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카데미의 노예가 살아남는 법-87화 (87/200)

87.

독방에서 바깥으로 나온 골버린.

“허…….”

그는 바깥의 정경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탄식을 내뱉는다.

“아직도… 믿기지가 않는군…….”

멀쩡한 정신으로 이렇게 오랫동안 이 세상을 바라보는 게 얼마 만이던가.

골버린은 젖은 눈으로 달빛에 감긴 치료원을 가만히 바라봤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뿐.

‘언제 다시 안개가 머릿속을 잠식할지 모른다.’

곧 다가올 현실을 떠올린 골버린은 조각같이 흩어진 옛 기억들을 긁어모으기 시작했다.

‘아마… 저기가 기사들과 신관들이 생활하는 곳이었던 것 같은데…….’

이윽고 그가 단층 건물에 들어서자.

“…어?”

딱 봐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병사가 그를 보며 입을 뻐끔거리더니.

“애… 애 새끼 노인이 나왔다! 애 새끼 노인이 나왔어!”

건물이 떠나가라 소리를 지르기 시작한다.

“이보게, 진정하게.”

골버린은 최대한 침착하게 병사를 진정시키고자 했으나.

“당장 레테 님을 불러와! 이곳은 우리가 막고 있겠다!”

“서둘러!”

병사들은 그의 말을 들은 체도 하지 않고 허겁지겁 그의 앞을 가로막으며 말한다.

“더… 더 이상 가까이 안 오는 게 좋을 겁니다.”

“또 독방에 갇히고 싶어요?!”

겁을 집어먹은 채 위협하는 병사들을 보며.

“허허…….”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실소를 흘리는 골버린.

‘대체 정신을 잃은 사이 난 무슨 짓을 하고 돌아다닌 건지…….’

골버린은 씁쓸히 웃다가 병사들을 보며 입을 뗀다.

“진정들 하게. 지금의 나는 멀쩡하네.”

“멀쩡… 하다고요?”

“그래. 그렇지 않고서야 지금 자네들과 이렇게 대화를 나눌 수 있겠나?”

골버린이 차근차근 말을 이어 나가자.

두려움에 짓눌려 있던 병사들의 눈동자가 점차 휘둥그레진다.

“저, 정말이십니까? 그럼 혹시 이건 뭔지 알아보시겠습니까?”

“자네의 손바닥이군.”

“허!”

골버린이 정답을 맞히자 병사들이 크게 놀란다.

“그… 그럼 이건…….”

“저건 투구 아닌가?”

“세, 세상에… 맞습니다. 그럼 혹시 자신의 이름은 기억하십니까?”

“골버린, 그게 내 이름일세.”

노인의 완벽한 대답에 병사들의 얼굴이 뜨악해진다.

“서, 설마 정신이 돌아오신 겁니까?”

“정신이 돌아왔다라……. 완전히 돌아온 것은 아니네.”

아주 조금씩이지만 머릿속에 안개가 끼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에.

골버린은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어 갔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의 나는 제정신이라고 이야기할 수…….”

“레바논 님께서 기적을 일으키신 게 분명합니다!”

“오오, 레바논이시여!”

병사들이 탄성을 내지르던 중.

“무슨 일이지?”

원장실에서 나온 레테 원장이 병사들을 보며 묻는다.

“레, 레테 님! 저것 좀 보십쇼! 골버린 님의 정신이 멀쩡해지셨습니다!”

“…뭐라고?”

황급히 골버린에게 다가가 말을 거는 레테 원장의 등을 보며.

나는 생각했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야?’

조금 전까지만 해도 레테 원장과 대화를 나누며.

흑마력 포션은 효과가 없었다고 말을 하고 있었건만.

‘저 노인은 어떻게 독방에서 나온 거야? 신성력으로 정신을 깨워도 길어야 5분이라며?’

분명 연구 일지에 적혀 있던 바로는.

아무리 신성력을 이용해도 노인들은 채 5분도 안 돼 다시 미쳤다고 적혀 있었다.

‘근데 왜 저 양반은 아직도 멀쩡한 거지? 혹시 성기사라서 약발을 더 받는 건가?’

내가 멀쩡한 골버린을 보며 속으로 혀를 내두르던 중.

“갈프 신관님! 갈프 신관님!”

골버린과 대화를 끝마친 레테 원장이 얼굴에 화색을 띤 채 내게 묻는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건가요? 분명 흑마력 포션도 소용이 없다고 하셨잖아요!”

‘이 양반아!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내가 한 거라곤 내 애매한 회색 마력을 댐 너머로 밀어 넣은 것밖에… 설마 그것 때문에 그런 건가?’

내가 골버린에게 행한 일이라곤 그것밖에 없었고.

그것이 기존의 연구 결과와 명확한 차이점을 만들었다면 나올 수 있는 답은 하나뿐이었다.

‘…진짜로 내 애매한 마력이 노인한테 뭔가 영향을 끼친 건가?’

“하하… 분명 독방에서 나올 때까지만 해도 아무런 일도 없었습니다만… 희한하군요.”

“그건 아무래도 좋아요! 이건 정말… 혁신적인 일이에요!”

잔뜩 흥분한 레테 원장이 계속 말한다.

“만약 저들의 정신을 온전하게 만드는 게 가능하다면, 저희 레바논은 엄청난 전력을 확보할 수 있게 돼요! 아니면 막대한 금화를 대가로 받고 치료가 끝난 노인을 자국에 돌려보내도 되고요. 어느 쪽이 됐건… 이건 정말 기적이에요!”

노인이 저리 오랫동안 제정신을 유지한다는 게 그리도 기뻤던 걸까.

차분해 보였던 레테 원장이 연신 입을 놀리자.

나는 덤덤히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렇죠. 덤으로 원장님의 앞날도 밝을 거고요.”

“호호호호, 제 앞날이 밝다고 한들 갈프 신관님의 앞날만 하겠어요? 이번에 갈프 신관님께서 발견하신 업적이 대신전까지 향한다면, 대신관님들은 물론이고 교황님도 기겁을 하실걸요?”

레테 원장의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피자.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글쎄… 완전히 치료된 건 아닌데 저렇게 김칫국부터 마셔도 되나 모르겠네.’

내가 보기에는 노인의 목과 머리 사이를 막고 있는 댐.

그것을 없애지 않는 한 노인들을 정상화하기 어려울 것 같았건만.

아무래도 레테 원장의 생각은 다른 모양이었다.

‘뭐, 그건 내 알 바가 아니지만.’

“흑마력 포션 말고 또 뭘 사용하셨죠?”

“뭐… 신성력을 이용하긴 했습니다.”

“신성력과 흑마력 포션 두 가지를 사용하신 거군요! 그 외에는 또 없나요?”

레테 원장은 눈을 번뜩이며 연신 내 대답을 양피지에 옮겨 적기에 바쁘다.

“그게 전부입니다.”

“호호호호, 그렇군요. 이건 내일 바로 실험을 해 봐야겠어요.”

레테 원장이 황급히 자리를 뜨려던 그때.

나는 잠시 그녀를 제지했다.

“실험을 하시는 건 좋습니다만, 그 전에 말씀을 드려야 할 게 있습니다.”

“네, 뭐든 말씀하세요.”

“어쨌건 흑마력 포션이 효과가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으니 저는 내일 날이 밝는 대로 이곳을 뜰까 합니다.”

‘비밀 통로의 위치도 알아냈으니 더 이상 이곳에 볼일은 없으니까.’

내 말에 레테 원장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어머, 벌써 가신다고요?”

“이 사실을 프란 신관장님께도 알려 드려야 하니까요.”

물론 내가 치료원을 단시간에 빠져나가기 위한 변명일 뿐.

프란 신관장을 만날 일은 없었다.

“그렇군요. 갈프 신관님 덕에 이런 엄청난 발견을 하게 됐는데, 참… 아쉽네요.”

‘그런 것치곤 별로 안 아쉬워 보이는데?’

내가 속으로 실소를 흘리던 중.

“이야기들은 다 끝낸 건가?”

골버린이 우리에게 다가와 말을 건다.

“호호호, 축하드려요. 정말 완전히 정신을 되찾으신 모양이네요.”

“그렇게 됐네. 그보다 그쪽 옆에 있는 젊은 신관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 자리를 좀 비켜 주겠나?”

“그러죠. 아 참, 갈프 신관님. 혹시 남는 약이 있으면 좀 받아 갈 수 있을까요?”

레테 원장의 물음에 나는 흑마력 포션 몇 병을 더 꺼내어 그녀의 손에 쥐여 줬다.

‘효과는 없을 텐데… 한번 잘 연구해 보쇼.’

“호호호호.”

레테 원장이 활짝 웃으며 자리를 뜨자.

“바깥에서 잠시 나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겠나?”

골버린이 내게 정중히 질문을 해 온다.

“그러시죠.”

나는 골버린과 함께 밖으로 나가 인적이 없는 숲길로 이동했다.

“여기라면 괜찮을 것 같군.”

“정신은 좀 어떠십니까.”

나의 물음에 골버린이 너털웃음을 터뜨린다.

“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내 정신으로 세상을 볼 수 있을 줄은 몰랐네. 정말… 감사하네.”

“감사하실 건 없습니다. 완전히 치유가 된 게 아니니까요. 아닙니까?”

그에 골버린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번진다.

“…맞네. 아직 정상으로 돌아간 건 아니네. 자네 덕에 상태는 호전됐지만 나는 여전히 미쳐 가는 중이지. 그래도… 고맙네.”

골버린은 고개를 쳐들고 밤하늘을 보며 나지막이 말을 이어 간다.

“자네는 레바논 님께서 내게 내리신 기적이네.”

“…….”

노인의 진솔한 읊조림에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보다 자네… 지하 감옥으로 갈 생각인가?”

“그렇습니다.”

나의 대답에 골버린은 잠시 말이 없다가 다시 입을 연다.

“연유를 물어봐도 되겠나?”

“만나야 할 사람이 있습니다.”

“…소중한 사람인가 보군.”

‘아니요. 전대 성녀를 만나러 가는 겁니다.’

하지만 그에게 사실을 말할 이유는 없었기에 나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뭐… 비슷합니다.”

“혹시 일행은 있나?”

“…예?”

나의 되물음에 골버린이 머쓱해하며 말을 이어 간다.

“그 왜… 자네도 알겠지만 세상이 좀 험난한가? 하물며 신관인 자네를 노리려는 사람들은 오죽 많겠나? 치료를 해 달라며 달라붙는 용병들은 오죽할 것이며, 부랑자들의 위협도 있을 것이야.”

“뭐…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만 아직까지 그런 일은 없었는데요.”

내 말에 단호히 고개를 젓는 골버린.

“위험이라는 게 어디 예고를 하고 들이닥치던가? 바람처럼 느닷없이 찾아오는 게 위험일세.”

‘무슨 말을 하려고 저러는 거야?’

“…그래서요?”

“큼… 흠… 그래서 말이네. 내가 자네의 호위로 일하면 어떨까 싶네.”

“예?”

갑자기 내 호위를 자처하는 골버린을 보며.

나는 생각에 잠겼다.

‘저러는 이유야 뻔하지.’

지금 그의 정신을 장시간 동안 온전케 한 이가 누가 있던가?

‘그러니 계속 내 옆에 붙어서 맨 정신을 유지하며 살고 싶은 것 같은데… 흠, 고민이네.’

레바논 왕국이라는 객지에서 소드마스터가 내 호위 기사가 된다?

솔직히 구미가 당기는 일이긴 했다.

‘노숙할 때도 돌아가면서 불침번을 서도 되는 거고. 노인네 말대로 변수가 생길 수도 있을 테니. 흠…….’

나는 골버린을 호위로 들였을 때의 단점과 장점을 생각해 보곤 입을 열었다.

“좋습니다.”

“오오! 정말 잘 생각했네!”

“단, 조건이 있습니다. 제가 무슨 일을 하건 그에 대해 의심을…….”

내 말에 골버린은 대답을 듣기도 전에 소리친다.

“어떤 조건이건 간에 전부 수용하겠네!”

“아, 예. 그렇다면야… 앞으로 잘 부탁드리…….”

내가 옅은 미소를 지으려던 그때.

사사삭-

갑자기 내 귓불을 흔들던 바람이 멎었다.

풀 곳곳에서 들려오던 벌레들의 울음소리도 세상이 멈춘 것처럼 갑자기 들려오질 않는다.

‘이건…….’

분명 레바논이나 베논이 나타나기 전에 보이는 징조이다.

‘왜 갑자기 찾아오려는 거지? 근데… 뭐야, 이거…….’

나는 팔을 내리려고 했으나.

어째선지 팔이 움직이질 않는다.

아니, 팔뿐만이 아니라 전신이 굳은 것 같다.

‘왜 이래?’

원래 두 신이 나타나더라도 나만큼은 정지한 시간 속에서 자유로이 움직일 수 있었건만.

지금은 몸을 움직일 수가 없다.

내가 혼란해하던 와중.

쩌저저적-

나의 양옆에 커다란 균열이 하나씩 생겨나더니.

검은 장발머리의 남자와 긴 금발머리의 여인이 각각 좌우측의 균열에서 걸어 나온다.

‘역시 두 신이 오기 전의 징조였나. 근데… 난 왜 못 움직이는 거야?’

내가 어떻게든 몸을 움직이고자 발버둥을 치던 중.

골버린을 살피던 베논이 레바논을 노려보며 사납게 말한다.

[이것도 네 장난질인가?]

[장난이요? 내가 이런 일로 장난질을 칠 것 같아요?]

[그럼 잠시라고는 해도 이 노인이 우리가 걸어 둔 제약에서 벗어난 건 어떻게 설명할 셈이지?]

‘…제약?’

두 신이 걸어 둔 제약이라니?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또 모르죠. 당신이 개수작을 부렸을지 누가 알겠어요?]

[이곳은 네년의 영역이다. 네년 말고는 이런 일을 할 년이 없다는 말이다.]

베논이 낮게 으르렁거리자.

레바논은 어깨를 으쓱이며 비꼬듯 묻는다.

[어머, 뭘 그렇게 화를 내요? 혹시 흑남이 레바논 왕국에 온 게 아니꼬워서 그런 건 아니죠?]

[말장난하지 마라. 이 일은 중대 사안이다. 있어선 안 되는 일이고 있을 수도 없는 일이란 말이다!]

[하아…….]

그에 레바논은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더니.

날을 세운 채로 말한다.

[당신의 힘에 문제가 생긴 건 아니고요?]

[…뭐라고?]

[내가 건 제약에는 변함이 없어요. 그런데 저 노인이 정신을 차렸다는 건, 당신이 걸어 둔 제약에 문제가 생겼다고밖에 볼 수 없겠네요. 아닌가요?]

레바논의 날 선 질문에 베논 또한 단호히 맞받아친다.

[내 제약에도 문제는 없다.]

[그럼 양쪽이 건 제약에는 전부 문제가 없다는 뜻이네요?]

두 신이 슬며시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자.

‘뭐, 뭐야. 갑자기 왜 날 쳐다봐?’

나는 속으로 침을 꿀꺽 삼켰다.

[예비 성남이 우리가 건 제약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도 있긴 하겠네요. 어쨌건 그는 우리의 힘을 간접적으로 받았으니까요. 그의 상태를 확인해 보는 게 가장 빠르겠네요.]

레바논이 손을 뻗어 내 이마에 갖다 대자.

베논 또한 똑같은 행동을 취한다.

[…이상하네요.]

레바논은 눈을 찡그린 채 나를 바라보며 말을 이어 간다.

[그는 딱히 달라진 게 없어요.]

[그럼 도대체 누가 우리의 제약에 간섭했다는 거지?]

베논과 레바논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자.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두 신이 말하는 제약이라는 게 혹시 그 댐 같은 걸 말하는 거라면 내가 한 게 맞긴 한데…….’

어째서 두 신은 내가 골버린의 정신에 영향을 줬다는 사실을 모르는 걸까?

‘특히 내가 사용한 애매모호한 마력에 대해선 아예 감을 못 잡는 것 같단 말이지.’

두 신은 나의 회색 마력에 대해선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눈치였다.

‘희한하네……. 신은 모든 걸 알고 있는 줄 알았더니, 왜 모르는 거지?’

[바알이 간섭했을 가능성은 없나?]

[그 하찮은 놈이 우리의 제약에 간섭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말도 안 되는 소리 좀 그만해요.]

일을 행한 사람이 바로 눈앞에 있건만.

두 신은 전혀 다른 곳에서 범인을 찾고자 했다.

‘혹시 내 흐리멍덩한 마력에 뭔가가 있는 건가…….’

내가 깊은 고민에 잠겨 있던 그때.

베논이 미간을 찌푸린 채 말한다.

[…어쨌건 이 일에 대해선 결론을 내려야만 한다.]

[당연하죠. 벌레들은 계속 벌레로 남아 있어야 하지 않겠어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