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
“전대 성녀… 말씀이십니까? 허허… 갑작스럽군요.”
“뭔가 아는 게 있나 보네.”
나의 말에 아크 교수는 찻잔을 내려놓곤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모른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요. 제가 신관장을 지내는 동안 섬긴 성녀님들만 3명이었으니까요.”
“…3명?”
‘3명이나 섬겼다고? 뭐, 나이가 적은 편이 아니니 그럴 수도 있다지만…….’
그보다는 물갈이가 잦았다고밖에 생각이 들지 않는다.
“허허, 모르셨나 보군요.”
“나야 그쪽 권력 구도에 대해선 관심이 없었으니까. 어떻게 3명이나 섬기게 된 건데?”
나의 물음에 아크 교수가 눈을 지그시 감는다.
“페카 성녀님께서는 성마전쟁에서 전사하셨지요.”
“성녀가… 전쟁에서 전사를 했다고?”
성녀는 주로 병마를 회복시키고 민심을 안정시키는 데 주력한다고 들었건만.
‘후방에서 부상자들 치료를 해 주다가 기습을 당해서 죽었나?’
내가 의아함을 감추지 못하자.
아크 교수가 계속 말을 이어 간다.
“허허, 그분께서는 굉장히 호전적이셨습니다. 대신전에 있으시기보단 성기사들과 함께 최전선으로 출전하는 걸 좋아하셨지요.”
“아아…….”
‘단명하기 딱 좋은 스타일이었네. 근데 성녀가 호전적이라……. 흠…….’
“페카 성녀님께서 돌아가신 뒤 새로이 선출되신 성녀님께서 바로 헬렌 님이십니다. 그녀 또한 굉장히 다정다감한 성격으로 많은 백성들에게 선망과 인기를 얻으셨지요. 하지만…….”
아크 신관장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자.
난 나지막이 한마디를 던졌다.
“이단 신봉자라도 됐나?”
“…….”
잠시 나를 바라보며 묘한 표정을 짓는 아크 신관장.
“허허, 세간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비사인데… 레바논 왕국의 권력 구도에 대해 관심이 없으셨다는 것치곤 내부 사정을 굉장히 자세히 아시는군요.”
“앉은 자리가 바뀌니 눈에 보이는 것도, 귀에 들려오는 것도 많이 달라지더라고.”
“허허…….”
아크 신관장은 나를 보며 씁쓸한 미소를 보이더니.
무겁게 입을 뗀다.
“아무래도 전 성녀에 대해 물으러 오신 것 같군요. 하지만 저는 그녀에 대해 알려 드릴 수 있는 게 없습니다.”
“이유가 있나?”
“이단을 언급하는 건 레바논 왕국의 교리에 위배되기 때문이지요.”
‘교리에 위배가 된다고? 그렇게 교리 잘 지키는 놈이 흑남 의식을 벌였냐?’
물론 흑남 의식을 하지 말라는 교리가 경전에 적혀 있지는 않았을 테지만.
어쨌건 나는 게슴츠레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을 이어 갔다.
“좋아. 교리 때문이라면 어쩔 수 없지. 대신 한 가지만 묻지.”
“허허, 말씀하시지요.”
“대신전의 지하 미궁 안에 전대 성녀가 갇혀 있어?”
“허허… 저는 잘 모르는 일입니다.”
긍정도 부정도 아닌 모르쇠로 일관하는 아크 신관장을 보며.
나는 조용히 한마디를 내뱉었다.
“정말로 몰라서 하는 소리야? 자칫 네 교수 생활에 영향이 갈지도 모르는데도?”
“허허… 그렇다면야 저는 제게 주어진 시간 동안 열심히 영적 구원을 하다가 떠날 수밖에 없지요.”
교수 자리에 그다지 욕심이 없는 것 같은 아크 교수의 발언에 나는 생각했다.
‘교수 자리 정도로는 협박이 어렵겠네. 그보다… 영적 구원은 무슨, 순교를 시키려고 하는 거겠지.’
“알았어. 수고해.”
덜컹-
흑남이 무심히 일어나 아크 교수의 방을 나서자.
“설마 흑남이 그녀를 언급할 줄이야……. 인생이란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군. 레바논이시여…….”
아크 교수는 닫힌 방문을 보며 나지막이 중얼거린다.
* * *
다음 날.
‘어우… 망할 할멈 같으니……. 조금만 살살하면 어디 덧나나?’
평소와 마찬가지로 나는 새벽부터 소드마스터인 에나 할멈의 훈련을 받곤 매점을 찾았다.
‘최근 흑행에다가 이것저것 일이 너무 많아서 잘하고 있는지 확인을 못 했으니까.’
내가 슬며시 매점 안을 들여다보자.
“호밀 님! 이건 어디에다 둘까요?!”
“산호맛 샌드위치는 금방 상한다. 가장 눈에 잘 보이는 곳에 배치해.”
“예!”
상품들을 들고 분주히 움직이는 하인들의 모습이 내 눈에 들어온다.
찹찹찹-
흑카지노에선 하인들이 열심히 패를 섞고 돌리는 연습을 하고 있었고.
어떤 하인들은 서로의 얼굴을 보며 자신들의 미소를 점검하기도 한다.
‘흠… 잘하고 있네.’
매점과 흑카지노가 하인들에게 있어 최고의 직장이라 그런 걸까.
하나같이 의욕적으로 일하는 모습이 참으로 보기 좋았다.
‘이곳에서 잘리면 다시 흑카데미의 하인으로 돌아가게 되니 그게 싫어서 열심히 하는 거겠다만, 어쨌건 좋네.’
이유나 원동력이 뭐가 됐건 상관없다.
나의 돈벌이를 위해 최선을 다해 주면 그걸로 족할 뿐.
‘오늘은 아스칼에게 찾아가서 흑혼해 듀오도 점검을 해야겠어.’
내가 속으로 오늘 일정을 정리하며 흑카데미로 돌아가던 그때.
“랄프 님! 랄프 님!”
어째선지 얼굴이 반쯤 질린 볼드 학장이 나를 부르며 뛰어온다.
‘뭐야. 또 무슨 일이 생긴 건가? 근데 표정은 왜 저래? 어제 뭘 잘못 먹었나.’
볼드 학장의 다급한 모습을 보니.
아마도 또 흑탑에서 나를 부른 모양이었다.
“왜? 또 흑탑에서 불렀어? 이 아침부터?”
“그게… 큰일이 났습니다.”
‘큰일? 큰일이 날 게 뭐가 있어?’
제른이 마녀들을 추격하여 기랄 군도로 간 것 말고는.
흑탑에 별다른 이슈가 없는 것으로 알고 있건만, 큰일이라니?
‘새로운 치료사를 뽑는다고 저렇게 야단법석을 떨지는 않을 테고. 혹시 제른이 마녀들에게 죽기라도 한 건가? 아니면 설마… 미스릴 광산에 문제가 생긴 건 아니겠지?’
“무슨 큰일?”
“케이탈 요새에서 긴급 서신이 날아왔다고 합니다.”
‘…케이탈 요새에서?’
케이탈 요새.
그곳은 검은 대지의 입구이자 흑탑이 운용하는 포털이 있는 출입구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검은 대지의 모든 성들을 통틀어 가장 삼엄하고 병력들이 많이 집결해 있는 곳이었다.
‘근데 그런 곳에서 긴급 서신이 날아왔다고?’
순간, 나는 가슴이 싸늘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케이탈 요새에서 긴급하다는 서신이 날아왔다는 건…….’
당장 내 머릿속에 떠오른 건 한 가지였다.
‘설마 대륙과 연결된 포털을 빼앗겼나?’
포털은 왕국마다 세워진 흑탑 지부들의 관리하에 있다.
하지만 만약 어떤 왕국에서 흑탑 지부의 위치가 들통이 나 포털을 점거당한 것이라면?
‘아니… 그렇다고 해도 그것까지 감안해서 케이탈 요새를 세운 것일 텐데… 긴급 서신을 띄울 정도면…….’
대규모의 병력이 포털을 타고 나와 케이탈 요새를 침공하고 있다는 뜻일 터.
나는 생각을 정리하곤 천천히 입을 뗐다.
“다른 왕국이 공격을 해 온 건가? 어디 왕국이야? 깃발을 봤을 것 아냐.”
“아… 그것이…….”
볼드 학장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겨우 말을 이어 간다.
“침공 때문이 아니라고 합니다.”
“…뭐?”
‘다른 나라에서 침공해 온 게 아니라면 대체 긴급 서신을 띄운 이유가 뭔데?’
내가 어이가 없어 속으로 혀를 내두르던 중.
볼드 학장 또한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내게 말한다.
“…성녀가 케이탈 요새에 방문했다고 합니다.”
“뭐라고?”
* * *
흑탑의 회의장 안.
“크흠…….”
“음…….”
나가란 탑주를 비롯하여 흑탑의 실세들이 한자리에 모여 있건만.
어째선지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는다.
‘다들 머리가 아프겠지. 당장 나만 해도 그런데.’
설마 성녀라는 도화선이 흑탑에, 그것도 직접 방문하리라고 누가 예상이나 했겠는가?
‘레바논 왕국이 의도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자칫 잘못했다간 대륙 전역에 사달이 날 수도 있어.’
성녀는 도화선이다.
성마전쟁이라는 폭탄을 터뜨릴 수 있는 도화선 말이다.
‘그런 일이 있어선 안 되겠다만 만약 성녀가 흑탑 방문 중에 죽기라도 한다면…….’
당장 성마전쟁이 일어나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성녀라는 작자가 흑탑이 어디 집 뒤의 동산인 줄 아는 건가? 대체 무슨 생각으로 흑탑에 온 거야? 자기 신분에 대한 자각이 없나? 진짜 제른 부탑주가 없어서 망정이지…….’
만약 제른이 있었다면 그놈은 분명 도화선에 불을 붙이려고 했을 것이다.
‘아니지… 탑주도 제른이랑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으니까 어쩌면……. 아오… 저 망할 년은 왜 갑자기 흑탑에 와 가지고 이 사달을 일으켜?’
내가 속으로 성녀에게 욕설을 퍼붓던 그때.
“레, 레바논 왕국의 성녀, 제이나 님께서 입장하십니다.”
문밖에서 남자의 떨리는 음성이 울려오고 회의장의 문이 서서히 열린다.
저벅, 저벅-
신발 소리가 조용하던 회의장 안을 울리자.
척, 척-
두터운 갑주를 두른 기사들이 그에 맞추어 절도 있게 걷는다.
‘저 여자가… 성녀?’
나는 회색의 로브를 두른 여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잠깐이지만 새하얀 피부나 커다란 눈망울이 꽤나 예쁘다고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다.
‘레나도 꽤 예쁜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성녀는… 아씨, 정신 차려! 지금 예쁜 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하지만 나는 이내 정신을 가다듬고는.
‘어디… 왜 흑탑에 왔는지 이유나 들어 보자.’
남자가 아닌 흑남으로서 그녀를 바라봤다.
“후우…….”
성녀의 입에서 나지막한 숨소리가 들려오더니.
“성녀 제이나가 나가란 흑탑주님을 뵙습니다.”
그녀는 탑주를 보며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인다.
“어서 오시게. 귀한 손님이 이 먼 곳까지 올 줄이야.”
“환대에 감사드려요.”
서로 미소를 보이며 간단한 안부를 건네는 성녀와 나가란 탑주.
“교황께서는 안녕하시나?”
“여전히 건강하시죠. 하루에 한 번씩은 메이스를 잡으세요.”
“허어… 이 늙은이는 깃펜을 잡을 힘도 없건만. 교황께선 아주 건강하신 모양이군.”
나가란 탑주가 힘없이 팔을 들어 보이자.
경직돼 있던 회의장의 분위기가 조금 풀어지는 느낌이 든다.
“그래서, 성녀께서는 어인 일로 사전 통보도 없이 흑탑을 방문하신 겐가?”
“흑남의 탄생 소식이 대륙 전역에 파다하게 퍼졌는데, 응당 축하를 드리러 와야죠.”
제이나의 말에 나가란 탑주의 눈이 게슴츠레해진다.
“축하라……. 그것참 고마운 말이네만 그건 성녀의 개인적인 축하인가, 아니면 레바논 왕국의 공식적인 축하인가?”
‘만약 개인적인 축하라고 한다면 성녀가 뭔가 의도가 있어서 흑탑에 왔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겠지.’
하지만 공적으로 온 거라면 그건 말 그대로 외교적인 문제로 온 것이라고 볼 수 있을 터.
“사전에 통보는 드리지 못했지만 저는 레바논 왕국을 대신하여 이 자리에 나왔어요.”
“허허허허, 그런가.”
그제야 나가란 탑주의 눈가가 풀어지자.
나는 생각에 잠겼다.
‘진짜 의외네……. 흑탑에 다른 사람도 아니고 성녀를 보낼 줄이야. 대체 레바논 왕국은 무슨 생각이지?’
“교황께서는 항상 탑주님께 감사를 표하고 있어요. 탑주님의 협조 덕분에 대륙이 평화를 유지하는 거라고 말이죠.”
“허허… 그런가? 그거 고맙군.”
나가란 탑주가 아무렇지 않게 미소를 보이자.
나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대륙 정벌을 생각하고 있는 노인네한테 협조해 줘서 고맙다니… 내 참…….’
하지만 흑탑이 있기에 대륙에서 전쟁이 뜸한 것도 엄연한 사실이긴 했다.
‘흑탑이라는 공통된 적이 있으니 다들 전쟁을 피하는 거겠다만, 그것도 언제까지 지속될지는 아무도 알 수 없겠지.’
향후 나가란 탑주가 어떠한 행보를 밟느냐에 따라.
대륙의 판도도 크게 달라질 테니까.
내가 생각에 잠겨 있던 사이.
“아참, 이건 교황께서 탑주님에게 보낸 선물이에요.”
제이나가 뒤를 돌아 고개를 끄덕이자.
성기사들이 들고 있던 두터운 상자를 회의장 중심에 내려놓는다.
‘안에 뭐가 들어 있는지는 확인을 했겠지?’
그럴 확률은 낮겠다만 혹시라도 저 안에 진짜 폭탄이라도 들어 있을 수도 있는 것 아닌가?
당연히 흑마법사들이 회의장 안에 상자를 들이기 전에 미리 확인을 했을 것이다.
“레논, 검증은 된 건가?”
“예. 전부 확인했습니다.”
“그런가. 교황께 감사하다고 전해 줬으면 좋겠군.”
탑주의 말에 제이나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럴게요. 그리고… 어떤 분이 흑남이시죠?”
제이나가 두리번거리며 회의장 안의 좌중을 살피자.
“자네 옆에 있는 남자가 흑남이네.”
나가란 탑주가 손을 들어 나를 가리켜 보인다.
“어머… 생각보다 젊으시네요.”
정말 놀랐는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나를 바라보는 제이나.
나는 그런 그녀를 보며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나이가 많아야만 높은 자리에 앉는 건 아니죠. 그러는 그쪽도 젊으신데요.”
“아, 저는 그 뜻이 아니고……. 실례했어요.”
제이나가 내게 고개를 숙여 사과하자.
나가란 탑주가 웃으며 이목을 돌린다.
“여하튼 자네의 방문 목적을 확인했으니 됐네. 그보다 얼마나 머무를 생각인가?”
“저도 아직은 잘 모르겠어요. 다만 레바논 님께서 떠나라 하시기 전까지는 머무를 생각이에요.”
제이나가 말을 끝마치자.
순간 한 가지 의심이 내 머릿속에 피어올랐다.
‘레바논이 떠나라 하기 전까지 머무른다고? 가만… 혹시 흑남 탄생을 축하한다는 건 그냥 명분이고 사실은 레바논이 시켜서 온 건 아니겠지? 에이… 아니겠지.’
레바논과 베논.
두 신은 서로 내게 개입하지 않기로 약속을 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성녀를 부리는 건 나한테 개입한다고 볼 수 있는 건가? 흠…….’
내가 제이나의 방문 이유를 다시 생각해 보던 중.
제이나가 나가란 탑주를 보며 말한다.
“이곳에 머무르는 동안에는 이곳저곳 둘러보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흑탑 안은 어렵지만 그 외에는 괜찮네. 다만 그러려면 자네를 안내해 줄 사람이 필요하긴 하겠군. 흠… 누가 좋을는지…….”
나가란 탑주가 고민하는 가운데.
나는 제이나를 보며 생각했다.
‘성녀가 얼마나 강한지는 잘 모르겠지만 누군가는 반드시 폭탄을 터트리려고 할 거야.’
당장은 제른이 없다고 해도 그의 수하들이 독단적으로 일을 치르려 할지도 모른다.
‘성녀가 흑마법사의 손에 죽는다면… 당연히 상황은 최악으로 흘러갈 거고. 하씨…….’
솔직히 내 입장에서 성녀가 죽건 말건.
대륙 곳곳에 봉화가 올라가건 말건 그건 내 알 바가 아니었다.
‘하지만 만약에 성녀의 죽음을 계기로 대륙의 전 국가들이 손을 잡고 흑탑을 공격하기라도 한다면…….’
아무리 흑탑이 검은 대지의 패자라고 해도.
그 공세를 이겨 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흑마법사들은 물론이고 당연히 수뇌부의 목도 날아가겠지.’
흑남이라는 자리를 꿰차고 있는 나도 사형대에 오를 가능성이 농후할 터.
‘그래. 전쟁에는 너무 변수가 많아. 나를 위해서라도 전쟁은 벌어져선 안 돼.’
나는 제이나 성녀를 바라보며 계속 생각했다.
‘후… 일단 성녀가 이곳에 머무르는 동안은 최대한 그녀의 안위에 신경을 써야겠어. 그리고 헬렌…….’
전날, 아크 신관장과 나누었던 대화가 불현듯 내 뇌리를 스쳐 간다.
‘현직 성녀라면 당연히 전대 성녀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을 거야. 그녀와 조금 가까워지면 전대 성녀에 대한 정보도 얻을 수 있을지 몰라.’
그뿐인가?
어쩌면 전대 성녀 헬렌의 이야기와 더불어, 바알에 대한 단서까지 얻을지도 모른다.
‘네가 정말 나를 축하하러 온 건지 아니면 다른 목적이 있는지는 몰라도 반드시 살려서 돌려보낸다.’
나는 더 이상 고민하지 않고 천천히 손을 들며 입을 뗐다.
“그녀의 안내 말입니다. 제가 맡았으면 합니다.”
“…자네가 하겠다고?”
“예. 제가 맡으면 어떨까 합니다. 그녀와 연배도 비슷하니 더 말이 통하는 부분이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나의 의견에 잠시 침음하는 나가란 탑주.
그는 이윽고 고개를 돌려 제이나를 응시한다.
“흑남의 의견에 대해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흑남께서 배려를 해 주신다고 하시니 저는 그저 감사할 따름이죠.”
“그런가? 알겠네.”
나가란 탑주는 묘한 미소를 짓고는.
다시금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본다.
“랄프, 자네가 당분간은 고생을 해야겠네.”
“알겠습니다.”
“자, 그보다 성녀도 먼 길을 오느라 고생했을 터이니 오늘은 쉬어야겠지.”
나가란 탑주가 문을 보며 고개를 까딱이자.
흑마법사들 몇이 성녀 일행의 옆으로 다가간다.
“저들이 자네들을 별채로 안내해 줄 걸세.”
“호의에 감사드려요.”
그 말을 끝으로 성녀 일행은 흑마법사들을 따라 회의장을 나갔고.
그것을 기점으로 길었던 회의도 끝이 났다.
‘하지만 여유 부릴 시간은 없어. 일단 레논 부탑주랑 상의를…….’
내가 레논 부탑주에게 다가가려던 찰나.
“흑남님!”
레논이 황급히 내게로 달려오며 낮은 목소리로 말한다.
“왜 성녀의 안내를 맡으신 겁니까?”
“왜라니요? 그야 제른 부탑주가 혹시라도 수작질을 부릴까 봐 먼저 손을 쓴 겁니다.”
나의 말에 레논이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인다.
“예, 저도 흑남님의 의중은 압니다. 다만 조금 성급한 감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성급하다니요?”
“흑남께서 성녀의 안내를 맡으신 상황에서 만약 성녀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파멸학파는 반드시 흑남께 책임을 물을 겁니다.”
‘이 아저씨야, 걱정하는 건 이해한다만 거기서 괜히 늦장 부렸다간 분명 다른 놈이 나섰을걸?’
나는 걱정하는 레논 부탑주를 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파멸학파에게 맡길 수는 없잖습니까?”
“그렇긴 합니다만…….”
“늦장을 부렸다면 탑주님께서 파멸학파에게 성녀의 안내를 맡기는 상황을 볼 수도 있었을 겁니다.”
나의 말에 씁쓸히 웃는 레논 부탑주.
“그것도 그렇습니다만… 후우……. 대체 왜 갑자기 성녀 때문에 이 소동을 겪어야 하는지, 머리가 다 혼란스럽군요.”
“하여간 이제껏 제가 본 레바논의 종들은 전부 종잡을 수가 없는 것 같네요.”
나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그의 말에 적당히 맞장구를 치곤.
주변 사람들이 회의장을 다 빠져나간 걸 확인하고 목소리를 조금 높였다.
“그래도 어쨌건 성녀가 적어도 검은 대지를 나서기 전까지는 그녀의 안위를 살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흑남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그래서 말입니다. 혹시 습격에 대비할 만한 물품 같은 건 없습니까?”
나는 레논을 보며 계속 말을 이어 갔다.
“제른 부탑주가 부재중이라고는 해도 그의 수하들이 과잉 충성심을 보일 수도 있습니다.”
“맞습니다. 저도 그 점이 계속 걱정이 되더군요. 습격에 대비할 만한 물건이라…….”
레논은 우두커니 서서 잠시간을 고민하다가 갑자기 눈을 번뜩인다.
“그러고 보니 꽤 쓸 만한 게 있긴 합니다.”
“오오, 그래요?!”
‘역시 악마학파 부탑주야. 그래, 뭔가 그런 것 하나쯤은 있을 줄 알았다니까?’
“다만… 그건 제가 사용하려고 했던 거였는데…….”
“흑탑의 안녕을 위해 기부한다고 생각하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후우… 그래야겠습니다. 일단 이동하시죠.”
* * *
그날 밤.
흑탑의 서쪽 부근에 위치한 별채 안.
“걱정을 많이 했었는데 생각보다 호의적이라 다행이었네요.”
편안한 차림을 한 제이나가 기사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그야 저희가 많은 수의 언데드들을 팔아 주니 호의적일 수밖에 없을 겁니다.”
“그래도 메스꺼운 존재들이라는 건 부정할 수 없습니다. 낮에 보셨습니까? 아무렇지 않게 사람들을 죽이는 놈들입니다.”
“필요하니 거래를 하고는 있다만 되도록 엮이고 싶지 않은 부류들입니다.”
아직 무장을 풀지 않은 여기사들이 앞다투어 말하자.
제이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답한다.
“그래도… 레바논 님의 신탁을 따르기 위해선 꼭 필요한 일이에요.”
“저는 조금 의문입니다. 어째서 레바논 님께서는 흑남을 왕국으로 데리고 오라고 신탁을 내리신 건지…….”
한 여기사의 말에 제이나가 단호한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본다.
“그분께서는 모든 계획을 갖고 계세요. 우리는 그저 레바논 님의 원대한 계획을 충실히 이행하면 돼요.”
“죄, 죄송합니다. 제가 실언을…….”
똑똑-
그들이 대화를 이어 나가던 중.
갑자기 별채 바깥에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혹시 누가 흑마법사를 불렀나?”
한 여기사의 물음에 모든 이들이 고개를 젓는다.
“검 챙겨.”
기사들이 모두 검을 들자.
한 여기사가 대표로 조심스럽게 문 앞으로 다가가 소리친다.
“누구냐.”
“흑남이다.”
“…흑남?”
너무도 의외의 사람이 찾아온 탓일까.
“흑남이 이 시간에 여긴 왜…….”
여기사들이 당혹해하던 와중 문 앞에 있던 여기사가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뭐야. 아주 잔뜩 무장을 했네.’
기사들의 손에 들린 검을 보며 나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성녀님은 안에 계시나? 아, 계시네.”
내가 제이나를 보며 눈인사를 건네자.
그녀도 어색하게 인사를 하며 입술을 뗀다.
“안내는 내일부터 해 주시는 게 아니었나요?”
“맞습니다. 안내는 내일부터였죠. 하지만…….”
나는 피식 웃으며 말을 이어 갔다.
“안내받을 사람이 죽기라도 한다면 다 소용없는 일 아닙니까?”
“뭐라고! 이놈이!”
한 여기사가 발끈하여 소리치자.
나는 무심히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당신들도 습격을 우려해서 무장을 풀지 못한 걸 텐데요?”
“…우리는 원래 무장을 한 채로 잔다.”
‘무장을 한 채로 자? 웃기고 있네. 그대로 자다간 목이 부러지겠다.’
나는 허세를 부리는 기사를 보며 피식 웃음을 흘리고는.
레논에게서 받았던 물건을 그들에게 내밀었다.
“하나씩 받으시죠.”
나의 손에 들린 물건을 보곤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제이나 성녀.
“이게 뭐죠?”
“당신들의 목숨을 지켜 줄 물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