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
“흑남님! 치세요!”
‘허 참… 하인이 극한 직업이긴 해.’
내가 옛정을 생각하여 그냥 망치로 드레이크의 머리를 가볍게 툭툭치는 사이.
“자, 던지세요!”
투드드드득-
“끄아아아악!”
“자, 5점! 3점!”
옆에서는 하인들을 이용한 과녁 맞히기가 진행 중이었다.
‘아… 저것도 진짜 더럽게 아팠지…….’
아무리 다트가 뭉툭하다고 해도.
학생들이 전력으로 던진 다트에 얻어맞는 건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그… 미안하게들 됐다. 내가 이상한 걸 고안해서…….’
뭉툭한 다트에 얼굴을 맞은 하인이 비명을 지르자.
나는 이 상황이 그저 묘하고 또 한편으로는 웃기기도 하여 실없는 웃음을 흘렸다.
그러던 중.
“여기서 뭐 해?”
등 뒤에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나는 슬쩍 고개를 돌렸다.
‘레나구나.’
“그냥 구경 중이었지. 시험은 잘 봤어?”
“다른 것들이야 그럭저럭 본 것 같은데, 성마법 방어학은 모르겠어. 설마 교수가 갑자기 도망칠 줄 누가 알았겠어?”
“뭐, 그 수업은 채점에서 제외하겠지.”
내가 덤덤히 대답하자.
레나는 화제를 돌리려는 듯 내가 들고 있던 나무망치를 가리키며 말한다.
“근데 망치에 힘이 하나도 없는 것 같던데. 괜찮아?”
“아, 그게…….”
“아니면 하는 방법을 잘 몰라서 그러는 거야? 이리 줘 봐, 내가 보여 줄게.”
레나는 나무망치를 낚아채어 가더니.
팔을 드높이 쳐들었다가 하인의 머리를 노리고 힘껏 내려친다.
콰작-
“끄어어어어억!”
망치에 머리를 정통으로 맞은 하인의 눈에 흰자위만이 남자.
“마, 망할…….”
“후욱, 후욱, 후욱, 후욱!”
위아래로 움직이는 하인들의 몸짓이 더욱 격렬해진다.
두 하인의 머리통이 아작이 날 무렵.
“자, 시간 다 됐습니다!”
드레이크 잡기 코너를 관리하던 학생이 레나를 멈춰 세운다.
“벌써? 아직 몇 마리 못 잡았는데…….”
“으으으으으…….”
레나가 아쉬워하는 눈치를 보이자.
땀을 뻘뻘 흘리던 하인들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간다.
“자, 여기 상품입니다. 드레이크를 많이 잡으셔서 드리는 거예요!”
상품으로 레나가 받은 것은 어딘가 조잡해 보이는 목걸이였다.
목걸이의 끝엔 스켈레톤의 머리 같은 게 장식되어 있었는데.
시장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정도의 물건이었다.
‘옛날에는 이런 것도 없었는데, 그래도 뭔가 예전에 비해서 발전해 나가는 느낌이네.’
발전하는 것은 비단 사람만이 아닌 모양이다.
“어때? 잘 봤어?”
“…어, 그래. 잘하더라.”
나의 칭찬이 기뻤던 걸까.
레나는 내게 나무망치를 내밀며 눈짓한다.
“그럼 이제 한번 해 볼래?”
“아냐, 본 것만으로 충분해.”
“…그래?”
레나는 잠시 고민하더니 상품으로 받은 목걸이를 내게 내민다.
“그럼 이건 네가 가져.”
“내가 가지라고? 그건 네가 받은 거잖아.”
“그렇긴 하지만 네가 하던 걸 뺏어서 한 거잖아. 그러니까 이건 네 거지.”
레나가 떠넘기듯 목걸이를 넘기자.
“그래, 잘 받을게.”
나는 더 이상 사양 않고 목걸이를 받아 목에 걸었다.
“뭔가 안 어울리는 것 같으면서도 잘 어울리는 것 같다.”
“그래? 다행이네. 고맙다.”
그렇게 나는 자연스럽게 합류한 레나와 함께 축제의 장 이곳저곳을 누비기 시작했다.
“자, 삼색 원판 한번 돌리고 가세요!”
‘어이구, 저건 흑카지노의 게임을 따라 한 건가 보네. 저건 또 뭐야? 매점의 물건을 떼다가 그대로 파는 거야?’
내가 학생들이 차린 가게들을 둘러보며 속으로 혀를 차는 것과 달리.
“저거 재밌어 보인다. 한번 해 볼래?”
레나는 그저 이 상황이 즐거웠는지 연신 미소를 지어 보인다.
그렇게 우리는 밤이 될 때까지 축제를 즐겼다.
“후… 힘들지만 그래도 재미있었어. 이제 내일부터는 또 열심히 공부해야지.”
“축제는 이틀이나 더 남았잖아?”
“노는 건 하루면 충분해.”
레나가 단호히 고개를 젓자 나는 슬며시 입을 뗐다.
“아몬 소환은 좀 어때? 진척이 있어?”
“예전에 비해 흑마력을 많이 늘리긴 했는데, 그래도 아직 부족할 것 같아. 스스로에게 확신이 서기 전까지 소환은 자제하려고.”
그녀의 말에 나는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계속 노력하다 보면 언제고 소환할 날이 올 거야. 단기간에 해결되는 부분은 아니니까.”
“나도 그럴 거라고 믿어.”
그 말을 끝으로 우리 사이에 다시 어색한 침묵이 흐르기 시작하던 중.
레나가 나를 보며 묻는다.
“그런데 있잖아. 어떻게 어린애들을 데려다가 수업을 할 생각을 한 거야? 보통은 그냥 흑카데미에 입학하는 것만 생각하잖아?”
“어떻게 생각하긴? 그냥 흑마법사를 위한 게 뭐가 있을까 생각하다가 떠올린 것뿐이야.”
나의 말에 레나의 두 눈이 동그래진다.
“너… 정말 희한하다. 흑혼해 듀오도 그렇고… 진짜 이상해. 무엇보다 나는 네가 흑마법사를 엄청 싫어할 줄 알았는데.”
‘뭐… 그랬었지. 자리가 사람을 바꾼다는 게 정말일지는 나도 몰랐지만.’
하지만 나는 굳이 속내를 꺼내기보단 희미한 미소로 답했고.
레나는 그런 나를 보며 말을 이어 갔다.
“그래서 그런 건진 몰라도 우리 아빠가 널 엄청 좋게 보시는 것 같아. 틈만 나면 네 칭찬도 많이 하시고 흑탑의 미래가 밝다고 기뻐하시더라고.”
“그래서 그런지 레논 부탑주님이 너랑 결혼할 생각은 없냐고 물으시더라.”
내가 무덤덤하게 이야기한 것과는 달리.
레나는 깜짝 놀라 나를 바라본다.
“…정말로? 정말 그런 말씀을 하셨어?”
“정말로.”
나의 대답에 레나는 한참이고 말이 없다가.
괜히 바닥만 보며 내게 묻는다.
“…넌 어떻게 생각하는데?”
‘어떻게 생각하긴. 뭐, 막말로 장인이 부탑주면 나쁘지 않긴 하지.’
하나 오직 권력과 이권만이 얽힌 사랑은 내가 원하지 않았다.
물론 레나가 결혼 상대로서 나쁘다는 건 아니었다.
그녀는 충분히 아름다웠고, 가문에 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안주하기보단 앞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진취적인 여인이었으니까.
‘하지만 솔직히 결혼을 하기에는 너무 이른 나이란 말이야.’
그렇기에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그야 고민해 보겠다고 했지.”
“…그렇구나.”
레나가 무언가 살짝 아쉬워하는 눈치를 보이자.
‘내가 뭘 잘못 말했나? 이럴 때는 또 좋은 방법이…….’
나는 주머니를 뒤적여 도굴꾼에게 샀던 거울을 꺼내어 레나에게 내밀었다.
‘이미 평범한 거울이라는 걸 확인했으니 선물로 줘도 상관없겠지.’
“…이건 뭐야?”
“선물이야.”
“선물?”
“아까 네가 나한테 목걸이를 줬잖아. 그 답례품이야.”
하지만 레나가 선뜻 거울을 받지 않자.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너무 갑작스러웠나? 뭔가 분위기가 이상하면 선물부터 주는 게 최고라고 들었는데…….’
아무래도 내 선택이 잘못된 모양이다.
“마음에 안 들면 나중에 다른 걸 줄게.”
내가 거울을 다시 회수하려던 그때.
“아니야! 마음에 들어!”
레나가 화들짝 놀라 얼른 거울을 낚아채 간다.
다행히 선물이 마음에 들었던 걸까.
레나는 거울을 바라보다가 홱 고개를 돌리며 말한다.
“…고마워.”
‘다행이네.’
아무래도 거울이 그녀의 마음에 든 모양이다.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네.”
“…응.”
* * *
한편, 같은 시각.
레바논 왕국의 대신전 안.
새하얀 대리석 기둥들이 쭉 늘어선 신전 안으로 두 사람이 걸어 들어오자.
“잘 돌아오셨습니다, 성녀님.”
“그 악의 구렁텅이에서 무사히 돌아오시다니… 레바논 님의 은총이 성녀님께 임했음이 분명합니다.”
복도에 서 있던 사제들이 제이나와 에밀라를 보며 허리를 숙여 보인다.
“교황님과 대신관님들께서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제이나는 사제의 미소에도 무심히 고개를 끄덕이곤.
대신전의 깊숙한 곳으로 향한다.
화아아악-
이윽고 은은한 빛에 휘감겨 있는 레바논의 신상이 그녀들의 눈에 훤히 보일 무렵.
“으허허허, 제이나! 잘 돌아왔습니다. 당신을 향한 레바논 님의 사랑이 제 피부에까지 느껴지는 것 같군요.”
정갈한 예복을 입은 노인이 환히 웃으며 제이나를 반가이 맞이한다.
“네, 무사히 흑남의 탄생을 축하하고 복귀했습니다.”
“정말 큰일을 해내셨습니다! 성녀님께서 굳이 흑탑으로 가신다고 했을 때 왜 말리지 못했는지 매일 스스로를 원망했습니다만, 이제야 마음이 놓입니다.”
어째선지 교황은 입에 걸린 미소와는 달리 눈빛은 차갑기 짝이 없다.
“그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우리에게 이야기를 해 주시겠습니까?”
“그러죠.”
제이나는 검은 대지와 흑탑에서 있었던 일을 차분히 이야기했고.
그녀의 말을 듣던 교황의 입가에는 흐뭇한 미소가 걸린다.
“흑혼해 듀오와 흑립 유치원이라……. 마신이 제법 유별난 인간을 대리인으로 삼은 모양입니다. 그 외에 뭔가 또 다른 일은 없었습니까?”
교황의 물음에 제이나는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젓는다.
“없었어요.”
“…정말입니까? 워낙 속이 검은 놈들인지라 분명 성녀님을 위협하는 세력들이 있었을 법도 한데… 작은 소동조차 없었던 겁니까?”
“네. 아무런 일도 없었어요.”
“흐음…….”
교황이 그럴 리가 없다는 듯 의아해했으나 제이나는 침묵을 고수했다.
“그렇습니까? 흑마법사들이 무슨 짓을 벌여도 이상하지 않았을 텐데… 의아하군요.”
교황은 묘한 눈으로 제이나를 바라보다가.
이내 온화한 미소를 보이며 말한다.
“그 또한 레바논 님의 은총이겠지요. 그보다 오랜 시간 이동한다고 피로가 쌓이셨을 텐데, 일단은 쉬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아니요, 백탑의 포털을 이용해서 괜찮아요. 그보다 교황님께 묻고 싶은 게 있어요.”
“…제게 말입니까? 얼마든지 물어보시지요.”
그에 제이나가 교황을 보며 나지막이 말한다.
“전대 성녀 헬렌 말이에요. 정말… 안식의 대지에 있는 건가요?”
“…….”
순간 교황의 얼굴에 서려 있던 온화함에 미세한 균열이 갔다.
“…물론입니다. 지금 그녀는 안식의 대지에서 편안히 쉬고 있을 겁니다만… 갑자기 그걸 왜 물어보시는지요?”
“그냥 궁금해서요.”
“흐음… 알겠습니다.”
아까와 달리 교황의 눈빛이 날카로워졌으나.
그 사실을 모르는 제이나는 계속 말을 이어 간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말하고 싶은 게 있어요. 저는 그곳에서 흑마법사들이 체계적으로 병력을 키워 나가고 있는 걸 봤어요. 아무리 그들과 평화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고 해도 저는 그에 대해 대비를 해야 한다고 봐요.”
“대비라 함은 어떤 대비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저희도 흑카데미를 따라 성카데미를 지어서 성기사들을 체계적으로 양성해 보면 어떨까 싶어요.”
제이나의 의견에 대신관들이 저들끼리 나지막이 소곤거린다.
“…성카데미? 이미 성기사들은 단장들을 필두로 훈련을 받고 있는데, 굳이 그런 걸 만들 필요가 있나?”
“덜떨어진 흑마법사들에게서 뭘 배울 게 있다는 건지 모르겠군. 쯧쯧… 꽃은 꽃답게 있으면 되는 것을…….”
그들이 한창 소곤거리던 중.
교황이 제이나에게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레바논을 위하는 성녀님의 생각은 충분히 이해했습니다. 다만 성카데미에 대해서는 심도 깊은 고민이 필요할 것 같군요.”
“네,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니까요. 제 질문은 여기까지예요. 그럼……. 에밀라, 가자.”
제이나가 에밀라와 함께 대신전을 나가자.
“교황님, 아무래도 저희가 신탁을 잘못 해석한 모양입니다.”
“맞습니다. 성녀가 직접 흑탑으로 간다는 신탁이 흑탑과의 전쟁을 준비하라는 신탁인 줄 알았는데, 성녀는 저리도 멀쩡하게 돌아오지 않았습니까?”
대신관들은 기다렸다는 듯 교황에게 의견을 피력한다.
“흐음… 계속 이야기들 해 보시지요.”
“저희의 해석이 틀린 걸 알았으니 일단은 흑탑과의 관계를 계속 유지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맞습니다. 괜히 악마들의 소굴을 쑤셔 화를 키울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얼굴에 기름이 번들번들한 대신관들을 보며.
교황은 무심히 고개를 끄덕인다.
“일단 언데드들을 데리고 오는 흑마법사들을 놔두라고 크라켄 왕국에 서신을 보냅시다.”
“바로 와이번을 보내겠습니다.”
“후우… 그보다 참으로 고민입니다. 얼른 지금의 성녀님께서 안식의 대지로 들어갈 준비가 되셔야 새로운 성녀님을 뽑을 텐데 말입니다.”
교황이 앓듯이 내뱉자.
“역대 성녀님들 중, 가장 치유 능력이 떨어진다는 게 참…….”
“막말로 일반 사제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겁니다.”
대신관들 역시 모두가 동의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런데 성녀님께서 갑자기 전대 성녀는 왜 언급한 거랍니까? 뭔가 들은 게 있는 것 아닐까요?”
“흐음…….”
* * *
한편 제이나와 함께 대신전 밖으로 나온 에밀라.
그녀는 성녀를 거처까지 호위하고는 비로소 자유의 몸이 되었다.
“후우…….”
그러나 그녀의 속내는 복잡하기 그지없었다.
이제껏 보호의 대상이라고만 생각했던 성녀님이 자신보다 강하다는 사실에도 큰 충격을 받았으나.
무엇보다 흑남이 레바논과 베논, 두 신의 유희 대상이라는 게 믿기지가 않았다.
“레바논 님… 저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하늘을 보며 나지막이 중얼거리는 에밀라.
도대체 레바논 님은 어째서 성녀님을 놔두고 흑남을 유희 대상으로 정한 것이란 말인가.
“아니다… 그럴 리가 없어.”
레바논 님께서 그런 추악한 놈에게 관심을 주실 리 없다.
그래, 흑남이 거짓말을 한 게 분명하다!
놈은 성녀님을 속이려고 거짓말을 한 것이다!
“하지만 만약… 놈이 거짓말을 한 게 아니라면…….”
에밀라는 애써 흑남의 말을 머릿속에서 지워 보려 했으나.
마음 한구석에 자리하고 있는 의심은 좀처럼 사라지질 않았다.
“지하 감옥이라…….”
흑남의 말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확인할 방법이 있긴 하다.
그건 바로 대신전 밑의 지하 감옥으로 가서 정말 전대 성녀가 있는지 확인하는 것.
“만약 정말… 정말이라면…….”
정말 전대 성녀님이 안식의 대지가 아니라 지하 감옥에 계신다면.
흑남이 거짓이 아닌 사실을 말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
깊은 고민에 잠겨 있던 에밀라가 마침내 결심한 듯 방향을 틀어.
지하 감옥이 있는 방향으로 향한다.
“콜록, 콜록…….”
싸늘한 지하의 공기 때문인지.
에밀라는 잔기침을 하고는 회랑 저 멀리 보이는 철문을 응시했다.
대신전의 지하에는 하나의 거대한 철문이 존재한다.
한번 이곳에 갇히면 영원히 나오지 못해 죽음으로써 참회를 한다 하여.
누군가는 이곳을 회개의 문이라고도 불렀다.
“누구냐!”
철문 주변을 삼엄히 지키고 있던 성기사들 중 한 명이 걸어오는 에밀라를 보곤 크게 소리친다.
“제2기사단장, 에밀라다.”
“어엇… 실례했습니다!”
횃불 너머로 에밀라의 얼굴이 선명히 드리우자.
성기사들은 무기를 내리고는 그녀에게 예의를 표한다.
“헌데… 에밀라 님께서 이곳에는 어쩐 일로…….”
“지하 감옥의 상태를 살피러 왔다.”
“…예? 하하…….”
에밀라의 요구에 성기사 중 한 명이 머쓱하게 웃으며 말한다.
“단장님, 이곳은 대륙에서도 악명을 떨친 죄인들만을 가둔 곳입니다. 아무리 에밀라 님이라도 이곳에 들어가시기 위해서는 대신관님들의 수락이 있어야만…….”
“제이나님의 명령이다.”
“…성녀님께서요?”
성기사들의 표정이 떨떠름해진다.
아무리 빈곤한 치유 능력을 가진 제이나가 허울뿐인 성녀라고 해도.
어쨌건 직책상으로는 대신관보다 높았던 탓이었다.
“규정에 문제는 없을 텐데.”
“…예. 그렇긴 합니다만……. 알겠습니다. 대신 다른 이들에게는 비밀로 좀 해 주십쇼. 괜히 또 이야기가 흘러 나가면 저희도 좀…….”
“걱정 마라. 내 입은 강철보다 무거우니까.”
“감사합니다. 찰스! 여기 에밀라 님 감옥 안내 좀 해 드려!”
중년의 성기사가 손짓하자.
“옙!”
꽤나 젊어 보이는 기사 한 명이 에밀라의 앞으로 뛰어온다.
“찰스입니다! 이쪽으로 따라오시면 되겠습니다!”
젊은 성기사의 안내를 따라.
거대한 철문을 지나 지하 감옥 안으로 들어서는 에밀라.
“음…….”
안으로 들어서자 퀴퀴한 냄새가 코를 찔러 온다.
“어디부터 보시겠습니까?”
“…어디부터 보다니?”
“지하 감옥은 총 20층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전부 둘러보려면 최소한 한나절은 걸리실 겁니다!”
찰스의 안내에 잠시 고민에 잠기는 에밀라.
“시간이 걸리는 건 상관없다. 전부 둘러보겠다.”
“저, 전부 말입니까?”
에밀라의 대답에 찰스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거린다.
“문제 있나?”
“…아닙니다! 알겠습니다!”
에밀라는 찰스의 안내를 따라 지하 1층을 시작으로.
하염없이 지하로, 지하로 내려갔다.
“12층의 죄인들 중에선 타나토스가 제일 유명한 편입니다!”
그 와중 몇천 명의 무고한 시민들을 잔혹하게 죽였다는 미친 드루이드와.
“18층의 죄인들 중에서는 케이나가 아주 악질 중의 악질인 편입니다!”
자신의 복수를 위해 성 하나를 통째로 날려 버렸다는 백마법사를 비롯하여.
찰스는 나름 유명한 죄인들에 대해 설명을 해 주기도 했다.
“흠…….”
이어 20층에 도착하자.
에밀라는 찰스를 따라 20층을 둘러보며 묻는다.
“교단 출신의 죄인은 위층에밖에 없는 건가.”
“예! 그리고 이곳이 지하 감옥의 마지막 층입니다!”
“…….”
지하 감옥의 끝까지 왔음에도 전대 성녀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다.
역시 흑남이 거짓말을 한 걸까?
에밀라의 얼굴이 굳어 가던 그때.
“이봐, 밖에서… 온 거야?! 내 말 좀 들어 봐. 쿨럭! 난 성녀야, 성녀라고!”
한 철창 안에서 메말라 비틀어진 것 같은 목소리가 들려온다.
이미 20층까지 내려오는 와중에도 수많은 죄인들의 목소리를 들었건만.
“…성녀?”
에밀라가 홀연히 목소리가 들려온 철창 앞으로 걸어가던 중.
“단장님! 저 여자의 말은 무시하셔도 됩니다! 매일같이 자기가 성녀라고 지껄이는 이단이자 미친년입니다.”
찰스가 그녀를 제지한다.
“잠깐 살펴보겠다. 자리를 비켜 다오.”
“예? 아, 예!”
찰스가 화들짝 놀라 뒤로 멀찍이 물러나자.
“네가… 성녀님이라고?”
에밀라는 철창에 대고 나지막이 묻는다.
텅-
“그래! 내가 전대 성녀 헬렌이라니까?”
그러자 철창 안의 죄수가 비틀린 웃음을 흘리며 다가왔는데.
“이건…….”
큰 화상이라도 입은 것인지 죄수의 얼굴이 너무도 흉측하여.
에밀라는 검집에 손을 올렸다가 천천히 손을 내렸다.
“…미친 게 분명하군. 전대 성녀님은 안식의 대지로 가셨다.”
“안식의 대지? 아하하하하하하! 너는 이곳이 안식의 대지로 보이냐?”
“…….”
죄수의 빈정거림에도 에밀라는 발걸음을 돌리는 대신 대화를 이어 나갔다.
“너는 성녀님이 아니다. 적어도 내가 아는 성녀님들은 그런 천박한 말투를 사용하지 않으셨다.”
“천박한 말투? 대체 뭐가 천박하다는 건데? 등신 같은 노괴물들 때문에 고상한 척한 거지, 이게 원래 내 성격인데? 어쨌건 내 말투 때문에 의심이 간다면 까짓것 장단에 맞춰 줄게.”
철창 안에서 비틀린 웃음소리가 들려오더니.
“이렇게 말하면 되는 걸까요, 제2기사단장 에밀라 님?”
조금 전과는 너무나도 다른 말투가 철창 안에서 흘러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