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카데미의 노예가 살아남는 법-38화 (38/200)

38.

“그건…….”

‘반박하자니 엄연한 사실이고 그렇다고 인정하자니 이제껏 쥐어 왔던 주도권을 잃을 판국이니 골머리가 아프겠지.’

나는 빙글빙글 웃으며 말을 이어 갔다.

“교수님, 이제는 상황이 좀 많이 바뀌었습니다. 제 말이 무슨 뜻인지 아시겠지요?”

“…….”

나의 말에 콘스 교수는 입술만 꾹 깨물 뿐.

어떠한 말도 하지 않는다.

“아크 교수와의 악연은 교수님께서 알아서 잘 끊어 내시리라 믿겠습니다. 더 할 말 없으시면 일어나 보겠습니다.”

내가 천천히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던 그때.

콘스 교수가 나를 날카롭게 노려보며 말한다.

“너… 이러고도 무사할 거라 생각해?”

“협박하시는 겁니까?”

“…….”

그녀가 다시 침묵하자.

“농담입니다. 그리고 마신님께서 저를 보우하실 텐데 무사하지 못할 건 또 뭡니까? 그럼 저는 이만…….”

나는 싱긋 미소를 던진 뒤 그녀의 집무실에서 나갔다.

아아아아아아아악-

곧, 집무실 안에서 콘스 교수의 괴성과 더불어.

집기들이 박살 나는 소리가 울려온다.

‘어이구, 아주 그냥 잔뜩 독이 올랐네.’

몇 년간 써먹기 좋았던 하인 놈이 갑자기 출세하여 으름장을 놓았으니.

정신 줄을 놔도 이상하지 않으리라.

‘꼬우면 흑남하든가.’

나는 속으로 실소하며 느긋이 복도를 걸어갔다.

* * *

다음 날.

“악마들의 모습이 같다고 해서 그들이 모두 같은 성향을 갖고 있는 건 아니야. 임프를 예로 들어 볼까? 겉보기에 놈들은 다 똑같이 생겼으니 생각하는 것도 똑같다고 여길 수 있겠지만 전혀 다르지.”

1학년들에게 ‘악마들이 갖고 있는 다양성’에 대해 교육하는 달프 교수.

“사람도 언뜻 비슷하게 생겼지만 저마다의 성격을 갖고 있는 것처럼 말이야. 이해했나?”

하나 어째선지 그의 눈길은 연신 한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거참, 수업에 좀 집중하지 왜 자꾸 날 봐?’

비단 나를 쳐다보는 이는 달프 교수뿐만이 아니었다.

“…….”

학생들 역시 말만 없다 뿐이지.

대부분의 놈들은 나를 죽일 듯 노려보고 있었다.

‘내가 흑남의 영광을 차지한 것도 모자라서 교실의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니 그럴 수밖에.’

“랄프, 이해했나?”

“그럼요. 이해했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했다.

‘청소하면서 이 수업을 몇 번이나 들었는데 모를까?’

“결국 악마도 사람과 비슷하니 자신과 계약한 악마의 성향을 파악하는 것도 계약자가 해야 할 일이라고 말씀하려 하셨던 것 아닙니까?”

“그, 그렇지. 크흠…….”

달프 교수가 떨떠름하게 동의하던 그때.

“교수님! 대체 저놈이 왜 저희와 같이 수업을 듣는 건가요!”

“맞아요! 저희가 왜 하인 놈이랑 같이 수업을 받아야 하는 거냐고요!”

유독 불만이 많아 보였던 남학생 두 명이 소리친다.

“으허허허허, 말들 조심하거라. 어쨌건 그는 흑남이니까.”

반쯤 비꼬듯 말하며 남학생들을 제지하는 달프 교수.

“흑남이면 다예요? 저희는 힘들게 흑카데미에 들어왔는데 왜 저놈만 특혜를 주는 거냐고요!”

“정 궁금하다면 학장님께 가 보려무나.”

“…그건 그렇다고 쳐요! 저놈 악마는 소환할 수 있는 건가요, 교수님? 적어도 수업을 들으려면 최소한의 재능은 있어야죠!”

남학생의 발언에 달프 교수가 눈을 번뜩인다.

“으허허허허, 그러고 보니 아직도 악마와 계약하지 못한 학생들이 있었지?”

그 말에 일부 학생들의 시선은 나에게로.

일부는 교실 한편에 앉아 있던 레나에게로 향한다.

‘저번에 아몬의 손을 소환했던 이후로 진전이 없었던 건가?’

그녀가 마왕의 팔을 소환한 탓에 치료제로 쓰일 뻔했던 기억이 불현듯 스쳐 갔다.

“레나는 아직 좀 더 준비가 필요할 테고, 랄프, 한번 나와서 악마를 소환해 보겠나? 아, 걱정 말게. 최하위급 악마야 흑마력이 없어도 소환은 가능하니까 말이네.”

달프 교수의 물음에 나는 그를 보며 생각했다.

‘저 자식… 내가 흑남이 된 게 어지간히도 마음에 안 드나 보네.’

아까부터 유독 나에게만 빈정거리는 태도를 보이는 것도 그렇고.

갑자기 악마를 소환해 보라는 것도 나를 엿 먹이려는 게 눈에 훤히 보였다.

‘내가 악마를 소환하지 못하면 나를 악마조차 소환하지 못하는 덜떨어진 병신 흑남이라고 매도하려는 거겠지.’

“그러죠.”

하지만 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참에 악마학에 재능이 있는지도 좀 확인해 보자. 재능이 있다면 임프라도 나오겠지.’

저주학파나 파멸학파와 달리.

악마학은 철저한 재능의 영역이라 불린다.

‘어느 정도의 노력으로 커버가 되는 두 학파와는 확실히 다르긴 해.’

계약자의 잠재력에 따라 나타날 악마 또한 다르다고 한다.

‘당장 레나만 해도 아몬의 팔을 소환했었잖아?’

잠재력이 높으면 높을수록 고위급 악마를 소환할 확률이 다분할 터.

‘어디… 내가 소환하면 어떤 악마가 나오려나.’

내가 달프 교수에게 나아가며 생각하던 중.

“저 병신 같은 새끼가 뭘 소환할까?”

“뭘 소환하긴? 뼛속부터 하인이었던 새끼가 뭘 소환하겠어? 임프나 소환하면 다행이지.”

“저딴 새끼가 흑남이라니…….”

학생들의 소곤거림이 귀 언저리로 뚜렷이 들려온다.

그에 나는 걸음을 멈추곤 소곤거리는 학생들을 보며 입을 뗐다.

“지금 뭐라고 했지?”

“…뭐?”

“방금 너희가 한 언행에 대해서 묻고 있는 거다. 방금 뭐라고 했었지?”

나의 물음에 학생들은 벙어리가 되어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다.

“그게… 그냥 우리끼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을 뿐이었어.”

“나보고 들으라는 듯 이야기를 했던 것 같은데.”

“아냐, 아냐! 진짜로!”

고위 직책에 있는 흑마법사를 능멸할 경우.

자칫 목이 잘려 나갈 수도 있는 탓일까.

학생들은 급하게 손을 저으며 변명을 늘어놓는다.

“이번에는 기분이 좋으니 넘어가겠다만 다음은 없어.”

“그, 그래…….”

나는 나의 뒷담을 한 학생들의 면면을 머릿속에 기억하곤.

달프 교수 앞으로 걸어갔다.

“계약진을 그릴 줄 모를 테니 내가 그려 뒀네. 자, 저 앞에 서게.”

달프 교수가 어느새 그려 놓은 핏빛의 계약진을 가리키자.

나는 덤덤히 고개를 끄덕이곤 그 앞에 섰다.

“자, 재료들은 내 미리 계약진에 뒀으니 편하게 자네의 피를 흘려 넣으면 돼.”

“그러죠.”

나는 달프 교수가 내민 작은 나이프를 받아 들곤.

엄지 부분을 살짝 베어 피가 나오게 만들었다.

툭-

나의 핏방울이 계약진에 떨어지자.

잠잠하던 계약진에서 조금씩 붉은빛이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흠… 뭐가 나오려나.’

딱히 엄청난 악마를 바라진 않았으나.

그래도 기왕이면 요긴하게 사용할 수 있는 악마가 나왔으면 했다.

‘비행 능력이 있는 페카인도 좋고, 아니면 백 리 밖을 살펴볼 수 있는 네드 아이도 괜찮을 것 같은데.’

어차피 내가 늙어 죽을 때까지 부려 먹을 악마이니.

기왕이면 뛰어난 능력을 가진 악마가 나오길 바라는 게 당연하지 않은가?

“흐음…….”

그러나 몇 분을 기다리고.

다시 몇 분을 기다려도 변화가 없자.

“희한하군. 이쯤 지났으면 무언가 반응이 있어야 하는데 말일세…….”

달프 교수가 입꼬리를 올린 채 계속 말한다.

“어쩌면 자네에게는 악마학에 대한 재능이 없는 걸지도 모르겠네. 으허허허, 이것 참… 안타깝게 됐네. 학장님께서 신신당부하셔서 나 역시 최선을 다해 자네를 가르치려 했네만 어쩔 수 없게 됐군.”

위로로 포장한 빈정거림을 던지는 달프 교수.

“아무래도 자네에게 악마학 수업은 어울리지 않을지도 모르겠어. 악마학은 포기하고 다른 수업에 집중하는 건 어떻겠나? 그 편이 자네에게 더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어.”

달프 교수의 말이 끝나자.

“저딴 게 흑남이라고? 진짜 어이가 없네.”

“재능도 없는 놈이 어떻게 흑남이 된 거지?”

“선정자였던 놈들도 죄다 문제 있었던 것 아냐? 어떻게 저런 놈한테 흑남의 자리를 빼앗길 수 있지?”

교실에 있던 학생들이 자기들만 들릴 정도로 낮은 목소리로 소곤거린다.

그러던 그때.

웅웅웅웅웅-

잔잔한 선홍빛을 흘리던 계약진이 점점 붉게 물들어 가기 시작하더니.

화아아아아악-

곧 엄청난 빛을 토해 내기 시작한다.

“이, 이 빛은…….”

그러자 달프 교수의 얼굴에 자리하고 있던 미소는 삽시간에 사라지고.

“어째서 이런 파동이… 이건 말도 안 돼…….”

얼굴에 번져 있던 검은 곰팡이가 크게 요동친다.

“뭔가 이상한데……. 갑자기 계약진이 왜 저러지?”

“그러게. 달프 교수님이 뭘 한 것 아냐?”

“근데 어째 레나 때랑 비슷한 것 같기도 하고. 설마… 아니겠지?”

학생들도 어안이 벙벙하여 자기들끼리 수군거리던 중.

쩌저저저저저저적-

붉은빛을 뿜어내던 계약진에 커다란 균열이 가기 시작하더니.

콰자작-

무언가가 깨진 틈을 비집고 올라온다.

‘저건…….’

제일 먼저 보인 것은 까마귀의 것보다 몇 배는 더 커 보이는 여섯 짝의 검은 날개였다.

쿵-

여섯 짝의 검은 날개가 와이어처럼 지면에 틀어박히자.

콰자자작-

곧이어 계약진 반대편에서 다시 여섯 짝의 날개가 튀어나와 지면에 박혔다.

‘저건 또 왜 하얀색이야? 아니… 그보다 대체 나는 뭘 소환한 거지?’

내가 기존의 검은색과는 대비되는 새하얀 여섯 짝의 날개를 멍하니 바라보던 찰나.

쨍그랑-

유리 깨지는 소리가 교실을 떠나가라 울리더니.

마침내 날개의 주인이 계약진 위로 천천히 떠오른다.

[이 세계는 참으로 오랜만이구나.]

‘…인간형?’

여섯 쌍의 커다란 날개가 무거워 보일 정도로 가녀린 체구의 여인의 등장에.

나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가만있자… 사람의 형태를 한 악마라면… 람네스, 아카르디, 베오린…….’

내가 도대체 어떤 악마를 소환한 건지.

바삐 머리를 굴리던 그때.

“허어… 맙소사……. 이럴 수가……. 페, 페, 펠, 펠기누스……?”

달프 교수가 소환된 악마를 보며 부르르 몸을 떤다.

도서관의 책에서 본 기억이 있다.

‘악마들의 꼭대기에 군림한다는 12마리의 대악마… 개중에서도 가장 이질적인 존재라고 했었지.’

마신 베논의 손에서 태어난 11마리의 대악마와 달리.

펠기누스만은 유일하게 레바논이 빚어낸 창조물이라고 책에 적혀 있었다.

‘다만 베논에 의해 타락하고 대악마가 됐다는 걸 봤는데……. 아니… 근데 왜 대악마가 튀어나온 거야?’

이건 내가 기대했던 것보다 너무 과하지 않은가?

내가 속으로 혀를 내두르던 그때.

“미천하고도 늙은 흑마법사가 대악마님을 뵙습니다!”

달프 교수가 탄성을 내지르더니 바닥에 철푸덕 엎드린다.

그러자.

“어… 어…….”

“뵙습니다…….”

이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던 학생들도 엉거주춤 의자에서 내려가.

달프 교수를 따라 바닥에 엎드린다.

[흠…….]

하지만 펠기누스는 그들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나를 바라보며 싱긋 미소를 보인다.

[네가 베논 님의 선택을 받은 아이로구나.]

“아… 예…….”

‘뭐야. 날 알고 있어?’

베논의 선택을 받았다고 말한 걸로 보아.

내가 흑남이 된 걸 아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게 겁먹을 필요 없단다. 나는 너의 부름에 응해 이곳에 나온 것뿐이니까.]

“저와 계약을 하러 나오신 겁니까?”

[그렇단다.]

‘허참… 진짜 대악마가 나와 계약을 하러 나왔다고?’

이것도 흑남이 된 영향인 걸까?

“저보다 더 뛰어난 사람도 많았을 텐데, 굳이 저를 선택하신 이유가 있으신지요?”

[네가 베논 님의 선택을 받았기 때문이지.]

“아하…….”

‘확실히 흑남이 된 게 이 계약에 영향을 끼친 모양이네.’

[나와 계약하겠니?]

그녀의 물음에 나는 생각에 잠겼다.

‘솔직히 계약하면 나야 땡큐긴 한데… 댁에 대한 정보가 너무 없단 말이지.’

비교적 정보가 풀려 있는 다른 11마리의 대악마와 달리.

펠기누스는 알려진 정보가 없었다.

“좋습니다. 다만…….”

[다만?]

“당신과 계약하면 저는 뭘 바쳐야 합니까?”

보통 악마들과 계약을 하기 위해선.

악마들이 원하는 대가를 지불해야만 한다.

‘당연히 고위급일수록 더 엄청난 대가를 원하겠지.’

눈앞의 펠기누스 또한 내게 엄청난 대가를 요구할 것이다.

‘진짜 말도 안 되는 걸 요구하면 어쩌지? 계약을 철회해야 하나?’

내가 고민에 잠겨 있던 그때.

그녀가 웃으며 말한다.

[네가 바쳐야 할 건 없단다.]

“…예?”

바쳐야 할 게 없다니?

‘아무런 대가도 필요 없다고? 이거… 혹시 펠기누스의 탈을 쓴 다른 악마가 나한테 사기 치는 건가?’

하지만 그녀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무형의 기운.

그것은 내가 봤던 두 신의 것과 비슷했다.

‘사기는 아닌 것 같은데… 진짜 원하는 게 없어?’

“정말입니까?”

[정말이란다.]

“그럼 펠기누스 님과 계약하면 저는 뭘 얻을 수 있습니까?”

내가 그녀에게 묻자.

“허…….”

달프 교수는 그런 나를 어처구니없다는 듯 올려다본다.

‘뭘 그렇게 미친 사람 보듯 봐? 대악마여도 따질 건 따지고 가야지.’

“펠기누스 님께서는 저에 대해 아실지 모르지만, 저는 당신에 대해 아는 게 없습니다. 그러니 이 계약에도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지요.”

[네가 원하는 거라면 그 무엇이든 가능하단다.]

‘뭐든 가능하다고?’

이 무슨 오만한 발언인가?

‘대악마이니 오만할 만도 하다만…….’

“정말 뭐든 가능한 겁니까? 막말로 제가 세상의 멸망을 원하면요?”

[어렵지 않다만 나의 어머니께서 방관하시지 않겠지.]

‘어머니? 아… 레바논? 음…….’

[얼른 선택을 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곧 이게 버티지 못할 것 같아서 말이야.]

펠기누스가 점점 흐릿해지는 계약진을 가리킨다.

‘그래. 일단 계약하자.’

“좋습니다. 계약하시지요.”

내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자.

펠기누스가 다가와 나의 이마에 입맞춤을 한다.

‘음…….’

잠시 이마가 타는 듯한 고통에 내가 인상을 찌푸리던 중.

[이제 다른 열한 놈의 놈팡이들이 널 건드릴 일은 없겠지.]

펠기누스가 만족스러운 듯 싱그러운 미소를 흘린다.

“…예?”

[계약은 완료됐단다. 하지만 내 힘을 온전히 사용하기 위해선 베논 님께서 주신 힘을 키우는 게 좋을 거야. 그렇지 않으면…….]

그녀가 무어라 말을 이어 가려던 찰나.

파창-

완전히 힘을 소실한 계약진이 박살이 나 사라져 버렸고.

펠기누스의 모습도 씻은 듯 보이질 않는다.

‘후… 그래도 무사히 계약은 끝낸 모양이네.’

내가 아직 따끔한 이마를 문지르던 그때.

“흑남… 흑남님이시여!”

‘이 늙다리는 또 왜 이래?’

바닥에 바짝 엎드려 있던 달프 교수가 나를 보며 목청을 높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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