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
‘이건…….’
분명 처음 보는 그림이건만 어째선지 그리 낯설다 느껴지지 않는다.
‘분명 방같이 생겼는데. 내가 이걸 어디서 봤었던 것 같… 아!’
나는 유심히 그림을 관찰하다가 무릎을 탁 쳤다.
‘대체 어디서 이걸 봤나 했더니. 이 그림… 레테 원장의 방 내부랑 상당히 흡사해.’
벽면 옆에 서 있는 레바논과 열둘의 대천사 동상.
그리고 테이블과 책장의 배치도까지.
그림은 레테 원장의 내부도와 굉장히 흡사했다.
‘근데… 그림 노인은 왜 이런 걸 그린 거지? 원장의 방 안에 뭐가 있기라도 한 건가?’
아니면 내가 모르는 무슨 다른 이유가 있기라도 한 걸까?
‘씁… 내가 정신 나간 노인이 그린 그림에 너무 의미 부여를 했나. 그래도 궁금하긴 한데… 한번 몰래 들어가 볼까.’
내가 그림을 놓고 깊은 고민에 잠겨 있던 중.
툭-
갑자기 그림 노인이 깃펜을 내려놓더니 침대에 드러눕는다.
‘…음?’
내가 의아해하던 중.
한 병사가 내게 말한다.
“갈프 신관님, 고생 많으셨습니다. 오늘의 일정은 이걸로 끝입니다.”
“…일정이 끝났다고요?”
“그림 노인은 한번 깃펜을 내려놓으면 그날은 더 이상 그림을 그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 일정이 끝났다고 말씀드린 겁니다.”
확실히 병사들의 말대로다.
침대로 올라간 그림 노인은 더 이상 양피지엔 관심조차 보이질 않는다.
“확실히 그렇군요.”
“그래도 만약의 상황을 대비해 몇 명은 방에 남지만, 다른 노인들을 다루는 것에 비하면 우스울 정도로 쉬운 일이죠.”
병사가 문을 열어 주며 말하자.
나는 고개를 끄덕이곤 치료원의 통제실이자 모든 관계자들이 머무르는 단층 건물로 돌아갔다.
‘아직 다 노인들을 관리하고 있는 건가? 조용하네.’
몇몇 병사들만이 뭉개진 갑옷을 힘겹게 갈아입고 있을 뿐.
인적이 드문 내부는 고요했다.
‘흠…….’
그에 나는 주변을 두리번거리곤 원장실 앞으로 다가갔다.
똑똑-
몇 번이고 노크를 해 봐도 안에선 아무런 인기척도 들려오질 않는다.
‘문은 열려 있는 것 같은데……. 아오… 그놈의 그림이 뭐라고.’
나는 열린 문을 보며 잠시 갈등하다가.
‘살짝만 살피고 나올까, 살짝만.’
빠르게 결단을 내리곤 얼른 원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역시 그림이랑 똑같아.’
나는 원장실 한쪽에 있는 동상을 보다가.
원장실 곳곳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이상하네. 딱히 특별한 건 없는 것 같은데.’
하지만 방 안에는 딱히 내 호기심을 자극할 만한 것이 없었다.
‘뭔가 엄청나게 중요한 물건이라도 있을 줄 알았더니… 그림 노인은 대체 왜 그런 그림을 그린 거야?’
그림 노인에게 낚였다고 생각하여 얼른 원장실을 나서려 했으나.
[소드마스터 연구 일지]
책장에 꽂혀 있는 책 한 권의 제목이 나의 발걸음을 멈춰 세웠다.
‘…연구 일지?’
나는 슬며시 책을 꺼내 얼른 내용을 훑기 시작했다.
‘흠… 허어…….’
책 안에는 이제껏 치료원에 온 노인들에 대한 정보가 기록되어 있었는데.
개중에서도 한 문구가 유독 내 눈에 강렬하게 들어왔다.
[…몇 년째 관찰해도 이들의 정신은 좀처럼 나아질 생각이 없다. 온갖 약재들을 먹여 봐도 효과가 없었다. 그나마 신관들이 신성력을 퍼붓거나 최고급 성수를 먹이면 그들의 정신이 잠시나마 멀쩡해진다는 걸 확인했다. 하지만 그건 임시방편일 뿐이다. 그들의 정신은 삽시간에 이상해졌다. 아직까지 근본적인 치료법은 없는 것 같다.]
‘신성력을 주입하면 잠시나마 멀쩡해 진다라……. 왜지? 왜 약재에는 아무런 반응을 안 하다가 신성력에는 반응을 보인 걸까?’
애당초 소드마스터들이 노년에 정신이 나간다는 것도 아직 피부에 와닿지를 않는데.
그들의 정신을 잠시나마 멀쩡하게 만들 수 있는 게 신성력뿐이라니.
‘잘 모르겠네……. 대체 늙은 소드마스터들의 정신이 나간 거랑 신성력이랑 무슨 관계가 있는 거야?’
아무리 고민해도 답은 나오지 않았고.
‘그럼 성기사인 골버린은 멀쩡해야 정상인 것 아냐? 그 양반은 왜 미친 거지?’
도리어 의문만이 든다.
하나 적어도 한 가지는 확실했다.
‘신성력을 주입해서 잠시 멀쩡해진다면, 독방에 있는 골버린한테 신성력을 주입하면 그 양반의 정신도 잠시나마 멀쩡해질 것 아냐? 그럼 그사이에 지하 감옥 비밀 통로에 대한 걸 물어보면 답해 주지 않을까?’
내가 생각을 끝마치고 연구 일지를 제자리에 집어넣던 그때.
“저녁에도 경계를 게을리하지 마! 특히 눈 노인을 잘 관리해. 저번에 그 노인이 난동 부린 걸 잊은 건 아니겠지?”
“명심하겠습니다!”
문 바깥에서 레테 원장과 병사들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다.
‘이런… 연구 일지에 너무 신경을 빼앗겼나…….’
원장실을 나가기에는 늦었기에.
‘망할…….’
나는 숨을 곳을 찾아 미친 듯이 원장실을 돌아다녔다.
덜컥-
곧 원장실의 문이 열리고.
무심히 안으로 들어서는 레테 원장.
“어머, 갈프 신관님?”
그녀가 의자에 앉아 있는 나를 의아하게 바라보며 묻는다.
“여긴 어쩐 일이시죠?”
‘씁… 어쩐다. 그림 노인의 그림이 신경 쓰여서 한번 들어와 봤습니다, 라고 말했다간 의심만 살 거고…….’
나는 맹렬하게 머리를 굴리다가.
스윽-
왼쪽 다리를 오른쪽 허벅지에 올리고 살짝 거만한 눈빛을 보이며 입을 뗐다.
“일단 앉으시죠.”
“…네?”
방에 무단으로 들어온 내가 명령하듯 목소리를 내리깔자.
레테 원장은 황당해하면서도 내 맞은편에 앉는다.
“미카엘 치료원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대충 상황을 살폈으니, 슬슬 본론을 꺼낼 때가 된 것 같아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본론이라니요?”
“프란 신관장님의 전언이 있었습니다.”
“…네?”
레테 원장의 얼굴에 긴장감이 맴돌기 시작하자.
나는 속으로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후… 다행히 믿는 모양이네.’
신관장의 전언?
물론 그딴 건 없었다.
그저 이 사태를 모면하기 위한 나의 변명이었을 뿐.
“신관장님의 전언이라고 하심은…….”
“지금까지 레테 원장께선 저 정신 나간 노인들의 정신을 회복시켜 보려고 했었지요. 하지만 진전은 없었습니다. 그렇지요?”
내가 추궁하듯 묻자.
“그렇죠…….”
레테 원장의 표정이 더 어두워진다.
“그래서 프란 신관장님께서는 저를 이곳에 보내시면서 한 가지 실험을 진행하실 걸 요구하셨습니다.”
“실험이라면…….”
나는 대답 대신 아공간 주머니에서 작은 병 하나를 꺼내어 그녀 앞에 놓았다.
“이건…….”
병을 이리저리 살피던 레테 원장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는다.
“흑마력 포션 아닌가요?”
“잘 보셨습니다. 흑마력 포션이 맞습니다.”
내가 덤덤히 고개를 끄덕이자.
레테 원장의 얼굴에 당황해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설마 실험이라고 하신 게…….”
“예, 이제껏 별다른 소득이 없었으니 약간의 변수를 둬 보자는 게 프란 신관장님의 뜻입니다.”
분명 프란 신관장이 들었다면 게거품을 물었겠으나.
뭐 어떤가?
‘신관장이 어떻게 되건 말건 내가 알 게 뭐야?’
애당초 나는 ‘레바논’이라는 단어와 연관된 이들에게 별로 좋은 기억이 없었다.
그렇기에 나는 빙긋 웃으며 말을 이어 갔다.
“하여 저는 이 흑마력 포션을 환자에게 사용하려고 합니다.”
“…네? 그걸 말인가요? 그 역겨운 흑마법사들이 사용하는 포션인데… 위험하지 않을까요?”
“독은 독으로 제압하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렇기에 해 볼 가치가 있는 것이지요.”
나의 말에 레테 원장은 도무지 지금의 현실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나를 바라본다.
“하지만 그건…….”
“허어! 설마 레테 원장께서는 프란 신관장님의 명령을 거역하실 셈입니까?”
내 엄포에 레테 원장이 황급히 고개를 젓는다.
“그럴 리가요?! 신관장님의 명령이라면 응당 따라야죠. 그럼 그 흑마력 포션은 누구에게 사용하실 건가요?”
“골버린이 신전에서 난동을 부린 건 아시지요? 프란 신관장님께서는 그 형벌로 골버린에게 흑마력 포션을 사용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저를 독방으로 안내해 주시겠습니까?”
“…그러죠.”
레테 원장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자.
‘이게 진짜 먹힐 줄이야…….’
나는 속으로 웃음을 흘리곤 레테 원장을 따라 독방으로 이동했다.
“여기가 골버린이 있는 독방이에요.”
‘호오… 독방이라기에 뭔가 엄청나게 밀폐된 공간일 줄 알았는데 그렇지도 않네.’
독방이라 불리는 건물은 다른 건물들과 별반 다르지 않을 정도로 평범했다.
“독방치고는 조금 평범하군요.”
“그렇죠? 하지만 어쩔 수가 없어요. 가두고 또 가둬도 자꾸 벽을 부수고 나오니까요.”
“그럼 독방도 의미가 없는 것 아닙니까?”
나의 물음에 레테 원장은 애매모호한 표정을 짓는다.
“보통은 그런데 몇몇 노인들은 독방에 넣으면 아주 질겁하면서 얌전해지기도 해요. 대표적으로 골버린이 그렇고요. 그래도 그 노인은 간간이 정신이 돌아오는 것 같기도 하고… 여하튼 그래요.”
“그렇군요.”
나는 그녀의 뒤를 따라 한 방 안으로 들어갔다.
‘음… 독방은 독방이네. 저걸 계속 보고 있으면 없던 정신병도 생기겠어.’
희한하게도 방 안의 모든 벽면들은 백지처럼 새하얬고.
“잘못했어요… 잘못했어요… 잘못했어요…….”
방 가운데에서는 사슬에 팔다리가 속박된 노인이 몸을 잔뜩 웅크린 채 같은 말을 반복하여 중얼거리고 있다.
‘저 상태에서 대화는 제대로 되려나 모르겠네…….’
나는 골버린을 보며 속으로 한숨을 내쉬고는.
고개를 돌려 레테 원장을 보며 입을 뗐다.
“이제 실험을 시작해야 하니 잠시 나가 있으시겠습니까?”
“그러죠.”
레테 원장이 순순히 밖으로 나가자.
‘분명 골버린은 애 같은 정신연령을 갖고 있었지. 그렇다면 좀 많이 상냥하게 대하는 게 좋겠어. 진짜 애를 다루듯…….’
“안녕.”
나는 조심스럽게 골버린 앞으로 다가가 말을 걸었다.
그러자 몸을 웅크리고 있던 노인의 몸이 움찔거리더니.
“누구… 야?”
골버린이 슬며시 고개를 쳐들고 나를 바라본다.
“난 이번에 이곳에 새로 들어온 신관이야. 널 도와줄 사람이기도 하고.”
“난 도움 같은 건 필요 없어! 말만 그렇게 하고 이곳에서 안 내보내 줄 거잖아!”
골버린이 경계하는 모습을 보이자.
나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는 말을 이어 갔다.
“그렇게 경계할 필요 없어. 나는 그저 네 말을 들으러 온 것뿐이니까.”
“내… 말?”
“그래. 전에 네가 지하 감옥과 이어진 비밀 통로가 있다고 그랬잖아. 그렇지?”
나의 물음에 골버린이 가시를 잔뜩 세운 채 소리친다.
“싫어! 싫어! 어차피 말해도 안 믿어 줄 거잖아!”
“아니야. 다른 사람들은 네 말을 안 믿었어도 나는 네 말을 믿어. 그러니까 나한테 알려 줄 수는 없을까?”
“싫어!”
‘하… 애들 찡찡거리는 것도 싫은데 노인네가 저러니 환장하겠네.’
역시 지금의 골버린에선 제대로 된 정보를 얻기 어려워 보인다.
‘좀 위험할 수도 있겠지만, 할 수 없지.’
나는 묶여 있는 골버린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는.
재빨리 그의 몸에 신성력을 흘려 넣기 시작했다.
그러자.
“으으… 으으으으…….”
골버린의 얼굴이 미세하게 변해 가기 시작한다.
‘오오, 효과가 있는 것 같은데?’
웅웅웅웅웅-
내 신성력이 골버린의 몸 안으로 스며들자.
‘이건… 희한하네.’
신기하게도 골버린의 몸 안에 있던 신성력들이 나의 신성력을 쫓아오듯 따라온다.
‘에나 할멈 말대로라면… 기운을 몸 전체에 순환시키라고 그랬었지.’
어깨를 시작으로 나는 골버린의 몸 전체에 신성력을 돌리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툭-
‘…음?’
어느 부근에서부터인가 더 이상 신성력이 흘러 들어가지 않는 느낌이 들었다.
‘저건 뭔데?’
그것은 꼭 잘 흐르는 강에 댐이 세워진 것 같았는데.
문제는 댐이 머리와 목 사이 부근에 설치되어 있단 점이었다.
“흐읍!”
신성력을 계속 불어넣으니 댐 사이로 조금씩 신성력이 흘러 들어가는 것 같긴 한데.
댐에 가로막힌 탓인지 넣는 양에 비해 신성력이 잘 들어가질 않는다.
‘아오, 망할… 저건 대체 뭐야?’
내가 댐을 부술 요량으로 신성력을 확 불어넣자.
“으으…….”
골버린의 입에서 고통스러워하는 신음 소리가 흘러나오더니.
쩌저저저적-
그의 사지를 묶고 있던 쇠사슬들이 팽팽하게 당겨져 벽면이 뜯겨 나가려 했다.
‘씁… 아무래도 더는 안 되겠네.’
저 반응을 봐선 더 댐을 건드렸다간 사달이 나리라.
‘만만찮네…….’
노인의 신성력을 이용했음에도 불구하고 내 신성력은 꽤 많이 소모가 됐다.
‘노인의 정신을 잠시나마 되돌리기 위해 수십 명의 신관들이 달라붙었다고 하니 당연한 거겠다만.’
나는 연구 일지에 적혀 있는 내용을 떠올리다가.
‘가만…….’
불현듯 한 가지 생각을 떠올렸다.
‘이제껏 노인들에 대한 연구는 약재랑 신성력만으로 진행한 거잖아. 그럼 흑마력을 불어넣으면 어떻게 되는 거지?’
레테 원장에게야 흑마력 포션을 쓰겠다고 했었으나.
난 정말 흑마력 포션을 사용할 생각은 없었었다.
‘솔직히 말도 안 되는 거긴 하지만…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잖아?’
그러나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나는 오른팔을 들어 골버린의 비어 있는 어깨를 잡곤 흑마력을 불어넣기 시작했다.
스스슥-
그러자 흑마력이랑 신성력이 합쳐진 애매모호한 기운이 골버린의 몸에 스며들어 간다.
“으으으…….”
‘흑마력이 몸속에 들어갔으니 고통스럽겠지만, 조금만 버텨 보쇼.’
나는 합쳐진 기운들을 모아 다시 두터운 댐을 향해 돌격했다.
사사사삭-
‘…음?’
분명 나는 댐을 부술 작정으로 기운들을 돌격시킨 것인데.
어째선지 내가 보낸 기운들이 바람처럼 댐을 그냥 통과해 버렸다.
‘이게 무슨 상황이야? 아니, 어떻게 넘어간 거야?’
내가 당황하여 기운 불어넣는 걸 중지하려던 찰나.
“으음… 자네는… 누군가?”
골버린의 입에서 아이 같은 말투가 아닌 노인의 무거운 말투가 흘러나온다.
‘정신이 돌아온 건가?’
그에 나는 그의 어깨에서 손을 떼고는 천천히 말을 걸었다.
“정신이 좀 드십니까?”
“여기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골버린.
그는 새하얀 방을 보곤 씁쓸히 웃는다.
“독방인가 보군.”
“여기가 어딘지 잘 아시는 모양입니다.”
내 말에 골버린이 고개를 끄덕인다.
“가끔 정신이 멀쩡해질 때가 있었네. 그보다… 갑자기 정신이 멀쩡해진 걸 봐선… 그쪽은 새로운 신관인 건가?”
“갈프 신관입니다.”
“그런가……. 실험은 지겹도록 받았다고 생각했네만……. 그래서 이번에는 또 뭘 할 셈인가.”
골버린이 체념한 듯 무거운 숨을 토해 내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실험을 하려고 어르신을 깨운 게 아닙니다. 저는 어르신의 부탁을 해결하고자 잠시나마 어르신의 정신을 되돌려놓은 겁니다.”
“…부탁? 내가… 자네에게 부탁을 했단 말인가?”
물론 골버린이 내게 그런 부탁을 한 적은 없다.
그저 내가 좀 더 수월하게 지하 감옥의 비밀 통로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약을 친 것일 뿐이었으니까.
“분명 그리 말씀하셨습니다. 제게 지하 감옥과 연결된 비밀 통로를 찾으라고 말씀하셨었죠.”
내가 단호히 말하자 골버린이 벙찐 얼굴로 나를 쳐다본다.
“내가… 그리 말을 했다고?”
“정신이 온전치 못하실 때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비밀 통로가 어디에 있는지 아시는 겁니까?”
“허어…….”
골버린이 멍하니 있자 나는 다급히 소리쳤다.
“어르신의 정신을 오랫동안 유지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니 얼른 말씀을 해 주셔야만 합니다.”
“…….”
잠시 말이 없던 골버린이 나를 지그시 바라보다가 입을 연다.
“한 가지만 묻겠네. 자네는 교황님 쪽 사람인가? 아니면 성녀님 쪽인가?”
‘뭐야. 이 양반도 파벌이 있었어?’
아무래도 내 대답에 따라 알려 줄지 말지 결정을 하려는 모양일 터.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그의 눈을 보며 포문을 열었다.
“저는 사람을 섬기지 않습니다.”
“…뭐라고?”
“제가 섬기는 이는 오직 레바논, 단 한 분뿐입니다.”
나의 대답이 예상 밖이었던 걸까.
골버린은 한 대 맞은 것 같은 표정을 짓더니 이내 입가에 반달을 그린다.
“으허허허허허, 내가 이상한 질문을 했군. 그렇지! 자네 말이 맞네. 사람을 섬길 게 아니라 레바논 님만을 섬겨야지. 아무렴!”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린 골버린.
그는 곧 근엄한 표정으로 날 보며 말한다.
“대신전 옆에 있는 작은 동산을 찾아가 보게. 동산을 둘러보다 보면 다른 나무들보다 유독 커다란 나무가 한 그루 있을 걸세. 그 밑을 잘 둘러보면 입구를 찾을 수 있을 거네.”
‘대신전 옆의 동산이라고? 접수 완료.’
“그렇군요! 잘 알겠습니다, 어르신. 바깥에 레테 원장이 눈을 부라린 채 기다리고 있는지라, 다음에 또 찾아오겠습니다!”
쾅-
갈프가 헐레벌떡 독방을 나가자.
“그런데 왜 내가 저 어린 신관에게 그런 말을 한 건지 잘 모르겠군…….”
독방에 홀로 남은 골버린이 나지막이 중얼거린다.
“허허허허, 곧 다시 정신도 희미해지겠지.”
과거의 경험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이제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머리에 두터운 안개가 끼기 시작할 것이다.
“이렇게 내 의지로 말을 한다는 게… 이토록 감사하고도 소중한 일이 될 줄이야…….”
채 몇 분 남지 않은 시간 동안.
골버린은 벽을 보며 중얼거림을 이어 나간다.
10분 뒤.
“흠… 이상하군…….”
본래라면 진작 머리에 안개가 꼈어야 하건만.
희한하게도 오늘은 그 시간이 늦는 것 같다.
“레바논 님께서 내게 생각을 할 시간을 더 주신 모양이로군…….”
30분 뒤.
“허어… 이게 대체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군……. 왜 멀쩡한 거지?”
아무리 기다려도 머릿속에 안개가 끼지 않자.
“설마… 방금 그 신관이 내게 뭔가 영향을 미친 건가?”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던 골버린이 벌떡 일어난다.
갑자기 찾아온 변화라고 해 봐야 그 젊은 신관과 이야기를 나눈 게 전부이지 않은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노인의 눈빛이 형형하게 빛나기 시작한다.
“흐으으읍!”
골버린이 사지에 힘을 주곤 몸 안쪽으로 확 당기자.
콰자자자작-
사지를 속박하고 있던 쇠사슬들이 힘없이 떨어져 나간다.
“갈프… 그래, 갈프 신관이라고 했었지.”
독방 문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기는 골버린.
“그 누구도 내 정신을 이토록 오래 유지시키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 신관은… 어쩌면… 내 정신을 고쳐 줄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
몽롱한 현실 속에서 발견한 희망이다.
반드시… 반드시 그 희망을 붙잡아야만 한다.
쾅-
독방의 문이 힘없이 떨어져 나가고.
그 안에서 골버린이 걸어 나가며 나지막이 중얼거린다.
“갈프 신관… 당장 그를 찾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