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
“…재앙의 문이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제이나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나는 그녀를 보며 생각에 잠겼다.
‘모르는 건가……? 아니면 연기를 하고 있는 걸까? 그래… 재앙의 문에 대해선 모를 수 있어. 나도 아직 그게 뭔지 감이 안 잡히니까. 그럼 헬렌에 대해 좀 더 질문을 해 보자.’
그녀가 진짜 모르는 걸 수도 있기에.
나는 다시금 질문했다.
“그럼 질문을 좀 바꿔 보죠. 대신전 밑의 지하 감옥 혹은 지하 미궁이라 불리는 곳에 갇혀 있는 사람 한 명을 만나 보고 싶은데, 혹시 가능합니까?”
“…누구를요?”
“헬렌입니다.”
내가 나지막이 대답하자.
제이나의 얼굴에 큰 물음표가 걸린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전대 성녀님이 왜 지하 감옥에 있다는 거예요?”
‘…뭐?’
“당신이야말로 무슨 소리를 하는 겁니까? 그녀는 지하 감옥에 있을 텐데요?”
“네? 은퇴하신 전대 성녀님이 왜 지하 감옥에 있을 거라 생각하시는 건가요? 어디서 이상한 말씀을 듣고 오신 것 같은데…….”
제이나는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나를 바라보며 말을 이어 간다.
“그녀는 지금 안식의 대지에서 편하게 쉬고 있으실 거예요.”
“안식의… 대지요?”
나의 물음에 제이나는 안식의 대지에 대해 간단한 설명을 해 주었다.
‘그러니까 안식의 대지는 레바논 왕국에서 큰 공로를 세운 양반들이 은퇴하고 나서 쉬러 가는 곳이다 이건데…….’
내가 알고 있던 정보와 제이나가 알고 있는 정보는 너무도 달랐기에.
나는 고심하다가 힐끔 제이나를 바라봤다.
‘이 여자… 아예 아무것도 모르는 것 아냐? 아니면 내가 잘못 알고 있었던 걸까?’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고는 입을 뗐다.
“그럼 하나만 더 묻죠. 전대 성녀가 안식의 대지에 있다고 했는데, 혹시 그녀가 안식의 대지로 들어간 걸 봤습니까? 아니면 안식의 대지에 헬렌이 있다는 걸 목격했다든가요.”
“아니요? 교황님이 알려 주신 건데요.”
‘이런 망할… 직접 본 게 아니라 그냥 전해 들었다고? 그래, 뭔가 이상하더라.’
내가 아크 교수에게 헬렌을 언급했을 때, 분명 그는 당혹스러운 반응을 보였었다.
‘속단하기에는 이르지만 내가 가진 정보가 맞을 확률이 더 높겠어.’
교황이 제이나에게 거짓 정보를 알려 줬을 가능성도 있을 터.
“그렇군요. 그런데 혹시 저도 안식의 대지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
“당신이요? 흠… 원래는 불가능할 텐데… 제 허락이 있으면 가능하지 않을까요? 왜요? 혹시 관심 있나요?”
어째선지 평소보다 더 눈을 반짝이는 제이나를 보며 나는 생각했다.
‘뭐야. 부담스럽게 갑자기 왜 저래?’
“아니요. 그냥 물어본 겁니다.”
“혹시 안전이 걱정되는 거라면 걱정 마세요! 제가 옆에서 단단히 지켜 드릴 테니까요.”
“호의에는 감사드리지만 제가 미치지 않고서야 레바논 왕국에 갈 일은 없을 것 같군요.”
내가 딱 잘라 말하자 제이나는 시무룩한 표정을 짓는다.
“여하튼 잘 알겠습니다. 쉬시죠. 저도 쉬어야겠습니다.”
그러나 나는 아랑곳 않고 내 방에 돌아와 생각에 잠겼다.
‘헬렌이 바알의 추종자라는 걸 성녀는 전혀 모른다라……. 대체 본국에서 얼마나 무시를 당하고 살아온 거야?’
남들은 다 아는 정보를 하물며 성녀가 모른다니?
‘물론 그 괴물 같은 힘을 숨기고 살아왔으니 그렇겠다만… 아오, 골머리가 아프네. 결국 재앙의 문에 대해서 알아낸 것도 없고.’
역시 전대 성녀인 헬렌을 만나 봐야만 하는 걸까?
‘하지만 무슨 수로 레바논 왕국의 감옥에 있는 사람을 만나? 후… 뭔가 빠뜨린 건 없는지 다시 살펴봐야겠어.’
나는 다시금 찬찬히 책을 읽어 나가기 시작했다.
* * *
이 주 뒤.
웅성웅성-
‘엄청나게 몰려들었네.’
나는 흑립 유치원 앞으로 몰려든 학부모들과 예비 원생들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긴장할 것 없단다. 아버지가 말씀하신 것 기억하지?”
“네, 방해되는 놈들은 전부 머리통을 으깨 버릴게요!”
“그래, 그래. 장하구나.”
자녀를 독려하는 학부모를 비롯하여.
“아들아, 흑립 유치원에 입학하지 못하면 내가 어떻게 한다고 했지?”
“가문을 떠나 살겠습니다.”
아이답지 않게 필사의 각오를 보이는 예비 원생의 목소리가 내 귓가에 들려왔다.
‘아니… 무슨 입학 못 한다고 가문을 떠나네 마네 하고 있어?’
내가 어이가 없어 실소를 흘리던 가운데.
볼드 학장이 내게 다가와 나지막이 보고한다.
“랄프 님, 두 번째 시험 준비가 다 끝났습니다.”
“그래? 언데드랑 함정 배치는 다 했고?”
“예. 각 층마다 적절하게 배분했습니다.”
볼드 학장의 대답에 나는 무심히 말을 이어 갔다.
“교수들은?”
“던전에 들어갈 준비를 끝내 놓은 상태입니다.”
“잘했어. 무엇보다 안전이 우선이야. 혹시라도 안에서 사고가 날 것 같으면 시험은 신경 쓰지 말고 바로 개입하라고 해.”
그에 볼드 학장이 교수들에게 다가가 나의 명령을 전달하자.
교수들은 흑립 유치원 옆에 있는 작은 입구로 들어가기 시작한다.
“랄프 님, 교수들을 진입시켰으니 이제 시작하겠습니다.”
볼드 학장은 내게 보고한 뒤.
학부모들 앞으로 나아가 크게 소리친다.
“시험을 진행하기에 앞서 서류 심사 통과를 축하한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한 검증 과정이었을 뿐, 곧 치러질 두 번째 시험에서 예비 원생들은 자신의 힘과 지혜를 증명해 보여야만 할 것이다.”
볼드 학장이 학부모들과 원생들을 보며 말을 이어 간다.
“그럼 지금부터 두 번째 시험을 시작하겠다. 시험은 간단하다. 각 층마다 자리하고 있는 시련을 통과하고 마지막 층에 있는 교수에게서 합격증을 받아 오면 된다.”
“안에서 다른 애를 죽여도 되나요?”
“상관없다만 그렇게 하면 네놈은 즉시 불합격 통보를 받겠지.”
볼드 학장이 눈을 부라린 채 질문을 던진 아이를 노려보자.
질문한 예비 원생은 주눅이 들어 학장의 시선을 피한다.
“그럼 지금부터 예비 원생들은 저쪽에 보이는 던전의 입구로 들어가라. 이미 시험은 시작됐다.”
볼드 학장의 말이 끝나자.
“비켜! 내가 먼저야!”
“아악!”
아이들은 서로 먼저 던전에 들어가기 위해 서로를 밀치며 악다구니를 내질렀다.
그렇게 예비 원생들이 던전에 들어가고 얼마나 지났을까.
‘흠…….’
나는 어느덧 어두워져 가는 하늘을 보며 생각했다.
‘생각보다 오래 걸리네. 난이도 자체가 높지는 않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잠잠한 던전 입구를 하염없이 바라보던 그때.
“흐윽, 허억…….”
“바, 밖이다! 밖이야! 엄마! 나 합격증 받았어!”
드디어 던전에서 하나둘 아이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자 일부 학부모들은 크게 기뻐하며 자기 아이들에게로 달려간다.
“아그란!”
“바젠! 바젠! 잘했어! 너무 잘했어!”
“네가 우리 가문을 다시 일으켜 세울 기둥이 되겠구나.”
2차 시험에서 통과한 예비 원생들이 부모와 기쁨을 만끽하는 사이.
곧 던전에서 나온 아이들의 숫자가 600명이 되자.
“여기까지가 두 번째 시험의 통과자들이다.”
볼드 학장이 600번째 예비 원생을 보며 소리친다.
“아아… 어떡해요, 우리 아이는 그럼 불합격이라는 소리잖아요!”
“여보, 진정해요. 올해가 가도 내년이 있잖아요.”
“그래도… 그래도…….”
합격하지 못한 예비 원생의 학부모들은 아쉬움을 못 이기고 탄식을 내뱉었고.
“아버지… 죄송해요…….”
“…못난 놈. 돌아간다.”
일부 학부모들은 탈락한 아이들을 데리고 그대로 발길을 돌려 버리기도 했다.
“시험에서 떨어진 예비 원생들은 이제 돌아가도 좋다.”
학부모들과 원생들이 쓸쓸히 발길을 돌리는 사이.
볼드 학장은 합격자들을 보며 다시 소리친다.
“마지막 시험은 내일 진행이 될 거다. 그러니 합격자들은 충분히 휴식을 취하고 내일 있을 시험을 준비해라. 이상이다.”
* * *
다음 날.
나는 새롭게 이사한 흑립 유치원의 원장실 안에서 눈을 떴다.
‘어우… 어제는 파멸 마법에 대해 심도 있게 공부 좀 해 보려 했는데, 결국 못 했네…….’
어제 두 번째 시험이 끝난 직후.
“제발… 우리 아이 좀 입학시켜 주세요. 제가 이렇게 엎드려 부탁드립니다.”
“흑남께서 시키시는 거라면 무엇이든 다 하겠습니다. 그러니 제 딸만큼은…….”
일부 학부모들이 내게 달려와 사정사정을 한 탓이었다.
‘솔직히 그 정도로 매달릴 줄은 몰랐는데. 그래도 규칙은 규칙이니까 다 내보냈지만, 거참… 어쩔 수 없는 일이지.’
학부모들에게는 내년을 기약하라고 했다.
‘뭐… 한 살 늦게 입학한다고 크게 달라질 것 없잖아? 물론 내년에도 떨어질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다만.’
내가 고개를 젓던 중.
똑똑-
“볼드 학장입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들어와.”
볼드 학장이 내 집무실을 찾아와 보고한다.
“방금 전 마지막 시험을 끝마쳤고 정확히 200명의 예비 원생들을 떨어뜨렸습니다.”
“…벌써 마지막 시험을 끝냈다고?”
마지막 시험은 교수들이 예비 원생들의 힘과 잠재력을 평가하여.
성장 가능성이 떨어지는 학생들을 떨어뜨리는 시험이었건만.
벌써 시험을 마무리 지었다니?
“600명을 벌써 다 평가했다고? 대충한 것 아냐?”
“흑마력에 친화력은 있는지, 저주를 걸어 정신력이 얼마나 뛰어난지 위주로 평가한 덕에 시간이 크게 소요되지 않았습니다.”
“수고들 했어. 시험을 치르는 데 도움을 준 교수들에게는 내가 따로 연구비를 지원해 준다고 전해.”
나의 말에 볼드 학장의 얼굴이 환해진다.
“감사드립니다.”
“학장은 따로 원하는 건 없어?”
“아닙니다. 저는 이미 레논 부탑주님께 많은 것을 지원받고 있습니다.”
볼드 학장이 송구스러워하며 거절하다가.
“아, 그리고 레논 부탑주님께서 입학식에 참석하지 못하여 죄송하다는 전언을 제게 보내왔습니다.”
“아아, 됐어. 어차피 지금 흑탑은 엄청 바쁜 상황이잖아?”
완성된 언데드 군단을 레바논 왕국 쪽에 보내야 했던지라.
언데드 군단을 호송하는 일에 흑탑의 흑마법사들이 대거 투입됐다고 이미 레논 부탑주에게 전해 들었었다.
‘거기다가 입학식이라 해 봐야 애들 입학식인데, 부탑주가 참석할 것까진 없지.’
“그보다 볼드 학장도 크게 고생했는데 고생한 값은 받아야지. 받아.”
내가 아공간 주머니에서 미스릴괴 두 개를 꺼내어 그에게 내밀자.
“…감사합니다.”
볼드 학장은 정중히 미스릴괴를 받아 주머니 속에 슬그머니 밀어 넣는다.
‘거절하더니 손은 정직하네.’
나는 주섬주섬 미스릴괴를 챙기는 볼드 학장을 보며 계속 말했다.
“그보다 200명을 떨어뜨렸으면 400명이 남았겠네.”
“그렇습니다.”
‘정원 미달이긴 하지만 차라리 이게 낫지.’
100명의 모자란 원생들을 받아 흑립 유치원의 명예를 실추시키느니.
보장된 400명을 받아 흑립 유치원의 위신을 높이는 게 내 입장에서도 나았다.
“지금 합격자들은 어디에 있지?”
“정원에 모아 뒀습니다.”
“그래? 그럼 바로 가지.”
나는 볼드 학장과 함께 곧장 예비 원생들이 모여 있다는 정원으로 이동했다.
“아아, 너무 떨려.”
“앞으로 4년간 이곳에서 생활하는 거잖아.”
“쉿, 쉿! 흑남님께서 오셨어!”
내가 원생들 앞에 모습을 보이자.
떠들썩한 분위기가 순식간에 잦아들었다.
‘눈빛들이 살아 있네.’
나는 아이들의 초롱초롱한 눈빛을 보고 속으로 미소를 짓고는.
임시로 설치해 둔 단상 위로 올라갔다.
“먼저 시험을 무사히 통과하고 흑립 유치원의 원생들이 된 걸 축하한다. 앞으로 너희는 이곳에서 최고의 흑마법사가 될 수 있도록 다양한 교육들을 받게 될 거다. 또한!”
나는 원생들과 학부모들을 보며 계속 말했다.
“성적이 우수한 원생들은 교수들의 판단하에 흑카데미로 입학하도록 조치할 예정이다.”
“흐, 흑카데미로 곧바로 입학시켜 준다고?”
“세상에…….”
나의 발언에 깜짝 놀라 수군거리는 학부모들.
“나이가 많고 적음은 상관없다. 오로지 성적과 실력만이 흑카데미로 입학하게 되는 지름길이 될 거다. 그러니 정진하고 또 정진해라. 이상이다.”
내가 간단한 연설을 끝마치자.
와아아아아아-
아이들의 열렬한 환호가 정원을 쩌렁쩌렁하게 울린다.
“교수들은 인원 나눠서 일부는 원생들을 기숙사로 인도하고, 일부는 학부모님들 나가시는 데까지 배웅해 드려.”
“예!”
* * *
일주일 뒤.
흑립 유치원, 원장실 안.
‘후우… 이건 좀 많이 난해하네. 마력은 충분한 것 같은데, 도대체 마법진 몇 개를 동시에 구현해야 되는 거야?’
나는 흑탑의 도서관에서 가져온 마법서를 읽다가.
답답한 마음에 자리에서 일어나 슬며시 창밖의 매점을 바라봤다.
‘크… 좋구나.’
나는 줄을 서 있는 학생들과 원생들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 저녁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원생들이랑 학생들이 섞여 매점을 사용해 주는 덕에.
요즘 흑마력이 들어오는 양도 확실히 체감이 될 정도로 늘어난 상태였다.
‘양쪽 심장의 서클도 합치면 10서클이구나. 물론 나누면 5서클이지만…….’
어쨌건 나의 최근 행보들로 인해 내 흑마력과 신성력은 예전에 비해 크게 증가했다.
다만 최근 신성력 착즙기를 썼음에도 불구하고 신성력이 흑마력에 비해 부족한 건 어쩔 수 없었지만 말이다.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하지. 아무리 그래도 흑마력 3배에 비할 바는 아니니까.’
나는 홀로 고개를 끄덕이곤 다시 창밖을 주시했다.
‘흠… 근데 확실히 매점이 작아서 그런지 줄이 길어졌네. 당장 추가된 원생들 숫자를 감안하면 작은 편이긴 하지. 흑카지노는 몰라도 매점을 좀 확장하긴 해야겠어.’
원생들이 흑카지노를 이용하는 건 이미 막아 둔지라.
굳이 흑카지노까지 확장할 필요는 없을 터.
‘그래. 내일 호밀에게 확장 공사를 준비하라고 언질을 해 둬야겠어.’
잠시 매점을 보며 머리가 어느 정도 식자 나는 다시 자리에 앉아 읽던 책을 옆으로 밀치고는.
탑주에게서 받았던 두 번째 책을 내려다보다가 천천히 책장을 펼쳤다.
‘내가 어디까지 봤더라……. 아, 여기구나. 근데… 대체 어떤 정신 나간 놈이 이딴 책을 쓴 거야?’
내가 이 책을 잘 보지 않은 이유는.
[나는 최강이다. 나는 무적이다.]
최근까지 본 곳들이 전부 책의 저자인 자신을 칭찬하는 내용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분명 내가 흑마법이랑 연관된 책을 달라고 했었던 것 같은데…….’
그래도 어쩌겠는가?
기왕 받은 거 끝까지 읽기라도 해야지.
[마법사는 쓰레기다. 흑마법사도 다를 게 없다.]
‘…얼씨구?’
[아무리 마법사들이 막대한 마력과 세상의 이치를 뛰어넘는 지식을 갖고 있다고 한들, 지척까지 다가온 검사를 처리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호오…….’
처음에는 저자의 칭찬 일색이던 책의 내용이 서서히 변해 간다.
[일국의 성을 박살 낼 힘이 있어도 자신의 눈앞에 드리운 검 하나에 벌벌 떨어야 하는 게 마법사다. 언데드가 없는 흑마법사 또한 병신이다.]
‘제법 평가가 신랄한데? 솔직히 아주 틀린 말도 아니고.’
최근 레바논의 오함마에게 제른이 박살 났던 걸 생각하면.
책을 쓴 저자의 말도 어느 정도 일리가 있어 보였다.
[언제까지고 언데드들에게 내 등을 맡길 수는 없었기에, 나는 어떻게든 이 약점을 보완해 보고자 했다. 그리고 마침내 결론을 내렸다. 그건… 바로 주먹이다!]
‘…뭐? 그렇게 내린 결론이 주먹이라고?’
이건 또 무슨 신박한 개소리인가?
‘아니… 어이가 없네.’
내가 픽 웃음을 흘리던 그때.
“무슨 책인데 그렇게 웃으시는 건가요?”
어느새 다가온 제이나가 나를 보며 묻는다.
“간단한 연구 자료였습니다.”
“흑립 유치원이 자리를 잡아서 그런지 조금 여유로우신 모양이네요?”
‘이곳에서 세상 제일 여유롭게 지내는 사람은 넌데?’
제이나의 물음에 나는 책을 도로 주머니에 넣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조금은 여유가 생겼죠. 하지만 마냥 여유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군요. 아 참, 오늘 레바논 님께서 제게 또 신탁을 내리셨어요.”
‘…뭐 어쩌라는 건데?’
뜬금없이 제이나가 화제를 돌리자.
나는 무덤덤하게 말을 내뱉었다.
“아, 그래요? 그거 잘됐네요.”
“레바논 님께서는 제게 더 이상 상황을 방관하지 말라고 하셨죠.”
“그렇군요.”
“그래서 전 슬슬 레바논 왕국으로 돌아갈까 해요.”
제이나의 말에 나는 순간 놀라 그녀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봤다.
‘진짜로? 진짜 간다고? 이야, 드디어 이 괴물 거머리가 돌아가는구나. 레바논이 정말 큰일을 해냈네!’
“아쉽지만 잘 생각하셨습니다.”
내가 새어 나오려는 미소를 억누르고는 짐짓 아쉽다는 표정을 보이자.
어째선지 제이나는 단호한 표정으로 나를 보며 말한다.
“단, 당신도 함께 갈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