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카데미의 노예가 살아남는 법-77화 (77/200)
  • 77.

    “…예? 제가 왜 당신과 같이 가야됩니까?”

    내가 정색하며 묻자 제이나는 굳은 표정으로 나를 보며 말한다.

    “그게 레바논 님께서 원하시는 일이기 때문이에요.”

    “…뭐라고요?”

    “그게 뭔…….”

    비단 놀란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던 건지.

    에밀라도 당혹한 기색이 역력하다.

    ‘이런 망할… 도대체 왜 안 돌아가고 이곳에서 뒹굴거리고 있나 했더니…….’

    제이나는 타지가 주는 자유로움을 즐기고 있던 게 아니라.

    나를 레바논 왕국으로 데려가려고 눈치를 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보다 레바논 그년… 진짜 설마 했는데 이런 식으로 나올 줄이야. 이거 거의 협정 위반 수준 아니야?’

    물론 베논과 레바논은 내게 직접적으로 개입하는 것을 금지했으니.

    성녀에게 신탁을 내리는 게 협정을 위반했다고 볼 수는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간접적으로 개입했다고 해도 그렇지, 이건 선을 넘었잖아!’

    성녀라는 패를 내밀어 흑탑에 혼란을 야기하고 이제는 나를 강제로 데려가겠다니?

    나는 가만히 천장을 바라보며 생각을 이어 나갔다.

    ‘베논 님, 이래도 되는 겁니까? 레바논 쪽에서 저렇게 나왔는데 지켜만 보고 있으실 겁니까? 예?’

    하지만 하늘에서는 내게 그 어떤 답도 주지 않았다.

    ‘그래, 뭐… 바쁘시겠지. 마신이 상담 센터도 아니고.’

    마신이 항상 내 부름에 응답할 정도로 한가한 양반은 아닐 터.

    그러나, 상관없다.

    ‘내가 과연 너희에게 순순히 협조할까? 그리고 만약 정말 레바논에 끌려가게 되면 오히려 좋을 수도 있지.’

    나는 그녀들에게 재미있는 것을 알려 주기로 했다.

    “같이 가면 교황부터 죽일 겁니다. 약속하죠.”

    “그게 무슨……?”

    제이나의 눈쌀이 찌푸려졌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다음엔 고위 신관들의 집을 하나씩 파멸해야겠어요. 어미, 아비, 자식, 사돈의 팔촌까지, 저주와 고통 속에서 그들을 언데드로 만들 겁니다.”

    “무엄한!”

    에밀라가 격분해서 나에게 다가오는 것을 제이나가 막았다.

    아마 뭔가 느끼는 게 있는 모양이지.

    “아! 성기사들도 빼놓을 수 없지요. 악마 소환의 제물로 아주 딱이니, 펠기누스가 좋아하겠어요.”

    에밀라의 눈이 분노에 가득 차 있다.

    “하지만 에밀라, 당신은 빼 드리죠.”

    그 눈을 보며 나는 웃어 보였다.

    “당신은 성녀의 측근으로, 성녀가 저지른 멍청한 짓이 어떤 결과를 낳는가를 지켜봐야 하니까요.”

    “걱정 마라. 그 전에 네놈의 목이 몸과 분리되어 있을 테니.”

    으르렁거리는 에밀라를 보며 나는 픽 실소를 흘렸다.

    “그 주인에 그 측근인가? 성녀만큼이나 멍청하군. 여기서라면 모를까, 레바논에서는 너희는 나를 절대 못 죽여.”

    와자작.

    성녀가 쥐고 있던 찻잔에서 심상찮은 소리가 났다.

    제이나가 앓듯이 뱉었다.

    “…부디 설명을 부탁드려요.”

    나는 제이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래, 설명해 주지.

    너희가 내 말을 믿을지는 모르겠다만.

    “저는 레바논 님과 베논 님 모두의 개입 아래 있습니다.”

    “그게 무슨……?”

    “저는 그분들의 유희 대상으로, 그분들이 원하기 전에는 죽을 수 없지요.”

    에밀라의 눈에는 비웃음이.

    제이나의 눈에는 의심이 차올랐다.

    하지만 믿든지 말든지 전혀 상관없다. 울면서 후회하는 건 내가 아니니까.

    “나는 흑남이고, 베논의 대리인이지요.”

    “그렇죠.”

    “그런데 레바논의 대리인이 베논의 대리인을 납치해서 레바논으로 가겠다고 합니다. 그렇죠?”

    나의 물음에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제이나.

    “두 신들이 저를 가지고 유희 중이라고 말씀드렸지요. 그런데 레바논 님이 이렇게 반칙을 하시는데, 베논 님의 체면이 구겨질까요, 안 구겨질까요?”

    “…….”

    나는 답하지 못하는 제이나의 앞에 내 얼굴을 들이밀었다.

    “구겨질까요? 안 구겨질까요?”

    “…구겨지겠죠.”

    “그러면 어떻게 될까요?”

    내 비웃음 섞인 질문에 그녀들은 입을 다물었다.

    베논의 대리인인 내가 교리상 적대 관계인 레바논에게 ‘님’을 붙이는 것에서.

    어쩌면 내 말이 진짜라는 걸 느꼈을지도 모른다.

    레바논은 선을 넘었다.

    다 넘은 것은 아니고, 반 정도?

    하지만 금을 밟은 것만으로, 그곳에서는 이미 분쟁의 불씨가 타오르고 있는 것이다.

    그 불씨를 밟아 끌지, 아니면 확 키울지는 베논의 선택에 달렸으나.

    ‘적어도 베논이 가만히 있을 놈은 아니지.’

    내가 만나 본 바로는 절대 그럴 놈이 아니었다.

    “레바논 님이 이렇게 선을 넘으면, 베논 님은 어찌하실까요? 가만히 참고 있을까요?”

    어쩌면 성마전쟁이 레바논의 심장부에서 시작될지도 모르지.

    “성녀님! 저 간악한 입에 속으시면 안 됩니다! 여차하면 제가 저놈의 목을 바로 날려 버리겠습니다! 베논이 그럴진대 레바논 님이 가만 계시겠습니까?”

    “에밀라.”

    “레바논 님의 신탁대로 하면 될 일입니다! 일단 데려가시죠!”

    악을 쓰는 에밀라를 보던 제이나가 피곤하다는 듯 얼굴을 쓸어내렸다.

    “지금 생각을 정리하는 중이니까 입 좀 다물어요, 에밀라.”

    베논의 폭탄이 레바논의 심장부로 들어가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제이나는 비로소 내 말을 이해한 모양이다.

    표정이 구겨진 성녀 앞에서 나는 입술을 당겨 웃었다.

    “성녀가 측근보다는 머리가 좋군요.”

    제이나가 입술을 깨문 채 깊은 고민에 빠져 있던 그때.

    사사삭-

    ‘…음?’

    나는 우물거리던 제이나의 입이 돌연 석상처럼 굳은 걸 보곤 생각했다.

    ‘…시간이 멈췄어.’

    쩌저저적-

    바로 그때 내 바로 옆에 커다란 균열이 생기더니.

    등까지 내려오는 검은 장발의 남자가 균열 사이로 걸어 나온다.

    ‘오오, 베논. 설마 아까 내 부름에 응한 건가?’

    “오셨습니까?”

    내가 나름대로 정중함을 갖춰 인사하자.

    베논은 무심히 나를 보다가 고개를 돌려 제이나를 보곤 얼굴을 구긴다.

    [레바논… 그 망할 년이 개수작을 부렸군.]

    ‘…음? 어어?’

    갑자기 손바닥에서 거대한 대검을 꺼내어 드는 베논.

    그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석상처럼 굳어 있는 제이나의 목을 치려던 그때.

    깡-

    어느새 온 건지.

    레바논이 베논의 일격을 검으로 틀어막고는 빙긋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이러시면 안 되죠? 직접적인 개입은 위반 행위잖아요?]

    [먼저 규칙을 어긴 건 네년이다.]

    베논이 으르렁거리자 레바논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규칙을 어기다니요? 저는 제 종에게 신탁을 내렸을 뿐이지 직접적으로 개입한 적이 없는데요?]

    [직접적으로 개입한 적이 없다고? 그럼 흑남이 바알에게 죽을 뻔했을 때는 개입하지 않은 게 되는 건가?]

    베논이 옛일을 꺼내어 들먹이자.

    레바논의 표정이 사나워진다.

    [그건 누가 먼저 도착하느냐의 차이였을 뿐인 거지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잖아요? 그럼 흑남을 그냥 죽게 놔뒀어야 했을까요?]

    [어쨌건 먼저 규칙을 위반한 건 네년이다.]

    베논의 말에 레바논의 얼굴에 한기가 어리어 간다.

    [웃기지 말아요. 그렇게 따지면 당신도 저보다 늦었을 뿐이지 엄연히 개입한 거나 다름없어요.]

    [푸하하하하하! 그게 개입이라고? 그래, 그렇다고 치지. 그럼 네년이 지금 하고 있는 이 짓거리도 개입이나 마찬가지다. 네 종이 네 명령을 따르는 것부터가 엄연한 개입이란 말이다.]

    [그래서 어쩌라고요? 규칙을 위반한 건 내가 아닌 당신인데요?]

    레바논의 물음에도 아랑곳 않고 제 말만 이어 가는 베논.

    [규칙을 하나 더 추가하지. 앞으로는 종을 이용하건 뭘 하건 간접적인 개입도 금지하지.]

    [뭐라고요? 어이가 없네요. 내가 왜 당신의 말을 따라야 하는 건데요?]

    레바논이 날카롭게 쏘아붙이자.

    베논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린다.

    [간접적인 개입을 허용하겠다고 한다면, 나는 지금 이 순간 모든 흑마법사들에게 레바논 왕국을 몰살하라고 선언할 거다.]

    […뭐라고요? 그걸 말이라고 하나요?!]

    [직접적인 개입이 아니니 안 될 것도 없을 텐데?]

    베논은 이미 승리를 확신했는지 여유로이 말을 이어 간다.

    [흑남은 성기사를 죽일 때마다 흑마력이 오를 텐데, 만약 성마전쟁이 일어나면 누가 유리해질까?]

    […….]

    베논의 빈정거림에 레바논은 반박할 거리를 찾지 못했는지 침묵한다.

    […좋아요. 당신 말대로 하죠. 앞으로는 간접적인 개입도 없는 걸로 해요.]

    [이해가 빠르군.]

    레바논을 보며 손을 까딱거리는 베논.

    [그럼 네 종에게 당장 이 땅에서 꺼지라고 전해라. 그리고 향후 비슷한 시도가 내 눈에 들어오거든 곧장 네 종의 목을 쳐 버리겠다. 이해했나?]

    베논이 경고를 날리기 무섭게.

    악귀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린 레바논이 균열 속으로 사라진다.

    ‘갔네.’

    나는 레바논이 사라진 자리를 가만히 보다가 슬쩍 베논을 바라봤다.

    ‘약간 억지 부리는 게 아닌가 싶었는데 제법 협상을 잘하시는구만.’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너를 도와준 게 아니라 레바논의 수작질에 내 신도들이 갈라지는 게 보기 싫었을 뿐이다.]

    “아하…….”

    내가 멋쩍게 고개를 끄덕이던 중.

    베논이 나를 보며 묻는다.

    [그런데 너는 왜 전쟁을 회피하는 거지? 흑마력을 얻는 데는 최적의 환경일 텐데. 제른이라고 했던가… 그 녀석을 지지했다면 분명 너는 쉽사리 강대한 힘을 얻을 수 있었을 거다.]

    “그랬겠죠. 저도 제른의 생각이 틀리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소 거친 감이 있을 뿐이지 그도 그 나름대로 흑탑을 위해서 그랬던 걸 테니까요.”

    나의 대답에 베논이 의문을 표한다.

    [그런데 왜 그를 축출한 거지?]

    “제가 축출한 게 아니라 그냥 놈이 제 손으로 무덤을 판 겁니다. 뭐, 성녀가 저렇게 비상식적인 힘을 가졌을지 제른이라고 알았을까요?”

    나는 피식 웃으며 말을 이어 갔다.

    “여하튼 강한 힘, 저도 좋아하죠. 제른의 말대로 전쟁을 일으키면 강한 힘을 얻을 수 있다는 것도 압니다. 하지만 저는 막무가내로 전쟁을 일으킬 생각은 없어요.”

    […네가 원하지 않더라도 언제고 전쟁은 일어날 거다. 예전에도 그래 왔으니 앞으로도 그러겠지.]

    ‘뭐… 틀린 말은 아니야. 내가 전쟁할 생각 없다고 소리쳐도 다른 놈들이 귀를 막고 있으면 무슨 소용이겠어?’

    나는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뗐다.

    “저도 압니다.”

    [잘 아는 놈이 이상한 짓만 하고 있나? 흑립… 유치원이라고 했나?]

    “이상한 짓이라뇨? 모두 전쟁을 대비하기 위한 저의 대비책입니다.”

    […대비책이라고?]

    베논이 의아하다는 듯 나를 바라보자.

    나는 덤덤히 대화를 이어 갔다.

    “평화를 원하니 전쟁을 준비하는 것이고, 전쟁을 준비하기 위해서는 먼저 내실을 다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가장 중요한 내실부터 다지고 있는 거고요.”

    [호오…….]

    나의 말에 베논의 입가가 미세하게 올라간다.

    [푸하하하하하! 흑마법사와는 좀처럼 어울리지 않는 생각이군. 이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겠지.]

    “뭐, 그렇겠죠. 납치당해서 아등바등 살다 보니까 여기까지 온 거지 애당초 저는 흑마법사가 될 생각도 없었으니까요.”

    내가 어깨를 으쓱이자 베논이 나지막이 묻는다.

    [그래서 널 납치한 흑마법사를 원망하나?]

    “뭘 원망까지 합니까? 제가 힘이 없어서 납치당했던 건데요. 아, 물론 그 얼굴도 기억 안 나는 놈은 찢어 죽여도 시원찮죠. 다만…….”

    나는 잠시 말끝을 흐렸다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예전처럼 흑마법사들을 혐오하지는 않게 됐죠. 오히려 흑마법사들을 위해 내실까지 다지고 있으니 이 상황이 좀 웃기기도 하고요. 그래도 어쩌겠어요? 기왕 흑남이 된 거, 흑탑이 다른 왕국들의 침공에 안 무너질 정도로 강하게 만들어야죠. 그래야 저도 편하게 살 것 아닙니까?”

    [그렇군.]

    “막말로 다른 왕국의 침공에 흑탑이 무너지면 탑주 머리랑 제 머리부터 찾으려고 할 텐데요.”

    내가 피식 웃음을 흘리자.

    [앞으로도 네 행보를 주시하마.]

    베논은 그런 나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등을 돌려 균열 속으로 들어가려 한다.

    ‘…아!’

    그때, 퍼뜩 내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고.

    나는 사라지려는 베논의 등에 대고 소리쳤다.

    “잠깐만요! 제가 바알에 대해 조사하다가 알게 된 건데, 도대체 재앙의 문이 뭡니까? 그곳에서 이 세상의 것이 아니라 대륙을 멸망시킬 기괴한 것들이 나온다고 적혀 있던데, 사실인가요?”

    내 외침에 베논의 발이 잠시 멈칫거린다.

    [알려 주는 것도 개입이다. 스스로 알아내라.]

    그 말을 끝으로 베논은 균열 속으로 사라졌고.

    ‘아오… 그냥 몰래 좀 알려 주고 가지. 아, 그럼 걸리려나?’

    내가 베논의 등을 보며 아쉬움에 한숨을 내뱉던 그때.

    움찔-

    굳은 듯 멈춰 있던 제이나의 입술이 다시금 꿈틀거리기 시작한다.

    ‘전부 돌아간 모양이네.’

    내가 다시 시간이 움직이는 걸 파악한 그때.

    “하지만…….”

    화아아아악-

    무어라 말을 하려던 제이나의 몸에서 갑자기 찬란한 신성력이 터져 나온다.

    ‘이건…….’

    “시, 신탁! 레바논 님의 신탁이 내려왔다! 오오! 레바논이시여!”

    그 모습을 본 에밀라는 바닥에 납작 엎드려 레바논의 이름을 부르짖는다.

    ‘뭘 그렇게 경배를 해. 어차피 내용 다 아는 뻔한 신탁인데.’

    내가 속으로 혀를 차던 중.

    제이나의 몸에서 흘러나오던 빛이 점점 잦아들었고 감겼던 그녀의 눈이 천천히 열렸다.

    “이게 도대체 무슨……. 신탁이… 신탁이 바뀌었어요…….”

    하나 어째선지 제이나가 계속 같은 말을 중얼거리며 혼란스러워하는 모습을 보이자.

    에밀라는 그런 그녀를 다독이며 조심스럽게 묻는다.

    “레바논 님께서는… 뭐라고 하셨습니까?”

    “그냥… 돌아오라고 하셨어요.”

    * * *

    한편, 같은 시각.

    흑탑의 외곽에 위치한 한적한 공터 위로.

    로브를 눌러쓴 사람들이 분주히 움직인다.

    “모인 인원은… 이게 전부인가?”

    고작해야 열 명 남짓 정도만 모인 파멸 병단을 보며.

    제른이 씁쓸히 웃는다.

    “그나마 믿을 만한 놈들만 모아야 했던 탓에……. 죄송합니다…….”

    그의 심복이었던 보우렌이 고개를 푹 숙이자.

    제른은 밤하늘을 보며 나지막이 말한다.

    “밝게 빛날 때는 잘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어두워지고서야 비로소 보이는군…….”

    “…예?”

    “나를 좇았던 게 아니라 내 권력을 좇았던 놈들이다. 미련 가질 것 없다.”

    제른이 덤덤히 말하자 보우렌은 조심스레 우려를 표한다.

    “하지만 이 인원으로 성녀를 죽일… 아닙니다.”

    겨우 모인 작은 희망의 불씨에 찬물을 끼얹고 싶지 않아서였을까.

    보우렌은 애써 뒷말을 삼킨다.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나?”

    “…아닙니다. 저는 오늘이 성녀를 죽이기 위한 최적의 날이라고 생각합니다.”

    흑탑의 흑마법사 대부분이 언데드 운송을 위해 자리를 비운 지금이야말로.

    그들에게 있어 최적의 상황이라 볼 수 있을 터.

    “다만, 저는 그저… 성녀를 죽일 수 있을지 조금 걱정이 됐을 뿐입니다.”

    이미 성녀의 강함을 제른에게서 들었던 탓인지.

    보우렌의 얼굴에 걱정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보우렌, 너는 아직 젊다. 지금이라도 발을 빼는 것도 좋은 선택이다.”

    제른의 말에 보우렌은 펄쩍 뛰며 강하게 부정한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부탑주님의 뜻이 곧 제 뜻입니다. 설령 그 끝이 불구덩이 속이라고 해도 따르겠습니다.”

    “…멍청한 놈.”

    제른은 피식 미소를 흘리고는 모여든 흑마법사들을 보며 천천히 입을 뗐다.

    “너희가 단순히 나와의 옛정을 잊지 못해 이 자리에 나온 거라면, 지금이라도 돌아가라. 그게 너희가 오래도록 연명할 수 있는 길이다. 하지만…….”

    제른이 길게 숨을 내뱉고는 무거운 목소리로 말을 이어 간다.

    “너희가 진정 흑탑을 생각한다면… 지팡이를 잡아라. 그리고 내 뒤를 따라라.”

    제른의 조용한 선포가 끝나자.

    턱-

    “제른 님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저희의 목숨과 흑탑의 부흥을 바꿀 수 있다면 기꺼이 내놓겠습니다.”

    누구 할 것 없이 지팡이를 잡고는 제른의 앞에 늘어선다.

    “멍청한 놈들…….”

    달빛 아래로 살며시 드러났던 제른의 미소가 곧 사라지고.

    “다른 무엇보다 성녀가 최우선순위다. 성녀를 찾아라. 그리고 반드시 죽여라. 그게 우리의 사명이자 우리가 나아가야 할 미래의 시발점이다.”

    제른의 고요한 외침이 그들의 귓가를 울린다.

    “그런데 제른 님… 흑남은 어떡할까요? 성녀를 죽이려 들면 반드시 그가 훼방을 놓으려 할 것 같습니다만…….”

    보우렌이 조심스럽게 묻자 제른은 무심하게 대답한다.

    “죽이는 건 성녀 한 명뿐이다.”

    “…그를 죽이고 싶어 하지 않으셨습니까? 기회가 된다면 성녀와 흑남을 한 번에 처리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만.”

    “그랬었지. 지금도 놈을 보면 화가 날 거다. 하지만…….”

    흑탑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말을 이어 가는 제른.

    “그건 내가 부탑주였을 때의 이야기다. 보우렌, 내가 그 늙은 신관 놈의 도움을 받고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아나?”

    “…잘 모르겠습니다.”

    보우렌이 고개를 젓자 제른이 피식 웃으며 말한다.

    “아무리 생각이 다르고 사상이 다르다고 해도 흑마법사는 흑마법사라는 거다.”

    “…예?”

    이해하기 어렵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는 보우렌.

    “속 모를 레바논의 노예를 믿기보다는, 방식은 다를지언정 흑탑의 미래를 생각하는 흑남을 믿는 게 낫다는 뜻이다.”

    “아아…….”

    보우렌은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다가 깊은 한숨을 내쉰다.

    “역시 그 늙은 쥐새끼 놈을 죽였어야 했는데……. 성녀를 죽이고 반드시 그 늙은이도 찾아 죽이겠습니다.”

    “백 명분의 피를 대가로 얻어 낸 교수인데, 탑주가 알면 눈물을 흘리겠군.”

    제른은 싱거운 농담을 던지고는.

    결의를 다진 채 흑마법사들을 보며 말한다.

    “지금부터 우리는 흑카데미로 이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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