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
“천년백작? 그게 뭔데?”
[한번 태어나면 천년을 산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에요. 바다의 패왕이라고도 부르고요.]
‘바다의 패왕이라……. 적어도 크기 하나만큼은 패왕급이긴 하네.’
막말로 저 괴물 같은 놈의 등에 달린 섬이 기랄 군도라고 해도 믿었으리라.
‘가만… 저게 머리인 건가?’
내가 섬의 끝에 달린 길쭉한 머리를 내려다보던 그때.
펠기누스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근데 조금 희한하네요…….]
“뭐가?”
[원래 천년백작은 움직이는 걸 좋아하지 않아서 한 자리에 우두커니 머무르는 걸 좋아한다고 하는데, 저 녀석은 좀 유별나네요.]
‘그러니까 가만히 일광욕이나 즐기는 놈이라는 거잖아? 근데 그런 놈이 왜 갑자기 내 앞에 나타난 건…….’
“펠기누스, 조금만 내려가 봐. 좀 더, 조금만 더. 됐어.”
나는 눈을 게슴츠레하게 뜬 채 천년백작의 머리 부분을 주시했다.
‘저건…….’
천년 백작의 머리에 있는 기이한 문양.
분명 난 저걸 본 적이 있었다.
‘콘스 교수가 갖고 있었던 숲의 증표… 그래, 거기에 있던 문양이랑 똑같아.’
그렇다는 건 천년백작 또한 바알의 하수인이라는 것 아닌가?
‘바알 그 망할 새끼가 진짜 날 죽이려고 작정을 했구나…….’
내가 속으로 욕지거리를 뱉던 중.
갑자기 천년백작이 머리를 내가 있는 부분으로 정확히 돌리더니 입을 쩍 벌린다.
웅웅웅-
놈의 입 부근에 모여드는 잿빛의 기운을 보며 나는 생각했다.
‘저 괴물 놈이 뭘 하려고…….’
콰과과과과과과과광-
나를 향해 날아드는 거대한 잿빛 광선을 목도하고서야.
나는 놈이 쏜 것이 브레스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던 그때.
[벌레 같은 놈이 감히 어디다 대고 아가리를 벌려!]
어느새 회색빛이 맴도는 기다란 창을 잡은 펠기누스가 크게 노여워하며.
쏘아져 오는 광선을 향해 힘껏 창을 내던진다.
까가가가가가각-
‘오오?’
확실히 대악마는 대악마인 걸까.
펠기누스의 창이 잿빛 광선을 두 갈래로 찢으며 하늘을 갈랐고.
쇄애애애애액-
광선을 두 동강 낸 창날이 천년백작의 머리통에 정확히 박히려던 그때.
사사삭-
‘…어?’
돌연 펠기누스의 창이 허공에서 홀연히 사라졌다.
[칫…….]
혀를 탁 차며 나를 째려보는 펠기누스.
[신성력이 부족하니까 이렇게 되는 거예요.]
“뭐라고?”
저 말인즉슨, 내 신성력이 부족하여 창날이 중간에 사라졌다는 뜻 아닌가?
‘아니… 이런 미친? 무슨 창 한 번 던졌다고 신성력이 바닥이 났어?!’
나는 어느새 바닥을 보이는 내 신성력을 확인하고는.
펠기누스를 보며 말했다.
“당신은 다 좋은데 연비가 너무 많이 들어.”
[…연비요?]
“그런 게 있어. 그보다 일단은 도망…….”
콰과과과과과과과광-
하지만 천년백작의 입에서 2차 포격이 날아오자.
[후우…….]
펠기누스는 좌측 날개를 덮듯이 포개어 둥근 방패 같은 모양을 만든다.
터어어어어어어엉-
광선이 펠기누스의 날개를 직격한 것일까.
‘크윽…….’
귀에 이명이 들릴 정도의 커다란 굉음에 나는 귀를 틀어막아야만 했다.
이윽고 펠기누스가 나를 슬쩍 내려다보자.
나는 손을 내리고는 그녀의 안위를 확인하고자 했다.
“괜찮아?”
[당연히 괜찮죠. 근데 반동 때문에 좀 멀리 날아온 것 같긴 하네요.]
‘허…….’
펠기누스의 말대로다.
도대체 얼마나 날아온 건지.
저 멀리 보이는 천년백작의 그 거대한 몸뚱이가 작은 섬처럼 보였으니까.
‘하지만 진짜 최악은… 이제 신성력이 거의 없다는 건데…….’
방금 전 펠기누스가 천년백작의 브레스를 몸으로 막아 낸 뒤.
이제 정말 신성력은 쥐꼬리만큼도 남아 있지 않은 상황이었다.
‘망할… 신성력이 다 떨어지면 펠기누스도 역소환될 텐데…….’
어떻게든 펠기누스가 돌아가기 전에 이 상황을 타개해야만 할 터.
[하아… 괴롭네요. 고작 웜급 드래곤보다도 못한 놈을 상대로 방어만 해야 한다니…….]
“네가 역소환되기 전에 천년백작을 죽일 수 있으면 싸우든가.”
[그럼 어렵겠네요. 천년백작을 죽이는 건 쉽지만 당신의 신성력은 이미 바닥났잖아요.]
펠기누스가 정곡을 찔러 오자.
나는 슬며시 말을 돌렸다.
“그럼 안 싸우고 놈을 피해서 기랄 군도까지 돌아가는 건? 가능해?”
[지금 당신의 남은 신성력을 봐선, 앞으로 한 번 정도 더 방어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어렵지 않을까요?]
‘씁…….’
펠기누스의 말이 맞다.
거기다가 어떻게든 기랄 군도로 돌아간다고 해도, 그것도 문제다.
‘내가 기랄 군도로 돌아간다고 해서 천년백작이 돌아갈까? 절대 아니겠지.’
분명 저 괴물 놈은 내 목숨을 끊을 때까지 나를 쫓을 것이고.
기랄 군도, 나아가 검은 대지까지 따라올 것이 분명해 보였다.
[그래서 제가 전에 신성력을 키우라고 조언했었잖아요?]
펠기누스의 말에 나는 속으로 소리쳤다.
‘나름대로 신성력 착즙기를 이용해서 최대한 키운 거야. 그리고 막무가내로 신성력을 늘렸다가 고자가 되면, 네가 책임질 거야?’
거기다가 선행을 하면 신성력이 오른다는데.
검은 대지에서 선행을 베풀기가 좀 쉬운 일인가?
‘신성력을 올리려고 흑마법사들을 때려잡을 수는 없잖아?’
[지금 당신의 신성력으로 제 힘을 다 끄집어내기에는 한없이 부족해요.]
“…나도 알아.”
내가 대답하는 와중.
웅웅웅웅웅-
다시금 천년백작의 입 주변으로 강대한 기운이 모여들기 시작한다.
[어떡할 건가요? 당신이 원한다면 어떻게든 저 섬에 내려다 주고요.]
‘망할…….’
앞은 천년백작, 뒤는 망망대해.
그나마 믿을 구석이었던 펠기누스도 이제 곧 사라진다.
‘나는…….’
“하아…….”
찰나간 고민을 하던 나는 푹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어쩌긴 뭘 어째… 최대한 뒤쪽으로 이동해 줘.”
[뒤쪽으로 가자고요? 섬이랑은 정반대잖아요?]
“그러니까 뒤로 가자는 거야. 한 번은 방어할 수 있다며?”
‘…모 아니면 도다.’
“천년백작이 또 브레스를 날릴 것 아냐. 그럼 그걸 방어하는 동안 또 뒤로 크게 밀릴 거고. 그때 나를 뒤쪽으로 힘껏 던져. 이해했어?”
[…뭐라고요? 진심으로 하는 말인가요?]
펠기누스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날 바라본다.
“그럼 이 상황에 농담을 할까.”
[그건 그렇죠.]
콰아아아아아아앙-
이윽고 천년백작의 입에서 브레스가 터져 나와 다시금 펠기누스의 몸을 정확히 적중한다.
‘아직 아니야. 아직… 아직…….’
쥐꼬리만큼 남아 있던 신성력이 완전히 가뭄이 든 호수처럼 변해 가던 그때.
“지금! 던져!”
나는 펠기누스를 보며 고성을 내질렀다.
그러자.
[계약자가 이 넓은 바다에 빠지는 걸 방관한다는 게 참… 묘하네요. 행운을 빌어요. 그리고 꼭 신성력도 좀 늘리고요.]
쇄애애애애액-
펠기누스는 창을 던지듯 있는 힘껏 나를 던지고는 역소환되어 서서히 자취를 감춘다.
‘후우…….’
한편, 나는 잠시간 하늘을 날다가 서서히 몸이 바다로 기울어지는 것을 느꼈다.
‘쓰읍…….’
점점 내 몸이 바다와 가까워지자.
나는 두 주먹과 발에 흑마력을 불어넣으며 생각했다.
‘바알 그 개 같은 놈… 자꾸 내 일을 초 치는데, 그놈이랑 연관된 건 내가 반드시 다 찾아내서 망가뜨린다. 반드시…….’
풍덩-
* * *
타닥, 타다닥-
“으음…….”
모닥불에서 튀는 불똥들이 잠을 깨운 것일까.
바닥에서 몸을 뒤척이던 남자가 서서히 눈을 뜬다.
‘여긴…….’
잠에서 깬 나의 눈에 먼저 들어온 것은 꽤나 생소한 공간이었다.
기숙사보다 작은 방 안 중심에는 모닥불이 피어오르고 있었고.
벽에 매달려 있는 말린 생선들이 왠지 모르게 시선을 자극한다.
‘사람이 사는 집 같긴 한데… 이상한 곳에 온 건 아니겠지?’
내가 천천히 몸을 일으키려던 그때.
“오, 일어났나?!”
모닥불 앞에 앉아 있던 노인이 내게 말을 걸어온다.
“누구… 십니까.”
“어부라네. 날이 좋아 물고기를 잡으려고 배를 띄웠는데 이상한 게 둥둥 떠다니고 있더군. 그래서 그물로 건졌더니 자네가 걸렸지 뭔가?”
자신을 어부라 칭한 노인이 웃으며 말을 이어 간다.
“레바논 님의 자비에 감사하게나. 내가 발견했으니 망정이지, 큰일 날 뻔했네.”
“…예.”
“그보다 어쩌다 그렇게 된 건가? 해적이라도 만난 겐가?”
늙은 어부의 나긋한 말투에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상선에서 허드렛일을 하던 중에 해적들에게 납치당했었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운이 좋아 놈들의 손에서 도망칠 수 있었죠…….”
“저런…….”
노인은 안타깝다는 듯 혀를 차고는.
조용히 나를 위로한다.
“딱한 일이군. 그래도 너무 걱정 말게. 더 이상 해적이 자네를 위협할 일은 없을 거네. 이곳은 안전해.”
“이곳은… 어디입니까?”
나의 질문에 늙은 어부가 껄껄 웃으며 대답한다.
“레바논 왕국일세.”
‘…그렇겠지.’
혹시나 하고 물어봤지만 역시나다.
‘뭐, 애당초 날아간 방향이 레바논 왕국 쪽이었으니까 당연한 거겠지.’
내가 다시금 아무런 말도 않자.
“그보다 며칠을 누워 있었으니 시장하겠군. 딱히 대접할 건 없고… 이거라도 먹겠나?”
노인은 구운 생선을 올린 낡은 그릇을 내게 내민다.
“…감사합니다.”
노인의 배려에 나는 감사를 표하고는 조촐한 식사를 시작했다.
달그락-
이윽고 생선 뼈만 남았을 때쯤.
나는 노인을 보며 천천히 입을 뗐다.
“그런데 어르신, 제가 이곳에 온 지는 얼마나 된 겁니까?”
“나는 날마다 바다에 나가지. 그리고 자네가 온 뒤로 내가 바다에 네 번 더 나갔네.”
“아아…….”
‘그럼 얼추 4일 정도 지났다는 건데… 레바논 왕국 근처까지 날아왔었던 건가? 아니면 진짜 운이 좋아서 바다를 표류하다가 저 어르신의 눈에 띈 건가? 아…….’
나는 곧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건 지금 난 살아 있다. 그거면 된 거야.’
“돌아갈 곳은 있나?”
‘돌아갈 곳이라……. 돌아가야지, 흑탑으로.’
만약 예전이었다면 절대 돌아가지 않았을 그곳.
하지만 이제는 돌아가야 할 그곳으로 말이다.
“예, 있습니다.”
“다행이군.”
‘근데 어떻게 돌아갈지가 관건인데…….’
일단 천년백작이 있는 이상 바다를 이용하는 건 어렵다.
배를 타고 나간들 다시 천년백작을 만나면 똑같은 일이 반복될 뿐일 테니까.
‘아크 신관장은 아마… 물고기 밥이 됐겠지.’
놈이 탔던 조각배가 뒤집어지던 걸 똑똑히 기억한다.
놈은 분명 죽었을 것이다.
‘그 망망대해에서 어떻게 살아남겠어? 그보다 어떻게 검은 대지로 돌아간다. 가만…….’
나는 문뜩 레바논에 있는 흑마법사 비밀 지부를 떠올렸다.
‘그래… 비밀 지부에 있는 포털을 이용하면 곧바로 돌아갈 수 있는 거잖아?’
물론 비밀 지부가 있는 곳까지 가는 데에 시간은 좀 소요되겠지만.
어차피 레바논 왕국에도 포털들이 있을 테니 포털을 이용하면 금방 갈 수 있을 것이다.
‘의외로 금방 돌아갈 수도 있겠는데?’
내가 곰곰이 생각을 이어 나가던 그때.
끼이익-
갑자기 나무 문이 열리고 다부진 체격의 여인이 집 안으로 들어온다.
“할아버지, 저 왔… 어? 일어났네?”
그녀는 나를 보더니 씨익 미소를 짓는다.
“넌 운 좋은 줄 알아. 우리 할아버지가 안 구해 줬으면 너는 진작 고기밥이 됐을걸?”
“그쯤 하거라. 해적들에게 잡혀 한참을 시달렸다고 하더구나.”
“그래도 제가 틀린 말 한 건 아니잖아요?”
손녀의 말에 늙은 어부는 단호히 고개를 젓는다.
“나는 그저 레바논 님의 도구로써 사용된 것뿐이다. 결국 레바논 님께서 저 청년을 구하신 게지.”
“또, 또 그놈의 레바논, 레바논! 지겹지도 않아요? 대체 레바논이 우리한테 뭘 해 줬다고 그래요? 입에 풀칠하는 것도 힘들어 죽겠는데, 이씨…….”
손녀가 더 이상 듣고 싶지 않다는 듯 손사래를 쳤으나.
늙은 어부는 아랑곳 않고 말을 이어 간다.
“그런 말은 꺼내지도 말거라. 레바논 님께서 우리를 지켜 주시니 이렇게라도 먹고사는 거란다.”
“어휴… 답답해 죽겠네.”
손녀는 복장이 터지는지 가슴을 치다가.
어딘가 불만 가득한 눈으로 나를 보며 말한다.
“여하튼 그쪽 사정이 딱한 건 알겠는데, 우리 사정도 썩 여의치 않아요. 그러니까 몸이 괜찮아지는 대로 어디든 가 줬으면 좋겠어요. 제 말 무슨 말인지…….”
“마린!”
“왜요? 우리 먹을 것도 부족한데 그럼 외지인 한 명까지 데리고 살자는 거예요?”
“어허!”
노인이 호통을 치자.
나는 그들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전 괜찮습니다. 손녀분의 말이 아주 틀린 말도 아니고요. 그저 도와주신 것만으로도 전 충분히 감사하고 있습니다.”
“어머, 그래도 아주 되먹지는 않았네.”
“허어, 그렇게 말을 해도……. 미안허이. 입은 걸걸해도 그래도 마음은 따뜻한 아이라네.”
노인의 말에 나는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하, 어르신의 핏줄이 어디 가겠습니까?”
“후우… 그렇게 말해 주니 고맙구만.”
“그보다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혹시 이 근방에 포털이 있는 성이 있습니까?”
나의 물음에 어째선지 조손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진다.
“포… 털?”
“아아, 포털? 그… 막… 다른 곳으로 휙휙 이동하는 걸 말하는 거지? 할아버지는 평생 이곳에서 안 나가셔서 잘 모르실 거고.”
“네, 그 포털이 맞습니다.”
“근데 미안, 나도 이야기만 들어 봤지 잘 몰라. 근데 포털은 왜?”
마린이 의구심을 보이자 나는 덤덤히 대답했다.
“포털을 좀 이용하려고 합니다.”
“…포털을? 네가? 그거 이용하려면 돈이 엄청나게 든다고 하던데. 우리 같은 어부들은 평생을 일해도 못 벌 돈 말이야. 그런데 그걸 네가 어떻게 이용하겠다는 거야?”
“마린, 제발 손님을 좀 더 정중하게 대하려무나.”
“어휴…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거예요? 돈도 없는데 포털을 이용할 순 없을 것 아니에요! 전 질문도 못 해요?”
할아버지의 타박에 심통이 난 걸까.
마린이 벌떡 일어나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려던 그때.
“오오, 계셨습니까?”
신관으로 보이는 배불뚝이 남자가 문 앞에 선 채 마린을 내려다본다.
“또 뭐예요. 저희는 이제 기부할 돈 없어요.”
마린이 짜증스럽게 소리치자.
신관의 입가에 씨익 미소가 걸린다.
“아니요. 그럴 리가 없습니다. 당신들은 분명 갖고 있을 겁니다. 맥기!”
신관의 외침에 경갑옷을 입은 기사가 우악스럽게 집 안으로 들어오더니.
퍼억, 퍼억-
갑자기 칼을 들어 나무 바닥을 뜯어내기 시작한다.
“그만! 그만해요, 좀!”
보다 못한 마린이 고함을 지르며 기사를 말리려 했으나.
퍼억-
“아아악!”
“마린!”
기사의 주먹질에 마린은 뒤로 나동그라지고 만다.
그사이 계속 작업을 이어 나가는 기사의 칼에 무언가가 걸리자.
“엔돈 님! 찾았습니다!”
기사는 곧 신관의 손에 작은 가죽 주머니 하나를 올려놓는다.
“자아, 자! 이것 보시지요! 레바논 님께 향해야 할 제물이 땅 깊숙이 처박혀 있었다니…….”
“야 이, 개 같은 놈들아! 그건 우리 할아버지 약재료 살 돈이라고! 내놔! 내놓으라고!”
눈이 뒤집힌 마린이 절규하듯 소리 지르며 신관에게 달려들었으나.
“아아아아악!”
그녀는 다시 기사의 손찌검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내놔… 내놓으라고…….”
마린이 눈물을 흘리며 손을 뻗어 보지만.
힘이 없는 외침이 저들의 귀에 닿을 턱이 없었다.
“레바논 님을 향한 여러분의 사랑 그리고 헌신, 잘 받았습니다. 분명 레바논 님께서도 기뻐하실 겁니다. 근데… 저 사람은 누굽니까? 못 보던 사람인 것 같은데…….”
그 와중, 신관이 게슴츠레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자.
늙은 어부가 황급히 말한다.
“제 먼 친척입니다. 조만간 다시 여행을 떠날 몸이지요.”
“…그래요? 흐음… 뭐, 좋습니다. 자자, 맥기! 다음 집으로 가지요.”
쾅-
수금을 끝마친 신관 무리가 사라지자.
“빌어먹을, 빌어먹을! 왜! 대체 왜 우리만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건데!”
마린은 땅을 치며 울부짖다가 할아버지를 노려본다.
“할아버지… 이래도 레바논이 우리를 지켜 준다고 생각하세요? 이래도 레바논이 우리를 사랑하는 거냐고요!”
“…….”
그에 늙은 어부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고.
나는 슬며시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움직여 봤다.
‘후우… 살짝 움직이는 게 거슬리는 느낌이긴 하지만, 이 정도면 나쁘진 않네.’
며칠 동안 누워 있었던 것치곤 내 몸 상태는 나쁘지 않았기에.
나는 조심스럽게 어부의 집을 나갔다.
‘호오… 진짜 어촌이었네.’
늙은 어부의 집 주변으로는 통나무집들이 자리했고.
사이사이마다 그물과 작살 따위가 어수선하게 널브러져 있었다.
‘이렇게만 보면 꽤나 평화로운 어촌 같은데, 저것만 빼면…….’
“오오, 계셨습니까? 레바논 님을 향한 당신의 사랑을 확인하러 왔습니다.”
옆집에 가서 똑같은 짓을 반복하고 있는 신관 무리를 보며 나는 혀를 찼다.
‘대단한 놈들이네. 빼먹을 게 없어서 어부들의 간을 털어먹냐.’
나는 그 모습을 멀찍이서 지켜보다가 불현듯 한 가지 생각을 떠올렸다.
‘그래, 나름대로 도움을 받았으니 조금 도와줄까. 어떻게 보면 이것도 선행이 되지 않을까?’
부패한 신관들의 부조리함도 바로잡고.
내 신성력도 올린다.
나름대로 괜찮은 방법인 것 같기도 했으나 솔직히 고민인 점도 있었다.
‘근데… 내가 평생 이곳에 있을 것도 아닌데 괜히 저놈들을 건드렸다가 더 피해만 주는 것 아냐?’
하인 시절에 하인들 처우를 개선해 주겠다고 학생들 몇이 나섰다가.
도리어 하인들 처우가 더 열악해졌던 옛 기억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도와주는 건 쉽지만 책임을 지는 건 또 다른 문제긴 해. 흠… 그래도 빚지고 떠나는 것도 좀 그렇고. 책임을 안 지면서 도와줄 방법은 없나?’
나는 수탈당하는 어촌의 주민들을 보며 깊은 고민에 잠겼다.
“자자, 맥기! 돌아갑시다!”
그러던 중 신관 무리가 수탈한 물건들을 수레에 가득 싣고 자리를 뜨려 하자.
‘흐음…….’
나는 멀찍이서 그들의 뒤를 쫓았다.
이윽고 그들이 작지만 반듯한 신전 안으로 들어가자.
나는 게슴츠레한 눈으로 신전을 응시했다.
* * *
다음 날 아침.
‘좋아. 준비는 끝났다.’
나는 예전 그라트니 요새에서 이용했던 사제 의복으로 갈아입고는 신전을 찾았다.
“계십니까?”
내가 힘껏 문을 두드리자.
“누구십니까?”
어제 봤던 엔돈 신관이 부스스한 모습으로 문 안에서 걸어 나온다.
“어… 그쪽은… 마린 여형제의 친척이었던가요?”
“하하, 아닙니다. 그건 제가 신분을 숨기기 위해 잠시 그분들에게 부탁을 한 것뿐이지요. 정식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갈프 신관입니다.”
나의 말에 엔돈 신관의 얼굴에 물음표가 걸린다.
“갈프… 신관이요?”
“이곳저곳 떠돌아다니며 레바논 님의 뜻을 전파하는 떠돌이 신관이지요.”
스스슥-
내가 슬쩍 손에 신성력을 응집시켜 보이자.
“오오오! 갈프 신관님이셨군요! 하하하하하, 에크만 신전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나를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보던 엔돈 신관의 태도가 급속도로 바뀌었다.
“그런데 갈프 신관님께서 이 작은 신전에는 어쩐 일이신지…….”
“레바논 님께서 저를 이곳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예?”
내 말에 엔돈이 멍하니 나를 바라보던 중.
옆에 있던 기사가 껄껄 웃기 시작한다.
“레바논 님께서 무슨 이런 깡촌에 신관님을 인도한단 말입니까?”
“어허, 맥기! 조용히 하게! 그래서, 레바논 님께서 갈프 신관님을 이곳으로 인도하셨단 말씀이시지요?”
“그렇습니다. 레바논 님께서는 제게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핍박받는 어부들을 구제하라, 라고 말입니다.”
나의 말에 신관과 기사의 눈동자가 흔들거린다.
“그게 무슨…….”
“그래서 저는 지금부터 레바논 님의 뜻을 그대로 실천할까 합니다.”
“…예?”
엔돈 신관이 어벙한 얼굴을 한 채 되묻자.
나는 싱긋 미소를 짓고는 엔돈의 얼굴에 냅다 주먹을 휘둘렀다.
“케헥!”
엔돈 신관이 힘없이 바닥을 구르자.
챙-
“갈프 신관! 이게 무슨 짓입니까!”
맥기가 칼을 빼 들며 소리친다.
“무슨 짓이라니요?”
그에 나는 더없이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주먹을 쳐들었다.
“이것이 레바논 님의 뜻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