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
“흑립… 유치원이라니요? 그건 대체…….”
“말 그대로입니다. 흑카데미에 들어가기에는 아직 어린 자제들을 더 일찍 흑마법에 익숙해지도록 만드는 기관인 셈이지요.”
“허어…….”
좌중이 탄식하자 나는 얼른 말을 이어 갔다.
“대개 1학년들이 흑카데미에 입학하거든 시체를 다루는 것에 큰 거부감을 보이거나 흑마력을 다루는 데에 애를 먹는 모습을 많이 보이더군요. 하지만 일찍부터 그런 거부감을 없애는 교육을 한다면 학생들은 지금보다 더욱 발전해 나갈 수 있을 겁니다.”
나의 말에 나가란 탑주의 눈이 이채롭게 빛난다.
“어렸을 적부터 체계적인 교육을 시켜 뛰어난 흑마법사를 육성하자는 거군. 으허허허허허허!”
내 의견이 마음에 들었던 걸까.
나가란 탑주가 흡족한 미소를 보이며 나를 바라본다.
“그런데 그게 자네가 원하는 보상인가?”
“그렇습니다.”
내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나가란 탑주는 나지막이 탄성을 내뱉는다.
“허어… 보통은 재물이나 힘을 탐하기 마련이건만 자네는… 흑탑의 발전만을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 모양이군.”
‘흑카데미가 발전할수록 내 흑마력도 점점 늘어나니까. 다만…….’
나는 슬며시 나의 심장 부근을 어루만졌다.
‘흑마력이랑 신성력 자체는 꽤나 많이 늘어난 것 같은데… 어째 더 이상 고리의 숫자가 늘어나지 않고 있는 게 문제지만.’
나도 흔히 노마법사들이 말하던 벽에 막히기라도 한 걸까.
‘뭐… 그렇다고 서클의 숫자가 중요한 것도 아닌 것 같으니까.’
당장 8서클 흑마법사라고 알려졌던 제른 부탑주도.
레바논의 오함마에게 머리가 으깨어지지 않았던가?
‘아무리 흑마력이 많다고 해도 상대가 흑마법을 사용할 시간을 주지 않거나, 흑마법을 무시하는 능력이 있다면 소용이 없어.’
물론 성녀 제이나는 예외라고 봐야겠으나 여하튼 나는 그때의 일로 다시금 깨달았다.
‘흑마력과 신성력의 양? 중요하지. 하지만 흑마법사들에게는 신체적 능력도 필요해. 그리고 흑마법을 다루는 센스도.’
나는 생각을 정리하고는 나가란 탑주를 보며 미소를 보였다.
“흑탑만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흑탑이, 나아가 검은 대지가 발전할수록 제게 돌아올 것도 많아질 테니까요.”
“으허허허허허! 자네 말이 맞네.”
좌중을 넌지시 바라보며 질문을 던지는 나가란 탑주.
“흑립 유치원의 건립에 반대하는 자가 있나?”
하나 탑주의 물음에 누구도 아니라고 대답하는 이는 없었다.
“좋군. 그럼 흑카데미 주변의 부지에 흑립 유치원을 건립하고 새 교수들을 채용해야겠군. 교수 문제야 내가 도와줄 수 있긴 하네만 부지는…….”
나가란 탑주는 레논 부탑주와 나를 한 번씩 보며 빙긋 웃는다.
“부지 문제는 서로 잘 이야기하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내가 고개를 숙이곤 자리로 돌아가려는 찰나.
“아, 잊을 뻔했군. 이것도 받게나.”
나가란 탑주가 내게 다가와 작은 주머니를 내민다.
“이건……?”
“약속했던 책들이네.”
“아아, 감사합니다.”
‘아공간 주머니인가 보네.’
내가 활짝 웃으며 주머니를 받아 들자.
나가란 탑주가 나지막이 말한다.
“필사본이라고는 하나 외부에 유출되는 일은 없도록 하게.”
‘당연하지. 누구 좋으라고 내가 이걸 보여 줘?’
“물론입니다.”
* * *
대회의가 끝난 뒤.
커다란 연회가 열렸고 나는 그곳에서 온갖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저녁이 될 때쯤에서야 레논 부탑주를 대면할 수 있었다.
“참으로 고생 많으셨습니다.”
“고생은요? 레논 부탑주께서 고생하셨죠.”
제른이 흑탑에서 쫓겨나게 된 덕일까.
레논의 표정이 유난히 좋아 보인다.
“제른이 물러났으니 레바논 왕국과의 전쟁을 주장하던 세력의 힘도 한풀 꺾일 겁니다.”
“그런데 파멸학파 부탑주 자리가 공석이 되지 않았습니까? 그건 어떻게 채워지는 겁니까?”
“파멸학파 내에서 새로운 부탑주를 선정할 겁니다. 그게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요.”
‘호오… 그러니까 자기 학파 내에서 새로운 부탑주를 선임한다, 이건가?’
그렇다는 것은 다른 학파 출신이 파멸학파 부탑주가 될 일은 없다는 뜻일 터.
“아무래도 한 학파가 부탑주 자리를 독식하는 걸 막고자 하는 취지인 모양이군요.”
“맞습니다. 한쪽에 권력이 쏠려서 좋을 게 없으니까요.”
“그렇군요.”
나와 레논이 잠시간 대화를 나누던 중.
나는 레논을 보며 물었다.
“흑립 유치원 건립에 필요한 부지를 빌려주실 수 있으십니까?”
“하하, 빌려드리는 게 아니라 그냥 드려도 모자랄 판에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흑카데미의 모든 부지가 랄프 님의 것이라 생각하시고 편하게 이용하셔도 됩니다.”
‘오우야… 그럼 전부 내 땅이라 생각하고 마음대로 해도 되겠네?’
“호쾌하시군요.”
나의 칭찬에 껄껄 웃는 제른 부탑주.
“이제 미스릴 광산의 복구가 끝나 드워프들이 채굴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거기서 나오는 수입의 일부가 악마학파로 흘러 들어올 터인데, 외려 제가 더 감사할 따름입니다.”
“서로 돕고 사는 거죠.”
내가 옅은 미소를 보이자.
레논이 찬장에서 술병과 잔 두 개를 꺼내어 테이블에 놓는다.
“흑탑이 위기에서 벗어나 번영의 길로 들어선 이 기쁜 날에 술이 빠져서야 되겠습니까? 한잔하시죠.”
‘허 참… 제른이 파면당한 게 어지간히도 기뻤던 모양이네.’
나는 술잔을 받아 들곤 웃으며 소리쳤다.
“제른 부탑주의 파면을 위하여.”
“위하여! 하하하하!”
* * *
다음 날.
‘어우… 머리야…….’
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은 채 겨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 아저씨 은근히 술 잘 먹네.’
레논이 생각 이상으로 주당이었던 탓에 전날 필요 이상으로 술을 먹고 말았다.
‘어우… 얼른 씻고 움직여야지.’
당장 해야 할 일이 많다.
탑주에게서 받았던 책도 읽어 봐야 하고 흑립 유치원을 건설할 부지도 살펴봐야 한다.
‘책은 저녁에 읽고 일단 건설할 부지부터 정해야겠어. 근데…….’
나는 게슴츠레하게 뜬 눈으로 슬며시 일어나 옆방으로 갔다.
드르렁-
요란하게 코를 골고 있는 제이나를 보며 나는 생각했다.
‘이 인간들은 자기 방을 놔두고 왜 기어코 내 방에서 자는 건데? 에밀라는 또 어디 갔어?’
물론 한방을 쓰는 게 나도 성녀 일행을 관리하기 좋았다.
다만 대체 이 식충이 같은 놈들은 언제 본국으로 돌아가는 걸까.
“이봐요, 성녀 양반. 아침인데 좀 일어납시다.”
“으음… 음… 벌써요?”
“이미 학생들은 아침 먹고 수업을 준비할 시간인데요.”
나는 눈을 비비는 제이나를 보며 잔소리를 이어 갔다.
“근데 왜 자기 방을 놔두고 여기서 자는 겁니까?”
“그야… 혹시라도 또 습격을 받으면 어떡해요?”
“예?”
‘진짜 미쳤냐? 걱정은 널 습격할 암살자의 몫인데 왜 네가 걱정을 해?’
나는 어이가 없어 픽 실소를 흘렸다.
“후우… 말을 맙시다. 그보다 대체 언제 본국으로 돌아갈 겁니까?”
“본국이요? 으음… 글쎄요. 이곳이 생각보다 재미있어서 조금 더 있으려 하는데요.”
‘이런 빌어먹을…….’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고는.
로브를 그녀의 머리 위에 툭 던졌다.
“여하튼 나가야 되니까 빨리 그거라도 걸쳐요.”
“저는 이따가 나가면 안 되나요?”
“당신이랑 에밀라는 지금 제가 고용한 용병 신분이라는 걸 잊었어요?”
성녀가 흑카데미에 있다는 사실이 퍼지거든 혼란이 있을 걸 대비하여.
나와 볼드 학장은 그녀들에 내가 고용한 용병이라는 신분을 부여한 상태였다.
“연기를 할 거면 끝까지 제대로 좀 해 줘요. 학생들이 알게 되면… 더 이상 이곳에 머무르긴 어려울 겁니다.”
“어우… 알았어요.”
나의 잔소리에 결국 툴툴거리며 로브를 걸치는 제이나.
그녀가 대충 옷매무새를 가다듬는 걸 끝내자.
나는 그녀와 함께 흑카데미를 나갔다.
“근데 에밀라는 어딜 간 겁니까?”
“저도 잘 모르겠어요. 다만 최근에 무슨 큰 충격을 받은 건지, 갑자기 이 흑카데미에서 검을 잘 다루는 할머니를 발견했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그 사람이랑 대련하러 간다고 하던데요?”
“아아…….”
‘그 큰 충격은 아마 댁한테 받은 거겠지.’
자신이 목숨 걸고 지켜야 된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자기보다 더 강하다는 걸 목격했으니.
그 충격은 이루 말로 설명할 수 없을 터.
‘에나 할멈이랑 대련이라……. 하긴 둘 다 소드마스터이니 좋은 대련상대가 되긴 하겠어.’
“근데 오늘은 어딜 가는 건가요?”
“땅을 보러 갈 겁니다.”
“…땅이요?”
“흑립 유치원을 지을 땅 말입니다.”
나의 말에 제이나는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아아, 근데 그런 건 대체 어떻게 생각하시는 거예요?”
“뭐가요?”
“흑립 유치원 같은 것 말이에요.”
제이나의 말에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대륙의 유명한 가문 자제들도 어렸을 때부터 부모에게서 교육을 받지 않습니까? 거기서 영감을 받은 거죠.”
“그래도요. 흑립 유치원… 흑립 유치원이라……. 저도 본국으로 돌아가면 한번 진지하게 건의를 해 봐야겠어요. 아니면 랄프 당신이 와서 설립을 도와주는 건 어때요?”
‘뭐?’
“제가 미쳤습니까? 레바논 왕국에 가면 성기사들이 좋다고 제 목에 칼을 꽂아 넣으려 할 텐데요.”
“제가 지켜 드리면 되잖아요.”
제이나의 말에 나는 순간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다.
‘저 괴력녀가 날 지켜 주면 확실히 안전할 것도… 아니야!’
“그렇다고 해도 싫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레바논 왕국에 오실 건데요?”
“그냥 갈 생각이 없는데요?”
나는 제이나의 제안을 단호히 거절하면서도.
눈으로는 계속 부지를 훑었다.
‘흠… 이곳에는 호수가 있어서 좀 그런데. 그렇다고 흑카데미랑 너무 인접한 부위에 짓자니 검은 숲이 또 마음에 걸리고.’
나는 한참 동안 흑카데미 주변을 배회했고.
‘그나마 여기가 제일 괜찮을 것도 같은데.’
과거, 흑남 의식의 시초가 된 자리이자 아크 교수에게 하인들이 몰살했던 자리를 보며 생각을 이어 갔다.
‘조금 꺼림칙하긴 하지만 이곳 정도면 나쁘지 않긴 하겠어. 그래, 그냥 흑카데미 옆에다 짓는 게 낫지.’
“이곳이 좋겠군요.”
“여기가요? 으음… 뭔가 기운이 썩 좋지 않은 곳 같은데요.”
제이나는 내가 가리킨 땅을 보며 얼굴을 찌푸렸으나.
나는 내 의견을 철회할 생각이 없었다.
“그래도 이만한 곳도 없습니다. 이곳으로 해야겠어요.”
‘좋아. 땅은 대충 정해졌고, 이제 인부들만 끌어다가 모으면 되겠네.’
흑카데미까지는 아니더라도 나름대로 큰 건축물이 들어설 터이니.
꽤나 많은 시일이 소요될 것이다.
‘얼마나 걸리려나…….’
내가 땅을 보며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던 중.
갑자기 제이나가 로브를 벗어 던지는 것 아닌가?
“뭐 하는 겁니까?”
“뭘 하긴요. 땅을 평평하게 만들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아니… 그렇긴 한데 그쪽이 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인부들을…….”
내가 채 말을 끝내기도 전에.
메이스를 쥔 가녀린 손이 점차 굵어져 간다.
“도움을 많이 받았는데 저도 좀 도와드려야죠.”
활짝 미소를 지은 제이나가 메이스를 들고 땅을 내려찍자.
퍼어어어어억-
천둥이 울리는 것 같은 굉음이 하늘을 울린다.
‘허…….’
몇십 분이나 지났을까.
“일단 이 정도면 되겠죠?”
제이나가 얼굴에 흙을 잔뜩 묻힌 채 내게 손을 흔들어 보였고.
나는 평평하게 다져진 땅을 멍하니 바라보며 생각했다.
‘내가 살면서 메이스로 땅을 고르는 걸 보게 될 줄이야…….’
나는 아무렇지 않게 땅에서 나온 뼈들을 툭툭 던지는 성녀를 보며 입을 뗐다.
“아, 예. 뭐… 일단 그쯤 하시죠.”
“제가 말했죠? 이 땅 느낌이 좋지 않다고요. 봐요! 뼈들이 엄청나게 나오잖아요.”
“그렇군요. 그런데 하나만 물읍시다. 혹시 성녀가 되기 전에는 뭘 했습니까?”
나의 물음에 배시시 웃는 제이나.
“농부였어요.”
“허…….”
‘농부였다고? 농부 출신 성녀라니…….’
“그런데 어떻게…….”
“레바논 님의 선택을 받고는 그 뒤로 쭉 대신전에서만 지냈었죠.”
“아아…….”
그녀가 농부 출신이라는 말에 나는 기묘한 동질감을 느꼈다.
“그래서 흙에 대한 거부감이 없으셨던 거군요.”
“네. 그래서 그런지 지금 이 순간이 그냥 즐겁네요.”
단순히 입에 발린 말이 아닌 건지.
그녀는 지금 정말 그 어느 때보다 밝은 미소를 보이고 있었다.
‘만약 도굴꾼들이 이 모습을 봤다면 엄청났겠어.’
저렇게 삽시간에 땅을 파는 최고의 인재를 도굴꾼들이 그냥 두고 볼 리 없을 테니까.
“하지만 더는 작업을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어차피 인부들을 부릴 생각이었으니까요.”
“제가 하고 싶어서 한 일이에요.”
“심정은 이해합니다만 아무래도 소리 때문에 보는 사람들이 생겨서요.”
내가 어느새 몰려나온 학생들을 가리키자.
제이나는 그제야 엉거주춤 로브를 눌러쓴다.
“아니… 이럴 수가…….”
그러던 중 학생들 사이에서 한 사람이 제이나의 얼굴을 보고는.
놀라움과 경악을 감추지 못한다.
“허허…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일인지. 내가 헛것을 보고 있는 건가?”
아크 교수는 멀찍이서 로브를 눌러쓴 성녀를 보며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린다.
“어떻게 성녀님이 이곳에……. 허허… 이는 분명 레바논께서 성녀님을 순교시키라는 뜻이로구나, 허허… 레바논이시여… 레바논이시여…….”
흑남의 탄생 이후로 쥐 죽은 듯 살았던 노신관의 얼굴에 화색이 돌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