철광이 있는 것도 아닌데 철로 덮여 있다? 이상하지 않나? 아무래도 놈들이 비밀 통로의 존재를 파악하곤 입구를 틀어막은 것 같네!”

“확실히 그런 것 같긴 하네요…….”

쇠붙이가 정확히 어떤 종류의 광물인지는 모르겠으나.

곳곳이 변색이 되어 있는 걸 봐선 아무래도 꽤 예전에 입구를 막은 것으로 보였다.

‘아오… 골치 아프게 됐네.’

“부수고 들어가려면 오래 걸리겠죠?”

“갈프, 지하 감옥이 몇 층으로 이루어져 있는지 아나? 20층일세. 그리고 이 통로는 20층으로 이어진 통로였어.”

“20층이라…….”

그 말인즉슨 아무런 장비도 없이 땅을 파려면 며칠이 걸릴지 알 수 없다는 소리나 마찬가지 아닌가?

‘거기다가 이 쇠붙이를 치우려고 해도 동산 위치가 대신전 옆이라 소리가 다 들릴 게 뻔하고…….’

“크흠… 그, 미안하네. 설마 놈들이 통로를 막아 버렸을 줄이야…….”

“다른 방도는 없겠습니까?”

“다른 방도라……. 정식으로 지하 감옥으로 들어가는 것 말고는 없을 것 같네…….”

골버린이 내 눈치를 보며 조심스레 말하자.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어쩐다…….’

그냥 이대로 다 포기하고 비밀 지부로 이동하여 흑탑에 복귀하는 방법도 있다.

‘하지만 그러기엔 두 신이 했던 말들이 계속 마음에 걸린단 말이야.’

전대 성녀라면 내가 갖고 있는 의혹들을 해소해 줄 수 있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이렇게 아무런 소득도 없이 발길을 돌릴 수는 없었다.

“흠…….”

“아니면… 내가 책임을 지고 교황님이나 성녀님께 찾아가 여쭈어보겠네.”

“어르신이 책임을 지겠다고요?”

내 물음에 골버린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인다.

“비록 옛일이라고는 하나 나도 기사단장 출신이네. 내가 간청을 올린다면 아주 외면하지는 않을 걸세.”

“흠… 뭐, 일리가 있긴 합니다만…….”

‘과연 골버린의 말을 그들이 제대로 듣기는 할까?’

비록 지금은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다고 해도.

골버린은 얼마 전까지 치료원 신세를 지던 정신 나간 노인이었다.

과연 그런 노인의 말을 저들이 제대로 듣기는 할까?

‘그럴 리 없겠지. 오히려 미친 노인이 대신전까지 왔다면서 바로 제압하려 들지도 몰라.’

골버린의 의기는 높이 사겠으나.

그것이 좋은 방법이라고 보기에는 어려웠다.

‘뭔가 좋은 방법이… 가만…….’

내가 깊이 고민에 잠겨 있던 중.

불현듯 며칠 전 아크 신관장이 자신을 찾아오라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흠… 그 늙은이가 무슨 꿍꿍이를 갖고 있는지는 몰라도, 마약 그의 환심을 산다면 고위 직급의 사람들에게 접근하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만약 일이 순리대로 풀린다면 지하 감옥의 출입은 물론이거니와.

전대 성녀와 대면하는 것도 가능할지도 모른다.

‘물론 많이 위험하긴 하겠다만…….’

내 인생에서 위험하지 않은 적이 있던가?

‘진짜 아니다 싶으면 비밀 지부로 도망치면 되니까.’

마침내 나는 속으로 결정을 내리곤.

골버린을 보며 입을 뗐다.

“아니요. 일단 어르신의 신분은 밝히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일단은 지금처럼 제 호위 기사 신분을 유지해 주시죠.”

“자네가 그리 말한다면야… 그리하겠네. 그러면 어떻게 지하 감옥에 들어갈 생각인가?”

골버린의 질문에 나는 아크가 준 추천장 꺼내어 흔들어 보였다.

“이걸 이용해 볼까 합니다.”

“그건……. 그 신관장 말이네. 뭔가 느낌이 안 좋아 보이던데, 믿어도 되는지 모르겠군.”

그의 말에 난 픽 웃음을 흘렸다.

“확실히 인상이 별로긴 하죠. 하지만 지금 저희가 대신전에 들어가기 위해선 이 방법이 유일합니다.”

“그렇긴 하네만……. 자네 뜻이 그렇다면 따르겠네.”

“그럼 일단 이동하시죠. 조금 전에 바위를 깨느라 큰 소음을 내서 사람들이 찾아올지도 모릅니다.”

나의 말에 골버린이 손을 탁탁 털며 삽을 내던지며 묻는다.

“바로 대신전으로 갈 건가?”

“아니요. 가기 전에 들러야 할 곳이 있습니다.”

“하기야… 이 몰골로 대신전에 가는 것도 조금 우스운 일이겠지. 그래서 어디로 갈 생각인가?”

“일단 저희는 할브람으로 갈 겁니다.”

* * *

할브람.

레바논 내에서도 가장 규모가 큰 성이자.

대신전을 지키는 최후의 관문이라 불리기도 하는 할브람.

그 할브람의 상업 지구 외곽에는 주로 신관들이 사용하는 가죽띠를 제작하는 공방이 자리하고 있다.

“하암… 졸려 죽겠네.”

손님 하나 없는 공방을 보며 늘어져라 하품을 하던 남자가 슬쩍 고개를 돌린다.

“한가하네. 야! 흑탑에서 온 소식 같은 건 없어?!”

“예, 없습니다. 그냥 조용하네요.”

“…그래? 흠… 그럼 아직도 흑남은 발견하지 못한 모양인데… 큰일이네.”

지부장의 중얼거림에 허리띠를 진열하던 남자가 의문을 표한다.

“그게 왜 큰일인 겁니까?”

“어이구, 이 머저리 같은 놈아. 생각을 좀 해 봐. 흑남이 그 신관장 놈을 쫓다가 실종됐다잖냐?”

“…그렇죠?”

전혀 이해하지 못한 것 같은 부하의 질문에 지부장이 푹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어 간다.

“그럼 결과적으로 흑남이 실종된 건 그 신관장 때문이라고 볼 수 있는 거지. 그렇지?”

“근데 천년백작이 튀어나와서 흑남을 공격했다고 했잖아요? 그럼 꼭 신관장 때문이라고 보기에는 어려운 것 같은데요.”

“어허이! 다르지! 완전 다르지! 천년백작이고 만년백작이고 간에, 이번 일에는 신관장이 개입되어 있잖아? 그게 문제인 거지.”

수하가 입을 우물거리자.

지부장은 답답함에 이마를 탁 친다.

“어이구, 이 답답한 놈아!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 봐. 만약 성녀가 흑마법사를 쫓다가 실종됐다면 어떨 것 같아? 저 미친 광신도 놈들이 가만히 있었을 것 같아? 당장 병력을 모아서 검은 대지로 찾아갔을걸?”

“아아! 이제 이해가 되네요! 그러면 우리가 레바논을 공격한다는 거죠?”

수하의 물음에 지부장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내가 큰일이라고 한 것 아니냐. 얼마 전에 내가 흑탑에 잠깐 다녀왔던 건 기억하지?”

“저… 그 정도로 멍청하진 않습니다.”

“여하튼 지금 흑탑 분위기가 어떤 줄 알아? 그냥… 더럽게 살벌해.”

지부장이 혀를 차는 것과 달리.

수하는 어벙한 표정을 한 채 묻는다.

“많이 심각하답니까? 진짜 전쟁이라도 한답니까?”

“내가 높으신 양반들도 아니고 그걸 어떻게 알아?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지금 흑탑에서 검은 대지에 있는 암살자들을 싹 다 소집하고 있다는 거지.”

“암살자들 소집하고 있다고요?”

수하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묻자.

지부장은 한숨을 내쉬며 말한다.

“너는 대체 어떻게 그 머리로 흑마법사가……. 후, 피에는 피 아니겠냐? 아마도 암살자들을 모아서 대거 레바논에 풀려고 하는 거겠지.”

“그럼 곧 여기저기서 신관들이 죽어 나가겠군요?!”

“그렇겠지. 그러다가 점점 골이 깊어지면 이제 전쟁까지 이어지는…….”

두 사람이 한창 대화를 나누던 중.

덜컹-

갑자기 가게의 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안으로 들어온다.

“어서 오… 어?”

지부장이 들어온 남자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는 가운데.

“어서 오세요! 저희 존슨의 가죽 공방에 잘 오셨습니다. 저희는 허리띠가 제일 잘 나가지만 그 외에 다양한 가죽 물건들도 취급하고 있습니다!”

수하가 활짝 웃으며 손님을 맞이한다.

“혹시 찾으시는 게 있으십니까?”

“찾는 거라…….”

남자는 잠시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희미한 미소를 지은 채 말한다.

“지부장을 만나러 왔다.”

“지, 지부장이요?”

남자의 난데없는 말에 수하의 얼굴에 긴장감이 맴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여긴 존슨의 가죽 공… 아악!”

갑자기 수하의 뒤통수를 후려갈긴 지부장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남자를 바라보며 말한다.

“맙소사… 살아 계셨군요.”

지부장이 넙죽 허리를 숙이자.

영문을 모르는 수하는 어안이 벙벙하여 지부장을 바라봤다.

“갑자기 왜 그러시는 겁니까?”

“이런 등신 같은 새끼……. 저분이 누군지 몰라?!”

“네, 잘 모르겠습니다만……. 누군데요?”

얼간이 같은 수하의 행동에 지부장은 가슴을 두드리며 속삭이듯 말한다.

“흑남이시잖아.”

“…예?”

“흑남님이라고, 이 얼간이 같은 놈아! 뭐 하고 있어! 얼른 인사 안 드리고!”

“아… 예…….”

* * *

“마,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흑남님.”

두 남자가 허리를 숙이자.

나는 웃으며 입을 열었다.

“다행히 지부장님께서는 절 잘 아시는 모양입니다.”

“그렇습니다! 전에 흑탑에 들렀을 때 먼발치에서 얼굴을 뵌 적이 있었죠. 하하하하…….”

“그랬었군요. 덕분에 귀찮은 절차를 피하게 돼서 다행입니다.”

“하하하… 그런데 말입니다…….”

우물쭈물하던 지부장이 조심스럽게 입을 연다.

“흑남께선 어떻게 이곳에 계시는 건지……. 분명 흑탑에서 실종되셨다고 들었습니다만.”

“사연을 다 풀자면 이야기가 길어질 겁니다. 시간이 없으니 그 부분은 다음으로 미루죠.”

“아… 알겠습니다. 여하튼 베논 님께서 도우신 모양입니다. 정말 다행입니다!”

호들갑을 떨며 말을 이어 가는 지부장.

“조금만 기다리시지요! 곧장 검은 대지로 이동하실 수 있도록 준비를 하겠습…….”

“아닙니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예?”

나는 대답 대신 양피지 두 장을 꺼내어 지부장에게 내밀었다.

“이건…….”

“그걸 흑탑에 전달할 수 있겠습니까? 한 장은 나가란 탑주님께, 다른 한 장은 레논 부탑주님께 전달해 주면 됩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돌아가시지 않는 겁니까?”

당황하는 지부장의 물음에 난 덤덤히 고개를 끄덕였다.

“당분간은 레바논에 남아 있을 계획입니다.”

“…….”

내 말에 두 사람이 멍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무슨 일을 하시려고…….”

“양피지 전달, 할 수 있겠습니까? 빠르면 빠를수록 좋습니다.”

* * *

다음 날.

할브람성을 나온 나는 골버린과 함께 대신전에 도착했다.

‘이게 대신전…….’

전쟁의 여파가 닿은 적이 없어서 그런 것일까.

대신전 바깥에 지어진 성벽은 그 용도가 무색할 정도로 새하얬다.

“이곳은 여전히 장관이군…….”

감회에 젖어 든 골버린의 중얼거림이 들려왔으나 나는 동의할 수 없었다.

‘확실히 장관이긴 하다만… 괜히 긴장되네.’

신관들과 성기사들이 우글거리는 굴속에 발을 디딜 생각을 하니.

괜히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 같았다.

“후… 가 보죠.”

나는 심호흡을 하곤 굳건한 문을 지키고 있는 성기사들에게 다가갔다.

“…누구십니까?”

경계심이 가득한 기사의 눈을 보며 나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아크 신관장님의 부름을 받고 왔습니다.”

“아아… 갈프 신관님이시군요.”

이미 이야기가 오갔던 걸까.

성기사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내민다.

“추천장을 보여 주시겠습니까?”

내가 추천장을 보여 주자.

성기사는 쓰윽 양피지를 훑더니 내게 추천장을 돌려주며 검을 거둔다.

“근데 그쪽 분은…….”

“아, 제 호위 기사입니다.”

웅웅웅웅-

투구를 쓰고 있던 골버린이 신성력을 보이자.

성기사는 그제야 의심을 풀며 말한다.

“제가 안내를 해 드리겠습니다. 이쪽으로 오시겠습니까?”

“그러죠.”

우리는 성기사를 따라 성벽을 지나 마침내 대신전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워…….’

눈앞에 드러난 대신전의 정경을 보며.

나는 나도 모르게 혀를 내둘렀다.

‘무슨 놈의 건물들이 전부 새하얘?’

꼭 대신전이 아니라 설경을 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으나.

곳곳에 세워진 레바논의 신상들이 이곳이 대신전임을 알려 왔다.

‘미친… 저게 다 신관들인가?’

잘 다듬어진 공터를 오가는 수많은 신관들과 성기사들.

당장 내 눈에 보이는 숫자만 해도 능히 몇백은 넘었다.

‘내가 정말… 레바논의 심장부에 왔구나.’

이제 정말로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혹시나 실수로라도 흑마법을 사용하는 일은 없어야겠지.’

내가 속으로 다짐하고 또 다짐하던 사이.

“이곳입니다.”

성기사가 다른 건물들보다 유독 거대한 신전 앞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이곳이 대신전의 심장부이자 교황님께서 거처하시는 백린입니다. 대신관님들과 성녀님께서 의논하실 때도 이곳에서 모이지요.”

“그렇군요. 친절한 설명에 감사드립니다.”

“하하, 아닙니다. 아크 신관장님께서 갈프 신관이 오시거든 잘 안내하라고 당부를 하셨습니다. 들어가시죠.”

“하하, 그러죠.”

우리가 성기사의 안내를 받아 백린의 안으로 걸음을 옮기려던 그때.

“어?!”

우측 저 멀리서 여인의 날 선 비명이 울려온다.

슬쩍 고개를 돌리자.

“당신이 왜… 당신이 왜, 여기에 있는 거죠?!”

눈을 부릅뜬 채 나를 바라보는 제이나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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