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
좀처럼 어울리지 않는 두 단어가 연결되어 내게 신선한 느낌을 준다.
“랄프 님, 이건 뭔가요?”
“사색 원판입니다. 흑카지노에서 인기가 많은 종목 중 하나죠.”
“사색 원판이요?”
제이나의 물음에 나는 사색 원판과 흑카지노에 대해 간단히 설명을 해 주었고.
“이런 세속적인 물건을 성녀님께 보여 드리다니. 역시 함정이었군.”
어째선지 눈썹을 치켜뜬 에밀라가 검을 뽑아 들려고 한다.
“아, 그거 박살 내면 저한테 최소 3천 골드는 지불하셔야 할 겁니다.”
“…뭐?”
“사색 원판으로 뽑는 수입이 못해도 그 정도니까요. 장사를 방해하려고 하셨던 것 아닙니까? 그럼 당연히 그에 따른 책임도 지셔야죠.”
나의 말에 에밀라는 가만히 사색 원판을 바라보다가 검을 집어넣고는.
신나게 사색 원판을 돌리는 제이나의 팔을 잡으며 말한다.
“손을 떼시는 게 좋겠습니다. 저건 마음을 타락시키는 물건입니다.”
“타락이라니요? 적당히 즐기면 가벼운 유흥거리가 됩니다.”
“유흥은 타락에 들어서는 입구다. 레바논을 섬기는 자라면 응당 유혹을 멀리해야 하는 게 맞다.”
“아, 예. 그러십니까?”
내가 에밀라와 치열한 눈싸움을 벌이던 중.
제이나가 나를 보며 묻는다.
“근데 어떻게 이런 걸 흑카데미에 설치할 생각을 하신 건가요?”
“그야…….”
‘그런 걸 다 설명하려면 나에 대한 전반적인 것들을 다 말해야 돼. 굳이 그럴 필요는 없지.’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희미한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베논께서 영감을 주시더군요. 그래서 세우게 됐습니다.”
“아아… 여하튼 이건 정말 굉장하네요! 아카데미 안에 상점을 들인다는 생각을 저는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거든요.”
눈을 반짝이며 말을 이어 가는 제이나.
“이건 아카데미의 학장님께 건의를 해 봐야겠어요. 에밀라, 우리도 대신전 안에 매점이라는 걸 세워 보는 건 어떨까요?”
“성스러운 대신전 안에 상인들을 들이자는 말씀이십니까? 교황님을 비롯하여 여러 대신관님들께서 반대하실 겁니다.”
“그럼 허락을 받을 때까지 건의하면 되잖아요?”
제이나가 뭐가 문제냐는 듯 묻자.
에밀라는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인다.
“성녀님의 뜻이 그러하시다면 그리하시죠.”
‘저, 저거… 성녀한테는 완전 예스맨이네.’
왜 성녀가 그렇게 고집이 센 건지 조금은 알 것 같기도 하다.
내가 그녀들을 보며 속으로 혀를 차던 중.
흑카데미의 마법진이 있는 쪽에서 누군가가 내 쪽으로 걸어온다.
“흑남님, 저를 찾으셨다고 들었습니다.”
레논이 어딘가 어두운 표정으로 말하자.
나는 겸연쩍게 입을 뗐다.
“바쁘실 텐데 찾아오게 해서 미안합니다.”
“아닙니다. 어차피 조금 있으면 흑탑에서 회의가 열릴 테니 이참에 같이 가시지요.”
‘성녀가 피습당한 것 때문에 그런 건가.’
“회의요?”
“아… 모르셨습니까?”
어째선지 레논의 표정이 더욱 어두워진다.
“밤사이에 성녀가 피습을 당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지금 생존 여부조차 확인이 안 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래요?”
“일부 기사들의 시체는 확인됐습니다만… 가장 중요한 성녀의 안위가 확인되지 않으니 답답할 노릇입니다.”
레논이 탄식하듯 말하자.
나는 올라오려는 웃음을 꾹 참고는 나지막이 말했다.
“그것참… 어떤 정신 나간 놈이 성녀를 습격한 건지 모르겠습니다만, 다행히 성녀는 잘 있습니다.”
“…예?”
내가 대답 대신 매점 안을 가리키자.
레논의 눈이 게슴츠레해졌다가 점차 기대감이 어린다.
“혹시… 성녀 일행입니까?”
“하하, 맞습니다.”
내가 웃으며 말하자 비로소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는 레논.
“허… 정말 여기까지 걸어오는 내내 정말이지 별생각이 다 들었습니다만 이제야 안도할 수 있겠습니다. 근데 저들이 여기에 있다는 건…….”
“부탑주께서 흔쾌히 내어 주신 좌표 저장 반지가 도움이 된 모양입니다.”
‘솔직히 말하면 우리가 과한 걱정을 한 것 같기도 하고.’
“다행입니다……. 정말 다행입니다. 다만, 혹시 피습을 당해서 심기가 불편하다거나 그런 기색은 없었습니까?”
레논이 걱정스럽게 묻자 나는 덤덤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불편해하기보단 새로운 환경에 큰 호기심을 보이더군요. 이참에 들어가서 말씀을 나눠 보시죠.”
내 말을 따라 매점 안으로 들어서는 레논.
그는 성녀를 바라보며 말한다.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당신은…….”
“부탑주 레논입니다. 이번 일에 대해 정말 이쪽에서도 할 말이 없을 정도로 큰 실례를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레논이 허리를 숙이자 제이나는 씁쓸해하며 말한다.
“저보다는 죽은 기사들에게 사죄를 하셔야 할 거예요.”
“그 부분에 대해선 흑탑이 반드시 성의를 표시하겠습니다.”
“고마워요.”
비교적 훈훈한 분위기 속에서 대화가 이어지던 중.
회의 시간이 다가온 탓인지 레논이 두 여인을 보며 말한다.
“그럼 흑탑으로 돌아가시겠습니까? 탑주께서 어제 묵으셨던 별채보다 더 안전한 곳을 마련해 주실 겁니다.”
“아니요. 괜찮아요. 저는 당분간 여기에 머무르려고요.”
“…예?”
성녀의 거절에 당황한 레논 부탑주가 나를 바라봤고.
‘뭐야. 왜 안 간다는 거야? 흑카데미 구경시켜 달라고만 할 땐 언제고 그새 또 마음이 바뀌었어?’
나 또한 어이가 없어 입을 뗐다.
“구경만 시켜 달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랬었죠. 하지만 생각이 바뀌었어요. 전 당분간 이 흑카데미 안에서 지내고 싶어요.”
‘…미친 것 아냐?’
상황만 바꾸면 내가 성기사 지망생들이 득실거리는 곳에서 지내겠다는 것과 마찬가지 아닌가?
“그건 안 됩니다.”
“왜요?”
“성녀님께서 그러시지는 않겠지만 만약이라는 게 있잖습니까? 학생들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단순한 문제 정도로 끝나지는 않을 겁니다.”
내 말에 나를 빤히 쳐다보는 제이나.
“그래도 전 남고 싶어요.”
‘아오… 또! 또 시작이네!’
“이곳보다 더 나은 환경을 제공해 드릴 텐데 안 가시려는 이유가 뭡니까?”
“바깥보다는 이 안이 더 나을 것 같아서요. 어제 지내 보니까 잠자리도 편안하더라고요.”
“허…….”
성녀가 고집을 부리자 에밀라가 나지막이 거든다.
“성녀님께서 안 가시겠다고 하면 그에 맞춰 환경을 조성하면 될 일이다.”
‘아니, 이년아! 여긴 흑마법사들이 교육을 받는 곳이라고!’
“아니, 상식적으로 생각해 봅시다.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안 될 이유도 없다.”
에밀라가 무뚝뚝하게 대꾸하자 난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내 흑마력 양성소에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절대 안 되지.’
“그럼 이렇게 해요. 제가 이곳에 머무르는 대신 저는 제가 피습당했다는 사실을 잊을게요.”
“…….”
갑작스러운 제이나의 제안에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건 좀… 갑작스럽네.’
성녀는 손님으로서 흑탑에 방문했고 습격에 대한 대처가 미흡했던 건 흑탑 쪽이다.
그러니 흑탑이 계속 레바논 왕국과의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다면.
어느 정도 성녀의 요구를 들어줘야 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다만 성녀가 흑카데미에 머무르는 건… 선을 넘는 것 같은데.’
예비 흑마법사들이 득실거리는 곳에 성녀가 머무른다?
만약 이 사실이 퍼졌다간 당장 흑카데미에 자녀를 보낸 학부모들이 들고 일어날 것이다.
‘요구를 해도 무슨 저런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하고 있어?’
내가 어처구니없이 제이나 바라보는 중.
레논이 대신 입을 뗀다.
“말씀은 이해했습니다만 그 부분은 저희가 아니라 탑주께서 결정하실 사안인 것 같습니다. 그러니 일단 흑탑에 돌아가서 탑주께 정식으로 건의를 해 보시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오, 좋은 판단이야.’
나는 책임을 나가란 탑주에게 떠넘기는 레논을 보며 속으로 박수를 쳤다.
“음… 알았어요.”
“그럼 이동하시죠.”
* * *
흑탑의 회의장 안.
“거참… 설마 일이 이렇게 돌아갈 줄이야…….”
“설마 성녀가 죽었겠어? 어디 다른 곳에 피신해 있겠지. 그리고 애당초 별채가 아니라 더 안전한 곳을 내줬어야 한다니까?”
이미 모인 열두 명의 위대한 흑마법사들 사이에서 설전이 오간다.
“내주긴 뭘 내줘? 그냥 이참에 검은 대지에 있는 레바논 종자들을 싹 처리하고 대륙으로 진출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
“전쟁 그까짓 것, 그냥 치르면 되는 것 아냐?”
전쟁을 찬성하는 이들부터, 중립을 지키는 자 그리고 반대하는 이들이 저마다 제각각의 의견을 낸다.
“전부 모인 건가?”
그 와중 나가란 탑주의 말이 회장 안을 울리자.
모든 이들이 침묵한다.
“흑남과 레논이 보이질 않는군.”
“레논 부탑주는 잠깐 흑카데미에 간다고 했습니다. 금방 돌아올 겁니다.”
“흠…….”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나가란 탑주가 고개를 젓고는.
좌중을 오시하며 말을 이어 간다.
“일단 사안이 사안이니 곧바로 진행하지. 간밤에 성녀가 피습을 당했다는 사실은 다들 잘 알고 있을 터. 지금부터 자네들의 의견을 듣도록 하겠네.”
“그냥 성녀를 찾아 죽이는 게 어떻겠습니까? 어차피 성녀는 피습을 당했습니다. 그녀가 살아 있다면 당연히 피습을 당한 부분을 걸고넘어질 겁니다. 그 부분에 대해서 저희가 또 보상을 해 줘야 하는데, 번거롭지 않겠습니까?”
한쪽에서 곧바로 성녀를 죽이자는 의견이 튀어나오자.
“미쳤습니까? 번거롭다고 성녀를 죽이다니요? 어쨌건 성녀가 습격을 당한 건 우리의 책임입니다. 그러니 줄 건 주면서 평화적인 타협안을 생각하는 게 더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경비를 서던 흑마법사들에게 책임을 지우고 성녀의 노여움을 달래는 편이 여러모로 우리 흑탑에게도 도움이 될 겁니다!”
다른 쪽에서는 화들짝 놀라 의견에 반박한다.
몇십 분째 양측이 서로의 의견을 주장하며 대립하던 중.
“그래서 그쪽의 말들은 성녀에게 빌빌 기자는 이야긴데, 뭐 좋습니다.”
성녀를 죽이는 쪽에서 누군가가 입을 연다.
“당신들의 말이 다 옳다고 칩시다. 그런데… 성녀가 살아 있긴 한 겁니까? 만약 죽었으면 그땐 어떻게 나오실 겁니까?”
“죽다니?! 설마 성녀가 그깟 피습에 당했겠나! 그저 지금은 잠시 몸을 피한 것이고, 곧 모습을 보일 걸세!”
“아니, 저는 성녀가 죽었다는 가정하에 질문을 던졌잖아요! 왜 딴소리를 해요!”
“뭐가 딴소리란 말인가?! 애당초 그런 가정을 세우는 것부터가 잘못된 거네!”
양측의 언성이 점점 높아져 시장 바닥처럼 시끄러워지자.
“그쯤들 하게!”
나가란 탑주가 좌중을 보며 일갈한다.
“그래서 자네들이 내린 결론이 뭔가?”
“전쟁을 준비해야 합니다.”
“사라진 성녀를 찾고 레바논 왕국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양측의 의견이 좀처럼 좁혀질 생각을 않자.
나가란 탑주는 깊은 고민에 빠진다.
“흠…….”
탑주의 침묵이 길어질수록 좌중의 목울대도 조용히 위아래로 꿈틀거린다.
“좋네. 그럼 이렇게 하지. 한 달 내로 성녀의 생존이 확인되지 않는다면 그땐…….”
온화해 보였던 나가란 탑주의 눈 위로 광폭한 짐승의 눈빛이 서려 가자.
쩌저저저적-
탑주가 쥐고 있던 지팡이 끝에서 바닥 갈라지는 소리가 울려 온다.
“전쟁을 준비한다!”
마침내 나가란의 입에서 돌이킬 수 없는 선언이 떨어지고.
“탑주님의 명령을 따르겠습니다!”
누구 할 것 없이 지팡이를 들고 크게 소리를 내지르던 그때.
쾅-
갑자기 요란한 소리를 내며 회의장 문이 좌우로 열린다.
“그러실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내가 회의장 안으로 들어서며 소리치자.
“흑남…….”
“그럴 필요가 없다니? 그게 무슨 소리인가?”
일순간, 좌중의 시선이 내게 꽂힌다.
“말 그대로입니다. 전쟁을 준비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죠.”
“전쟁을 준비할 필요가 없다니? 회의 참석에도 늦은 자네가 뭘 안다고 그러나?”
“아주 잘 알고 있죠.”
한 흑마법사의 질문에 나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뭐라고?”
“그야 성녀는 제가 보호하고 있었으니까요.”
내가 제이나를 보며 고개를 까딱이자.
로브에 가리어져 있던 제이나의 얼굴이 좌중 앞에 드러났고.
“허…….”
좌중은 그런 제이나를 멍하니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