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카데미의 노예가 살아남는 법-79화 (79/200)

79.

분명 낮에 아크 교수가 흑카데미 안팎을 오갔던 걸 기억한다.

그런데 갑자기 자취를 감췄다?

‘어디선가 성녀와 제른이 싸운 걸 몰래 지켜보고 있었던 게 분명해.’

그리고 제른의 패배가 확실시되자.

그대로 도주할 계획을 세웠던 모양이다.

‘하긴, 아크 신관장도 제른이 질 거라고는 예상 못 했겠지.’

그러니 이렇게 흔적을 곳곳에 남긴 채 도주를 택한 것 아니겠는가?

‘아마 멀리는 못 갔을 거고…….’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뒤늦게 허둥지둥 내게 달려온 볼드 학장을 보며 입을 뗐다.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아크 교수가 죄인인 제른과 손을 잡고 이곳을 습격해 왔었다.”

“…예?”

나는 대답 대신 텅 빈 아크 교수의 집무실을 눈짓으로 가리켰고.

볼드 학장의 표정이 눈에 띄게 어두워진다.

“허어… 그런 어리석은 선택을 할 사람이 아니었을 텐데… 대체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던 건지…….”

“어차피 어두워져서 추격은 어렵고, 날이 밝는 대로 흑탑에 가서 아크 신관장의 목에 현상금을 걸어. 나머지는 내가 탑주님께 이야기할 테니까.”

“…알겠습니다.”

* * *

다음 날, 아침.

끼이익-

‘후우… 그래도 빠르게 처리해서 다행이네.’

나는 새벽부터 흑탑에 가 나가란 탑주를 대면했고.

전날 있었던 일을 그에게 보고했다.

‘아크 신관장… 쉽게 도망가긴 어려울 거야…….’

일단 아크 교수의 죄목이 검은 대지에 있는 모든 흑마법사들에게 전달될 것이며.

아크 교수의 목에 걸린 현상금을 본 암살자들이 움직이기 시작할 것이다.

그뿐인가?

‘레바논 출신들은 포털 이용도 못 한다고 하니, 한번 재주껏 도망가 보시든가.’

아크 신관장에 대한 일은 완전히 흑탑 쪽에 떠넘겼기에.

나는 창밖의 햇살을 만끽하며 오랜만에 찾아온 평온한 일상을 누리기로 했다.

‘날 좋네.’

가볍게 산책을 하고자 흑립 유치원을 나가 잘 다듬어질 길가를 걷던 중.

“어제 무슨 날벼락이 떨어지기라도 했나? 이게 대체 뭔 일이래?”

“낸들 알아? 망할. 망할 애새끼들이 축제 준비 한답시고 우리를 볶아 먹는 것도 화딱지가 나는데, 아침부터 이게 무슨 지랄인지 모르겠네.”

어제 있었던 전투의 잔재들을 분주히 정리하는 하인들의 모습이 나의 눈을 자극했다.

‘에이씨, 좀 여유롭게 걸으려 했더니…….’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고는 발걸음을 돌려 집무실로 향했다.

‘그래. 산책은 무슨 산책이야. 그 정신 나간 괴물년을 두 눈으로 목격하고도 여유 부릴 생각이 들어? 다른 인간은 몰라도 제이나 그년을 때려잡을 힘을 길러야 돼.’

지금까지야 손님 입장에서 그녀를 상대했었으나.

다음에는 적으로 만날 가능성이 농후할 터.

다음 만남이 언제가 될지는 모르나 적어도 그 괴물을 능가하는 힘을 길러야만 한다.

‘이참에 이거나 마저 읽자.’

나는 전에 읽다 만 두 번째 책을 다시 꺼내어 펼쳤다.

‘어디까지 읽었더라……. 아, 여기구나.’

[언데드도 결국은 도구일 뿐, 결국 믿을 건 나의 몸과 정신밖에 없다. 하여 나는 그날로 수많은 무투가들을 찾아다니며 그들의 체계적인 훈련법과 기술을 배워 나갔다.]

‘호오… 그러니까 흑마력과 박투술을 접목하려고 했다? 이건 좀 신박하네. 근데 흑마법사한테 기술을 알려 주는 무투가도 있었다니. 희한하네.’

[물론 내 요청을 거절하는 놈들에게는 저주와 죽음을 선물했지만 말이다.]

‘아…….’

[이제부터 적을 내용들은 내가 리치가 되면서까지 수십 년을 연구한 박투술의 정수들이다. 나의 연구가 후대에 널리 알려지길 바라며…….]

‘이제부터 박투술에 대한 내용이 나오는 건가…….’

나는 침을 꿀꺽 삼키고는 다음 장을 넘기고 책의 내용을 쭉 살펴 나갔다.

몇 시간 뒤.

나는 검은 숲 외곽에 집을 짓고 그곳에 머무르고 있던 에나 할멈을 찾아갔다.

“할멈! 에나 할멈!”

내가 작은 오두막집을 보며 소리치자.

삐걱-

“아가야, 이미 훈련 시간은 지났단다. 내일 찾아오려무나.”

에나 할멈이 문을 열고 나와 손을 휘적거린다.

“아, 그렇게 야박하게 굴지 말고 잠깐만 제가 배운 것 좀 봐 줘요.”

“…배운 것? 흑마법이라면 교수들을 찾아가야지.”

“흑마법이 아니니까 할멈을 찾아온 거죠!”

흑마법이 아니라는 말이 에나 할멈의 호기심을 자극한 걸까.

“그래? 그럼 한번 해 보려무나.”

에나 할멈이 헝겊으로 닦던 검을 내려놓고 나를 바라보자.

“자, 합니다? 잘 보세요!”

나는 책에서 본 대로 허리는 꼿꼿이.

다리에는 힘을 꽉 준채 앞으로 탁 튀어 나갔다.

“흐읍!”

나는 몇 번이고 같은 행동을 반복하고서야.

에나 할멈을 보며 물었다.

“어떤 것 같아요? 뭔가 위압감이 느껴져요?”

“…재롱이라도 부리러 온 거니?”

‘재롱? 씁…….’

이쪽은 나름대로 진지하게 임한 것이건만 재롱이라니?

“뭔가 피부가 저릿하다거나, 숨이 안 쉬어지는 그런 느낌은 못 받았어요?”

“아아… 무슨 소리를 하나 했더니…”

에나 할멈이 피식 실소를 흘리다가 돌연 나를 노려보는데.

화아아아악-

한순간에 달라진 그녀의 분위기 때문일까.

‘흐읍…….’

순간 무언가가 나의 몸을 짓누르는 것 같은 느낌에 나는 등골이 서늘해졌다.

“이런 느낌을 이야기하는 거니?”

“…맞아요! 방금 그거 어떻게 한 거예요?”

“아서라. 마도의 길을 걷는 네가 다룰 수 없는 힘이란다.”

에나 할멈이 어림도 없다는 듯 말하자.

나는 오기가 생겨 다시금 책의 내용을 떠올리며 발을 쳐들었다.

‘그러니까 책에서 본 대로라면… 심장에 머무르는 흑마력을 끌어다가 발 쪽에 몰아 넣으라고 했었는데……. 아씨… 왜 이렇게 안 돼?!’

다리까지는 어떻게든 흑마력을 보내겠는데.

그마저도 금방 맥을 잃고 픽 사라져 버렸다.

‘한 번이라도 좋으니까 말 좀 들어! 말 좀!’

나는 이를 악물고 나의 마력들을 발에 밀어 넣으며 제자리에서 날뛰기 시작했다.

‘…어?’

그러던 그때 아주 찰나의 순간이긴 했지만 나의 마력이 발끝까지 뻗어 나갔고.

쿵-

뛰어올랐던 나의 몸이 지면과 닿자 그곳에서 작은 충격음이 일었다.

‘아씨… 보내는 건 가능한데 계속 유지하는 게 쉽지 않네. 이거 생각보다 마력 소모량이 큰데?’

내가 속으로 혀를 차던 중.

“호오… 검술은 영 재능이 없어서 가르치는 재미가 없었는데 의외로 재능이 있는 부분이 있었구나. 체내의 오러를 몸으로 돌릴 줄 알다니.”

에나 할멈이 놀란 눈으로 날 바라보며 말한다.

“오러요? 그건 기사들의 전유물 아닙니까? 전 제 마력을 돌린 건데요?”

“…그래? 다른 흑마법사들도 그게 가능한지는 내가 마법적 지식이 없어 잘 모르겠다만, 여하튼 지금 네가 한 건 기사들이 수련하는 오러 수련법과 흡사했단다.”

“그래요? 그럼 그냥 평범한 것 아닌가요?”

나의 물음에 에나 할멈이 미소를 머금은 채 고개를 젓는다.

“정말 평범한 놈들은 오러를 느끼는 데만 몇 년이 걸린단다. 설령 오러를 느낀다고 해도 그 기운을 몸으로, 검으로 보내는 데 또 수많은 세월을 필요로 하고.”

“그렇군요.”

‘뭐, 결국에는 다른 놈들도 다 한다는 거잖아?’

안 된다.

그 정도로는 그 괴물 같은 성녀를 상대하기 부족하다.

“근데 제가 최근에 좀 접한 게 있는데 한번 봐 주시겠어요?”

“해 보려무나.”

에나의 승낙이 떨어지자.

나는 책에 담겨 있던 그림들을 떠올리며 어수룩한 박투술을 선보였다.

“후우… 어때요?”

그러자 유심히 내 몸짓을 관찰하던 에나 할멈이 차분히 말한다.

“적어도 검술보다는 박투술 쪽이 좀 더 나아 보이는구나. 누가 가르쳐 줬니?”

“그냥 책에서 본 걸 따라 해 본 건데요.”

“책이라고? 한번 보여 주겠니? 괜히 또 이상한 걸 배웠다가는 네 몸만 축날 거란다.”

“흠…….”

‘하긴, 할멈의 말도 맞지. 나보다는 그래도 이쪽에 통달한 할멈에게 보여 주고 가르침을 받는 게 나을 거야. 어차피 할멈은 이걸 봐도 못 써먹을 테니까.’

애당초 흑마법사를 위해 만들어진 박투술이니.

에나 할멈이 책을 본들 크게 상관없을 것이다.

“여기요. 앞쪽은 쓸데없는 내용이 많아서 이쪽부터 보시면 될 거예요.”

내가 주머니에서 책을 꺼내어 에나 할멈에게 내밀자.

“흐음… 과연…….”

에나 할멈은 두터운 책을 술술 넘기더니 고개를 주억거린다.

“흑마법사를 위한 박투술이라……. 재미있구나.”

“어떤 것 같아요?”

“이건 내가 알고 있던 것과는 궤를 달리하는 지식이구나.”

에나 할멈이 자신의 배꼽 부분을 가리키며 말을 이어 간다.

“모든 기사들은 이곳에 오러를 담아 둔단다.”

“네, 그렇죠.”

전에 에나 할멈의 설명을 들은 적이 있었기에 난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여기에 적혀 있는 내용대로라면, 이건 심장에 있는 오러를 끌어다가 쓰는 방식이라 마법사들에게 더 적합할 것 같구나. 이 부분은 내가 가르치기보단 더 현명한 흑마법사를 찾는 게 좋을 것 같구나. 대신 박투술은 내가 좀 도와주마.”

“그게 낫겠죠?”

“검술보다는 차라리 이게 네 신변을 보호하는 데 더 도움이 되겠구나. 일단 자세부터 잡아 보려무나.”

* * *

일주일 뒤.

‘어우, 정신없네.’

성녀 일행이 있던 날들이 차라리 여유가 있었을 정도로.

나의 최근 일정은 숨 가쁠 정도로 바빴다.

‘새벽에는 에나 할멈에게서 박투술을 배우고, 흑카데미에서 교수들에게 수업도 들어야 하고…….’

그 와중에 흑립 유치원의 원생들과 교수들도 신경 써야 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매점 확장 공사가 끝나서 이제 그쪽은 덜 신경 써도 되는 거겠지만.’

매점과 흑카지노의 총 운영자, 호밀이 기대 이상으로 운영을 잘해 주고 있는 터라.

그나마 그 부분은 여유가 있었다.

“원장님, 안녕하세요!”

“어, 그래.”

어린 원생들의 인사를 받으며 흑카데미 쪽으로 넘어가려던 중.

‘음? 언제 저런 걸 달아 뒀지?’

천장에 매달린 기괴한 조형물들이 내 눈에 들어왔다.

‘이건 또 뭐야? 설마… 오늘이 그날이었나?’

그뿐만이 아니었다.

흑립 유치원의 벽에는 베논으로 보이는 남자의 그림들이 빽빽이 붙어 있었기에.

나는 지나가던 교수를 붙잡았다.

“혹시 오늘이 무슨 날인가?”

“…예?”

내가 천장에 달려 있는 거대한 검은 용을 가리키자.

교수는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마신님의 탄생일을 기념하는 축제가 있습니다.”

‘아아, 진짜 오늘이 그날이었어? 너무 바쁘다 보니까 아예 잊고 있었네.’

마신의 탄생일.

마신 베논의 탄생일을 기념하는 날로서, 3일간 모든 학생들은 잠시나마 학업을 뒤로하고 축제를 즐기는 날이기도 했다.

이 시기만큼은 분위기가 굉장히 자유분방한 편이지만.

외부의 출입은 엄금했다.

‘벌써 여섯 번째 베논의 탄생일인가……. 시간 참 빠르네…….’

나는 붙잡았던 교수를 보내고는 흑립 유치원을 나갔다.

“거기 끝부분 똑바로 잡아! 쓰러지면 우리 목이 날아가는 거야!”

“예!”

밖으로 나가니 하인들이 바삐 무언가를 설치하는 모습이 곳곳에서 보였고.

“자, 이건 제 가문 대대로 내려오던 묘기입니다. 자, 여기 칼이 보이시죠? 이제 이걸 제 팔에 찍을 겁니다. 하지만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겁니다. 자!”

푹-

“어… 어어어?!”

“이런 미친! 흑마력 포션 가져와!”

이미 준비를 끝마친 학생들은 저마다 갖고 있는 재주들을 선보이거나.

가문에서 가지고 나왔던 물건들을 진열해 놓고 호객 행위를 하는 등.

나름대로 평범한 축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거참… 묘하네. 하인이 아니라 방문객 입장에서 축제를 즐기는 건 또 처음이야.’

나는 그런 학생들의 모습을 보며 묘한 감정을 느꼈다.

‘원래였으면 학생들 뒤치다꺼리하기 바빴을 텐데.’

어쩌면 저기 기둥을 올리는 하인들의 옆이 내 자리였을지도 몰랐다.

나는 옛 기억들을 추억하며 축제 현장을 둘러보던 중.

‘어… 저건…….’

학생들이 운영하는 한 가게 앞으로 다가갔다.

“어, 흑남님! 어서 오세요! 드레이크 잡기 한번 해 보실래요?”

‘아…….’

“드레이크 잡기라…….”

“엄청 간단한데 재미있어요!”

내가 말꼬리를 흘리자.

여학생이 내 손에 나무망치를 쥐여 주며 말을 이어 간다.

“저기 앞에 있는 나무 판이랑 구멍들 보이시죠?”

“저 구멍들 위로 올라오는 드레이크들을 때리면 되는 거겠지?”

나의 물음에 여학생이 눈을 휘둥그렇게 뜬다.

“잘 아시네요?”

‘잘 알 수밖에 없지. 이거… 내가 고안한 거거든.’

하인 1년 차 시절.

학생들에게 잘 보여 목숨을 연명하겠다는 일념 하나로 그들에게 제공했던 아이디어가.

5년 넘게 명맥을 이어 올 거라곤 예상하지 못했지만 말이다.

“드레이크를 많이 때리면 상품을 드리니까 한번 도전해 보세요!”

“…얼마지?”

“원래는 1골드씩 받는데 처음이시니까 무료로 해 드릴게요!”

그에 나는 나무 판 앞에 서서 드레이크들이 올라오기를 기다렸다.

그러자.

쑤욱-

곧 구멍들 위로 드레이크들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는데.

“허억, 허억!”

“쓰읍…….”

드레이크 가면을 쓴 하인들이 입에서 단내를 풍기며 열심히 움직이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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