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카데미의 노예가 살아남는 법-40화 (40/200)

40.

그 말을 끝으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교실을 나갔다.

“레나 님, 저런 놈은 무시하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맞아요. 태생부터 천박한 놈이 뭘 알겠어요? 흑남이 돼서 아주 그냥 콧대가 하늘을 찌르는데, 그것도 잠시뿐이라고요!”

뒤에서 여학생들의 수군거림이 언뜻 들려왔으나.

나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급한 놈이 우물 파는 거지.’

대충 떡밥을 던졌으니.

이제 레나는 궁금해서라도 그녀의 아버지를 찾아갈 수밖에 없을 터.

‘그럼 왜 내가 부탑주를 언급했는지 알게 되겠지?’

그 뒤로 그녀가 부탑주에게 어떤 말을 하느냐에 따라.

이후의 결과도 달라지게 되리라.

‘편지를 봤을 때는 꽤나 딸을 아끼는 것 같던데… 어떻게 나오려나.’

* * *

며칠 뒤.

볼드 학장이 나를 찾는다는 전언에 나는 학장실로 이동했다.

‘무슨 일이지?’

나는 느긋하게 학장실로 걸음을 옮겼고.

“오셨습니까?”

내게 인사하는 볼드 학장에게 대강 고개를 끄덕여 주며 물었다.

“손님이 계셨군요.”

“저분께서 흑남님을 찾으셨습니다.”

그에 나는 고개를 돌려 머리가 희끗한 남자를 바라봤다.

‘호오… 레논 부탑주가 나를 직접 만나러 왔다?’

유독 눈썹이 굵고 진한 남자.

그는 무언가 불만이 담긴 눈으로 나를 응시한다.

“반갑습니다. 랄프입니다. 초면은 아니지요?”

내가 먼저 웃으며 손을 내밀자.

“레논… 입니다.”

레논은 굳은 미소를 보이며 내 손을 맞잡는다.

“레논 님께서 저를 보러 오셨다고요?”

“예.”

우리는 다시 자리에 엉덩이를 붙이곤.

서로의 안부 등 간단한 대화를 나누었다.

그러던 중.

“펠기누스와 계약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레논이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내게 물어 온다.

‘뭐야. 그 사실이 벌써 부탑주의 귀에까지 들어갔다고?’

교수들이 말한 걸까?

‘아니면 레나가 그에게 찾아가서 말한 걸지도 모르지.’

“하하, 운이 좋았습니다.”

“운이… 좋았다고요?”

레논은 헛웃음을 흘리더니 싸한 눈으로 날 바라본다.

“그게 정말 운만으로 될 일이라 생각하십니까?”

“안 될 건 또 없잖습니까?”

“아니요. 불가능합니다. 악마학파의 흑마법사들이 왜 흑마력을 늘리려고 기를 쓰는지 아십니까? 강한 악마와 계약을 하기 위해선 악마의 힘을 버틸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게 맞지. 통상적인 거고. 솔직히 펠기누스가 이상한 거긴 했어.’

“그래서 하고 싶은 말씀이 뭡니까?”

“그냥 궁금했을 뿐입니다. 흑남이 되시고 나서 베논 님께서 흑마력을 주셨다든가…….”

‘아, 그게 궁금한 거였어?’

아무래도 레논은 하인 출신인 내가 어떻게 대악마와 계약을 했는지 의문이었던 모양이었다.

‘그보다 더한 걸 받았지.’

“맞습니다. 베논 님께서 제게 많은 선물을 허락하셨죠.”

“…그렇습니까?”

레논의 표정에 씁쓸함이 묻어 나오자.

난 속으로 생각했다.

‘레나가 흑남이 안 돼서 아쉬운 모양이네. 하지만 이미 자리에 주인이 생겼는데 어쩌겠어?’

“제가 대악마와 계약한 것 때문에 저를 보자고 하셨던 겁니까?”

“물론 그 이유도 있습니다. 적어도 제 생전에 펠기누스와 계약한 흑마법사는 흑남님이 처음이니까요.”

‘호오… 생전에? 그럼 적어도 근 몇십 년간은 펠기누스와 계약한 사람이 없었다?’

아무래도 펠기누스는 보통 까칠한 악마가 아닌 모양이다.

‘달프 교수에게서 펠기누스에 대해서 좀 더 들어 보긴 해야겠어.’

내가 잠시 딴생각을 하던 중.

레논이 말을 이어 간다.

“베논 님의 신탁만 없었다면 당장이고 흑남님을 흑탑의 악마학파에 모셔 가고자 했을 겁니다. 하지만 오늘은 그 이유 때문이 아닙니다.”

‘뭐, 보나 마나 부지 문제로 찾아온 거겠지.’

“그럼 무슨 연유로 찾아오신 겁니까?”

내가 모른 척 묻자.

레논이 무겁게 입술을 뗀다.

“저번에 보내셨던 서신에 대해 이야기를 좀 나눌까 합니다.”

“서신이라 함은……. 아, 부지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하지만 그건 이미 부탑주님께서 불가하다는 답변을 보내셨던 걸로 기억합니다만.”

내가 칼같이 딱 잘라 말하자.

부탑주는 어색한 미소를 보인다.

“그게 말입니다……. 당시에는 그랬었지만 제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 이유가 뭡니까?”

“여기에 있는 볼드 학장도 아니고 흑남께서 흑카데미 부지를 사적으로 사용한다는 게 전례가 없던 일이다보니, 아무래도 고민을 할 시간이 좀 필요했었습니다. 흑남님께서도 아시다시피 전례를 깨는 일이 도통 어려운 일이 아니잖습니까?”

레논 부탑주의 말에 난 속으로 픽 실소했다.

‘고민은 무슨? 애당초 들어줄 생각도 없었으니 딱 잘라서 불가 통보를 내렸던 거겠지.’

만약 내가 레나에게 ‘그녀의 아버지’라는 말을 꺼내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레논은 계속 내 부탁을 묵살했을 것이다.

“아, 그러셨군요. 그래서 충분히 고민을 해 보셨습니까?”

“예, 흑남님께 부지를 빌려드리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렇습니까?”

‘이렇게 쉽게 빌려줄 거였으면서 그동안 빠꾸를 놔?’

나는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마음을 바꾸신 건 감사합니다만 이제 괜찮습니다.”

“괜찮다 하심은…….”

“이제 부지를 안 빌려도 될 것 같습니다.”

나의 말에 레논의 표정이 멍해진다.

“그게 무슨……. 부지를 필요로 하셨던 게 아니었습니까?”

“맞습니다. 분명 필요했었지요. 하지만 이제 딱히 필요하지가 않아서 말이죠.”

레논의 표정이 굳어 가자.

‘설마 내가 거절할 줄은 몰랐지?’

나는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계속 말했다.

“빌려주시기로 결정까지 하셨는데 거절을 하게 되어 죄송하게 됐습니다.”

“하하…….”

“부지 외에 더 하실 말씀은 없으신지요? 만약 없으시다면 저는 이만 일어나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들어야 할 수업이 많아서 말입니다.”

내가 천천히 자리에서 엉덩이를 떼려던 찰나.

“그럼 흑남님께서 필요로 하는 부지를 제가 선물로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레논이 나를 붙잡듯 다급히 소리친다.

“…선물이요?”

“예, 흑남이 되신 기념으로 드리는 제 축하 선물입니다.”

레논의 대답에 난 속으로 헛웃음을 흘렸다.

‘어떻게든 줘야 되니까 선물이라는 말로 포장하는 것 봐라. 그러게 진작 빌려줬으면 좀 좋아?’

나는 레논을 보며 생각을 이어 갔다.

‘더 거절해서 곤란해하는 모습을 보고 싶기도 하지만… 이쯤 할까? 그보다 대체 레나가 부탑주에게 무슨 말을 한 건지 궁금하기까지 하네.’

어떻게든 나와의 관계를 회복하려는 레논의 노력 이면에는.

분명 레나의 입김이 작용했을 게 뻔하잖은가?

‘그러니 다음에는 서로 좋게 좋게 줄 건 주고, 받을 건 받고 하면서 삽시다.’

“하하, 선물이라니요? 제게는 너무 과분한 선물인 것 같습니다만.”

“아닙니다. 오히려 흑남님께서 제 선물을 받아 주신다면 그 또한 영광일 겁니다.”

이제는 제발 좀 받으라는 듯.

간곡히 말하는 레논을 보며 나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하아…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받지 않는 것도 도리에 어긋나는 것 같군요. 그럼 감사히 받도록 하겠습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후… 드디어 부지를 얻었네.’

레논의 허가가 떨어졌으니.

이제는 내가 원하던 바를 실행할 차례다.

‘서로 할 이야기도 다 한 것 같으니 슬슬 일어나 볼까.’

“흑남님, 아무쪼록 제 딸 레나를 잘 가르쳐 주시길 바랍니다.”

레논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나를 보며 말하자.

‘그쪽이 지금 같은 태도를 유지한다면 말이지.’

나는 빙긋 미소를 지었다.

“하하, 시간이 허락하는 대로 노력을 해 보지요.”

덜컥-

랄프가 레논이 내민 손을 맞잡아 주고 학장실을 나가고.

몇 분 뒤.

“후… 아비 노릇 하기 참 힘들군.”

“…송구스럽습니다.”

“자네가 잘못한 게 뭐 있나? 원망을 하려거든 베논 님과 펠기누스 님에게 해야지.”

주눅 든 볼드 학장의 목소리와 씁쓸해하는 레논의 목소리가 잔잔히 학장실을 울린다.

* * *

며칠 뒤.

“자, 일하자!”

덜그럭-

나의 명령에 스켈레톤들이 기다렸다는 듯.

삽과 곡괭이를 들고 땅을 헤집기 시작한다.

‘단순한 일을 시키는 데는 이만한 녀석들이 없다니까.’

앞으로 매점이 들어설 부지를 열심히 개간하는 스켈레톤들.

‘학생들을 위한 매점을 짓는다, 그야말로 엄청난 악행이야…….’

자라나는 쓰레기들을 위해 매점을 짓는다?

이 얼마나 훌륭한 악행인가?

‘학생들이 매점을 이용해서 체력적으로 튼튼해지고 스트레스를 해소한다면… 이거야말로 악행이라고 할 수 있겠지.’

내가 생각해도 정말 엄청난 악행이다.

‘학생들은 매점을 이용하고, 난 3배에 달하는 흑마력을 얻고. 완벽해…….’

내가 속으로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던 그때.

“저, 하인장… 아니, 흑남님… 정말 괜찮겠습니까?”

내 작업을 돕고 있던 늙은 하인이 슬며시 질문을 던져 온다.

‘그냥 편하게 대하면 될 걸 뭘 그렇게 격식을 차리는지…….’

아무래도 나의 위치가 달라진 탓일까.

하인들은 전보다 더 나를 대하는 것을 어려워했다.

“호밀, 그렇게 조심할 필요 없어. 네가 실수 좀 한다고 해도 널 실험체로 쓰거나 하지는 않을 테니까.”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내가 몇 번이고 죽을 뻔한 건 호밀도 잘 알잖아?”

다른 교수들이야 어쩔지 몰라도.

적어도 나만큼은 하인들을 막무가내로 죽이거나 그들을 흑마법의 실험 재료로 사용할 일은 없을 것이다.

“물론 잘 알지요. 하지만 하인장님께서 이제 흑남이 되셨으니…….”

“걱정 마. 적어도 내가 자리에 있는 동안 현직 하인들이 개죽음을 당할 일은 없게 할 테니까. 아, 감옥에 있는 놈들은 나도 어쩔 수 없어. 그랬다간 실험 재료도 사용 못 하게 한다고 나를 욕할걸?”

“그 말씀만으로도 이 늙은이는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호밀이 감격하여 허리를 숙이자.

난 속으로 혀를 찼다.

‘나중에 하인들의 처우도 좀 개선을 해야겠어.’

당장은 눈앞의 일이 먼저다.

“그런데 랄프 님, 이곳에 대체 뭘 지으려고 하시는 겁니까?”

“궁금해?”

나무 기둥을 올리고 돌을 쌓는 스켈레톤들을 바라보며.

나는 나지막이 말을 이어 갔다.

“이곳에서 물건을 팔 거야.”

나의 말에 호밀이 눈을 부릅뜬다.

“물건 말입니까?”

“그래. 학생들은 학기 중에는 거의 밖으로 못 나가잖아? 밖의 여관이나 노점상들이 먹을 걸 파는 것처럼 여기서도 먹을 걸 파는 거지. 그 외에 학생들이 필요로 하는 물건들을 공수해 와도 좋고.”

“허어… 어떻게 그런……. 학장님께서 허락하신 겁니까?”

호밀이 거듭 놀라워하며 묻자.

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래. 고생 좀 했지. 정확히는 부탑주의 허락을 받아야 했으니까.”

“부, 부탑주님의 허락 말입니까?”

“그래. 좀 깐깐한 양반이 아니었어.”

나의 말에 호밀은 감탄하면서도.

조심스럽게 내게 묻는다.

“이제 랄프 님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위치에 오르셨군요.”

“뭐든 할 수는 없지. 내게도 입장이라는 게 있으니까. 그리고 나를 고깝게 보는 사람들도 많을 거고. 솔직히 벼락출세한 하인을 좋게 볼 사람이 몇이나 되겠어?”

“냉정하시군요.”

호밀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냉정해야지. 그래야 이런 도전도 할 수 있지.”

“도전… 말입니까?”

“그래, 내 악행을 위한 도전이지.”

호밀이 고개를 갸웃거렸으나.

나는 구태여 정확한 대답을 하진 않았다.

“그런데 하인장님, 외람된 질문이지만 그럼 이 매점이라는 곳에서 팔 건 어디서 구해 오는 겁니까?”

“그것도 미리 준비를 해 뒀지. 슬슬 올 때가 되긴 했는데……. 일단 호밀은 현장 좀 잘 지켜보고 있어. 잠깐 다녀올 데가 있으니까.”

* * *

이 주 뒤.

“아씨! 좀 비켜! 내가 먼저 왔잖아!”

“너나 비켜! 어차피 이 주 있으면 본가로 가잖아? 그때 실컷 처먹으라고!”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그리고 그때까지 언제 기다리라고!”

학생들로 북적거리는 매점 안을 보며.

‘어우야……. 이건… 생각 이상으로 호황이네.’

난 속으로 씨익 미소를 지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