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카데미의 노예가 살아남는 법-53화 (53/200)

53.

신성력 착즙기가 움직인 건.

내 신성력에 반응하여 움직였다는 뜻일 터.

이건 백 프로 의심을 받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네로의 의심만 벗겨 내면 앞으로는 계속 신성력을 얻을 수 있어.’

기본적으로 내 마력은 흑마력과 신성력이 섞인 잡탕에 가까웠다.

‘그 탓인지는 몰라도 흑마력을 아무리 늘려도 뭔가 힘이 엄청 늘어난다는 느낌이 없었단 말이지.’

국은 없고 순대만 많은 순댓국처럼 말이다.

그래서 나는 신성력에 눈길을 돌렸었다.

‘실제로 신성력을 조금 늘리니까 확실히 몸의 균형도 맞아 가는 느낌이었고. 다만 문제는 신성력을 늘리는 방법이었었지.’

신성력을 늘리기 위해선 선행을 해야 하는데.

내가 처한 환경상 선행을 행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저 신성력 착즙기가 있다면 손쉽게 신성력을 모을 수 있다는 것 아냐?’

더욱이 사람만이 아니라 물건에서도 신성력을 착즙할 수 있다니.

쓸데없는 살인도 하지 않아도 될 터.

‘저걸 선물로 받아 가야겠어. 다만 그전에…….’

일단 나에게 쏠린 의심부터 풀어야겠다.

“하하… 약간의 오해가 있었습니다.”

“…오해요?”

네로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하, 설마 레논 부탑주의 딸인 레나와 베논 님의 인정을 받은 제가 신성력을 가지고 있을 거라 생각하십니까?”

“그건 그렇습니다만… 주변에 신성력이 있는 물건이 없으면 발동되지 않는 물건인데…….”

네로가 말꼬리를 흐리자.

나는 이때다 싶어 아공간 주머니에서 자그마한 조각상 하나를 꺼내 들었다.

“신성력 착즙기가 그 발광을 한 이유는 아마 이것 때문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건……?”

“레바논을 본따 만든 조각상이죠. 아마도 이것 때문에 신성력 착즙기가 반사적으로 작동을 한 것 같네요.”

나는 무심하게 미소를 유지한 채.

조각상을 신성력 착즙기 앞에 갖다 대고 흔들어 보였다.

그러자.

까가가가가각-

신성력 착즙기에 달려 있던 드릴 같은 것이 맹렬하게 회전하며.

당장이라도 조각상에 달려들 듯 움직이는 것 아닌가?

“어이쿠…….”

‘휴… 다행히 잘 반응하네. 이 쓸모없는 조각상을 어디에 써야 하나 했는데……. 고맙다, 아크 신관장.’

나는 잽싸게 조각상을 거두어들인 뒤.

미소를 머금은 채 네로를 바라봤다.

“보셨죠?”

“…네. 확실히 그렇긴 합니다만… 어째서 흑남께서 그런 물건을 갖고 계신 건지……?”

여전히 미심쩍은 눈으로 나를 보는 네로를 보며.

나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이번 학기 때 흑카데미에 신관장 한 명이 교수로 들어왔었는데, 그 사람에게 선물로 받은 겁니다. 연구차원에서 갖고 있었는데 설마 이것에 반응할 줄은 몰랐네요.”

“아아… 아크 대신관장의 선물이었습니까?”

상황이 대강 이해가 갔는지.

네로는 그제야 미심쩍어하던 시선을 거둔다.

‘후… 어째 잘 먹힌 것 같네. 뭐, 틀린 말도 아니니까.’

“그 외에 신성력이 있는 물건들 몇 가지가 더 있긴 한데, 한번 보시겠습니까?”

“아닙니다. 제가 실례를 했습니다. 이 방에 들어가기 전에 미리 말씀을 드렸어야 했는데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죄송합니다.”

네로가 고개를 푹 수그리자.

‘그래, 큰 실례를 저질렀지. 흑남을 레바논의 종자라고 의심해?’

나는 속내와 달리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하하, 괜찮습니다. 애당초 어느 흑마법사가 신성력이 있는 물건을 들고 다닐까요? 의심하실 만도 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네로가 재차 감사를 표하자.

나는 이때다 싶어 입을 뗐다.

“그래서 말인데… 이걸 선물로 받으려 합니다.”

“…그걸 선물로 정하시겠다는 겁니까?”

왜일까.

나의 말에 네로의 표정이 눈에 띄게 딱딱해져 간다.

‘뭐야. 왜 그렇게 표정이 썩어 들어 가?’

“문제가 있습니까?”

“아닙니다……. 문제는 없습니다만… 더 밑층으로 내려가면 그보다 더 엄청난 것들도 많은데, 더 둘러보시고 결정하시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더 엄청난 것? 더 밑의 층엔 죄다 위험한 것뿐이라며? 거기다가 신성력 착즙기보다 더 엄청난 게 어디에 있다고?’

흑마법사들에게는 별난 물건일지 몰라도.

신관들과 성기사 그리고 나에게만큼은 보배와도 같은 물건이나 다름없었다.

“아닙니다. 이거면 충분합니다.”

“그렇지만… 밑에도 보고 가시는 게…….”

‘아니. 나는 이걸 실험하러 가야 한다고!’

“하하, 괜찮습니다. 이미 많은 걸 봐서 피곤하기도 하고요. 시간도 늦었으니 오늘은 이쯤에서 정리를 하고 싶군요.”

“그렇지만… 알겠습니다.”

결국 체념한 것인지.

네로는 씁쓸히 고개를 끄덕이곤 발길을 돌린다.

‘뭐야. 밑층을 못 보여 준 게 그렇게 아쉽나?’

* * *

그날 밤.

제른의 집무실 안.

“네로 님,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흑남을 죽일 수 있다고 신신당부하지 않으셨습니까?”

제른이 맞은편에 앉아 있던 네로를 보며 싸늘하게 묻는다.

“그게… 본래는 밑의 층에 있는 ‘분해하는 인형’이 있는 방까지 그를 데려갈 계획이었습니다.”

분해하는 인형.

욕망의 방에서도 극도로 위험한 저주가 걸린 물건으로서.

그 물건의 반경 안에 들어가면 대상이 누구건 잘게 분해시키는 저주받은 물건이다.

“문제가 있었습니까?”

“흑남이 중간에 발길을 돌려 버렸습니다.”

네로가 씁쓸히 답하자.

제른이 눈을 게슴츠레하게 뜬 채 그녀를 바라본다.

“발길을… 돌렸다고요?”

“네. 어째선지 신성력 착즙기에 큰 관심을 보인 탓에…….”

차마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네로.

“제가 그를 욕망의 방에 들이기 위해서 탑주께 얼마나 고개를 숙였는지는 아실 거라 믿습니다. 그것도 그 핏덩이를 위해서 말입니다. 그런데 실패를 했다라…….”

“면목이 없습니다. 하지만 흑남이 다시 욕망의 방으로 들어오기만 한다면 그때는 반드시…….”

“다음이요?”

제른 부탑주가 피식 실소를 흘린다.

“한번 욕망의 방에서 물건을 들고 나왔으니 다시 선물이라는 미끼를 이용할 수 없는데, 무슨 수로 다음을 계획할 수 있겠습니까? 무언가 좋은 수라도 있으니 그런 말씀을 하신 거겠지요?”

“그건…….”

네로가 답하지 못하자.

제른의 눈가에 피로감이 쌓여 간다.

“으허허허허, 그냥 말씀해 보신 건가 봅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할 게 뭐 있겠습니까? 그저 놈이 운이 좋았던 것을……. 알겠습니다. 일단 돌아가서 쉬시지요.”

네로가 꾸벅 인사하고 집무실을 나서자.

“위대한 흑마법사? 하… 쓸모없는 년…….”

제른의 입에서 싸늘한 읊조림이 흘러나온다.

“욕망의 방에서 수집 욕구나 채우던 년에게 내가 뭘 기대했던 건지……. 후… 아무래도 다른 방법을 생각해 봐야겠어.”

* * *

한편, 같은 시각.

‘후우… 긴장되네.’

레나와 헤어지고 얼른 방으로 돌아온 나는.

미스릴로 만든 천으로 꽁꽁 동여매진 신성력 착즙기를 꺼냈다.

까가… 가가… 각-

당장이라도 나를 착즙하고 싶은 건지.

연신 헛바퀴를 도는 신성력 착즙기를 보며 나는 헛웃음을 흘렸다.

‘조심해서 사용해야겠는데?’

우선 나는 헤드셋 같은 머리 부분을 미스릴 천으로 잘 묶고.

마찬가지로 다른 쪽은 기둥 부분에 묶어 착즙기가 난동을 부릴 수 없도록 만들었다.

까가가가가가각-

‘좋아. 고정은 잘됐네. 근데… 조금 망설여지긴 하네…….’

신성력이 늘어나는 것?

물론 좋은 일이다.

‘하지만 신성력이 많으면 많을수록 고자가 될 가능성도 높아지는 탓에 그간 선행을 하는 건 삼가 왔었지.’

하지만 더 이상 신성력을 외면할 수는 없다.

‘좋으나 싫으나 신성력도 내 몸의 일부야. 흑마력만 높일 수는 없다고. 내 가설이 맞다면… 후… 좋아! 이제 한번 사용을 해 볼까.’

나는 먼저 아크 신관장에게서 흑남 즉위 기념 선물로 받았던.

두툼한 방패와 메이스를 꺼내어 들었다.

‘신관들이 정성을 다해 만든 축복받은 무기들… 착즙하기에는 딱 좋네.’

나는 먼저 방패를 집어 착즙기의 드릴 부분 밑에 놓았다.

그러자.

까가가가가가강-

방패는 믹서기 안의 과일 갈리듯 순식간에 형체를 잃어 갔고.

스스스스슥-

‘오오… 이게 진짜 되네?’

방패가 사라진 자리 위로 포근한 기운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놀람도 잠시.

‘이크… 사라지기 전에 얼른 흡수하자.’

나는 재빨리 표류하는 신성력을 들이켜곤.

심장 인근에 자리하고 있는 서클들을 회전시켰다.

웅웅웅웅웅-

그러자 흑마력만이 서클의 대부분에 차 있던 과거와 달리.

따듯한 기운들이 서클 속으로 스며들어 빠른 속도로 나의 흐리멍덩한 마력과 융화되어 간다.

‘오오오… 그래, 이거였어! 이거였다고! 왜 흑마력을 엄청 늘려도 발전이 더디나 했더니… 역시 신성력이 문제였었구나!’

방대한 흑마력과 달리 빈약했던 신성력.

역시 그것이 내 실력 향상에 있어 문제가 됐던 모양이었다.

‘펠기누스가 왜 신성력을 늘리라고 했었는지 이제야 확실히 납득이 가네. 좋았어! 이것도 얼른 갈아 볼까?!’

나는 서둘러 메이스까지 신성력 착즙기 밑에 밀어 넣었고.

갈려 나가는 메이스 사이로 흘러나오는 신성력을 보며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관리하기가 좀 까다로울 뿐이지 정말 최고의 보물을 얻었구나.’

* * *

내가 흑혼해 듀오의 관리와.

신성력 착즙기에 한창 몰두하여 신성력이 담긴 물건을 수집하는 사이.

약 세 달 정도 되는 방학 기간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거참…….’

흑카데미의 개학을 맞아.

나 역시 흑탑에서 나와 흑카데미로 돌아왔다.

‘계속 흑탑에 머물러도 되긴 하지만 흑마력 3배를 포기할 수는 없으니까. 그보다 참… 시간 빠르네.’

나는 흑카데미의 연회장 안을 둘러보며 혀를 내둘렀다.

‘흑혼해 듀오는 아스칼에게 맡기긴 했지만 종종 들러서 잘 관리하나 확인을 해야지. 뭐 딱히 한 것도 없는데 시간이 이렇게 빨리 지나가는 건지.’

“이번에 난 아버님과 함께 현장학습을 나갔었다고! 내가 거기서 뭘 한 줄 알아?”

“사냥이라도 한 것 아냐? 난 그것보다 더 굉장한 걸 했다고! 시련의 탑 최고의 역작이라고 불리는 불사의 미궁에 다녀왔으니까.”

“오오… 몇 층까지 내려가 봤는데?”

한껏 방학을 즐기고 흑카데미로 돌아온 학생들.

저들은 자기들의 경험담을 떠벌리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보다 소문 들었어? 흑남께서 흑탑에 기이한 결혼 상단을 만드신 모양이던데.”

“결혼 상단? 그건 또 뭔데?”

“나도 사촌 형님께 들은 거라 자세히는 모르는데, 다른 탑과의 결혼을 주선하는 상단인 것 같아.”

일부 학생들은 나를 보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거나.

“흑남님도 공식적으로 흑탑에 발을 담그려고 하시는 걸까?”

“그건 모르지. 여하튼 흑탑의 젊은 흑마법사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대. 그래서 지금 흑탑의 실세들이 바짝 긴장하고 있다고 하던데?”

안목이 넓은 학생들은 흑탑의 정치적 변화에 대해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음…….’

하나 나는 그런 학생들을 보며 다른 생각을 하기 바빴다.

‘내 흑마력을 늘려 줄 고객들이 돌아왔으니 매점이랑 흑카지노도 더 확장을 해야겠지.’

매점의 주요 고객들도 돌아왔으니.

앞으로 나의 흑마력은 더더욱 늘어나게 될 터.

‘썩을 놈들. 잘들 돌아왔다.’

내가 속으로 피식 실소하던 사이.

“모두 정숙해라.”

볼드 학장의 묵직한 한마디가 떨어지자.

학생들은 삽시간에 침묵을 지킨다.

“각자의 자리에서 잘 방학을 보냈을 테고. 전 학기에는 굉장히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다. 치료사가 규율을 어기고 죄를 저질렀고, 그로 인해 유능한 한 교수가 목숨을 잃었지.”

볼드 학장이 리치 더스틴과 전 마물학 교수 베크 교수를 언급하곤.

계속 말을 이어 간다.

“하여 이번 학기에는 새로운 치료사와 마물학 교수님을 초빙하게 됐다.”

볼드 학장의 말이 끝나고.

‘어디… 이번에는 어떤 미친놈들이 왔는지 볼까.’

내가 연회장의 문 쪽으로 고개를 돌리던 찰나.

“검은 숲 출신의 힐락 님의 방문을 환영합니다!”

문 앞에 서 있던 새로운 하인장이 연회장이 떠나가라 소리친다.

‘…음? 검은 숲 출신이라고?’

검은 숲은 마물들이 우글거리는 극악한 환경을 가진 숲이건만.

그곳 출신의 교수라니?

‘뭐, 설마 마물학 교수가 마물인 건 아니겠지?’

내가 생각해도 어이가 없었기에.

나는 속으로 웃음을 흘렸다.

그러던 그때.

그그그그그그그극-

‘시발… 저건 뭔데?’

웬 검은 돌덩이 같은 것 하나가 연회장 안으로 들어오는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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