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뭐, 뭐야. 이 자식들 갑자기 왜 이래?’
환호와 광기로 번들거리는 눈빛들이 나를 주시하자.
나는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베논 님께서… 베논 님께서 자네에게 임하신 걸 우리가 두 눈으로 똑똑히 봤네.”
탑주가 가슴이 먹먹했는지 겨우 내게 질문을 던진다.
“베논 님께서는 뭐라고 하셨지?”
“…바알의 암살자들을 조심하라고 하셨습니다만, 바알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바알이라고?”
순간, 탑주의 얼굴이 눈에 띄게 험악해져 가자.
난 속으로 생각했다.
‘바알이 대체 뭐 하는 양반인데 그러는 거야?’
5년간 흑카데미 생활 중에도 들어 본 적이 없는 이름이다.
“허… 바알이라니……. 그 이름을 여기서 들을 줄이야…….”
“그게 누굽니까?”
“한때는 베논 님과 마신의 자리를 두고 패권을 다퉜다는 재앙의 신이네. 지금은 그 이름조차 아는 사람이 드물지만.”
‘…재앙의 신?’
“굳이 암살자라는 걸 언급하신 걸 보아하니… 아무래도 베논 님께서 자네에게 경고를 하신 게 분명해.”
“…저를 노린다고요?”
“자네는 이제 베논의 의지를 받드는 흑남이 되지 않았나? 그러니 바알의 표적이 된 것이지.”
‘그러니까 내가 베논의 직통 통신망이 돼서 나를 죽이려 한다는 거네? 아니, 그런 잡신의 부하들이 있는 걸 알았으면 진작 좀 없애지 왜 놔두고 있었던 거야?’
내가 속으로 혀를 차는 사이.
“바알이라니요? 놈들은 전부 없앤 것 아니었습니까? 파피!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놈들의 본단을 불태웠다고 하지 않았어?!”
“분명 그랬었는데…….”
비교적 젊어 보이는 남자와 여인이 말다툼을 벌이기 시작한다.
“아니면 너… 설마 몰래 놈들과 내통하고 놈들을 살려 준 건 아니겠지?”
“뭐? 헛소리하지 마! 내가 그럴 놈으로 보여?!”
“넌 애당초 그쪽에서 넘어왔잖아. 못 할 것도 없겠지.”
“뭐라고!”
두 남녀의 말다툼이 심각해져 가던 찰나.
“그쯤들 하게.”
“하지만 나가란 님! 저 자식이 먼저 저를 의심했다고요!”
“케이, 그쯤 하게.”
탑주가 그들을 중재하곤 다시 입을 뗀다.
“지금은 베논 님의 신탁을 따를 때지 우리끼리 싸울 때가 아니네. 바알의 종들을 찾아 죽이는 게 우선이야.”
“하지만 놈들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요? 우리 중에 바알의 심복이 없다고 장담할 수도 없잖아요?”
케이라 불린 남자가 입을 삐죽거리자.
“놈들은 아주 간사하고 교활했었지. 네 말도 일리가 있다.”
나가란도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인다.
“그럼 흑남님도 위험한 것 아닌가요?”
“그렇지. 본래라면 본단으로 흑남을 보내는 게 맞겠다만…….”
나가란이 낮게 침음하던 사이.
부탑주들을 비롯하여 12명의 흑마법사들이 의견을 던진다.
“그를 황혼의 요새로 이동시키는 건 어떻겠습니까?”
“전시 상황이 아니라면 좋은 곳이겠지. 하지만 지금 그곳은 베이크 왕국에 노출이 되지 않았나!”
“그럼 제12마병단에 넣는 건…….”
“흐음…….”
하지만 어느 의견도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나가란은 미간만 찌푸릴 뿐이었다.
그러던 그때.
“아니면 그냥 흑탑에서 생활하게 하시지요?”
부탑주 한 명이 툭 의견을 던지자.
“…그거네!”
나가란은 손뼉을 탁 치곤.
웃으며 내 앞으로 다가온다.
“베논 님께서 자네에게 직접 경고까지 하신 걸 봐선 아무래도 가볍게 여길 사안이 아닌 것 같다.”
“그렇겠지요.”
“그러니 당분간은 흑카데미에 머무르는 건 어떨까 싶은데.”
‘흑카데미에 머무르라고?’
“이유가 있는 겁니까?”
“흑카데미에 들어가기 위해선 여하튼 흑탑을 거쳐야 하니 그래도 비교적 안전하겠지. 물론 변수가 없는 것은 아니겠다만…….”
‘검은 숲 때문인 건가.’
흑카데미에 들어오기 위한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정식 루트인 흑탑을 통해 들어오거나, 검은 숲을 뚫는 방법뿐.
적어도 내가 아는 방법은 그 정도뿐이었다.
‘하지만 검은 숲을 뚫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해.’
일단 숲 자체가 워낙 방대하기도 하거니와.
그 안에 어떤 마물이 사는지도 미지수였기 때문이었다.
‘흑카데미에 남는다면 나는 너무 좋지.’
그러잖아도 베논이 내게 허락한 흑마력 3배의 권능을 이용하기 위해선.
흑카데미에 있어야만 했다.
‘오래 있는 것도 아니고, 바알의 세력만 쳐 내면 만사 오케이라는 것 아냐? 그때까지 흑카데미에서 편하게 힘을 키우면 되는 거고.’
내가 신이 나 속으로 환호성을 지르던 사이.
탑주가 넌지시 내게 말한다.
“커흠… 물론 자네는 탐탁지 않겠지. 그래도 내가 장담하겠네. 흑카데미보다 안전한 곳을 찾는 게 쉽지는 않을 거네.”
“그렇기야 하겠습니다만 탑주님께서도 아시다시피 저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곳의 하인장이었습니다. 돌아가거든 그때와 같은 처우를 받게 되는 겁니까?”
나의 물음에 탑주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뜬다.
“그럴 리가 있나? 자네, 흑남이라는 자리를 너무 과소평가하는 것 아닌가? 적어도 흑카데미 안의 그 어떤 사람도 자네를 감히 건드릴 수는 없을 거네.”
“볼드 학장도 말입니까?”
“물론이지!”
그 말인즉슨, 흑카데미 안에서 나보다 높은 사람은 없다는 뜻 아니겠는가?
‘크… 역시 자리가 사람을 만드는 게 맞네.’
흑남.
이름만 좀 거북할 뿐이지 정말 마음에 드는 자리다.
‘내가 흑카데미 안에서 뭔 짓을 해도 나한테 태클 걸 사람도 없다는 거고. 좋다, 좋아.’
하지만 탑주 나가란은 내가 그의 제안을 마음에 들지 않아 한다고 생각한 걸까.
그는 내 표정을 흘낏 살피더니 얼른 말을 던진다.
“게다가 그곳에선 자네의 실력도 키울 수 있으니 더 좋지 않겠나? 물론 흑남으로서 해야 할 일도 있으니 그땐 나와야겠지만 그마저도 걱정할 필요는 없네. 그때마다 최고의 호위를 붙여 줄 테니까.”
“흠…….”
“자네도 잘 알겠지만 흑카데미에 들어가기가 좀 힘든가?”
탑주의 거듭되는 설득에 나는 잠시 고민하는 척하다가.
손가락을 하나 펼쳤다.
“좋습니다. 대신 제 부탁을 하나만 들어주시지요.”
“부탁? 너무 난처한 부탁만 아니라면 들어주겠네.”
“저주에 해박한 흑마법사 한 분만 제게 잠시 보내 주시면 됩니다.”
나의 요청에 나가란의 얼굴에 물음표가 걸린다.
“저주에 능한 흑마법사라면… 흑카데미에도 있지 않은가?”
“그렇기야 합니다만 곧 방학이잖습니까? 당연히 해당 교수님께서도 본가로 돌아가시겠지요.”
“그렇군. 어려운 일은 아니니 그리하지.”
행여나 내가 마음을 바꿀까 싶었는지.
나가란이 볼드 학장을 보며 엄포를 놓는다.
“흑남이 흑카데미에 머무르는 동안 무슨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잘 관리하게. 내 말 이해했나?”
“예!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볼드 학장이 엎드린 채 소리치자.
나가란은 그런 그를 내려다보며 고개를 젓는다.
“최선을 다할 게 아니라 무조건 가능해야 할 걸세. 만약 자네가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면… 자네가 지금 앉고 있는 그 자리가 위태로울지도 모를 테니 말이네.”
“예! 반드시 흑남님께 누가 되는 일이 없도록 관리하겠습니다!”
* * *
당일 저녁.
흑카데미의 회의실 안.
“이제부터…….”
모든 교수를 소집한 볼드 학장이 교수의 면면을 보며 천천히 입을 뗀다.
“모든 교수들은 최선을 다해 흑남님을 가르쳐야 한다. 또한 혹시라도 흑남님께 실례가 되는 일을 하지 않도록.”
“…예?”
갑작스러운 볼드 학장의 발언 때문인지.
교수들은 어안이 벙벙하여 멍하니 볼드 학장을 바라본다.
“흑남… 님은 본단으로 가는 게 아니었습니까?”
“당분간은 흑카데미에 계시기로 결정됐다.”
“언제까지 있는 건가요?”
“그건 나도 알 수 없다.”
볼드 학장이 말을 끝마치자.
“흑남님이 흑카데미에 머무르신다는 거야 그렇다고 치더라도 왜 저희가 교육을 해야 하는 겁니까?”
“애당초 저희는 학생들만 가르치는 게 아니었나요?”
일부 교수들이 불평을 터뜨린다.
“하기 싫은 사람은 하지 않아도 좋다. 다만 너희 자리에 새로운 교수가 부임하겠지. 너희 말고도 교수를 할 사람은 흑탑에 차고도 넘치니까.”
“크흠… 학장님, 제 뜻은 그게 아니라…….”
“허허, 학장님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당연히 따라야지요.”
볼드 학장의 으름장에 교수들의 불만은 삽시간에 수그러들었다.
“그럼 전원 이의는 없는 걸로 알겠다.”
“다만 학장님, 아크 교수는 계속 흑카데미에 있는 건가요?
“갑자기 그걸 묻는 이유는?”
볼드 학장의 물음에 콘스 교수가 당당히 말을 이어 간다.
“하인이 흑남이 되는 최악의 사고가 발생했는데 당연히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하는 것 아닌가요?”
콘스 교수가 아크 교수를 째려보자.
“허허…….”
아크 교수는 멋쩍은 웃음만을 흘린다.
“애당초 저희가 지금의 사태에 몰린 것도 결국 의식이 어중간하게 마무리돼서 그런 것 아닌가요?”
콘스 교수가 날카롭게 쏘아붙이자.
“하긴… 학생들 중 한 명이 흑남이 됐다면 우리가 하인 놈을 흑남이랍시고 떠받들 일도 없었겠지.”
“아크 신관장에게 책임이 있긴 합니다.”
불만이 있던 일부 교수들이 콘스 교수의 의견에 동조한다.
“분명 아크 교수에게는 책임이 있다.”
“그럼… 그를 파면하는 건가요?”
콘스 교수가 눈을 반짝이자.
볼드 학장은 무심히 고개를 젓는다.
“아니. 그렇지는 않다.”
“…네?”
“어쨌건 흑남 의식 자체는 성공적으로 끝났고 흑남은 탄생했다. 탑주님과 부탑주님들 그리고 12분의 위대하신 흑마법사님들께서도 흑남을 인정했다.”
볼드 학장의 말에 콘스 교수의 눈빛이 눈에 띄게 흔들린다.
“그렇기에 아크 교수를 파면할 이유는 없다. 답이 됐나, 콘스 교수?”
“그런…….”
“허허… 일이 이렇게 됐으니 앞으로도 잘 부탁드리지요, 콘스 교수님.”
아크 교수가 허허롭게 웃자.
콘스 교수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을 홱 돌려 버린다.
* * *
당일 밤.
나는 급하다는 콘스 교수의 호출을 받고.
그녀의 집무실로 왔다.
‘솔직히 이제는 그녀의 호출 따위는 무시해도 되지만… 궁금하단 말이지?’
여전히 나를 쓸 만한 패 정도로 취급할지.
아니면 흑남으로 인정하고 나를 존중할지 말이다.
“무슨 일이십니까, 콘스 교수님?”
“…상황이 달라졌어. 볼드 학장은 아크 신관장을 파면할 생각이 없는 것 같아.”
‘아, 그래서 그렇게 똥 씹은 표정을 하고 있었어? 생각한 대로 일이 안 돌아가서 어쩐대?’
나는 속으로 피식 미소를 흘리곤.
어깨를 으쓱였다.
“그렇습니까?”
“그러니 이제 네가 직접 죽이는 수밖에 없어.”
“제가요?”
내가 모른 척 묻자.
콘스 교수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흑남이 됐으니 마신님께 엄청난 힘을 받았겠지? 아크 교수를 죽일 수 있을 정도의 힘 말이야.”
“뭔가 받긴 했지요.”
내가 싱긋 웃자.
콘스 교수가 부릅뜬 눈으로 날 보며 말한다.
“그럼 망설일 것도 없겠네. 이제 아크 교수를 죽일 수 있는 거잖아? 그렇지? 언제가 좋을까? 적어도 방학이 시작되기 전에는 그를 죽일 수 있겠어?”
그녀답지 않게 흥분한 콘스 교수가 소리치듯 말하자.
나는 미소를 유지한 채 툭 한마디를 던졌다.
“그런데 제가 왜 아크 교수를 죽여야 합니까?”
“…뭐?”
“정확힌 제가 왜 콘스 교수님의 말을 따라야 하는 거죠?”
내 물음에 말문이 막힌 것일까.
잠시 입만 뻥긋거리던 콘스 교수의 얼굴은 곧 분노로 새빨갛게 물들어 간다.
“너… 그게 무슨 소리야……!”
“그렇잖습니까? 위치로 따지면 교수님보다 위에 있죠. 그러니 제가 콘스 교수님의 말을 따를 의무도 없잖습니까?”
“…뭐라고?”
나는 피식 웃으며 한마디를 던졌다.
“잊었습니까? 저 이제 흑남입니다.”