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
“방금 그건…….”
“결국 말투라는 건 연기하기 나름이라는 거지요. 이제 좀 알았나요?”
“근데 네년… 너는 나를 본 적이 없을 터인데 어떻게 나를 알고 있는 거지?”
그러자 진물이 흐르는 얼굴 위로 섬뜩한 미소가 떠오른다.
“그야 갇혀 있어도 그분께서 내게 세상의 모든 것들을 환상으로 보여 주시니까.”
“레바논 님께서 도와주신…….”
“닥쳐!”
철창 안에서 벼락같은 일갈이 터져 나오자.
“괜찮으십니까?!”
멀찍이 뒤로 물러나 있던 찰스가 허겁지겁 달려온다.
“괜찮다. 내 안위를 걱정할 필요 없으니 죄인과 대화를 나눌 수 있게 자리를 비켜 줬으면 한다.”
“아, 예!”
찰스가 다시 물러나자.
“다시는… 다시는 그 역겨운 년의 이름을 내 앞에서 꺼내지 마……. 알아들었어?”
“전대 성녀님이라는 말은 역시 거짓이었나 보군. 진짜 성녀님이었다면 그런 반응을 보였을 리 없었을 거다.”
에밀라의 말에 철창 너머에서 픽 비웃음이 흘러나온다.
“진실을 모르니 그런 얼간이 같은 소리도 할 수 있는 거지.”
“…….”
죄인이 어느 정도 감정을 추스른 듯하자.
에밀라는 무심히 말을 이어 갔다.
“일단 네가 정말 전대 성녀님이라는 가정하에 질문을 하겠다. 그럼 왜 당신은 이곳에 갇힌 거지?”
“그야 내가 그 개 같은 년을 배신했으니까.”
그녀가 레바논이라는 이름에 격한 반응을 보였던 걸로 봤을 때.
아마도 그녀가 말하는 ‘개 같은 년’은 레바논 님이 분명하리라.
“이해할 수가 없군……. 네가 정말 전대 성녀님이었다면 누구보다 그분의 사랑을 받으며 살았을 텐데.”
“나는 전혀 원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년은 사랑이라는 명목하에 나의 모든 것을 겁박했는데, 그게… 사랑이라고?”
죄인이 이를 갈며 증오감을 표출했으나.
에밀라는 도저히 그녀를 이해할 수 없었다.
“성녀님에게 있어 그분의 사랑은 최고의 축복일 텐데, 넌 역시 가짜인 모양이군.”
“아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한참을 미친년처럼 웃던 죄인이 뚝 웃음을 그치곤 떨리는 목소리로 말한다.
“나도 처음에는 그런 줄 알았지. 성남이 돼서 왕국의 정점에 올라 사람들의 존경과 경탄을 받으며 살 거라고 생각했었다.”
“…성남?”
성남이라니?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그런데… 그런데! 그년은 나를 바꿔 놨어! 남자였던 나를… 제 마음대로 바꿔 버렸다고!”
“…미쳤군.”
황당하기 짝이 없는 말에 에밀라는 혼란스러워하며 그녀를 바라봤다.
“내가 미쳤다고? 아니, 진짜 미친 건 그년이다. 날 강제로 여자로 만든 그년이라고! 그런데도 내가 왜 그년을 따라야 할까?”
“…….”
도대체 어디까지가 진실인 걸까.
아니, 저 죄인의 말이 진실이긴 한 걸까?
그저 미치광이의 외침에 불과한 건 아닐까?
“그래서 난 나를 원래의 모습으로 회복시켜 주겠다는 바알과 손을 잡았다. 결과야 이 꼴이 됐지만.”
전혀 알지 못했던 이야기의 연속에 에밀라는 지끈거리는 이마를 부여잡는다.
“…네 말이 전부 진실이라고 가정하지. 그럼 이단인 네가 어떻게 살아남은 거지?”
전대 성녀가 정말 바알의 신봉자가 된 것이라면 응당 죽였어야 함이 맞지 않은가?
그런데 어째서 그녀는 아직까지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던 걸까.
“그야 내 머릿속에 있는 정보들 때문이지. 바알을 섬기는 신도들의 근거지 위치가 전부 내 머릿속에 있으니까.”
“…….”
에밀라가 복잡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던 중.
“단장님! 이제 올라가셔야 할 시간입니다!”
멀찍이서 찰스가 다가오며 말한다.
“…다음에 다시 오지.”
“다음? 글쎄… 다음은 없을 것 같은데?”
죄인이 히죽 웃으며 말꼬리를 높이자.
에밀라가 의아해하여 묻는다.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군.”
“설마 이곳에 찾아온 사람이… 너 한 명뿐이었을까? 이상하지 않아? 왜 사람들이 내가 이곳에 갇혀 있다는 걸 모를까? 조금만 관심이 있다면 알 수 있는 사안일 텐데.”
“…….”
죄수의 말에 에밀라는 잠시간 침묵하다가.
홱 등을 돌려 찰스를 보며 말한다.
“돌아가지.”
“예!”
점점 사라져 가는 그들을 보며.
헬렌은 나지막이 중얼거린다.
“얼간이 같은 놈들…….”
* * *
찰스와 함께 지상으로 올라온 에밀라.
“…….”
하지만 감옥 입구에 있어야 할 성기사들은 보이지 않았고.
어째선지 이단 심문관들과 대신관 중 한 명인 자스밀이 서 있었다.
“대신관님이 이곳에는 어쩐 일이신 겁니까.”
“오오, 에밀라. 이곳에 이단이 있다는 연락을 받고 황급히 달려왔답니다.”
“…이단이라니요?”
에밀라가 눈살을 찌푸리자.
노파가 무언가를 꺼내어 들어 에밀라에게 보여 준다.
“이건 추잡한 바알의 신상과 바알의 추종자들과 연락을 주고받았던 양피지들입니다.”
“…그렇군요.”
“모두 당신의 방에서 나온 것들이지요.”
자스밀이 싱긋 웃어 보이자.
“…….”
에밀라는 뭔가 일이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걸 느꼈다.
“그게 제 방에서… 나왔다는 겁니까?”
“당신에게 거는 기대가 컸는데… 참으로 유감이에요.”
하나 유감이라는 말과 달리 자스밀의 표정은 차갑기 짝이 없었다.
“대체 전대 성녀가 뭐라고 제 입을 틀어막으려는 겁니까.”
“이미 그녀에게서 다 들었으면서 모르는 척하려는 건가요? 안타깝네요. 우리엘.”
자스밀의 말이 끝나자.
그녀의 등 뒤로 열두 장의 새하얀 날개가 뻗어 나온다.
어느새 기다란 백색의 창을 손에 쥔 자스밀.
“허…….”
레바논을 섬기는 열둘의 대천사.
개중에서도 지혜를 담당한다는 우리엘의 창이 자신을 겨누자.
에밀라는 헛웃음을 흘리다가 천천히 검을 빼 든다.
“이게 충성의 대가입니까?”
“레바논 님의 허락 없이 심연을 들여다보려 한 대가이지요.”
그 말을 끝으로 그녀들 사이에선 정적만이 흘렀고.
탁-
두 여인의 신형이 자리에서 사라지기 무섭게.
콰아아아아아아앙-
커다란 빛무리가 일며 굉음이 그 자리를 덮었다.
* * *
한 달 뒤.
‘흠…….’
나는 원장실의 의자에 앉아.
제른이 보낸 서신을 읽어 보고 있었다.
‘어째 잘 정착한 모양이네.’
도망친 제른 부탑주가 정착했다는 곳은.
다름 아닌 과거 그의 유배지로 정해졌던 에린도르섬 인근 지점이었다.
‘검은 대지 최북단으로 갈 줄이야. 안 덥나? 뭐… 그래도 그쪽이 사람이 적으니 운신하는 데 편하긴 하겠네.’
그래도 제른 나름대로 심사숙고하여 결정한 것일 터.
나는 제른이 보낸 서신을 계속 읽다가 침음을 흘렸다.
‘흠… 인부를 보내 달라고?’
정착은 잘 했는데 언데드를 제작하려면 사람 수가 더 필요하여.
믿을 만한 사람들을 보내 달라는 게 제른의 요구 사항이었다.
‘하긴… 인부들이 있어야 언데드들도 빨리 만들지. 근데 인부들을 어디서 구하지?’
일단 멀쩡한 흑마법사들은 안 된다.
그들에게 있어 제른은 반역자에 불과했으니까.
‘어쩔 수 없이 노예를 써야 하나……. 아니면 나가란 탑주에게 부탁을 좀 해 볼까?’
지금 제른의 생존 여부를 알고 있는 사람은 나가란 탑주, 레논 부탑주 그리고 나까지 딱 세 명이었다.
‘아무리 제른 부탑주를 이용하려고 해도 나가란 탑주의 반발을 사면서까지 이용할 이유는 없었으니까.’
그렇기에 나는 나가란 탑주에게 제른을 살려 줬다는 사실을 알렸었다.
‘탑주가 그렇게 순순히 승낙할지는 몰랐지만.’
탑주는 오히려 나의 배포를 칭찬했다.
또한 다른 흑마법사들에게 언데드 제작을 걸리지 말라는 조언과 더불어.
제른과 잘 협업하여 언데드를 제작해 보라는 말까지 남겼었다.
‘의외로 레논 부탑주도 나가란 탑주랑 비슷한 반응을 보였었고……. 그래, 그럼 레논 부탑주에게 가서 입이 무거운 사람들을 좀 내어 달라고 해 볼까?’
마침 레논 부탑주를 비롯하여 레바논에 언데드를 납품하러 갔던 흑마법사들이 모두 돌아왔으니 이야기를 꺼내기도 좋을 것이다.
내가 서신을 보며 생각에 잠겨 있던 그때.
똑똑-
“흑남님, 안에 계십니까?”
바깥에서 볼드 학장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들어와.”
나는 서신을 내 아공간 주머니에 넣고는 볼드를 맞이했다.
“무슨 일이야?”
“레바논 왕국의 비밀 지부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저희에게는 좋은 일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만, 최근 레바논 왕국에서 좀 의아한 일이 벌어졌다고 해서 말입니다.”
“좋은 일?”
“레바논 왕국의 소드마스터 에밀라가 사망했다고 합니다.”
“…뭐?”
볼드 학장의 말에 나는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에밀라가 죽었다고? 근거 없는 소문은 아니고?”
“최근 대신전 안에서 큰 장례식이 있었다고 한 걸 봐선 진짜인 것 같습니다. 그녀의 시체를 본 사람들도 있다고 합니다.”
“흠… 소드마스터나 되는 양반이 갑자기 죽었다고? 허 참… 죽은 이유가 뭐라는데?”
내가 의심하는 눈치를 보이자.
볼드 학장은 다시금 양피지를 훑곤 단호히 말한다.
“소문으로는 앓고 있던 지병이 악화되어 죽었다고 합니다.”
“지병이 악화돼서 죽었다고? 그럴 리가…….”
적어도 내가 본 에밀라는 지병으로 죽을 여인이 아니었다.
“소문도 소문 나름이지, 인간의 영역을 넘어선 소드마스터가 지병으로 죽었다고?”
“저도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은 합니다. 아마도 내란이 있었다고밖에 생각이 안 되지만 일단 저쪽의 입장은 그렇습니다.”
그에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 여자가 정말 지병으로 죽었을 리는 없을 텐데……. 뭔가 내가 모르는 비사가 있는 건가? 성녀를 호위하다가 죽은 건가? 아니면 레바논 쪽에서도 내분이 일어난 건가?’
나는 여러 가지 상황들을 가정하며 그녀가 죽은 이유를 생각해 봤으나.
도무지 그녀가 죽을 만한 이유가 떠오르질 않았다.
그러던 중 불현듯 한 가지 가정이 나의 머릿속을 스쳐 갔다.
‘혹시 에밀라가 전대 성녀랑 접촉했다가 죽은 거라면……. 아니야. 아무리 전대 성녀랑 접촉했다고 해도 그렇지, 국가에 엄청난 전력이 되는 소드마스터를 죽인다고? 이건 말이 안 돼.’
그럼 도대체 그녀는 왜 죽은 것이란 말인가?
“뭔가 소문 중에 또 다른 말은 없었어? 예를 들어… 에밀라가 지하 감옥에 갔다든가…….”
내가 말꼬리를 흘리며 볼드 학장을 바라보자.
볼드 학장은 놀라워하며 말한다.
“확실히 그런 소문도 있긴 했습니다. 혹시 이미 소문을 들으셨던 겁니까?”
“…그래?”
‘설마 진짜로 전대 성녀랑 접촉했던 건가?’
만약 내가 그녀들에게 심어 두었던 의심의 씨앗이 이러한 결과를 만들어 낸 것이라면.
도대체 에밀라는 왜 죽은 것이란 말인가?
‘설마… 저쪽에서 입막음이라도 하려고 한 건가? 결코 알려져서는 안 될 사실을 알게 됐다든가…….’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다시 입을 뗐다.
“성녀에 대한 이야기는 없었나?”
“예. 성녀에 대한 소문은 없었습니다.”
“…그래?”
‘그럼 성녀는 관여하지 않았다는 거고, 에밀라의 독단적인 행동이라고 봐야겠네.’
에밀라가 나의 말에 의문을 품고 지하 감옥에 갔다가 전대 성녀를 대면했다.
그리고 그녀에게서 은폐해야만 하는 대답을 듣고 제거당했다면.
에밀라의 갑작스러운 죽음도 어느 정도 말이 되긴 한다.
‘흠…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가정일 뿐이라… 확신을 못 하겠네.’
내가 깊은 고민에 잠겨 있던 그때.
갑자기 볼드 학장이 무언가 생각난 게 있는지 얼른 내게 말한다.
“아, 그리고 아크 신관장을 목격했다는 정보가 들어왔습니다.”
“…그래? 목격한 곳이 어디라는데?”
“케이탈 요새 부근에서 그를 봤다고 합니다.”
‘케이탈 요새? 그 늙은이… 포털을 타려고 했구나. 하지만 어쩌나, 진작 막아 뒀는데.’
그럼 이제 그 늙다리 신관장이 검은 대지를 벗어나기 위해 가야 할 곳은 한 곳뿐일 터.
“케이탈 요새에 연락해서 당장 기랄 군도에 있는 배들 전부 통제하라고 그래.”
“그렇잖아도 이미 해적들에게도 공문을 보냈다고 합니다.”
“그래? 일 처리 빠르…….”
나는 무심히 고개를 끄덕이다가.
‘가만… 그러고 보니 전에 아크 신관장한테 전대 성녀 이야기를 꺼냈을 때 뭔가 알고 있는 눈치였지.’
불현듯 한 가지 옛 기억이 떠올라 눈을 부릅떴다.
‘만약 아크 신관장을 붙잡아 심문한다면 에밀라의 죽음에 대해서도 짐작할 수 있을지 몰라.’
레바논 왕국이 소드마스터를 죽이면서까지 숨기려고 했던 정보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나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채비를 갖추었다.
“나가시는 겁니까?”
“그래. 아무래도 내가 직접 아크 신관장을 추격해야겠다.”
“…예?”
화들짝 놀라 나를 바라보는 볼드 학장.
“왜 놀라?”
“파멸 병단이 놈을 쫓고 있는데 굳이 흑남께서 나서실 필요가 있나 해서 말입니다.”
“나도 원래 움직일 생각이 없었는데 생각이 바뀌었어. 기랄 군도로 가야겠다.”
* * *
5일 뒤.
뿌우우우우우우-
뱃고동 소리가 울리는 커다란 항만 주변으로 크고 작은 배들이 정박할 뿐.
그 어떤 배도 출항할 기미는 보이질 않는다.
“화물 내려!”
“빨리빨리 움직여!”
곳곳에서 해적들의 고함 소리가 울리는 가운데.
턱-
‘사람들 많네.’
나는 배에서 내려 눈앞에 펼쳐진 정경을 바라봤다.
해적들의 손에 줄줄이 끌려가는 노예들을 비롯하여.
어깨에 커다란 가죽 주머니를 이고 어디론가로 향하는 해적들을 보며 난 속으로 감탄했다.
‘분명 똑같이 사람 사는 곳인데 확실히 흑탑이랑 느낌이 달라.’
“흑남님, 이곳이 기랄 군도입니다.”
나를 따라온 제3 악마 병단의 단장 케서린을 보며 난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이곳 어딘가에 죄인이 숨어 있을 거다. 반드시 놈을 찾아내야만 한다!”
“예!”
제3 악마 병단장 케서린을 비롯하여 휘하 흑마법사들이 대답하던 중.
저벅, 저벅-
해적들로 보이는 일단의 무리가 나의 앞으로 걸어온다.
“혹시… 흑남님이십니까?”
개중 머리가 희끗한 애꾸 노인이 나를 보며 정중히 인사를 해 온다.
“그래. 이분이 흑남이시다. 예의를 갖춰라.”
나 대신 케서린이 대답하자.
“크허허허허허!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저는 이 기랄 군도를 통치하고 있는 팔칸이라고 합니다.”
애꾸 노인이 호쾌하게 웃으며 누런 이를 드러내 보인다.
“반갑군, 랄프다.”
“흑탑에서 보낸 공문은 잘 봤습니다. 죄인을 쫓고 계시다고요?”
“맞다. 아크 신관장이라고 흑탑에서 내란을 도모한 죄인이지.”
나의 말에 한쪽 눈을 휘둥그렇게 뜨는 팔칸.
“내란이라니… 예나 지금이나 신관 놈들은 역하기 짝이 없군요!”
“혹시 놈의 위치나 정보 같은 건 없나?”
“아직은 없습니다만 이쪽에서도 죄인을 찾고자 애쓰는 중입니다. 지금 군도에 머무르고 있는 놈들을 일일이 조사 중이지요!”
팔칸의 말에 나는 희미한 미소를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협조적이군.”
“으허허허허허! 놈이 빨리 잡혀야 저희도 다시 약탈을 하러 다닐 수 있지 않겠습니까? 지금 배들이 죄다 항만에 묶여 있는지라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확실히 해적들 입장에선 손해가 크긴 하겠어.’
배들을 띄우는 게 저들의 생업일 텐데.
아크 신관장을 잡고자 저들의 생업을 막아 버렸으니 말이다.
“흑탑은 기랄 군도의 협조를 결코 잊지 않을 거다. 죄인만 잡으면 바로 항만의 봉쇄를 풀어 주겠다고 약속하지.”
“어이쿠! 그런 말씀을……. 이 늙은이는 그저 말씀만으로도 감사할 따름입니다. 으허허허허!”
팔칸이 호탕하게 웃으며 내게 감사를 표하던 그때.
뿌우우우우우-
“뭐, 뭐야! 야! 멈춰! 멈추라고! 어어?! 너희 뭐 하는 거야!”
갑자기 항만 쪽에서 거친 고함이 울려온다.
“무슨 일이 있는 모양이군.”
“으허허허허! 별일 아닐 겁니다. 워낙 말투가 거친 놈들인지라 저런 일은 흔히…….”
내 말에 팔칸은 여유롭게 대답하며 항만에 눈길을 돌렸고.
“저, 저 새끼들이…….”
팔칸의 표정이 뜨악해졌다가 점점 분노로 새빨개진다.
“이 새끼들 분명 내가 지금 배 띄우면 목에 밧줄을 걸겠다고 했는데……!”
어째선지 항만에 가만히 있어야 할 배들 중 몇 척이 동시에 출항을 시작한 탓이었다.
“유리통 가져와! 빨리!”
노여움에 눈이 뒤집어진 팔칸이 고함을 지르자.
해적 한 명이 헐레벌떡 그의 앞에 기다란 나무통을 대령했다.
‘저건… 망원경?’
내가 팔칸의 손에 들린 유리통을 보며 생각하던 중.
척-
팔칸은 유리통을 한쪽 눈에 대고는 출항한 배들의 면면을 살핀다.
“귀머거리 난스, 반월의 행크, 쌍칼의 소크? 이놈들이 내 말을 어길 리가 없는데…….”
‘흠… 이상하네. 아무리 생업이 있다고 해도 어기면 처형하겠다는 걸 무시하고 배를 띄웠다고?’
뭔가 이상하다.
아무리 해적들이 제멋대로 사는 놈들이라고 해도.
자신의 터전을 버리면서까지 배를 띄우지는 않을 터.
“잠깐 줘 봐.”
“엇?!”
나는 팔칸의 손에 들려 있던 망원경을 뺏어 들어 출항한 배들을 면밀히 살폈다.
그러던 중.
‘저건…….’
나는 선박의 돛마다에 커다란 글귀들이 적혀 있는 걸 발견할 수 있었는데.
[허허, 한발 늦으셨습니다.]
그 글귀는 누가 봐도 명백히 아크 신관장이 적어 놓은 것이었다.
‘이 사이비 새끼가…….’
하지만 어처구니없는 것도 잠시뿐.
‘그런데…….’
나의 마음에 한 가지 의문이 피어올랐다.
‘사이비 신관장 놈은 왜 저렇게 눈에 띄는 짓을 한 거지?’
마치 내가 그의 도발에 넘어가 주길 바라는 것처럼 말이다.
“…….”
나는 잠시 고민에 잠겨 있다가 팔칸을 보며 입을 뗐다.
“혹시 기랄 군도에 항만이 더 있나?”
나의 물음에 팔칸이 놀란 듯 날 바라본다.
“그게… 이곳 말고도 북서쪽 부근에 항만이 하나 더 있긴 합니다. 다만 레바논 해병들의 탄압이 심해져서 그쪽은 잘 사용하고 있지 않습니다.”
“거기다.”
“…예?”
팔칸이 당황하여 묻자.
나는 손을 까딱이며 말했다.
“거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