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레논 부탑주의 갑작스러운 발언에 나는 멍하니 그를 바라봤다.
“흑마… 랜드요?”
“그렇습니다. 흑마랜드.”
레논이 진중한 눈으로 날 바라보자.
난 속으로 헛웃음을 삼켰다.
‘아니, 이 양반… 진짜로 흑마랜드에 관심이 있던 거였어? 레나는 대체 이 양반한테 무슨 말을 한 거야?’
이쪽은 그저 농담으로 던졌던 말을 이렇게 진지하게 받아들일 줄이야.
“레나가 부탑주님께 무슨 말을 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직 구상 중일 뿐인 이야기입니다. 실현 가능성이 낮기도 하고요.”
“가능성은 있다는 말씀이시군요.”
“아… 예… 뭐… 그렇죠.”
‘아니… 이 양반은 진짜 흑카데미에 롤러코스터를 들여놓고 싶은 건가?’
레논이 눈을 번뜩이며 말한다.
“흑남님께서 만드신 흑카지노 덕에 학생들의 성적이 비약적으로 상승했다고 들었습니다.”
“하하… 제 덕이라기보단 학생들이 노력한 덕이죠.”
“계기를 만들어 주신 건 흑남님이십니다. 그리고… 수입이 꽤나 많이 발생한다고 들었습니다만…….”
‘아하, 왜 말도 안 되는 농담에 관심을 보이나 했더니 돈 때문이었어?’
나는 이제야 레논이 왜 내 농담에 깊은 관심을 보였는지 이해했다.
‘확실히 매점이랑 흑카지노가 돈이 되긴 하지.’
매일같이 학생들이 이용해 주는 덕에.
그야말로 금화가 쌓이고 있지 않은가?
“맞습니다. 제법 돈이 되긴 하지요.”
“…그렇습니까?”
나의 말에 레논 부탑주의 눈이 장사치의 그것으로 변해 간다.
“그렇다면 혹시 흑마랜드를 지으실 의향이 있으시다면 저도 적극적으로 협조를 하겠습니다.”
‘적극적으로 협조한다? 땅을 줄 테니까 흑마랜드에서 나오는 수입의 일정 부분을 달라, 이런 뜻인가?’
“원하시는 게 있으시겠죠?”
“하하, 큰 건 아니고 그저 흑마랜드에서 나올 수입의 일부를 제게 나눠 주시면 어떨까 싶습니다.”
‘역시…….’
솔직히 나쁜 조건은 아니다.
‘다만… 흑마랜드 건설이 불가능하다는 게 문제지.’
애당초 이쪽은 농담으로 던진 말이다.
이곳의 기술력으로 무슨 수로 놀이동산을 짓는단 말인가?
‘그리고 흑마랜드가 뭔지는 알고 저런 이야기를 하는 건가?’
흑카데미 안에 철로가 깔리고.
플룸라이드와 회전목마가 빙글빙글 돌고 있어도.
레논은 지금과 같은 태도를 유지할 수 있을까?
‘생각만 해도 어처구니가 없네…….’
내가 생각했음에도 너무도 어처구니가 없는 생각이었기에.
나는 속으로 실소를 흘렸다.
“부탑주님의 말씀은 충분히 이해했습니다. 하지만 흑마랜드를 당장 건설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어렵… 다고요?”
“네. 일단 제가 생각한 흑마랜드가 뭔지는 아십니까?”
나의 물음에 레논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입을 연다.
“학생들이 좀 더 흑마법에 익숙해질 수 있도록 실습을 하는 장소가 아닙니까? 아니면… 잔혹성과 무자비함을 기르기 위한 곳이거나…….”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곤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흑마랜드는 그런 곳이 아닙니다. 꿈과 환상 그리고 동심이 있는 곳이죠.”
“…예?”
당혹해하는 레논을 보며.
나는 흑마랜드가 어떤 곳인지 간단히 설명을 해 주었다.
“즉, 흑남님의 말씀을 정리하자면… 엄청난 돈과 기술이 들어가는 투기장 같은 곳이군요.”
“투기장이 아니라… 음… 오히려 흑카지노에 가깝겠죠. 일단 휴식을 취하기 위한 곳이니까요.”
“음…….”
나의 말에 레논은 낮게 침음한다.
“여하튼 다른 것보다 흑마랜드는 건설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일단 건설할 기술이 부족하고, 설령 기술이 있다고 한들 메테오를 맞아도 무사할 정도로 안전한 재료가 필요하니까요.”
“허어…….”
나는 거듭 흑마랜드의 건설이 불가능하다는 걸 설파했으나.
레논은 미련을 버리지 못한 건지 입맛을 다시며 날 바라본다.
“그래도 말입니다. 만약 흑마랜드가 건설이 된다고 치면, 흑남님께서는 돈이 벌릴 거라 보십니까?”
“물론입니다. 흑카지노 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큰돈이 벌리겠지요.”
“음…….”
다시 고민에 빠진 레논.
“기술력은 드워프들을 납치해 오고 재료는 약탈해 오는 쪽으로 하면 가능할 것도 같은데…….”
그는 깊이 고민에 빠져 나지막이 중얼거리다가.
정신을 차리곤 날 보며 말한다.
“여하튼 흑남님의 생각은 잘 알았습니다. 당장은 불가능하지만 가능성이 보인다면 실현하시겠다는 뜻이라고 봐도 되겠습니까?”
“아… 네, 가능하다면 말입니다.”
“하하, 잘 알겠습니다. 그보다 잡설이 너무 길었군요.”
자리에서 일어나는 레논.
“저를 따라오시지요. 저희 악마학파에 대해 상세히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 * *
나는 레논과 함께 흑탑 밖으로 나갔다.
“어디로 가는 겁니까?”
“저기에 있는 건물이 보이십니까? 저희는 저기로 가는 중입니다.”
레논이 가리킨 곳은 흑탑 옆에 위치한 커다란 건물이었다.
‘생긴 건 그냥 평범한 건물인데. 저기가 악마학파의 흑마법사들이 연구를 하는 곳인가?’
“자, 들어가시죠.”
레논의 인도하에 나는 건물로 들어섰다.
‘이곳은…….’
“스켈레톤은! 몇 구나 완성됐어!”
“1조! 지금 50구째 제작 중입니다!”
“늦어! 오늘 내로 100구는 더 제작해야 된다! 그래야 납기일을 맞출 수 있다! 알았어?!”
안에서는 하인인지 흑마법사인지 모를 사람들이 열심히 뼈를 맞추고 있었고.
“누더기 골렘은?!”
“지금 두 개째입니다!”
“어떻게든 한 개 더 기워 놔!”
다른 한쪽에선 사람의 가죽을 바삐 꿰매고 있다.
‘언데드를 제작하는 공방인가? 근데… 납기일?’
납기일이라 함은 어디선가 흑탑에게 언데드 제작 의뢰를 맡겼다는 것 아니겠는가?
‘대체 어디서 이런 걸 맡긴 건지…….’
내가 의아함을 감추지 못하던 그때.
작업반장으로 보이는 남자가 소리친다.
“다음 달까지 어떻게든 물량을 맞춰야 된다! 그래야 레바논 왕국의 발주 날짜를 맞출 수 있다! 알았나?!”
“예!”
‘…레바논 왕국이 발주한 거라고?’
신성 왕국 레바논.
수많은 성기사들과 신관들을 보유하고 있으며.
흑마법사와는 원수 관계나 다름없는 그들이 스켈레톤 제작을 의뢰했다니?
‘허…….’
내가 어처구니가 없어 멍하니 그들을 바라보던 중.
“어이구! 부탑주님 오셨습니까?”
호령을 내리던 남자가 방긋방긋 웃으며 헐레벌떡 우리 앞으로 달려온다.
“작업 상황은 좀 어떤가?”
“최선을 다해 물량을 맞추고 있는 중입니다! 이번 달 안으로 물량을 맞출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흠…….”
레논이 제작된 스켈레톤들과 누더기 골렘을 살피자.
작업반장은 마른침을 삼킨다.
“혹시 무슨 문제라도…….”
“아니네. 이정도 품질이면 교황도 만족해하겠지. 잘했네.”
“으허허허허허! 감사합니다!”
부탑주의 칭찬에 작업반장의 입가가 귀에 걸린다.
‘…교황? 그럼 이것들을 전부 그 교황이 의뢰한 거라고?’
“그런데 아직 영혼 부여 작업은 하지 않은 모양이군.”
“일단 기초 작업을 마무리하고 본격적으로 영혼을 부여하려고 합니다! 한번 둘러보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정말 깔끔하게 잘 작업을 했습니다만… 그런데 옆의 분은 누구신지…….”
“흑남님이시다.”
레논의 말이 끝나자.
“흑남님이요? 아아… 흑남님… 흑남님?”
작업반장의 눈이 둥그렇게 떠졌다가 경악으로 물들어 간다.
“허… 허억… 죄, 죄송합니다. 제가 흑남님을 못 알아뵙고 그만 경솔한 언행을…….”
작업반장이 머리를 처박고 엎드리자.
“…흑남? 저분이 소문으로만 듣던 흑남님인가 보구만.”
“허어… 나이도 어린 것 같은데 벌써 저런 자리에 오르다니… 부럽긴 하군.”
“능력이 있으니 그런 거겠지. 듣자 하니 저 나이에 벌써 펠기누스 님과 계약을 했다는 소문도 있던데? 아, 물론 사실인지는 나도 모르지.”
인부들이 수군거리는 가운데.
나는 웃으며 작업반장을 일으켜 세웠다.
“그렇게 예의를 차리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일어나세요.”
“이렇게 관대하실 수가…….”
“렘슈, 흑남님께서 괜찮다고 하시니 이만 물러가도록.”
“예!”
작업반장이 고개를 푹 숙인 뒤 제자리로 돌아가자.
나는 그제야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 레논에게 질문을 던졌다.
“여기는 뭐 하는 곳입니까?”
“보이는 그대로입니다. 외부에서 언데드 제작 주문이 들어오면 제작을 하고 판매하는 일을 하는 곳이죠. 그게 악마학파가 주로 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의 대답에 난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뭐야. 악마학파는 아직 계약하지 못한 악마들에 대해 파악하거나, 악마들을 부려 대륙에 악행을 벌이는 게 아니었어?’
“그래요? 제 생각과는 조금 많이 다르군요. 저는 악마학파가 악마들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와 고찰을 할 줄 알았는데 말입니다.”
내 말에 레논이 씁쓸히 웃는다.
“그러면야 더할 나위 없이 좋겠습니다만 연구에는 많은 돈이 필요합니다. 악마와 계약하는 데 필요한 재료들도 그렇고 흑마법사들에게 나가는 돈도 그렇고… 모든 게 돈입니다. 그러니 이렇게라도 돈을 벌어야죠.”
“악마들을 이용하면 더 수월하게 돈을 벌 수 있는 것 아닙니까?”
그렇잖은가?
명색이 악마학파인데 악마를 이용하지 않는다니?
“그렇기야 합니다만 대부분의 악마들은 전투를 원하지 이런 돈벌이의 수단으로 자신이 사용되는 걸 원치 않더군요.”
“아하…….”
‘그러니까 악마들이 전투 외에는 협조적으로 나오지 않는다 이거네. 그럼 악마들이 원하는 대로 전투를 하고 돈을 벌면 되는 것 아냐?’
하지만 나는 굳이 속내를 드러내지 않고 질문을 이어 갔다.
“그럼 다른 학파들은 어떻게 돈을 법니까?”
“보통 저주학파는 저주를 걸거나 저주를 풀어 주고 돈을 법니다.”
“호오… 그럼 저주학파가 제일 풍족하겠습니다.”
보이는 사람마다 저주를 걸고 돈을 요구하면 될 테니까.
하지만 레논 부탑주는 고개를 젓는다.
“제일 여유가 있는 학파는 파멸학파입니다.”
“…네?”
“그들은 탑주님께서 시킨 일을 하고 돈을 법니다. 보통은 다른 왕국의 사주를 받고 다른 왕국의 도시를 초토화하거나, 아니면 자국 내의 영지를 공격해 달라고도 하죠.”
‘세 학파마다 돈 버는 방식이 다르구나. 근데 자기 왕국 내의 영지를 공격해 달라고도 한다고?’
스스로 자기 왕국을 공격해 달라고 요청한다니?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인가?
“왕이… 자기 나라를 공격해 달라고 요청을 한다고요?”
“자주 있는 일은 아닙니다만 보통 왕국에 내란이 일어났을 때 저희를 많이 찾더군요.”
피식 웃으며 말을 이어 가는 레논 부탑주.
“내란을 잠재우는 데는 외부의 적을 끌어들이는 것만큼 좋은 것도 없으니 말입니다.”
“허어…….”
레논 부탑주의 말에 나는 어이가 없었다.
‘이쯤 되면 공식적으로는 흑마법사들이 대륙의 공적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모든 왕국들이 필요로 하는 필요악이 아닐까?’
“그런데 말입니다. 파멸학파가 하는 일을 악마학파라고 못 할 건 없잖습니까?”
아무리 파멸학파의 흑마법이 강력하고 눈길을 끈다고 해도.
파괴력만큼은 악마학파 역시 밀리지 않을 터였다.
“그건…….”
잠시 망설이던 레논 부탑주.
그는 곧 한숨을 내쉬며 말한다.
“사정이 있습니다.”
‘말하기 어려운가 보네.’
굳이 그 사안에 대해 더 캐물을 이유가 없었기에.
나는 화제를 돌리고자 다시 질문을 던졌다.
“여하튼 그럼 그렇게 세 학파가 번 돈은 탑주님께 가는 겁니까?”
“아닙니다. 학파들이 번 돈의 일정 부분은 흑탑의 유지비로 사용되고 남은 돈은 각 학파들이 알아서 관리합니다.”
‘그러니까 번 돈의 일부는 흑탑에 세금으로 내고, 남는 돈은 각 학파들이 알아서 관리한다? 주먹구구식으로 운영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체계적이네.’
이제야 흑탑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대충 파악이 된다.
‘각 학파들이 알아서 돈을 벌면 부탑주들이 가진 권력도 꽤 강하다고 봐야겠네.’
이들도 흑마법사이기 전에 사람이다.
사람인 이상 돈이라는 족쇄에서 벗어날 수는 없을 터.
‘이 양반… 보기보다 더 굉장한 양반이었구나?’
레논 부탑주가 가진 권력이 생각 이상으로 많은 듯하자.
나는 속으로 그를 재평가했다.
“이해했습니다. 꽤나 체계적이군요. 한 가지만 더 묻겠습니다. 아까 전에 교황이 언데드들을 발주했다고 들었는데 그건 무슨 말입니까?”
내가 의문을 표하자.
레논도 덩달아 얼굴에 물음표를 띄운다.
“무슨 말이라니요? 말 그대로 교황이 저희에게 의뢰를 한 겁니다.”
당연하다는 듯 말하는 그를 보며.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레바논 왕국과 흑탑은 원수 관계가 아니었습니까?”
“아아… 계속 흑카데미 안에 계셨으니 잘 모르실 만도 합니다.”
내 물음에 레논은 그제야 상황을 파악했는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 간다.
“그랬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전 탑주님께서 상황을 많이 바꾸어 놓으셨지요. 그래서 겉으로는 원수 관계를 유지하고 있긴 하지만 뒤로는 이렇게 거래를 하는 상황이 만들어진 겁니다.”
“허…….”
‘전 탑주라는 양반… 엄청난 협상가였나 보네.’
그라트니 요새에서 봤던 성기사들과 사제들.
그들이 흑마법사들에게 갖고 있던 증오심을 생각해 보면.
전 탑주는 정말 큰 업적을 이뤄 낸 셈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레바논 왕국이 어떻게 순순히 흑탑과의 계약에 응했는지 의문이군요.”
“이유야 간단합니다. 레바논 왕국의 존재 의의는 악을 멸하고 빛을 수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저희가 사라지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레바논 왕국도 왕국을 유지할 명분을 잃게 되겠지요. 그러니 저희에게 이런 의뢰를 하는 것일 테고요.”
레논의 대답에 나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하긴. 만약 흑마법사들이 사라진다면… 그 많은 성기사들이랑 사제들도 거의 실직자가 되는 것 아냐? 아니 뭐… 사제들이야 치료사로 직업 변경을 한다고 치고, 성기사들은… 흠…….’
결국 자기네 왕국을 계속 존속하기 위해.
흑탑에 의뢰하여 자기네 왕국에 지속적으로 언데드를 보내게 한다니.
“허허, 어둠이 있어야 빛도 존재할 수 있다네.”
불현듯 그라트니 요새에서 아크 신관장이 했던 말이 떠오른다.
‘그 사이비 신관장이 그런 말을 한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구나.’
겉으로는 치고받고 싸우던 레바논 왕국과 흑탑이.
뒤로는 이런 거래를 하고 있었을 줄이야.
‘아크 신관장이 교수로 왔을 때 둘 사이에 뭔가 있겠거니 생각은 했었다만… 거참…….’
내가 속으로 피식 미소를 흘리던 중.
레논이 나지막이 말한다.
“작업 공방은 대충 다 둘러본 듯하니, 이제 데스나이트들이 제작되는 걸 보여 드릴까 합니다.”
“그것도 악마학파 관할이었습니까? 하하, 저는 좋지요.”
“가시죠.”
나는 레논과 함께 작업 공방을 나가.
흑탑 뒤편으로 이동했다.
“성기사들의 정신을 굴복시키는 작업이 잘 끝났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보는 것만으로도 큰 도움이 되실 겁…….”
내가 레논의 설명을 들으며 걸음을 이어 가던 그때.
저벅저벅-
검은 로브를 두른 사람들이 저 앞에서 걸어오더니.
우리의 옆을 지나다가 돌연 걸음을 멈춘다.
“오오, 이게 누구십니까? 레논과 흑남님 아니십니까?”
무리의 앞에서 걷던 노인이 레논을 보며 미소를 보이더니.
시선을 돌리고 내게 고개를 숙여 보인다.
“파멸학파의 부탑주 제른이 흑남님께 인사드립니다.”
“랄프입니다.”
내가 따라 고개를 끄덕이자.
제른은 고개를 들고 나를 바라보며 말한다.
“레논과 함께 계신 걸 보아하니, 아무래도 악마학파에 가시는 걸 선택하신 모양입니다. 악마학파보단 저희 파멸학파에서 배울 게 더 많으실 텐데 굳이 악마학파로 가신 이유가 있으십니까?”
‘어딜 선택하든 내 마음이지.’
도발적인 질문에 나는 고까운 시선으로 그를 바라봤다.
“어디서 무얼 배우든 그건 제 소관입니다. 제른 부탑주님께서 상관하실 일이 아니지요.”
“당연한 말씀입니다. 저는 그저 악마학파에 있어 봐야 잡일만 배우실 것 같아 우려가 돼서 드린 말씀이었습니다.”
“제른!”
눈을 부릅뜬 레논이 일갈하듯 소리친다.
“흑남님의 앞이다. 말조심해라.”
하지만 레논의 경고에도.
제른은 아랑곳 않고 말을 이어 간다.
“지금이라도 레바논 왕국과 손을 잡은 어리석은 평화주의자보단 저희 파멸학파에 들어오시는 게 현명한 선택이라고 충언을 드리고 싶습니다. 아무쪼록 올바른 선택을 하시길…….”
거친 언사와 달리 제른은 다시 내게 정중히 인사를 하곤.
수하들과 함께 자리를 떠난다.
‘어리석은… 평화주의자?’
제른은 왜 레논에게 저런 질타를 하고 간 걸까?
‘혹시 파멸학파는 지금 흑탑과 레바논 왕국과의 관계를 고깝게 여기는 건가?’
“방금 전에 제른이 한 말… 무슨 뜻입니까?”
“그게…….”
나의 물음에 레논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힘겹게 입을 뗀다.
“지금이야 저희가 레바논과 뒤로 친하게 지내고 있다지만, 지금과 같은 상황을 원치 않는 흑마법사들도 많습니다.”
‘평화를 원치 않는다면 뭐 전쟁이라도 원하는 건가?’
“방금 제른 부탑주도 그런 쪽입니까?”
레논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인다.
“…맞습니다. 그는 공존보다는 대륙의 멸망을 원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