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카데미의 노예가 살아남는 법-67화 (67/200)

67.

“…개소리?”

기사단장이 미간을 꿈틀거리며 나를 무감각하게 바라본다.

“에밀라! 가만히 있어요.”

“…예.”

기사단장을 만류하는 제이나를 보며 나는 생각했다.

‘…에밀라? 어디서 들어 본 것도 같은데…….’

하지만 딱히 떠오르는 이가 없었기에 나는 계속 말을 이어 갔다.

“자기가 어떤 자리에 앉아 있는지, 자기가 앉은 자리가 얼마나 무거운 자리인지 알고 있었다면 애당초 이곳까지 오지도 않았겠지.”

“성녀의 자리가… 무거운 자리라는 거는 저도 알고 있어요! 단 한 번도 가볍다고 생각해 본 적도 없고요!”

“아, 그래? 그럼 그렇게 스스로의 중요성을 잘 아는 사람이 왜 그러는 건데?”

하지만 제이나는 입을 꾹 다문 채 대꾸하지 않는다.

“너나 나나 성마전쟁을 일으키기에 좋은 명분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야. 하물며 이 검은 대지에서 너를 노리고 있는 사람들이 몇이나 된다고 생각해? 아, 혹시 대륙에서는 찬양과 칭송만 받고 살아와서 잘 모르는 건가?”

“그쯤하지.”

에밀라가 눈썹을 꿈틀거리며 검집에 손을 올렸으나.

나는 아랑곳 않고 대화를 이어 갔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검은 대지에 온 거냐? 정말 흑남의 탄생을 축하하러 온 거였다면 그냥 신관장 한 명을 보냈어도 충분했을 텐데.”

“그건…….”

제이나가 선뜻 답하지 못하자.

나는 게슴츠레한 눈으로 성녀를 보며 질문했다.

“혹시 교황이 널 보낸 건가? 그래, 교황이 성마전쟁을 원해서 너를 보냈다고 가정하면 이 빌어먹을 상황도 얼추 설명이 되지 않겠어?”

내가 빈정거리던 그때.

“무례함이 도를 넘었군.”

척-

대체 언제 뽑혀 나온 건지 에밀라의 검이 나의 목 끝을 겨누고 있다.

‘호오… 이것 봐라…….’

요 몇 달간 소드마스터인 에나 할멈에게 검술을 배웠다곤 허나.

나는 아직도 검에 대해선 문외한에 가까웠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에밀라의 실력을 짐작해 보려고 했다.

‘검술에 대해 평가하긴 뭐하지만 에나 할멈한테 뚜들겨 맞은 경험으로 미루어 봤을 때, 이년… 최소 소드익스퍼트는 되지 않을까?’

아니.

내가 검을 보는 눈이 떨어져서 그렇지 어쩌면 그 이상의 실력자일지도 모른다.

‘그래. 명색이 기사단장인데 이 정도 실력은 있어야… 잠깐… 에밀라… 에밀라?’

그녀의 검술을 본 탓일까.

문뜩 아크 신관장의 수업에서 들었던 하나의 이름이 내 뇌리를 강타한다.

‘제2기사단장 에밀라?’

레바논 소속 제2기사단장, 강철의 에밀라.

‘10년을 넘게 그라트니 요새를 지키며 얻은 이명이라고 했었나. 허 참… 소드마스터가 옆에 있었다니. 그래도 아무 생각 없이 검은 대지에 오진 않았던 모양이네.’

“성녀님을 모독한 죄로 네놈을 죽이겠다.”

“죽여? 나를? 한번 해보든가.”

나 역시 지팡이를 들고 몰래 술식을 읊으려던 찰나.

“에밀라, 검을 내려놔요.”

제이나가 에밀라의 팔을 붙잡고 만류한다.

“놈은 성녀님을 모독했습니다. 그러니 죽어도 그리 억울해하진 않을 겁니다.”

“저를 욕한 건 사실이지만… 어쨌건 우리를 도와주려 한 거잖아요. 검 내려놔요. 당장!”

제이나의 호령에 마지못해 검을 내리는 에밀라.

하지만 눈만은 여전히 나를 뚜렷이 응시하고 있다.

“어쨌건 저희에게 도움을 주셨는데, 이쪽이 저지른 무례함에 대해 사과드릴게요.”

“애당초 놈의 도움 따위는 필요 없었습니다.”

“에밀라!”

좀처럼 풀리지 않는 분위기에 발을 동동 구르는 제이나.

나는 그런 그녀를 보며 생각했다.

‘이제야 남겠다고 하는 것도 조금은 이해가 가네. 소드마스터가 옆에 있는 데다가 당사자도 성녀니까. 저 정도면 탑주나 부탑주들이 나서지 않는 이상 쉽게 죽지는 않겠지. 괜한 걱정을 했던 것 같기도 하고…….’

내가 속으로 씁쓸해하던 중.

제이나가 재차 내게 사과한다.

“미안해요.”

“아니요. 저도 사죄드리죠. 어쨌건 저도 실례를 끼쳤으니까요.”

“실례라니요! 천만에요!”

제이나가 손사래를 치자 나는 옅은 미소를 머금은 채 말을 이어 갔다.

“제가 두 분을 너무 과소평가했던 모양입니다. 특히 옆에 있는 기사단장분께서 소드마스터일 거라고는 예상을 못 했네요.”

“성녀님이 검은 대지로 오시는데 설마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았을까.”

‘그래. 나도 그렇게 생각했었지. 그런데 너희가 좌표 저장 반지를 사용해 버려서 나도 너희가 다 병신들인 줄 알았던 것 아냐.’

소드마스터에 성녀 파티였다면 스스로 습격자들을 처리할 것이지.

왜 좌표 저장 반지를 사용한 거란 말인가?

“그 부분은 약간의 오해가 있었다는 걸 인정하죠.”

내가 순순히 오해를 인정하고 사과하자.

제이나도 밝게 웃으며 고개를 젓는다.

“별말씀을요. 그럼 저희가 검은 대지에 있어도 괜찮다고 봐도 되는 건가요?”

“물론입니다. 다만 언제까지 머무르실지 일정을 알려 주셨으면 좋겠군요. 그래야 저도 그에 맞춰 안내를 해 드릴 수 있을 테니까요.”

나의 말에 제이나가 해맑게 웃으며 말한다.

“목적을 달성할 때까지는 계속 있으려고요.”

“아, 예?”

역시 성녀가 검은 대지를 찾아온 데는 이유가 있었던 모양이다.

‘다만 목적을 달성할 때까지 남는다는 건 좀 그런데.’

“목적 말입니까? 어떤 목적인지 알려 주신다면 제가 도움을 드릴 수도 있을 것 같군요.”

나는 되도록 성녀를 빨리 검은 대지에서 내보내고픈 마음에 미소를 보이며 말했으나.

제이나는 단호히 고개를 젓는다.

“아직 저희의 목적은 말씀드릴 수 없어요.”

“그렇습니까?”

‘뭐, 쉽게 말해 줄 거라 생각하진 않았으니까.’

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계속 말했다.

“알겠습니다. 여하튼 오늘은 밤도 깊고 경황도 없으실 테니 제 방에서 쉬시죠.”

“…네?”

“뱀같이 간악한 놈인 줄만 알았더니 파렴치하기까지 하구나.”

제이나와 에밀라가 동시에 말하자.

나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저라고 당신들과 한방을 쓰고 싶을까요. 다만 당신들이 밤사이에 이곳에서 무슨 일을 벌일지 모르니 오늘만 한방을 쓰려고 하는 겁니다.”

“당신의 저택 안이 아닌가요?”

제이나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이곳은 흑카데미 안입니다. 그러니 제가 더 신중해질 수밖에 없죠. 학생들이 당신들을 보면 무슨 생각을 하겠습니까?”

“흑카데미요? 여기가 흑카데미 안이었나요?!”

흑카데미라는 말에 두 눈을 반짝거리는 제이나.

“네. 흑카데미 안입니다. 학생이라고 하기엔 뭐하지만 저도 이곳에서 생활을 하고 있죠.”

“그럼 혹시 내일 이곳을 둘러봐도 될까요?”

‘성녀가 흑카데미를 구경한다라… 흠… 그 정도야 상관없겠지.’

“그러시죠. 잠자리는 저쪽의 침대를 쓰시죠. 저는 의자에서 자겠습니다.”

* * *

다음 날, 아침.

‘망할… 결국 한숨도 못 잤네.’

말은 여유롭게 했어도 혹시라도 저들이 흑카데미 안을 돌아다닐 수도 있다는 생각에.

결국 나는 날밤을 새우고 말았다.

반면.

드르렁-

‘얼씨구?’

제이나는 죽은 듯 잠을 잤으며.

에밀라는 코를 골며 수면을 취하고 있었다.

“슬슬 일어납시다. 흑카데미를 구경시켜 달라고 했잖습니까?”

“으음… 벌써요?”

“잠을 안 잤나? 눈이 퀭하군.”

‘거, 쓸데없이 눈치 빠르네.’

나는 에밀라의 말을 묵살하고는 제이나를 보며 덤덤히 말했다.

“이미 아침입니다. 조금 있으면 학생들이 나와서 활동할 시간이니 그 전에 얼른 움직이죠.”

“하음… 알겠어요.”

두 여인이 로브를 꾹 눌러쓰는 사이.

나는 문을 열고 복도 밖을 살폈다.

‘후… 다행히 사람은 없네.’

“따라오시죠.”

내가 앞장서서 복도를 걸어가자.

“와… 우와…….”

“정말 역겨운 곳입니다.”

두 여인은 사뭇 상반된 반응을 내며 나의 뒤를 쫓았다.

“정말 신기하네요. 흑마법사를 전문적으로 육성하는 기관이라니. 꼭 대륙에 있는 아카데미를 보는 것만 같아요.”

“비슷할 겁니다. 애당초 그곳의 운영 방식을 따라 했다고 하니까요.”

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제이나.

이윽고 우리가 커다란 문을 지나 밖으로 나가자.

“그런데 저희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건가요?”

그녀는 의아하다는 듯 내게 묻는다.

“구경하기 전에 밥부터 먹어야 할 것 아닙니까.”

“아아, 식당으로 가는 건가요?”

‘식당?! 미쳤냐?’

흑마법사들과 어울려 식사를 하는 성녀라니.

이 무슨 혼종이란 말인가.

“저희는 매점으로 갑니다.”

“…네? 매점… 이요?”

생소한 단어에 고개를 갸웃거리는 제이나.

“보면 아실 겁니다.”

내가 그녀들과 함께 매점으로 가던 중.

“…그때에 레바논 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네. 나의 자녀들이여, 내가 너희를 사랑하노라, 하고.”

어디선가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슬쩍 시선을 돌리니 하인들에게 레바논의 교리를 설파하는 아크 교수가 나의 눈에 들어온다.

‘저, 저 인간! 내가 저건 하지 말라고 말을 했는데도 은근슬쩍 또 하고 있네?’

내가 흑남이 된 이후로는 쥐 죽은 듯 지내는가 싶더니.

어느 순간부터인지 몰래 또 순교를 시키기 위해 밑 작업을 하고 있는 모양이다.

“아크 교수.”

“어이쿠… 허허, 흑남께서 이 이른 시간에 무슨 일이십니까?”

“무슨 일이긴, 지나가다가 봤지. 근데 내가 전에 예배 같은 건 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나?”

내가 싸늘히 말하자 아크 교수가 어색하게 웃는다.

“허허, 저는 그저…….”

아크 신관장이 어색하게 변명을 하려던 중.

“…아크 신관장님?”

그를 알아본 제이나가 당혹해하여 눈을 동그랗게 뜬다.

“허허, 아크 교수입니다. 그런데 그쪽은…….”

제이나와 에밀라가 로브를 두르고 있던 덕에.

그들을 알아보지 못한 아크는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 그들을 바라본다.

‘지금 여기서 굳이 성녀의 존재를 알릴 필요는 없겠지.’

“내 지인이야.”

“…지인입니까? 허허, 그것참 놀라운 일이군요.”

“놀라울 게 뭐 있어.”

나의 말에 아크 교수는 웃으며 고개를 젓는다.

“놀라운 일이지요. 흑남께 지인이라 칭할 정도로 친분이 있는 사람이 생겼으니 말입니다. 아무래도 그간 밖에서 많은 일들을 겪으셨던 모양입니다.”

“많은 일들을 겪긴 했지. 그런데… 지인이 하인밖에 없다고 비꼬려는 건 아니겠지?”

“허허, 설마요?”

나는 지그시 아크 교수를 바라보다가 나지막이 경고했다.

“여하튼 예배는 드리지 마. 알았어?”

“허허…….”

나는 아크 신관장의 씁쓸한 웃음소리를 뒤로하고 두 여인에게 손짓했다.

“얼른 이동하시죠.”

“방금 그 사람… 아크 신관장님 맞죠? 그렇죠?”

“맞습니다.”

내 입에서 대답이 흘러나오자.

“세상에… 아크 신관장님을 여기서 뵙게 될 줄이야…….”

제이나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린다.

“아크 신관장에 대해서 잘 아십니까?”

“잘 알죠! 그분은…….”

“정신 나간 놈이지.”

에밀라가 제이나의 말을 이어받아 말하자.

‘싸가지 없기는 해도 사람 보는 눈은 있네.’

나는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제법 유명하신 모양입니다?”

“유명? 유명하다면 유명한 편이지. 순교라는 명목하에 레바논 님을 믿는 일반인들을 흑마법사의 손에 넘겼었으니까.”

거의 혐오하는 수준으로 아크 교수가 있는 곳을 바라보며 말을 이어 가는 에밀라.

“그 일로 신관장의 칭호를 박탈당했지만 솔직히 신관장이라는 칭호도 아까운 놈이야. 그 뒤로 교황의 부름을 받았다고 들었다만. 흠… 왜 그가 이곳에 있는지는 몰라도 잘 어울리는군.”

“…….”

에밀라의 비꼼에 제이나가 답하지 않자.

나는 슬며시 질문을 던졌다.

“혹시 왜 저렇게 순교에 미쳤는지도 아십니까?”

“그걸 내가 왜 알아야 하지?”

“제2기사단장이면 알 만도 하니까요.

나의 말에 에밀라가 무심히 대꾸한다.

“내가 신경 쓸 건 딱 세 가지뿐이다. 레바논 님과 제이나 님 그리고 검. 그게 전부다.”

“아, 예.”

나는 대충 대답하곤 어느덧 눈앞에 자리한 매점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가 매점입니다.”

“함정은 아니겠지?”

“말을 맙시다.”

내가 먼저 매점으로 들어서자.

뒤이어 에밀라가 주변을 경계하며 안으로 들어선다.

“이곳은… 상점인가?”

“아니요. 매점입니다.”

“매점이 뭔가요?”

제이나의 물음에 나는 가볍게 설명을 해 주었고.

“그러니까 아카데미 안에 있는 상점 같은 거네요?!”

“뭐, 그렇죠. 잠깐 둘러보고 계시죠. 호밀! 호밀!”

“랄프 님, 오셨습니까.”

곧 늙은 하인이 운반하던 짐들을 내려놓고 내게 다가오자.

나는 호밀을 보며 말했다.

“잠깐 하던 일 멈추고 볼드 학장한테 가서 내 말 좀 전해 줘.”

“뭐라고 말씀을 드리면 되겠습니까?”

“레논 부탑주 좀 이쪽으로 모셔 오라고 전해.”

“그리하겠습니다.”

호밀이 금세 자리를 뜨자 나는 다시금 고개를 돌렸다.

‘이 여자들이 어디로 갔지?’

나는 곧 그녀들을 찾을 수 있었는데.

촤르르르륵-

“이것 봐요, 에밀라. 신기하지 않나요?”

‘호오…….’

열심히 사색 원판을 돌리는 제이나를 보며 나는 생각했다.

‘도박하는 성녀라… 묘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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