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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카데미의 노예가 살아남는 법-43화 (43/200)

43.

‘그래. 그것 때문에 왔겠지.’

애당초 그녀가 내게 말을 붙이려고 했던 이유도.

결국 악마 때문이었으니까.

“도와줄 수야 있지. 그런데 대가는?”

“대가라면… 아버지를 설득한…….”

레나가 머뭇거리자 나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네 아버지가 저지른 실례를 바로잡은 거니까 그건 대가가 아니지.”

“…그럼 대가로 원하는 게 뭔데?”

‘내가 원하는 것?’

나는 긴장한 그녀를 보며 천천히 입술을 뗐다.

“흑탑의 탑주 자리.”

“뭐, 뭐라고? 진심이야?”

레나가 당황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날 바라보자.

난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뭘 그렇게 놀라? 당연히 농담이지. 내가 정말 탑주의 자리를 원한다고 하면 줄 수는 있고?”

“…….”

애당초 나는 그녀에게 딱히 원하는 게 없었다.

‘있다고 해도 그녀에게 내 부탁을 들어줄 만한 힘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

“좋아. 도와줄게.”

하지만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도와주려고 했지만, 만약 그녀를 성공적으로 돕는다면 레논에게 빚을 지울 수 있겠지.’

다음에 또 레논 부탑주에게 부탁할 일이 생기거든.

이 일을 들먹이며 부탁을 하면 될 터.

“…정말이야?”

“그래. 오늘 밤, 내 방으로 찾아와. 아, 재료는 네가 다 준비해 갖고 와.”

“알았어! 밤에 찾아갈게!”

신이 난 그녀가 흑카지노를 나서자.

나는 생각에 잠겼다.

‘아몬을 소환하는 것 자체는 크게 어렵지 않겠지.’

이미 그녀는 한번 아몬의 팔을 소환한 적이 있다.

그렇다면 다시 계약을 진행할 경우.

아몬이 등장할 확률이 굉장히 높다는 뜻이 된다.

‘이미 대악마가 침을 바른 계약자에게 선뜻 다가갈 악마는 없을 테니까.’

그래서 레나가 다른 악마들과도 계약을 못 하고 있었던 것 아닌가?

‘다만 문제는… 역시 레나가 아몬과의 계약에 실패할 경우겠지. 그 부분을 최대한 생각해 두고 움직여야 돼.’

* * *

그날 밤.

검은 인영이 흑카데미의 3층 복도를 거닐더니.

한 방 앞에서 멈춘다.

똑똑-

“들어와.”

내가 소리치자.

레나가 방문을 열고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온다.

“우와…….”

그녀는 방 안을 둘러보더니.

“나도 개인 방은 못 받았는데…….”

부럽다는 듯 나를 바라본다.

그에 내가 답하려던 찰나.

“으허허허, 흑남님과 학생은 다를 수밖에 없지.”

내 맞은편에 앉아 있던 달프 교수가 대화에 끼어든다.

“근데 달프 교수님은 왜 여기에 계신 거야?”

“전문가는 많을수록 좋으니까.”

실제로 달프 교수는 악마들과 관련하여 다양한 지식들을 갖고 있었고.

나는 그와의 대화를 통해 이번 일의 가능성을 엿보았다.

‘그리고 만에 하나 수틀리면 아크 교수를 불러와야 할 것 아냐.’

하나 무엇보다 달프 교수는 일종의 보험이었다.

‘저번처럼 게거품을 물고 쓰러지면 어떻게든 시간을 벌어야 하니까.’

나는 속으로 고개를 젓곤.

달프 교수에게 질문을 던졌다.

“교수님, 흑마력 포션은 얼마나 있습니까?”

“수십 병 정도를 갖고 왔습니다만… 저는 조금 걱정입니다.”

“저번처럼 될까 봐요?”

나의 물음에 달프 교수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런 상황이 벌어지지 않는 게 제일 좋긴 하겠습니다만, 또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눈앞이 아찔합니다. 더스틴이라도 있으면 좋았겠습니다만…….”

달프가 낮게 침음하자.

나는 조용히 물었다.

“그러고 보니 새 치료사는 언제 온 답니까?”

“다음 학기가 시작될 무렵 온다고 하더군요.”

“다음 학기요? 이상하군요. 흑탑에서 바로 치료사를 보내면 되는 것 아닙니까?”

나의 물음에 달프 교수가 고개를 젓는다.

“교수면 모를까 치료사를 하려는 흑마법사는 거의 없습니다. 더스틴이 조금 유별난 편이었지요.”

“마물학 교수의 자리도 아직 비어 있잖습니까?”

“으허허허허, 그 또한 생각보다 인기가 없는 자리입니다. 인기가 없는 자리에 새 인재를 채워 넣기란 쉽지 않은 일입니다.”

달프 교수의 말에 나는 동의하곤 화제를 돌렸다.

“여하튼 무슨 일이 생길 경우에는 아크 교수에게 협조를 구해야죠. 그보다 교수님께선 이 계약이 가능하다고 보십니까?”

“으허허허, 흑남님께서 도와주신다면야 무조건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아니, 이 양반아. 흑남이 천하무적인 줄 알아?’

펠기누스를 보고 나선 완전히 나를 맹신하는 달프 교수를 보며.

나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애당초 제가 도와줄 게 없잖습니까? 계약은 레나가 혼자 하는 건데요.”

“다르지요. 자고로 악마들은 남의 것을 더 탐내는 법입니다. 옛 문헌에 따르면 대악마와의 계약을 진행할 때 옆에 대악마와 계약한 계약자가 있을 경우, 대악마들이 거진 모습을 보였다고 합니다.”

잔기침을 하곤 말을 이어 가는 달프 교수.

“그러니 이미 펠기누스와 계약하신 흑남님에게 혹해서라도 아몬 님은 분명 모습을 보일 겝니다. 어쩌면 팔만이 아니라 온전히 그 모습을 드러내실지도 모르지요.”

‘그러니까 나는 아몬을 부르는 미끼 같은 거다?’

나는 속으로 헛웃음을 흘리곤.

달프 교수를 보며 질문을 던졌다.

“만약 아몬이 나타나지 않는다면요?”

“으허허, 아쉽지만 그건 그것대로 좋지 않겠습니까? 다른 악마들과 계약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기는 셈이니 말입니다.”

“확실히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군요.”

달프 교수의 합리적인 발언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만에 하나 일이 잘못되면… 아시죠?”

“으허허허, 이미 한번 경험했던 일입니다. 잘 알지요. 후… 그보다 기대가 됩니다. 만약 레나까지 계약에 성공한다면… 저희 흑카데미에서 대악마와 계약한 자가 무려 두 명이나 되는 것 아닙니까?!”

“잘된다면 말이죠.”

나는 어느새 계약진을 완성한 레나를 보며 물었다.

“준비는 다 됐어?”

“다 끝났어. 다만…….”

그녀가 계약진을 보며 머뭇거리자.

나는 피식 미소를 흘리며 말했다.

“뭘 망설여? 최고의 미끼가 옆에 있는데. 편하게 불러.”

“…응.”

예전의 충격 때문일까.

잠시 망설였던 그녀가 마침내 계약진에 피를 흘려 넣는다.

웅웅웅웅-

계약진이 붉게 물들어 가던 그때.

콰작, 콰자자자자작-

“오… 옵니다!”

갈라진 계약진 위로 검은 털로 덮인 거대한 팔 두 개가 튀어나온다.

우드드드득-

검고 두터운 두 팔이 계약진을 찢어 버릴듯 갈라 놓더니.

[네가 흑남인가?]

검은 산양 같은 모습을 한 거대한 대가리가 계약진 위로 올라와 나를 응시한다.

‘무슨 놈의 낯짝이… 저렇게 거칠게 생겼어?’

“그렇습니다.”

내가 아몬의 불똥 같은 두 눈을 마주하며 고개를 끄덕이던 그때.

“어, 어떻게 이럴 수가…….”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레나가 아몬을 보며 경악한다.

“분명 전에 계약을 시도했을 때는 팔조차 한계였었는데…….”

혼란해하면서도 감격하여 아몬을 올려다보는 레나.

“이제… 이제 아몬 님과 계약을 할 준비가 된 건가요?”

[네가 준비가 됐다고?]

으헝헝헝헝헝헝-

레나의 질문에 아몬이 방이 떠나가라 웃음을 터뜨린다.

[착각이 심하군. 네 육신은 여전히 연약하고 보유한 흑마력도 미비하다. 너는 아직 나와 계약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

“…네? 그럼 대체 왜…….”

[그야 저 녀석을 보러 나온 거니까.]

아몬의 굵은 손가락이 나를 가리키고.

놈의 입에서 쇠를 긁는 것 같은 음성이 흘러나온다.

[베논 님께서 몸소 선택하신 흑남이다. 보러 올 가치는 충분하지.]

“겨우 그런 이유 때문에 아몬 님이…….”

[겨우 그런 이유?]

아몬은 천장이 찢어져라 웃음을 터뜨리곤.

무심한 눈으로 레나를 내려다본다.

[아무래도 너희 인간들은 흑남이라는 자리를 하잘것없게 여기는 모양이군. 우스운 일이야.]

아몬의 나지막한 읊조림에.

“흐, 흑남이 엄청 중요한 자리임을 알고 있습니다만, 아몬 님께서 이렇게 몸소 나오실 정도로 엄청난 자리인 겁니까?”

옆에서 몸을 덜덜 떨던 달프 교수가 조심스럽게 묻는다.

[나는 너에게 질문하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

아몬의 손가락이 위에서 아래로 그어지자.

콰작-

“커흑…….”

돌연 달프 교수의 몸이 무형의 기운에 의해.

바닥에 짓눌리는 것 아닌가?

‘가차 없네.’

[오만함의 대가는 곧 죽음이지.]

“제, 제가 무례를… 부디… 목숨만은…….”

달프 교수가 고통스러워하며 자비를 갈구하던 사이.

내가 천천히 입을 뗐다.

“그 정도면 충분하지 않습니까? 그 노인도 충분히 알아들었을 겁니다.”

[흑남의 부탁이니 그 정도는 들어주지.]

아몬이 꺾었던 손가락을 펴자.

“허억, 허억…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달프 교수가 자리에 바짝 엎드린 채 소리친다.

하지만 그에 아랑곳 않고 나를 주시하는 아몬.

[그런데… 조금 의외군.]

그는 나를 이리저리 살피더니 고개를 갸웃거린다.

[왜 네게서 이상한 냄새가 나는지 모르겠어. 그래… 이 냄새… 꼭 레…….]

‘저 새끼가 미쳤나?’

나는 순간 싸늘함을 느끼고 얼른 입을 열었다.

“보는 눈이 많습니다. 거기까지만 하시죠.”

그러자 불타는 아몬의 두 눈동자가 크게 요동친다.

[역시 그런 거였나? 그런 거였군!]

으헝헝헝헝헝헝-

무언가 깨달은 것인지.

아몬은 요란하게 웃어 젖히더니 흥미롭다는 듯 나를 내려다본다.

‘대악마라는 놈이 왜 이렇게 입이 가벼워? 계약을 할 거면 얼른 하고 가든가. 아니면 그냥 가든가.’

[그저 베논 님의 사랑만을 받은 게 아니었나! 왜 펠기누스 님께서 너와 계약했나 했더니! 이제야 이해가 간다!]

“…그렇습니까?”

‘호오… 이건 조금 흥미롭네. 그러니까 펠기누스가 나와 계약한 이유가 흑남 때문만이 아니었다?’

그렇다는 건 내 안에 자리하고 있는 신성력 또한.

그녀와의 계약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다는 뜻일까?

‘근데… 펠기누스… 님?’

내가 의아해하던 중.

아몬이 껄껄 웃으며 말한다.

[흥미롭군. 흥미로워. 참으로 재미있다!]

“그렇습니까? 근데 그녀와의 계약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내가 레나를 힐끗 가리키며 묻자.

아몬은 심드렁하게 답한다.

[아까도 말했듯 저 여자는 나와 계약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내가 오늘 모습을 보인 이유는 너를 보기 위함이었다. 오히려 네가 이 자리에 없었다면 그녀는 죽었겠지.]

“그런…….”

[흑남을 경외하고 보필해라. 그의 곁에서 힘을 키워라. 그게 네가 나와 계약할 수 있는 지름길이 될 수도 있겠지. 명심해라.]

그 말을 끝으로 아몬은 다시 나를 보며 툭 한마디를 던진다.

[정식으로 지옥에서 볼 날이 있었으면 좋겠군.]

‘…뭐요? 지옥에서 보자고? 이게 무슨 개소리야?’

악마의 인사치레인 건지.

아니면 진심으로 내가 지옥으로 가길 바라는 건지.

‘어이가 없네.’

나는 서서히 사라져 가는 아몬의 신형을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사사삭-

이윽고 아몬이 사라지고.

수명을 다한 계약진 또한 형체를 감추자.

“후우…….”

그제야 레나와 달프 교수가 무겁게 숨을 내쉰다.

“흑남님, 아무래도 계약에는 실패한 모양입니다.”

“그러게요. 아무래도 레나가 아몬의 조건을 충족하기 전까지 계약을 하기엔 어려울 것 같네요.”

나는 힐끔 레나를 보며 말을 이어 갔다.

“어때. 이제 만족하지? 네가 지금보다 더 나아지면 계약해 주겠다고 했잖아.”

“그렇긴 하지만…….”

또 아몬과의 계약에 실패한 탓일까.

그녀는 우울한 표정을 짓더니 곧 고개를 젓는다.

“그래. 네 말이 맞아. 네 덕분에 아몬 님을 직접 뵐 수 있었으니까, 오늘은 그것만으로 만족해야지. 고마워.”

레나가 진심으로 감사를 표하는 것 같자.

나 역시 피식 웃으며 답했다.

“그래. 고마운 줄 알면 됐다.”

‘이 정도 해 줬으면 이제 자기가 알아서 하겠지.’

아몬과 직접 1:1 면담을 시켜 줬으니.

더 이상 내게 아몬과의 계약을 부탁할 일은 없을 터.

‘아니면 설마 아몬이 그런 말을 했다고 나한테 붙으려는 건 아니겠지?’

나는 힐끔 레나를 살폈으나.

다행히 그녀는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근데 무슨 생각을 저렇게 하는 거지?’

사라진 계약진을 멍하니 바라보는 레나를 보며.

나는 분위기를 바꾸고자 툭 농담을 던졌다.

“혹시 아버님이 놀이공원도 좋아하시니? 흑마랜드 같은 것 말이야.”

“…뭐? 놀이공원이 뭔데?”

“아, 농담, 농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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