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
“지금부터 우리는 흑카데미로 이동한다.”
결의를 다진 제른의 한마디를 끝으로.
성녀를 죽이기 위해 모인 결사대는 조심스럽게 흑탑으로 진입했다.
“제른 님, 이쪽입니다. 경계 병력은 없으니 그대로 나아가시면 됩니다.”
“…고맙다, 메피르.”
그래도 아직 제른에게 충성을 바치는 흑마법사가 흑탑에 남아 있었던 건지.
그들은 흑탑 곳곳을 망봐 주며 제른이 지나갈 길을 터 주었다.
웅웅웅-
그 덕에 별다른 의심을 받지 않고.
수월히 흑카데미 마법진 앞에 도착한 제른.
“…이동한다.”
그들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마법진에 올랐고.
곧 달빛을 받아 훤한 벌판이 그들의 눈에 들어왔다.
“마지막으로 상태를 점검해라. 그리고…….”
제른이 부하들을 보며 명령을 내리려던 중.
“제른 님! 누가 이쪽으로 오는 것 같습니다.”
한 흑마법사가 앞쪽을 가리키며 낮은 목소리로 말한다.
“일단 몸을 숨…….”
제른이 황급히 수하들에게 명령을 내리려던 그때.
달빛에 드러난 성녀와 기사의 모습이 그의 눈동자에 일렁였다.
“…전투를 준비해라!”
“…예?”
이미 한번 성녀에게 쓴맛을 본 탓일까.
턱-
제른은 부하의 물음에도 아랑곳 않고 지팡이를 땅에 꽂고 나지막이 중얼거린다.
그러자.
콰과과과과과곽-
지팡이에서 굵은 밧줄 같은 것이 흘러나오더니.
순식간에 흑마법사들의 주변으로 검붉은 그물망이 이중, 삼중으로 형성되어 간다.
“절대로 성녀의 접근을 허용해선 안 된다!”
제른이 비어 있는 다른 손을 들어 이중 영창을 시작하며 일갈하자.
“예!”
추종자들은 그제야 상황을 파악하고는 전원 지팡이를 잡은 채 술식을 읊기 시작한다.
“진정한 흑탑을 위하여!”
“반드시 성녀를 죽여야만 한다!”
영창을 끝마친 흑마법사들이 고함을 지르며 지팡이를 쳐들자.
달빛만이 자리하고 있던 하늘이 검붉게 변하더니.
콰과과과과과과광-
성녀 일행이 있던 자리에서 격렬한 폭음과 함께 불길이 치솟았다.
“뭐야, 설마 죽은 건가?”
불길 사이로 산 자의 울부짖음도 도망하는 기색도 느껴지지 않자.
얼떨떨해하는 흑마법사들.
하지만 곧 불길 사이로 체구가 거대해진 성녀가 모습을 드러내자.
“허… 우리의 파멸 마법에 맞고도 멀쩡할 줄이야…….”
“정말 몸집이 커졌군. 제른 님의 말씀이 사실이었어!”
흑마법사들은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
하나 끝없이 술식을 읊조리던 제른만은 불길에 지팡이를 겨눈 채 조용히 중얼거린다.
“…심연의 계곡.”
그러자 갑자기 불길이 치솟았던 지면에 거대한 철문이 생겨나더니.
끼이이이익. 키아아아아아!
서서히 열린 철문 사이로 수많은 팔들이 촉수처럼 튀어나와.
불길 사이에서 걸어 나오던 성녀의 몸을 붙잡고 문 안쪽으로 끌어당기기 시작했다.
“저 마법은… 심연의 계곡 아닌가?! 허… 실물로 보는 건 처음이군.”
“대체 저건… 무슨 흑마법인가?!”
“파멸학파의 흑마법사들 중에서도 그 경지가 끝에 다다른 흑마법사들만이 사용할 수 있는 흑마법이지. 저 문에서 튀어나온 망령들의 손이 보이나? 한번 저 손에 붙잡혀 문안으로 끌려 들어간 사람은 영원토록 심연의 계곡에서 망령들과 싸워야 한다더군.”
“오오… 과연……. 그럼 성녀는 이미 죽은 목숨이겠군.”
하나 흑마법사들이 제른의 경지에 감탄을 금치 못하는 것과 달리.
제른은 안도할 수 없었다.
“…이것도 부족하다. 부족해…….”
치욕스러웠던 과거의 경험을 통해.
그는 성녀에게 어지간한 흑마법은 통하지 않는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제른은 처음부터 자신이 사용할 수 있는 최고위 흑마법 중 하나를 시전한 것이건만.
화아아아아아악-
“저, 저건…….”
아까보다 더욱 몸집이 부풀어 오른 제이나의 성스러운 일격이 지면에 내리꽂히자.
콰아아아아아아앙-
지축을 울리는 굉음이 그들의 귀를 찢을 듯이 뒤흔들어 놨다.
콰아아앙, 콰아아앙, 콰아아아앙-
제이나의 거대한 주먹이 망령들의 팔과 맞닿을 때마다.
수천 개에 달하던 망령들의 팔이 녹아 없어졌다.
“세상에…….”
“저게 정녕… 사람이란 말인가?”
흑마법사들이 기가 질려 겨우 지팡이를 쳐들던 그때.
“오, 옵니다! 괴물이 옵니다!”
철문을 반쯤 으깨어 놓은 제이나가 그들을 향해 득달같이 달려오기 시작했다.
“제른 님께서 결계를 몇 겹으로 설치해 놓으셨는데! 괜찮을 거다!”
터억-
“으아아아아압!”
하지만 제이나가 가로막고 있던 검붉은 그물망을 우악스럽게 잡아 핏대가 설 정도로 힘을 주자.
찌직, 찌지지지지직-
제른이 펼쳤던 결계가 양피지 찢기듯 좌우로 찢겨 나간다.
“괴, 괴물…….”
“베논이시여…….”
흑마법사들이 크게 동요하던 그때.
“증오의 불길.”
영창을 끝마친 제른이 제이나를 보며 손을 뻗자.
성녀의 발밑이 거뭇하게 변하더니.
화르르르르륵-
검붉은 불기둥이 하늘을 뚫을 정도로 솟구쳐 오른다.
“저건… 증오의 불길?”
한번 불이 붙으면 죽을 때까지 꺼지지 않는 증오의 불길.
제른의 손에서 최고위 파멸 마법이 발현되자.
흑마법사들은 그저 저 괴물이 불 속에서 타 죽기를 바라며 기대 어린 눈으로 불기둥을 바라봤다.
하지만…….
화르르륵-
“이건 제법… 뜨겁네요.”
제이나가 옷에 붙은 불을 먼지 털어 내듯 털어 내며 불길 사이에서 걸어 나오자.
그 모습을 본 제른은 허탈한 웃음을 흘린다.
“레바논은 대체 무슨 괴물을 만들어 낸 거란 말인가…….”
후우우웅-
제른의 중얼거림이 끝나기 무섭게 그의 눈앞에 거대한 주먹이 드리웠고.
쩌어어어억-
성스러운 일격을 맞은 제른의 몸이 순식간에 뒤로 튀어 나간다.
콰자자자자작-
멀쩡히 서 있던 나무들은 순식간에 박살 났고.
“크윽… 쿨럭, 쿨럭…….”
소음이 멎은 자리에선 고통스러워하는 제른의 기침 소리가 간헐적으로 울렸다.
전투의 승패가 확실히 갈리자.
“에밀라, 잔당 처리를 부탁해요.”
“…예.”
제이나는 에밀라에게 뒷일을 맡기고는 아직 숨이 붙어 있는 제른에게 다가갔다.
그의 멱살을 우악스럽게 잡아 들어올리고는 싸늘한 시선으로 제른을 쏘아보는 제이나.
“분명 당신은 유배를 갔다고 들었는데 왜 여기에 있는 거죠?”
“크킄… 그야, 네년의 목숨 하나로… 흑탑의 부흥을 이끌 수 있기 때문… 이다……. 그걸 위해서라면… 난 지옥에서라도 돌아올… 거다…….”
제른이 피를 게워 내며 힘겹게 말을 토해 내자.
제이나는 도무지 그를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바라본다.
“제가 죽는 게 왜 흑탑의 부흥으로 이어진다는 거죠? 전쟁은 양쪽의 피해만 야기할 텐데요?”
“어리석긴……. 전쟁에서 나오는 모든… 부산물들이, 쿨럭… 흑탑의 성장에 필요한 자양분이 된다……. 땅, 노획품, 노예… 하다못해… 시체들까지 말이다……. 그러니… 전쟁을 안 할 이유가 있나?”
“그깟 흑탑의 부흥 하나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피해를 입어도 된다는 건가요?”
그에 제른의 입가에 비웃음이 걸린다.
“…피해? 어이없는 소리를… 다 하는군. 전쟁이 벌어져도… 결국 사람들을 지배하는… 머리만 바뀔 뿐이지 달라지는 건 없다.”
연신 입에서 피를 흘리면서도 계속 말을 이어 가는 제른.
“거기다가 우리가 잡아 온 노예의 숫자보다… 너희가 이교도를 숙청한답시고… 죽이는 사람의 숫자가 더 많은 건… 알고 있나?”
“당연한 것 아닌가요? 이교도는 처리해야만 하니까요.”
“그래… 그렇게 말할 거라 생각했다……. 너희는 그저 레바논의 뜻만 따르는… 노예들일 뿐이니까. 쿨럭, 쿨럭…….”
제이나가 멱살을 붙잡은 손에 힘을 주며 죽일 듯 노려보자.
제른은 더 이상 미련은 없다는 듯 희미한 미소를 보이며 말한다.
“…죽여라.”
“당연히 그래야죠.”
제이나가 주먹을 쳐들어 제른의 얼굴에 힘껏 내리꽂으려던 그때.
“그쯤 하지.”
나는 제이나를 보며 소리치곤 죽어 가는 제른을 보며 혀를 찼다.
‘도망자 신세가 된 와중에도 성녀를 죽이러 온 건가? 진짜 그 집념만큼은 인정한다.’
“지금 뭐 하는 겁니까?”
내가 추궁하듯 묻자.
제이나는 분노를 숨기지 않으며 내게 말한다.
“저를 죽이려던 암살자를 죽이려고 한 것뿐인데요? 이 흑마법사, 저번에 저를 암살하러 왔던 놈 아닌가요? 그런데 어떻게 풀려난 거죠?”
“뭐 어떻습니까? 죄인이 손님을 가장한 죄인을 공격한 것뿐인데 문제될 게 있습니까?”
지은 죄가 있어서일까.
제이나가 입을 꾹 다물자.
“파멸 병단장!”
나는 흑탑에서 데리고 온 단장을 보며 소리쳤다.
“예!”
“성녀 일행을 케이탈 요새까지 잘 인도하도록. 혹시라도 저들이 조금이라도 이상한 행동을 한다면… 바로 보고해. 그때는… 레바논 왕국과 끝장을 보는 날이 되겠지만.”
“그리하겠습니다!”
수백에 가까운 인원에 파멸학파의 최정예들로 구성된 파멸 병단이 성녀 일행과 함께 마법진을 타고 자리를 뜨자.
“아직 팔 들 힘은 있죠? 드시죠.”
나는 제른의 머리맡에 흑마력 포션을 내려놓았다.
“쿨럭, 쿨럭… 날… 동정하는 건가?”
“딱히 그런 건 아닙니다만, 뭐 싫으면 그냥 죽으시든가요.”
내 말에 제른은 힘없이 나를 바라보다가.
힘겹게 포션을 잡고 입에 들이붓는다.
‘흠… 방금보다 좀 나아지긴 했네.’
포션의 효과가 서서히 나타나는 건지 제른의 숨이 아까보다 평온해 보이자.
나는 그의 옆에 털썩 주저앉아 무심히 질문을 던졌다.
“대체 전쟁이 뭐라고 성녀한테 그렇게 집착한답니까?”
“전쟁이야말로 지금의 흑탑에 가장 필요한 것이기 때문이지. 지금 흑탑이 어떤지 아나? 지금의 흑탑은 그저 레바논 왕국의 그림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흠… 뭐, 제른의 말도 틀리지는 않지.’
어쨌건 흑탑은 언데드를 제작하여 그것을 레바논에 팔았고.
레바논은 그 언데드들을 이용하여 자기들의 명성과 존귀함을 유지하기 바빴으니까.
“언제부터 우리 흑마법사들이 레바논의 노예가 됐지? 저들과 손을 잡았을 때부터 우리는 스스로 레바논의 노예를 자청한 거나 다름이 없다. 그래서 나는 그 부조리함을 타파하고 싶었다.”
“당신 말도 일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쪽의 주장이 실현된다고 가정해 보죠. 대륙의 왕국 대부분이 레바논을 믿고 있는 판국에 다시 성마전쟁이 벌어지면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흑탑과 레바논 왕국과의 싸움으로 끝날 것 같아요?”
나는 단호히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어 갔다.
“절대 아니에요. 대륙의 모든 왕국이 우리에게 칼을 겨눌 겁니다.”
“…그럼 계속 지금처럼 레바논의 노예로 살겠다는 건가?”
“제가 언제 평생 노예처럼 살자고 했습니까? 모든 일에는 때와 시기가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내실을 다져야 할 때고요. 먼저 훌륭한 흑마법사들을 충분히 양성한 뒤, 언데드들의 숫자를 늘리고 동맹 세력을 만들어야 합니다. 전쟁은 그 뒤에 논해도 늦지 않아요.”
나의 말에 우두커니 나를 보던 제른이 입을 뗀다.
“너는 전쟁을 싫어하는 게 아니었나?”
“좋아하지 않을 뿐이지 정말 필요하다면 해야죠. 그런데 아직 흑탑의 내실도 안 다져진 상황에서 그쪽이 자꾸 전쟁, 전쟁 하면서 성녀를 죽이려고 드니까 저도 기를 쓰고 막으려고 한 거고요.”
“…그렇군. 그런 거였군.”
제른은 바닥에 누운 채로 하늘을 보며 씨익 웃음을 지었다.
“왜 나가란 탑주가 네 녀석을 밀어주려 했는지 조금은 알 것도 같다.”
밝게 빛날 때는 잘 보이지 않았던 게 어두워지고서야 비로소 보이는 듯하다.
“이제 날 탑주에게 데려가든 이 자리에서 죽이든 네 마음대로 해라.”
“그래요? 살려 주려고 했는데 죽는 걸 원한다고요?”
나의 말에 제른이 눈을 휘둥그렇게 뜬다.
“날… 살려 주겠다고?”
“엄밀히 말하면 그쪽의 생각도 틀린 건 아닙니다. 어느 부분은 저도 동의하고요. 그러니 편하게 죽을 생각 말고 흑탑을 위해서 일 좀 하시죠.”
“…….”
나의 말에 제른은 잠시간 말을 잇지 못한다.
한참 동안 고요함만이 맴돌던 중 제른이 겨우 입을 뗀다.
“날… 믿는 건가?”
“당연히 안 믿죠. 그러니 먼저 제가 내는 숙제를 좀 풀어야 할 겁니다.”
“무슨 일을 시키려고 하는 거지?”
의구심을 보이는 제른을 보며 나는 툭 말을 내뱉었다.
“일단 미리 말해 두겠는데, 당신을 다시 부탑주 자리에 앉힐 생각은 없어요.”
“권력에 대한 욕심은 수레에 갇혔을 때 전부 내려놨다.”
“호오… 그래요? 그럼 숙제를 풀기에는 딱 좋겠네요.”
나는 씨익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무슨 일을 시킬 거냐고 물었죠? 전쟁을 준비해 주시죠.”
“…뭐?”
“전쟁 준비 좀 해 달라고요. 자금은 이쪽에서 조달해 줄 테니까 언데드들을 좀 만들어 주면 됩니다.”
나의 선언에 제른의 얼굴에 혼란스러움이 가득 낀다.
“…언데드는 흑탑의 언데드 공방에서 만들고 있을 텐데?”
“그건 대부분 팔려고 만드는 거잖아요. 제 말은 사설 언데드 공방을 만들라는 겁니다.”
내 말에 제른의 눈이 번뜩인다.
“일개 흑마법사가 언데드를 대량으로 갖는 건 규율에 어긋나는 일이라는 걸 알고 있겠지?”
“잘 알죠. 근데 그렇게 규율을 잘 아는 양반이 성녀를 죽이려고 했답니까?”
나는 피식 웃으며 말을 이어 갔다.
“그 규율은 좀 고리타분한 규율이죠. 아까 성녀랑 싸우면서 못 느꼈어요? 흑마법사들은 근접전에 취약합니다. 그러니 반드시 언데드들의 보호를 받아야 하는 거고요. 사설 언데드 공방은 그 밑 작업 정도라고 보면 되겠네요.”
일단 언데드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을 터.
‘개인이 언데드를 생산하는 게 금지 행위라면 몰래 만들면 그만이지.’
거기다가 사설 언데드 공방은 제른에게 내는 일종의 시험이기도 했다.
‘만약 사설 언데드 공방을 제대로 운영한다면 조금은 믿어 주겠다만, 만약 아니라면…….’
내가 게슴츠레한 눈으로 제른을 바라보던 중.
제른이 내 얼굴을 똑바로 보며 묻는다.
“너는… 전쟁을 벌일 생각인 건가?”
“평화를 원하니 전쟁을 준비하는 거고, 전쟁을 준비하려면 내실부터 다져야 합니다. 그리고 좋든 싫든 언제고 전쟁은 발발할 수 있는 거고요.”
“…….”
입을 닫은 제른을 보며 난 계속 말했다.
“그러니 사설 언데드 공방을 비밀리에 만들어서 한번 키워 보든가 하시죠. 어차피 그쪽은 도망자 신세라 할 것도 없잖아요? 뭐, 싫으면 마시든가요.”
‘그래도 전쟁과 관련해선 누구보다 열정이 있는 것 같아서 리스크를 감수하고 맡겨 보려고 하는 건데, 싫다고 하면 다른 사람 알아보는…….’
쿵-
갑자기 머리를 땅에 처박는 제른.
‘뭐야…….’
“이 올러티 제른, 오늘 이 순간부터 흑남님을 따르겠습니다.”
‘…갑자기?’
사설 언데드 공방을 맡기겠다는 게 그렇게도 감격이었던 걸까.
나는 제른을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아직 제른은 믿을 수 없지. 하지만… 솔직히 사설 언데드 공방을 맡기기에 적합한 사람도 마땅히 없단 말이지.’
아무래도 규율에 어긋나는 일인 만큼.
지인보다는 언제든 쳐 낼 수 있는 제른이 이 일에 더 적합하기도 했다.
‘쯧… 레바논만 아니었어도.’
솔직히 아무리 베논과 레바논이 새로운 협정을 맺었다고 해도.
레바논이 또 언제 어디서 무슨 개수작을 부릴지 모른다.
그러니 이쪽도 준비를 더 해 둬야 하지 않겠는가?
“하하, 일어나시죠. 그쪽의 충성은 제 숙제를 통과한 뒤에 받는 걸로 하죠.”
“그리하겠습니다.”
“그런데 하나만 물읍시다. 대체 어떻게 도망쳐 나온 겁니까? 파멸학파의 흑마법사들이 자진해서 나서기라도 했답니까?”
나의 물음에 제른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것도 있긴 하지만 조력자가 있었습니다.”
“조력자요?”
“예, 아크 신관장이 제 탈출에 협력했습니다.”
‘아크 신관장이? 이것 봐라……. 어이가 없네. 진짜 자기네 성녀를 순교시키려고 탈출시킨 건가?’
“호오… 그래요? 일단은 알겠습니다.”
일단 나는 제른에게 내가 찾아갈 터이니 먼저 몸을 숨길 것을 지시하고는.
흑카데미에 상주하고 있던 언데드들을 모아 아크 신관장의 집무실을 찾아갔다.
‘아크 신관장, 교수 생활도 오늘로 끝이네?’
범죄자인 제른을, 그것도 신관장인 아크 교수가 도왔다?
이 죄목 하나만으로도 아크 신관장의 목을 날리기엔 충분할 터.
‘그래. 좀 조용히 사나 싶더니, 역시 사람이 바뀔 리가 없지.’
쾅쾅-
나는 아크 신관장의 집무실을 두드리며 소리쳤다.
“아크 신관장, 안에 있는 것 다 아니까 문 열어!”
“…….”
하지만 어째선지 안에서 인기척이 들려오지 않는다.
“그냥 부숴.”
내 명령이 떨어지자.
데스나이트들이 문을 난도질하기 시작했고.
끼이익, 쿵-
곧 힘없이 나가떨어진 문짝 너머로 텅 빈 집무실의 정경이 내 눈에 들어왔다.
‘이 망할 늙은이가… 도망쳤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