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
레바논이 불쾌하다는 듯 골버린을 바라보자.
베논은 픽 실소를 흘린다.
[벌레라고?]
[뭐, 틀린 말은 아니잖아요? 애당초 저들은 내 무료함을 달래기 위한 물건일 뿐이었으니까요. 당신도 그렇게 생각하잖아요?]
[글쎄, 적어도 난 네년처럼 나의 신도들을 벌레라고 생각한 적은 없는데.]
입가에 비웃음을 머금은 채 계속 말을 이어 가는 베논.
[네년의 마음가짐이 그 모양이니 널 섬기던 하수인도 변절해서 바알 쪽으로 간 것 같은데. 아닌가?]
베논의 빈정거림에도 레바논은 어깨를 으쓱여 보인다.
[그래서요? 오히려 당신은 제게 감사를 해야 돼요. 그 덕분에 오히려 재앙의 문이 어느 정도 위력을 갖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었잖아요?]
[…뭐? 감사? 푸하하하하!]
시원하게 웃음을 터뜨리는 베논.
그는 곧 웃음을 그치곤 무심한 눈으로 레바논을 응시한다.
[그래, 그렇다고 치지. 그런데 변절한 네 신도를 계속 살려 둬도 되는 건가?]
[그게 무슨 말이죠?]
[흑남이 그녀랑 만나게 되면 일이 복잡해질 것 같은데.]
베논의 말에 레바논은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잖아도 슬슬 제이나에게 변절자를 죽이라고 신탁을 내리려고요.]
[그런가……. 놀고만 있진 않은 모양이군.]
[어머, 당신만 할까요?]
두 신 사이에서 싸늘한 분위기가 퍼져 나오던 가운데 베논이 입을 뗀다.
[여하튼 제약도 제약이지만 계속 흑남을 예의 주시 해라. 만약 그가 네년의 영역에서 죽기라도 한다면… 그땐 네년을 가만두진 않을 거다.]
[당신이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내가 알아서 할 거예요. 설마 내가 귀중한 열쇠를 방치할 거라 생각한 건가요?]
‘내가… 열쇠?’
내가 열쇠라니?
지금 저 두 양반은 대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걸까?
‘내가 듣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건가?’
[말은 잘하는군. 그래 봐야 결국 내기는 내가 이기겠지만.]
[어이가 없네요. 이미 그는 레바논 왕국에 왔고 선행을 베풀며 신성력을 올리고 있는데요? 비록 당신이 먼저 앞서 나갔을지는 몰라도 결국 그는 성남이 될 거예요.]
[그건 네년의 생각일 뿐이다. 정말 그리될지는 지켜보면 알겠지.]
쩌저저저저적-
베논은 그 말을 끝으로 균열 속으로 사라졌고.
[언제까지 그리 자신만만하게 굴 수 있을까?]
레바논은 베논이 사라진 자리를 보며 중얼거리곤 마찬가지로 균열 사이로 걸어 들어간다.
‘음…….’
두 신이 사라지자 나는 슬며시 팔에 힘을 주었다.
‘둘 다 확실히 간 모양이네.’
나는 팔 흔드는 걸 멈추곤 생각을 이어 갔다.
‘근데… 이해할 수가 없네. 제약이라니? 그럼 골버린의 몸에 있던 그 댐 같은 게 두 신이 걸어 둔 제약이라는 건데…….’
두 신이 나눈 이야기로 봤을 때는.
비단 골버린뿐만이 아니라 모든 소드마스터들에게도 동일한 제약이 걸려 있는 듯했다.
‘두 신은 왜 그런 제약을 걸어 놓은 걸까. 벌레는 벌레로 남아 있어야만 한다라…….’
제약을 걸지 않으면 벌레가 아닌 다른 무언가가 되기라도 한다는 걸까?
‘그것도 그렇고 더 이해가 안 되는 건… 분명 내가 제약을 건드렸는데 왜 두 신은 내 회색 마력에 대해 전혀 눈치를 못 챈 거지?’
물론 내 입장에서는 다행인 일이었으나.
두 신이 내 힘에 대해 전혀 눈치채지 못한 점은 분명한 의문으로 남았다.
‘거기다가 내가 열쇠라는 건 또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네.’
대체 두 신은 무슨 의도로 저런 말을 했던 걸까.
‘레바논의 말대로 내가 정말 무언가를 열기 위한 열쇠라면… 두 신이 내기를 한 이유가 설마…….’
내기에서 이긴 쪽이 열쇠를 가진다.
뭐 그런 내막이 있는 건 아닐지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아오… 모르겠다.’
내가 대량의 정보와 의문에 혼란스러워하던 중.
“그렇다면 어째서 레바논과 베논이 널 선택했을까? 이상하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나?”
“네가 두 신의 선택을 받은 재앙이기 때문이다.”
불현듯 바알이 했던 말이 내 머릿속을 스치듯 지나갔다.
‘그럼 두 신이 내게 이런 힘을 준 게, 내가 열쇠이기 때문이라는 건데…….’
물론 바알도 믿을 놈은 못 된다.
하나 어째선지 지금만큼은 놈이 했던 말들이 계속 머리를 울리는 것 같다.
‘대체 뭘 위한 열쇠라는 건지……. 아씨… 안 되겠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 계속 고민해 봐야 소용없을 터.
‘일단 서둘러 지하 감옥으로 가 봐야겠어.’
레바논은 성녀에게 변절자를 죽이라는 신탁을 내리겠다고 했다.
두 신이 말했던 레바논을 변절한 신도.
그건 분명 전대 성녀인 헬렌을 말한 것이리라.
‘그녀가 대체 뭘 알고 있는지는 몰라도 두 신은 내가 그녀와 만나는 걸 꺼리는 것 같은 눈치였고, 그러니 더욱 전대 성녀를 만나 봐야겠어.’
신탁을 받은 제이나가 헬렌을 죽이기 전에 먼저 지하 감옥으로 가야 했다.
‘아, 근데 신들이 자꾸 날 관찰하고 있다는 게 거슬리네.’
하나 두 신에 대해 의심이 생긴 탓일까.
이제는 두 신이 날 관찰하고 있다는 사실이 거슬리기 시작했다.
‘내가 지하 감옥에 가까이 가면 갈수록 더 서둘러서 전대 성녀를 죽이려고 할 것 아냐? 씁… 두 신이 날 관찰하지 못하게 할 방법은 없나.’
내가 거듭 고찰하고 고찰하던 그때.
“갈프 신관, 무슨 생각을 그렇게 깊이 하고 있는 건가?”
골버린이 넌지시 말을 걸어온다.
“하하… 아닙니다. 일단 가시죠.”
* * *
다음 날, 아침.
미카엘 치료원의 정문 앞.
척-
중무장한 병사들 앞에서 레테 원장이 날 보며 아쉽다는 듯 미소를 보인다.
“벌써 돌아가신다니 참 아쉽네요. 좀 더 계셔도 되는데 말이죠.”
“그래도 보고를 드리는 게 우선이지 않겠습니까?”
나는 내 옆에 서 있는 골버린을 힐끗 보며 말을 이어 갔다.
“소드마스터의 정신이 돌아왔다는 사실을 프란 신관장님께 알려 드려야지요.”
“호호호, 물론 그게 더 중요한 일이죠. 다만 이렇게 금방 갈프 신관님을 떠나보내야 한다니 아쉬움이 들어서요.”
그녀의 말에 나는 씨익 미소를 지었다.
“이번 일은 비단 제 공로가 아닌 레테 원장님의 공로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머지않아 다시 대신전에서 원장님을 뵐 수 있을 거라 믿습니다.”
“호호호호호, 빈말이라고 해도 기분은 좋네요.”
활짝 웃는 레테 원장을 보며 난 속으로 생각했다.
‘대신전은 무슨… 오늘을 끝으로 다시는 볼 일도 없겠지만, 잘 지내든가 하쇼.’
“그럼 저는 이만…….”
* * *
레테 원장은 떠나가는 마차에 손을 흔들어 보이다가.
곧 미소를 지우곤 병사에게 말한다.
“당장 그림 노인의 방으로 가자.”
“예!”
병사들과 곧바로 그림 노인의 방으로 이동한 레테 원장.
“호호호호호호!”
그녀는 멍하니 그림을 그리고 있는 노파를 보며 활짝 미소를 짓더니.
‘이걸 먹이면 된다, 이 말이지?’
품에서 검은 물이 담겨 있는 병을 조심스럽게 꺼내 든다.
“신관님들! 그럼 치료를 부탁드릴게요.”
레테 원장의 말이 끝나자.
웅웅웅웅-
대기하고 있던 신관들이 그림 노인에게 다가가.
조심스럽게 신성력을 불어넣기 시작한다.
“으으으…….”
이윽고 노파의 입에서 미세한 신음소리가 흘러나오자.
‘이때 흑마력 포션을 복용시키라고 했었지?’
레테 원장은 기다렸다는 듯 노파에게 다가가 그녀의 입에 흑마력 포션을 흘려 넣는다.
‘갈프 신관의 말대로라면 곧 반응이 올 거야.’
이제 그림 노인은 정신이 나간 노인에서 온전한 정신을 가진 소드마스터로 탈바꿈할 터.
‘교황님과 대신관님들께서 이 사실을 알게 되면 분명 크게 놀라시겠지? 그러면… 신관장이 되는 것도 꿈은 아닐지도 몰라.’
교황, 대신관 그리고 성녀를 제외하곤 감히 명령을 내릴 자가 없다고 하는 권력의 자리.
그 자리가 곧 자신의 것이 된다는 생각에 레테 원장이 눈을 반짝이고 있던 중.
“으으으으으으으으…….”
그림 노인이 몸을 좌우로 크게 비틀기 시작한다.
“워, 원장님, 자, 잘되고 있는 거지요?”
“호호호호, 이제 곧 그림 노인이 정신을 되찾을 거니 잘 지켜보세…….”
레테 원장이 활짝 웃으며 말을 이어 가려던 그때.
“으으으으… 으으으으으으! 꺼어억!”
그림 노인의 입에서 튀어나온 트림 소리가 레테 원장의 귓가에 작렬한다.
“…….”
“…음?”
멍한 눈으로 그림 노인을 바라보는 레테 원장.
“이게 대체…….”
스슥-
그녀의 당혹감을 알기는 하는 걸까.
시원하게 트림을 한 그림 노인은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레, 레테 님… 잘된 겁니까?”
“그림 노인의 상태를 보니 달라진 건 없는 것 같습니다만…….”
병사들의 수군거림에 레테 원장은 단호히 고개를 젓는다.
“그럴 리 없어요. 그럴 리가 없다고요! 골버린이 멀쩡한 정신상태로 걸어 나가는 걸 나도, 당신들도 똑똑히 봤잖아요?!”
레테 원장은 홀린 듯 그림 노인에게 다가가.
마지막 흑마력 포션을 그녀에게 먹이려 들었다.
하나.
툭, 팅-
그림 노인이 매몰차게 팔을 휘저은 탓에 손에서 튕겨 나간 포션 병이 바닥을 굴렀고.
“아…….”
레테 원장은 바닥에 짙게 깔린 검은 액체를 보며 헛웃음만을 흘릴 뿐이었다.
* * *
미카엘 치료원에 침묵만이 맴돌던 그 시각.
“후우…….”
피카르성에 도착한 나는 골버린과 함께 마차에서 내렸다.
“피카르성이라… 이곳도 이렇게 보는 건 참 오랜만이군…….”
골버린은 감회가 새롭다는 듯 성내를 바라보다가.
내게 넌지시 질문을 해 온다.
“이제 피카르 신전으로 가는 건가?”
“아니요. 우리는 빅토리아성으로 갈 겁니다.”
“빅토리아로 간다고?”
골버린이 의아하다는 듯 나를 바라보다가.
곧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허어… 역시 뭔가 예사롭지 않다고 생각은 했네만, 빅토리아 신전 출신의 신관이었던 모양이군. 참으로 역사가 깊은 곳이지. 그곳에서 대신관들도 몇 배출하지 않았던가?”
‘빅토리아 신전 출신은 아니고 흑카데미 출신이올시다.’
“하하. 뭐… 그런 셈이죠.”
내가 아무렇지 않게 웃어 보이자.
골버린도 껄껄 웃으며 말을 이어 간다.
“그러고 보니 자네의 가문도 모르는군. 어디 가문 출신인가? 자네만 한 신관을 배출할 정도의 가문이라면 분명 내가 모르진 않을 걸세. 에드워드 가문인가? 아니면 제이 가문?”
“가문의 명성이 뭐 그리 중요하겠습니까. 저는 그저 레바논 님을 섬기며 그분의 뜻을 전파하는 떠돌이 신관 갈프라는 이름 하나로 족합니다.”
“허어…….”
나의 말에 깊은 감명을 받은 걸까.
골버린이 탄식하듯 놀라며 나를 보더니 빙긋 미소를 짓는다.
“겸손하군. 으허허허허, 하기야 자네 말이 맞네. 가문의 이름이 뭐가 중요하겠나? 그저 레바논 님의 뜻을 따르는 것 하나로 족한 것을.”
“그보다 일단 빅토리아성으로 가는 마차를 알아보죠.”
나는 괜히 더 대화를 나눴다가는 골치가 아파지겠다는 생각이 들어.
얼른 말을 돌렸다.
“그러지. 아 참, 그리고 적당한 검 하나만 내게 쥐여 줄 수 있겠나?”
“검이요?”
“그래야 문제가 생겼을 때 자네를 수월하게 보호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말이네.”
‘검이라…….’
내가 골버린의 빈손을 지그시 바라보던 그때.
“이교도들을 호송 중이다! 길을 터라!”
“비켜라!”
어디선가 남자의 커다란 고함이 내 귓전을 울려 왔다.
‘…이교도?’
나는 호기심에 인파를 뚫고 슬며시 갓길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덜그럭, 덜그럭-
‘저건…….’
수많은 성기사들이 쇠창살이 박힌 수레를 호송하고 있었는데.
신기하게도 철창 안에 갇힌 사람들은 전원 여성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왜 남자는 한 명도 없고 여자들만 잡아 온 거지? 가만… 근데 저 죄인들… 왜 어디선가 본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거지?’
내가 사지가 밧줄로 묶이고 입에 재갈이 채워진 여인들을 의아하게 바라보던 중.
“이 마녀 새끼들아! 죽어!”
“왜 가축이 없어졌나 했더니 다 네년들의 짓거리였구나!”
“이 더러운 이교도 새끼들이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발을 들여?!”
퍼억-
갑자기 주민들이 수레를 향해 욕설을 퍼부으며 돌을 던지기 시작했고.
성기사들은 그런 주민들을 관망하며 제지하지 않는다.
“마녀라……. 이 신성한 땅에 역겨운 종자들이 발을 디밀었군. 그렇지 않나?”
골버린이 혀를 차며 내게 동조를 구하듯 질문을 던졌으나.
‘…마녀라고? 설마 검은 대지에서 탈출한 마녀들이었나? 가만… 저년들… 전부 바알의 신도들이잖아?’
나는 그런 그녀들을 바라보다가 불현듯 한 가지 생각을 떠올렸다.
‘만약 저년들을 이용한다면… 두 신의 이목을 피할 수도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